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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인 우암 이열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노닐던 별서인 선몽대를 지을 당시 심고 그 후 후손들이 보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성천 변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퇴계이황이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라하여 직접 써 주었다는 친필 현판 선몽대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당시는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했을 것이며 드넓은 백사장이 었을 것이나 지금은 바닥이 다 보일정도로 수심이 얕아진 내성천. 선몽대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일행 최현득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향교에서 ‘맹자(孟子)’를 수강하고 있는 동료들이 같은 수강생인 경북문화재연구원 전 사무처장 김규탁님이 은퇴하여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감천(甘泉)을 방문하는데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가는 길에 선몽대, 회룡포, 삼강주막 등도 둘러볼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쾌히 승낙했다. 회룡포, 삼강주막, 삼수정은 비록 가 본 곳이긴 하나 또 가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고, 김 처장은 동년배(?)이지만 인품이 훌륭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어 현직에 있을 때에도 가끔 만났던 분이기에 낙향해서 사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은퇴자들이 다 그렇듯이 일찍 고향을 떠나 도시생활에 젖어 살았기 때문에 농촌생활에 다시 적응하기가 힘든 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고, 또한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내려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김 처장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예천으로 향했다. 첫 방문지는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仙夢臺, 명승 제19호)일원’이었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초입 내성천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다. 호안림, 방풍림, 또는 수구막이용의 비보림(裨補林)이라고도 했다. 숲을 지나 막다른 지점, 강가에 있는 선몽대는 기대와 달리 규모가 작았다. 또한 대(臺)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수량(水量)이 줄어들어 그런지 수심도 얕고, 드넓었다는 모래밭도 여느 지역보다 넓지 않았다. 아래를 흐르는 소(沼) 역시 메워져 그런지 깊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눈으로 보는 모습일 뿐, 5세기 전에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이다. 또한 경치라는 것이 겉만 화려하다고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느끼는 감정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만큼 자질이 부족한 내 기준으로 판단할 사안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된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은 물론 그의 제자이자 7년간의 왜란(倭亂)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서애 유성룡과 동문수학을 했으며 역시 임란 때에 영남지방 방어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병사한 학봉 김성일, 그 외에도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등이 찾았을 정도로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곳이니 내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근기(近畿) 출신인 다산의 7대조 감사공 정사우(丁士優)가 시문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을 따라 다산 정약용(丁若鏞)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하니 더욱 뜻 깊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경상도에서 다산의 흔적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주로 서울에서 관료생활을 했고 많은 세월을 전남 강진 초당(草堂)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선생이 강진으로 이배(移配)되기 전 잠시 포항 장기에 머물 때에 지역민들에게 그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미담은 들었지만 다산의 아버지가 예천군수를 역임했다는 사실과 다산이 아버지를 따라 선몽대를 찾았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선몽대 일원은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즉 ‘기러기가 내성천의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 한가로이 쉬는 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대(臺)를 건립한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는 본관이 진성(眞城)으로 1538년(중종 33)이 곳 백송리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린도 찰방을 지낸 이굉(李宏), 어머니는 안동 김수량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신중하고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미묘한 말과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인 퇴계가 매우 사랑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1576년(선조 9) 과거에 급제하고, 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박사, 사헌부감찰, 예조정랑을 거쳐 은계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1585년(선조 18) 외직인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이어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경상도 경산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대신들이 우암을 천거했다고 한다. 그는 부임 즉시 사비를 들여 우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학교를 세워 교화시켰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세금을 골고루 부과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등 불과 1년 여 만에 고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공무수행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어느 날, 감사(監司)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상관의 부름이라 급히 달려갔으나 기껏 한다는 부탁이 책의 표지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특별히 그런 부탁을 했을 것이나 우암의 생각은 달랐다. 사적(私的)인 일로 바쁜 공직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직위가 높은 감사라도 부당하다며 관복을 벗어 던지고 물러나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563(명종 18)년 선몽대를 짓고 평생 동안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았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향년 54 세로 길지 않는 생애를 살았다. 당호(堂號) 선몽대(仙夢臺)는 퇴계가 써준 것으로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암이 남긴 한 편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 사람의 가르침 헛된지 오래지만/ 남긴 뜻 아직 있어 내 마음 같구나. 작은 집 처마기둥 이제야 완성하니/성근 인정 때문에 떠돌지는 않았으리. 작은 정자 오뚝하니 물속에 어리고/나루 멀리 넓은 하늘 훤히 트였구나. 오리와 노을은 온갖 자태 빚어내고/ 늦바람에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는구나. 산자락 물가에 우뚝하게 솟았으니/ 안개대문 솔 창문 비단과 같구나. 스님과 같이하여 자리는 조용하니/세속인연 적음을 요즘에 깨닫네. 이 시는 우암이 권력을 멀리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에 만족해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오늘 날 불나비처럼 권력에 매달리려는 지식인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글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소나무의 수령이 100~200여 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것들은 후손들이 새로 심은 소나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소나무는 진성이문의 숭조사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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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옥씨 건강하시지요? 고향냄새가 물씬 나네요. 고향이 백송인 한선 원희 생각이 나네요. 고맙습니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송리 지명도 고상하네요,,,,^^ 아마도 두 친구 분은 전생에도 학자였던가 봅니다,,,~~~
오래전에 안동에 있을 때 몇 번 갔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쓸쓸할 정도로 한적해서 오래 벤치에 앉아있으면 세상에 혼자 뿐인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지...
좋은 사람과 함께하면 행복할거야,,,, ^^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산은 좋은사람과 함께하는산,,, 삶은 행복과 고해바다 이제 나는 중도에 이를려고,,,^^ 청매가 피기 시작하더라 한 잎 따왔어 재홍이 생각하며,,,,,
이렇게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고향의 명소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으니 부끄럽네 언제 함께 갈 수 있었면 좋겠네.
친구야 우리 옛날 도시락 싸가지고 호명가는 백사장에서 놀았는 생각이나네 다시 옛생각하면서 모여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