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부침하는 삶의 역정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의 소중한 기회를 낭비하고 있지 않는가? 정신적인 향상의 길을 가는데 적당한 시기는 언제인가? 이러한 물음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야 케마 스님의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20년이 넘는 수행으로 깊은 선정체험을 하고, 수행을 바탕으로 호주, 스리랑카, 독일에 세운 수행센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와 수행을 가르쳤으며, 여성 불자들의 수행환경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아야 케마(Ayya Khama, 1923~1997, 본명 Ilse Ledermann) 스님. 그 분의 마지막 저서인 『I give you my life(내 삶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라는 자서전이 입적하기 직전에 독일어로 1997년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1998년에 미국 샴바라 출판사에서 영역되어 출판되었다.(우리말 역 『이 생명 다 바쳐서』 신동욱 역, 2000년, 장승). 이 자서전을 통해서 아야 케마 스님의 생애를 살펴본다.
수용소서 죽음공포 극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태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주식투자가였던 아버지의 능력으로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1939년 나찌의 학살을 피해 9000명의 어린이와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떠난다. 부모님은 당시 유럽의 유태인의 유일한 합법적인 망명지였던 중국 상해로 피난을 갔다. 2년 동안 스코틀랜드의 한 유태인 가족과 함께 지낸 후, 1940년 말에 부모님이 있는 상해로 간다. 상해에서의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생활도 1941년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영향 하에 점차 불안해지다가 1943년에 유태인 수용소에 수용되고 만다. 이 시기에 아야 케마 스님은 가장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인생은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본인의 폭격으로 옆에 함께 서 있던 아는 사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완전히 없어졌다. 바로 전에 있던 사람이 다음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살게 되거나 죽거나 결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은 후에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죽음의 임박함과 수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불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기 5일전에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죽게 되고, 몇 달 후에 어머니는 재혼하게 되었다. 그러자 22세의 나이에 17년 연상의 유태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1947년에 딸을 낳게 된다. 그 후 26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입국이 허용되어 미국 시민이 되었다. 34세가 되던 해에 인생의 비물질적인 측면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때 생각이 비슷하던 겔드(Gerd)를 만나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이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3살이던 아들을 데리고 아야 케마 스님은 겔드와 함께 멕시코의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란초 라 푸에르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태국 숲속 사원서도 정진
이곳에서 처음으로 요가난다의 가르침을 비롯한 정신적인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2년 동안의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겔드는 중남미로 여행을 떠나기로 제안하여 어린 아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 뉴질랜드, 호주에 이르게 되었고, 겔드의 직업 때문에 파키스탄까지 가게 되었다. 그후 영국과 유럽에서 얼마정도 지낸 후에 인도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때 라마나 마하리시와 스리 오로빈도의 아쉬람에서 명상을 경험한다. 인도를 떠나, 스리랑카에 처음 왔을 때, 천국과 같은 기후와 환경 속에서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되었고, 1979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출가를 하게 되는 인연을 맺는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후에 호주로 돌아와서 브리스밴 근처의 농장을 구입해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을 한다.
그 후, 영국출신으로 태국에서 비구가 된 칸티팔로 스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불교교리와 수행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조동종에서 세운 타사하라에서 3개월간 수행을 하기도 하였지만, 선불교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는 상좌불교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얀마에서 우 바킨 센터에서 7일간의 비자로 세 차례 수행하고 난 후에 호주로 돌아온다. 호주의 농장에서 14년을 산 후, 1977년 겔드는 전문적으로 수행의 길을 가는 아야 케마 스님을 위해서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찾게 되며, 20년 가까이 삶을 함께한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길을 가게 된다.
