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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들의 대한 약속
슥 8:9-17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 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모든 사람을 풀어 서로 치게 하였느니라
1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1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8:9-17 / [성전 건축의 시작]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의 성전을 지으려고 주춧돌을 놓던 그날, 예언자들에게서 이런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아, 힘을 내어 성전 공사를 완성하여라! 10) 그때에 나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제까지는 너희의 모든 수고가 허사였다. 너희가 아무리 일을 하여도 품삯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너희의 가축들도 전혀 벌어들인 것이 없었다. 그때에는 범죄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도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다시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런 보장이 없었다. 그때에는 내가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분쟁을 일으켜 놓았었다. 11)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살아남은 이 백성에게 완전히 다르게 대해 주겠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2) `이제는 내가 오직 너희에게 평화와 번영을 심어 주겠다. 너희의 농사는 평화로운 시절을 맞이하여 풍년이 들고, 포도나무마다 열매가 풍성할 것이다. 온 땅은 풍년을 누리고, 하늘은 철마다 고른 비를 내릴 것이다. 살아남은 이 백성에게 내가 이 모든 복을 누리게 하겠다. 13) 유다와 이스라엘아, 이방인들은 저주하고 욕을 할 때마다 `유다 사람들처럼 가련한 신세가 되어라' 하였으나 이제는 그 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유다라는 말은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축복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처럼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이방인들에게 유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거나 실망하지 말아라! 오히려 힘을 내어 성전 재건을 계속하여라!' 14) 보아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의 조상들이 나의 분노를 폭발시켜 놓았을 때에는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결심을 바꾸지 않았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5) `그와 똑같이 오늘날에는 내가 다시 예루살렘 시민과 유다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기로 작정을 하였다. 너희는 내 마음이 다시 바뀔까봐 걱정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16) 오히려 너희는 내가 시키는 일들을 하여라. 너희는 서로 진실한 말을 하여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법정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라! 17) 서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궁리를 하지 말아라! 검은 것도 희다고 하는 따위의 거짓말은 아예 입에서 떼어 버려라! 이런 것들은 내가 모두 미워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주전 566-520년). 하지만 어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12)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재건 사역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손을 견고히 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풍작을 거두지 못했으며, 그 결과 가축들도 먹이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곤란을 겼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를 핑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협하는 대적들로 인하여 평안히 다닐 수도 없었고, 내부적으로도 동족들끼리 자주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하게 된 지금에는 이런 징계를 거두어 주시겠다고 하시며, 더 이상 외부의 위협 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씨를 뿌리고 풍성한 추수를 하여 사람들과 가축들이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성전 재건 중단으로 인하여 내려진 포도나무, 땅의 산물, 하늘 이슬의 재앙들이 그치고 다시 평안과 축복을 누리게 하리라는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13-17)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선민공동체를 재건하고, 성전재건을 다시 착수할 때 그들과 함께 하사 그들이 행하는 일을 형통케 하실 것이며 그것을 완수하게 하실 것이고, 그들을 복된 존재로 굳게 세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성전 재건에 착수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변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손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과업이 부여되고 주변에 대적이 산재할 때 가장 먼저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질 때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적용: 고난은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은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은혜는 더욱 풍성하여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꼭 해야 하지만 멈추어 버린 일이 없는지 살피시며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존 뉴톤 목사님께서는 임종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에 놀라운 일이 세 번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며, 세 번째는 내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깜짝 놀랄 것이다.”
< 설 교 >
누림의 축복을 받읍시다
슥 8:9-17 / 이삼규 목사
몇 주전에 로또 열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적이 있습니다. 너도나도 로또 복권 사느라고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4000만원 어치 복권을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최대 복권에 당첨된 재미교포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당첨금을 받고 일순간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파산을 하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닙니다. 적은 것이라도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미국 서부지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심하게 악취 나는 웅덩이를 보고 늘 투덜거렸습니다. 소나 말에게도 물을 먹일 수 없었기에 농부의 불평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결국 농부는 그 웅덩이가 딸린 농토를 남에게 사정하다시피 하며 팔아버렸습니다. 「웅덩이와의 결별」이 있던 날 농부는 파티를 벌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은 농부에게 일생최대의 실수가 되었습니다. 그 웅덩이에서 거대한 유전(油田)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축복의 유전」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 하나님께서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1. 누림의 축복을 받지 못한 때(10절)
그 동안 몇 주에 걸쳐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메시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직설적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각성을 하도록 힘썼습니다. 그 결과 16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봅시다.