농장을 정리한 후, 1978년 시드니 근처에서 칸티팔로 스님의 요청으로 왓 붓다담마라는 수행처를 만들어, 칸티팔로 스님이 주지로 아야 케마 스님은 운영을 맡아 함께 수행을 지도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후 태국의 숲 속 사원에서 3개월을 보내면서 아찬 싱통 스님과 아찬 마하부와 스님의 지도를 받은 후에 출가를 결심한다. 1979년 호주로 돌아와서 55세의 나이에 칸티팔로 스님에게 출가를 하려는 의사와 태국보다는 스리랑카로 가고 싶다고 하자, 냐나포니카 스님을 소개해준다. 태국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언어의 문제와 태국에서의 여성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5세에 자식과 손자를 본 중년이 넘은 서양의 여인이 출가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야 케마가 세상에서 겪은 온갖 일들은 마음의 평화나 행복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무상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출가하기 직전의 아야 케마 스님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출가하는 것은 다음 단계의 향상을 위한 길이었고, 아야 케마 스님은 이전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출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한다. 그 만큼 확고한 신념에 의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아야 케마 스님은 편안한 삶을 놓아버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독일을 떠나 영국에서 혼자 살면서. 상해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면서,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과 심지어는 자신의 삶조차도 놓아버리는 일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인도 등 세계여행 하며 무상체득
스리랑카에 도착해서 처음 찾아간 곳은 냐나포니카 스님이 계신 캔디의 작은 절이었고, 출가하고자 하는 뜻을 전하자, 콜롬보에 계신 나라다 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나라다 스님의 지도 하에 수백 명의 스리랑카 신도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10계를 받아 서양여인으로 최초로 출가한 여성이 되었지만, 비구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비구니 승단의 전통은 이미 상좌불교에서는 끊어진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방에서 출가하는 여인들은 비구니가 아니라 10계를 지키는 출가자가 되는 것이다. 이 때 법명을 ‘평온’을 의미하는 케마(Khema)라고 받았고, 아야(Ayya)는 출가한 여인들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아야 케마라고 불리게 된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지의 상좌불교에서는 여성이 출가하더라도 비구니가 될 수 없다. 상좌불교의 종주국이었던 스리랑카에서 전쟁과 기근으로 12세기 경에 비구니 승단의 전통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스리랑카에는 비구도 없어졌었는데 미얀마와 태국에서 다시 계율의 맥을 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비구 승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상좌불교에서는 비구니 승단이 다시 생겨나려면 부처님이 다시 비구니 승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인 상좌불교의 입장이다. 하지만 현재 상좌불교 국가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출가하여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사원에서 수행과 교학에 정진하고 있다. 그들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고 여성 수행자들의 입장을 개선하려고 아야 케마 스님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87년에 사키야디타(석존의 딸들)라는 세계적인 여성불자 모임을 주도한 세 명의 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다는 점이 한 단면이다.
“전생에 스리랑카 비구니” 체험
1979년, 아야 케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10계를 받아 출가자가 되었지만, 전통 승가(비구와 비구니 승가)의 일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10년 후에 미국에서 대승불교인 중국불교의 전통에서 비구니계단이 만들어져서 10명의 서양 여성이 200여명의 중국 여성과 함께 비구니계를 받을 때, 함께 계를 받았지만, 아야 케마 스님은 상좌불교의 출가자로서 불교를 수행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나라다 스님을 계사로 수계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은사라는 관념은 거의 없고, 스리랑카에 있을 때는 냐나포니카 스님을 자주 찾아가서 불교를 배웠다.
출가하자마자 바로 콜롬보에서 멀지 않은 칸두보다의 마하시 계통의 수행센터에서 집중수행을 시작했다. 출가한 다음 날 새벽 좌선을 할 때, 아야 케마 스님의 마음속에는 정글 속의 큰 탑 앞에 서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바로 자신임을 바로 알아차렸고, 그 탑은 나중에 스리랑카의 고도(古都)인 아누라다푸라에 세워진 탑 가운데 하나였음을 직접 확인 하였다. 이 경험을 통해서 아야 케마 스님은 먼 전생에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수행센터에서 얼마 동안 지낸 후, 호주의 왓 붓다담마 수행처로 돌아와서 칸티팔로 스님과 함께 센터를 이끌었다. 아야 케마 스님은 깊은 선정체험으로 색계(色界) 사선(四禪)에 익숙해져 있었으나, 누구도 무색계(無色界) 사선을 설명하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1983년 스리랑카의 냐나라마 스님을 뵙고 점검을 받기 전까지 혼자서 선정 수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가서 새로운 불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여성출가자를 위한 전문적인 수행처의 건립이었다. 유럽대륙 출신으로 처음으로 상좌불교 비구가 된 냐나틸로카 스님 NyanatilokaThera(1878~1957)에 의해 도단두와에 1911년 세워진 수행처 Island Hermitage가 있는 호수의 작은 무인도를 여성출가자을 위한 섬(Parappuduwa Nuns’ Island)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이 불사는 1989년 아야 케마 스님이 스리랑카를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수행지도나 출판을 통한 수익은 모두 이 센터를 만드는데 소요되었다. 1983년 유방암이 발병하였고, 아야 케마 스님은 수술을 하지 않고 혼자서 바나나 농장에서 3개월간 수행을 할 기회를 만든다.
비구니 전문 수행처 건립
이 때, 수행승으로 명성이 높은 냐나라마(Nyanarama) 스님을 자주 찾아 수행을 점검받는다. 이 때 20년간 수행한 선정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되며, 색계 사선과 무색계 사선을 바르게 체험을 통해 알고 있음을 확인한다. 아야 케마 스님은 다양한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선불교 등의 다양한 수행전통을 익혔고 가르쳤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입출식념), 생각 알아차리기, 걷기 수행, 감정을 정화하기 위한 느낌의 감찰, 다양한 방법에 의한 자애관, 내면의 실재에 이르는 관찰법 등을 지도하였고, 가장 중요시한 수행법으로는 깊고 고요한 선정수행이었다.(『I give you my life』, p.199) 불교 수행법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Being Nobody, Going nowhere : Meditations on the Buddhist path』(Boston: Wisdom, 1987 초판, 2001)에서는 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선정수행 자체는 수단이며, 목적은 위파사나에 의한 지혜를 얻는 데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 p.17) 선정과 지혜,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이 두 가지 길은 서로 손을 잡고 가야하는 불교 수행의 두 갈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수행법은 아야 케마 스님의 개인적인 수행편력과 팔리 경전을 바탕으로 한 상좌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 특히 사선정 및 무색계선정에 대한 체험과 지도 방식은 서양에서는 보기 드물었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제자 몇 명이 깊은 선정체험을 맛보았다고 한다.
1989년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에 의해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아야 케마 스님은 독인의 뮌헨으로 가게 된다. 뮌헨 근처의 알가우에 붓다하우스(Buddha Haus)를 창건하였다. 1939년 2차 대전 때문에 떠난 독일로 다시 돌아와서 정착하여 이 곳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지에서 수행과 법문을 하면서 1997년 입적할 때까지 지낸다. 아야 케마 스님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외적인 여행을 한 뒤에 다시 고향인 독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면의 여행은 완전히 다른 길을 따랐다. 외적인 여행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직장, 자식, 손자, 난관, 고무적인 일, 공포를 경험했지만, 내적인 여행의 종착역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었다.
유방암 극복하고 후학 지도
독일에서는 9명의 제자에게 수행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자신이 건립한 수행처를 이끌 후계자도 선정하였다. 1993년, 아야 케마 스님은 유방암이 심해져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1995년에 마지막 수술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상태가 되었지만, 이 수술도 무사히 지나갔다. 이 수술 이후에 아야 케마 스님은 자신의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기에 한 순간도 소홀히 지내지 않고,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불법에서 얻은 평화와 행복을 나누기 위하여 마지막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삶과 수행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이다.