슥 8: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던 선지자는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 말씀은 '기운을 내라' 또는 "담대하게 되라"는 의미입니다. 왜 기운을 내라고 했을 까요? 왜 담대하게 되라고 했을 까요? 그것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앙의 담대함을 가지고 외적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성전 재건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슥 8:10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a.삯을 받지 못함-사람, 짐승
b.사람이 대적 때문에 출입이 평안치 못함-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수고한 만큼 삯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과거 독재 정권시절 또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모든 노동자들이 숨을 죽이고 거저 고용주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임금을 많이 주던지 적게 주던지 항의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재벌들이 어떻게 재벌이 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에게 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돈을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싸웠습니까? 지금은 노조가 구성되어서 어느 정도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정당한 임금을 달라고 협상도 할 수 있습니다. 교사들도 노조를 결성하였고 이번에 군수출신 행자부 장관이 새로 취임하였는데 공무원 노조라는 명칭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수고한 만큼 그 임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을 때 사람도 삯을 받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뿐입니까? 많은 대적들이 있어서 출입이 편치 못하였습니다.
학개서에서도 이런 것을 잘 표현하고 하고 있습니다.
학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 1: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 2:1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개선지자는 좀더 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안 먹고 안 쓰고 죽자살자 벌어보아도 새는 구멍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집은 조금 벌어도 알뜰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수입은 많은데 그냥 여기 저기 새는 구멍이 있어서 물질이 남아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재벌이면 무엇합니까? 어떤 재벌은 병이 들어서 그토록 맛있는 것이 많건만 허연 죽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누림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누림의 축복이 임한 때(11-13절)
10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 11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전에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지만 이제부터 그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누림의 축복을 주시기로 하셨을까요?
a.특별한 대우를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슥 8: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호세아서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 된 삶을 살 때 그들을 "로암미"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그런데 "암미"라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우가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가 "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참여의 정부가 출범을 하였습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상고를 졸업한 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는 학력이 지배하던 시대는 끝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력만 있으면 비록 이장을 하였고 군수밖에 하지 못했어도 행자부 장관도 됩니다. 농고를 졸업하였어도 농림부 장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b.평안한 추수를 얻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슥 8:12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대우를 해 주시는 것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평안한 추수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삯을 받지 못하여 평안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안한 추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음으로 마음이 기쁘게 될 것입니다. 땅이 산물을 내므로 마음의 강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포도나무의 열매가 맺히고, 땅이 산물을 냅니까? 하나님께서 우로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이른 비를 내려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이것을 누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남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의 성전 재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림의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 누림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c.축복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슥 8: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길로 나갈 때 그들은 이방 가운데서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 나라에 망하였고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주신 율법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축복의 모본이 되어야 그들이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축복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언제 이런 누림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손을 견고히 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할 때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빠서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기가 어렵습니까? 그러니 더욱 열심히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가하게 해주시면 입도 한가해지는 것입니다. 바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빠야 수입도 많아지고 그래야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바쁠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누림의 축복을 계속해서 받으려면?(14-17절)
우리가 누림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이스라엘에게 노를 격발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킬 때였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우상을 섬기며 말씀에 불순종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킴으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대하 36:16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그러나 그들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셨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꿈인 성전 재건을 이루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전 재건이 시작되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슥 8: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누림의 축복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은 백성들이 행할 일은 무엇입니까?
a.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
b.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라.
c.서로 심중에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라.