수없이 부침하는 삶의 역정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의 소중한 기회를 낭비하고 있지 않는가? 정신적인 향상의 길을 가는데 적당한 시기는 언제인가? 이러한 물음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야 케마 스님의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20년이 넘는 수행으로 깊은 선정체험을 하고, 수행을 바탕으로 호주, 스리랑카, 독일에 세운 수행센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와 수행을 가르쳤으며, 여성 불자들의 수행환경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아야 케마(Ayya Khama, 1923~1997, 본명 Ilse Ledermann) 스님. 그 분의 마지막 저서인 『I give you my life(내 삶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라는 자서전이 입적하기 직전에 독일어로 1997년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1998년에 미국 샴바라 출판사에서 영역되어 출판되었다.(우리말 역 『이 생명 다 바쳐서』 신동욱 역, 2000년, 장승). 이 자서전을 통해서 아야 케마 스님의 생애를 살펴본다.
수용소서 죽음공포 극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태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주식투자가였던 아버지의 능력으로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1939년 나찌의 학살을 피해 9000명의 어린이와 함께 영국으로 피난을 떠난다. 부모님은 당시 유럽의 유태인의 유일한 합법적인 망명지였던 중국 상해로 피난을 갔다. 2년 동안 스코틀랜드의 한 유태인 가족과 함께 지낸 후, 1940년 말에 부모님이 있는 상해로 간다. 상해에서의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생활도 1941년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영향 하에 점차 불안해지다가 1943년에 유태인 수용소에 수용되고 만다. 이 시기에 아야 케마 스님은 가장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인생은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본인의 폭격으로 옆에 함께 서 있던 아는 사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완전히 없어졌다. 바로 전에 있던 사람이 다음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살게 되거나 죽거나 결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은 후에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죽음의 임박함과 수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불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기 5일전에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죽게 되고, 몇 달 후에 어머니는 재혼하게 되었다. 그러자 22세의 나이에 17년 연상의 유태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1947년에 딸을 낳게 된다. 그 후 26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입국이 허용되어 미국 시민이 되었다. 34세가 되던 해에 인생의 비물질적인 측면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때 생각이 비슷하던 겔드(Gerd)를 만나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이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3살이던 아들을 데리고 아야 케마 스님은 겔드와 함께 멕시코의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란초 라 푸에르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태국 숲속 사원서도 정진
이곳에서 처음으로 요가난다의 가르침을 비롯한 정신적인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2년 동안의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겔드는 중남미로 여행을 떠나기로 제안하여 어린 아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 뉴질랜드, 호주에 이르게 되었고, 겔드의 직업 때문에 파키스탄까지 가게 되었다. 그후 영국과 유럽에서 얼마정도 지낸 후에 인도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때 라마나 마하리시와 스리 오로빈도의 아쉬람에서 명상을 경험한다. 인도를 떠나, 스리랑카에 처음 왔을 때, 천국과 같은 기후와 환경 속에서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되었고, 1979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출가를 하게 되는 인연을 맺는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후에 호주로 돌아와서 브리스밴 근처의 농장을 구입해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을 한다.
그 후, 영국출신으로 태국에서 비구가 된 칸티팔로 스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불교교리와 수행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조동종에서 세운 타사하라에서 3개월간 수행을 하기도 하였지만, 선불교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는 상좌불교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얀마에서 우 바킨 센터에서 7일간의 비자로 세 차례 수행하고 난 후에 호주로 돌아온다. 호주의 농장에서 14년을 산 후, 1977년 겔드는 전문적으로 수행의 길을 가는 아야 케마 스님을 위해서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찾게 되며, 20년 가까이 삶을 함께한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길을 가게 된다.