d.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만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진실해야 합니다.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누림의 축복은 누구에게 임합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집에 빠르고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였을 때는 누림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먼저 구할 것을 구할 때 누림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는 길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림의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우리가 행할 일
스가랴 8:14-17, 야고보서 3:13-18 / 배의신 목사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어떤 성품의 사람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어떤 삶의 방식을 좋아하십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찾아보라고 하면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면서 사람들에게도 요구하신 성품이자 삶의 방식인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것이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인 이사야 9: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서 메시아를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9절에서 팔복 중의 일곱 번째 복이 나오는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에서 공통적인 성품이자 삶의 방식이 나오는데;‘평화’ 혹은 ‘평강’, ‘화목’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품이자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면서 요한복음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19절입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진리’ 혹은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 성품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히브리서 12:14절에서는 대단히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이란 ‘진리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화평’과 ‘진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두 본문말씀에도 들어 있는 이 내용이 지금 살펴볼 말씀입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스가랴서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소수만 남았고, 그동안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계획을 말씀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의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70년 동안이나 노예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 죄의 대가를 치렀으니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버리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본문 16-17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이 말씀의 핵심이 ‘화평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속한 삶의 방식인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과 분열을 일으키는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화평과 진실한 삶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본문 17-18절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도 ‘화평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삶은 화평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옛날에 한 선비가 친구의 부모가 돌아가시자 조문을 갔습니다. 선비가 도착하자 마침 친구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팥밥이어서 색깔이 붉었습니다. 고지식한 선비는 이를 두고 나무랐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자네는 어찌 팥밥을 먹는단 말인가?” 황망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들면서 물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그러자 선비가 말했습니다. “붉은 색은 기쁨을 의미하지 않은가? 자네는 부모가 돌아가셔서 기쁘다는 뜻인가?” 그러자 친구가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흰 밥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상중에 있어서 슬프다는 뜻이라는 말인가?”
이 이야기는 마치 욥기에서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친구들이 위로는 고사하고 욥을 책망하다 못해 몰지각한 죄인으로 몰아세우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은 진리를 지키는 진실한 사람인척하면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기주의적인 형식주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합니다. 진실은 없고 외모와 외식과 형식에 빠져있습니다. 어느 인터넷 뉴스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를 보도한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외국 뉴스에서는 우리나라의 ‘성형수술에 대한 수많은 광고’와 ‘성형외과병원’들을 보도하면서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연예인들 중에는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도 성형수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형수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적인 아름다움인 진실에는 관심도 없고 외모만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꽃미남’ ‘여신급 외모’ ‘꽃 중년’ 등. 지금 이 세대는 외모 가꾸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세대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질을 높이고 사회에서 본이 되는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런 영적인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당을 더 크고 웅장하게 건축하고, 수많은 프로그램들과 다양한 문화사역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에 기도하는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편의주의와 세상적인 행사들은 날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교회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습니다. 이 조사에서 국민들은 ‘사회에 대한 봉사를 가장 많이 하는 종교’로 ‘기독교’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믿을 수 있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서는 가톨릭과 불교에 이어 세 번째였습니다. 더 많이 봉사하고도 신뢰 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하지 못한 삶’때문입니다. 물론 일을 많이 하다보면 안 좋은 모습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화평을 이루고 진실한 삶을 산다면 결코 이런 외면을 받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본문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외모나 외적인 성장보다는 영적인 아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6: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24절에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이런 화평과 진실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부부가 맹렬한 싸움 끝에 서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만 하면 싸우게 되니까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글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날 출장을 가게 된 남편은 새벽차를 놓칠까 봐 어쩔 수 없이 부인에게 \'내일 아침 4시에 깨워 줘요.\' 라고 적은 쪽지를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은 창문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는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남편이 부인을 깨우려고 하는데 머리맡에 종이쪽지가 보였습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여보, 벌써 4시예요."