농장을 정리한 후, 1978년 시드니 근처에서 칸티팔로 스님의 요청으로 왓 붓다담마라는 수행처를 만들어, 칸티팔로 스님이 주지로 아야 케마 스님은 운영을 맡아 함께 수행을 지도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후 태국의 숲 속 사원에서 3개월을 보내면서 아찬 싱통 스님과 아찬 마하부와 스님의 지도를 받은 후에 출가를 결심한다. 1979년 호주로 돌아와서 55세의 나이에 칸티팔로 스님에게 출가를 하려는 의사와 태국보다는 스리랑카로 가고 싶다고 하자, 냐나포니카 스님을 소개해준다. 태국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언어의 문제와 태국에서의 여성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5세에 자식과 손자를 본 중년이 넘은 서양의 여인이 출가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야 케마가 세상에서 겪은 온갖 일들은 마음의 평화나 행복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무상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출가하기 직전의 아야 케마 스님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출가하는 것은 다음 단계의 향상을 위한 길이었고, 아야 케마 스님은 이전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출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한다. 그 만큼 확고한 신념에 의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아야 케마 스님은 편안한 삶을 놓아버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독일을 떠나 영국에서 혼자 살면서. 상해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면서,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과 심지어는 자신의 삶조차도 놓아버리는 일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인도 등 세계여행 하며 무상체득
스리랑카에 도착해서 처음 찾아간 곳은 냐나포니카 스님이 계신 캔디의 작은 절이었고, 출가하고자 하는 뜻을 전하자, 콜롬보에 계신 나라다 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나라다 스님의 지도 하에 수백 명의 스리랑카 신도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10계를 받아 서양여인으로 최초로 출가한 여성이 되었지만, 비구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비구니 승단의 전통은 이미 상좌불교에서는 끊어진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방에서 출가하는 여인들은 비구니가 아니라 10계를 지키는 출가자가 되는 것이다. 이 때 법명을 ‘평온’을 의미하는 케마(Khema)라고 받았고, 아야(Ayya)는 출가한 여인들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아야 케마라고 불리게 된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지의 상좌불교에서는 여성이 출가하더라도 비구니가 될 수 없다. 상좌불교의 종주국이었던 스리랑카에서 전쟁과 기근으로 12세기 경에 비구니 승단의 전통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스리랑카에는 비구도 없어졌었는데 미얀마와 태국에서 다시 계율의 맥을 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비구 승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상좌불교에서는 비구니 승단이 다시 생겨나려면 부처님이 다시 비구니 승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인 상좌불교의 입장이다. 하지만 현재 상좌불교 국가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출가하여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사원에서 수행과 교학에 정진하고 있다. 그들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고 여성 수행자들의 입장을 개선하려고 아야 케마 스님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87년에 사키야디타(석존의 딸들)라는 세계적인 여성불자 모임을 주도한 세 명의 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다는 점이 한 단면이다.
“전생에 스리랑카 비구니” 체험
1979년, 아야 케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10계를 받아 출가자가 되었지만, 전통 승가(비구와 비구니 승가)의 일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10년 후에 미국에서 대승불교인 중국불교의 전통에서 비구니계단이 만들어져서 10명의 서양 여성이 200여명의 중국 여성과 함께 비구니계를 받을 때, 함께 계를 받았지만, 아야 케마 스님은 상좌불교의 출가자로서 불교를 수행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나라다 스님을 계사로 수계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은사라는 관념은 거의 없고, 스리랑카에 있을 때는 냐나포니카 스님을 자주 찾아가서 불교를 배웠다.
출가하자마자 바로 콜롬보에서 멀지 않은 칸두보다의 마하시 계통의 수행센터에서 집중수행을 시작했다. 출가한 다음 날 새벽 좌선을 할 때, 아야 케마 스님의 마음속에는 정글 속의 큰 탑 앞에 서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바로 자신임을 바로 알아차렸고, 그 탑은 나중에 스리랑카의 고도(古都)인 아누라다푸라에 세워진 탑 가운데 하나였음을 직접 확인 하였다. 이 경험을 통해서 아야 케마 스님은 먼 전생에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수행센터에서 얼마 동안 지낸 후, 호주의 왓 붓다담마 수행처로 돌아와서 칸티팔로 스님과 함께 센터를 이끌었다. 아야 케마 스님은 깊은 선정체험으로 색계(色界) 사선(四禪)에 익숙해져 있었으나, 누구도 무색계(無色界) 사선을 설명하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1983년 스리랑카의 냐나라마 스님을 뵙고 점검을 받기 전까지 혼자서 선정 수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가서 새로운 불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여성출가자를 위한 전문적인 수행처의 건립이었다. 유럽대륙 출신으로 처음으로 상좌불교 비구가 된 냐나틸로카 스님 NyanatilokaThera(1878~1957)에 의해 도단두와에 1911년 세워진 수행처 Island Hermitage가 있는 호수의 작은 무인도를 여성출가자을 위한 섬(Parappuduwa Nuns’ Island)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이 불사는 1989년 아야 케마 스님이 스리랑카를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수행지도나 출판을 통한 수익은 모두 이 센터를 만드는데 소요되었다. 1983년 유방암이 발병하였고, 아야 케마 스님은 수술을 하지 않고 혼자서 바나나 농장에서 3개월간 수행을 할 기회를 만든다.
비구니 전문 수행처 건립
이 때, 수행승으로 명성이 높은 냐나라마(Nyanarama) 스님을 자주 찾아 수행을 점검받는다. 이 때 20년간 수행한 선정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되며, 색계 사선과 무색계 사선을 바르게 체험을 통해 알고 있음을 확인한다. 아야 케마 스님은 다양한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선불교 등의 다양한 수행전통을 익혔고 가르쳤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입출식념), 생각 알아차리기, 걷기 수행, 감정을 정화하기 위한 느낌의 감찰, 다양한 방법에 의한 자애관, 내면의 실재에 이르는 관찰법 등을 지도하였고, 가장 중요시한 수행법으로는 깊고 고요한 선정수행이었다.(『I give you my life』, p.199) 불교 수행법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Being Nobody, Going nowhere : Meditations on the Buddhist path』(Boston: Wisdom, 1987 초판, 2001)에서는 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선정수행 자체는 수단이며, 목적은 위파사나에 의한 지혜를 얻는 데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 p.17) 선정과 지혜,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이 두 가지 길은 서로 손을 잡고 가야하는 불교 수행의 두 갈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수행법은 아야 케마 스님의 개인적인 수행편력과 팔리 경전을 바탕으로 한 상좌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 특히 사선정 및 무색계선정에 대한 체험과 지도 방식은 서양에서는 보기 드물었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제자 몇 명이 깊은 선정체험을 맛보았다고 한다.
1989년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에 의해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아야 케마 스님은 독인의 뮌헨으로 가게 된다. 뮌헨 근처의 알가우에 붓다하우스(Buddha Haus)를 창건하였다. 1939년 2차 대전 때문에 떠난 독일로 다시 돌아와서 정착하여 이 곳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지에서 수행과 법문을 하면서 1997년 입적할 때까지 지낸다. 아야 케마 스님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외적인 여행을 한 뒤에 다시 고향인 독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면의 여행은 완전히 다른 길을 따랐다. 외적인 여행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직장, 자식, 손자, 난관, 고무적인 일, 공포를 경험했지만, 내적인 여행의 종착역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었다.
유방암 극복하고 후학 지도
독일에서는 9명의 제자에게 수행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자신이 건립한 수행처를 이끌 후계자도 선정하였다. 1993년, 아야 케마 스님은 유방암이 심해져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1995년에 마지막 수술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상태가 되었지만, 이 수술도 무사히 지나갔다. 이 수술 이후에 아야 케마 스님은 자신의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기에 한 순간도 소홀히 지내지 않고,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불법에서 얻은 평화와 행복을 나누기 위하여 마지막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삶과 수행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