잠언 17:1절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세상에서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본문 17-18절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십니다. 화평, 평화, 하나 됨, 행복한 등의 뜻이 있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샬롬(shalowm;)’,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화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성품입니다. 히브리서 12:14절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바꾸어 말해서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 다툼을 일으키며, 분열을 일으키며, 이간질을 하며,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싸움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신명기 10:1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나 요한계시록의 칠복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된 말은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행복한’ ‘복된’이라는 의미로 ‘최고의 복’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것으로 인한 행복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화평하고 진실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스가랴 본문 다음에 나오는 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달의 금식과 다섯째달의 금식과 일곱째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화평과 진실한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슬픔을 바꾸어 기쁨이 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말하지 않아도 삶의 모습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우리들의 삶에는 주님이 이루시는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를 넘어 승리로
슥 8:14-17 / 김태영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은혜와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방종한 삶의 허가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약속받은 자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합당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은 생활에서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 입은 자로서 구원의 은혜를 넘어 축복 받은 삶의 승리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진실과 공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6절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리는 승리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실과 공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쟁하거나,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거나, 거짓 맹세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진실하지 못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깨달은 자라면 거짓된 세상 속에 있다할지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의도적이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말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에도 조금 부끄러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용기를 내어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핑계로 불의와 죄를 짓는 자들은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약속을 받은 자답게 진실과 공의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진리와 화평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지켜왔던 슬픔과 애통의 금식을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바꾸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더 이상 패배를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기념하는 절기가 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승리의 날에 누리는 기쁨은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기쁨이요 하나님에 의해 누리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풍성한 기쁨과 감격이 있는 승리의 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들에게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위해 진리를 희생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진리를 위해 화평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승리의 날을 누릴 그 백성들의 삶에서 이러한 진리와 화평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진리와 화평을 잘 조화시켜감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누리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회복과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통하여 더 크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만민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입니다. 바로 그 날에 우리는 진정한 승리의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우선 예루살렘의 회복과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통해 이웃 국가들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변화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는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에 보면, 이방 백성 10명이 유다사람 하나의 옷을 잡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으니 우리도 너와 함께 가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와 기도로 삶의 회복과 변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지며,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오늘 우리가 능력의 복음이 있는 교회에 서 있습니다. 능력의 복음으로 삶의 회복과 변화를 이룸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는 진정한 부흥의 중심에 서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머무는 배은망덕한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답게 은혜를 넘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승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된 승리를 누리는 자가 되기 위해 진실과 공의의 삶을 살며, 삶 속에서 진리와 화평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고, 능력의 복음으로 삶의 회복과 변화를 이루어 진정한 부흥의 중심에 서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베푸실 은혜
슥 8:9-17
하나님은 예언자에 의해 여기서 그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비축하셨던 긍휼에 대해 더욱 확신을 제시한다. 여기, 이전에 그들의 확신을 위해 있었듯이 그들의 위로를 위한 말씀이 있다. 이 대목은 그들이 지금 짓눌려 있는 환난들과 관계되는 강한 격려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을 살필 수 있다.
Ⅰ. 이 격려가 해당되는 주인공들. 그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실하게 성전의 건축에 지원했던 자들이다(9절).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그 손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분주하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때에 들으라. 이전에 그들에게 보내졌던 저 예언자들의 말에 너희 선조들이 그랬듯이, 그 말에 청종치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는 그 약속의 위로를 취할 수 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들은 계율을 지키라. 즉 그것을 완성시키라.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것을 계속해야 하며, 얼마동안 하늘의 환상에 순종하여 그 일을 열심히 너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귀한 약속과 함께 그 손이 강하게 되어야 하며, 그 마음이 위로받아야 할 자들이다. 너희에게 이 위로의 말씀이 보내졌다." 저들, 그리고 저들만이 하나님을 위해 기용되었고, 그에 의해 격려될 것이 기대된다. 의무의 경작에 그들의 손을 대는 자들은 긍휼의 약속으로 그 손이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잘못을 피하는 자들은 저주의 상속을 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켜 축복이 되게 한다.
Ⅱ. 그들이 이제까지 그 아래서 괴로워하던 낙담들이 무엇이었는가?(10절)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부여하시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그들을 더 기이하게 보이게 했고, 그들의 위로에 더 흐뭇하게 했던 그 축복에 대한 장식으로서 언급되었다. 그 시대가 오랫동안 매우 나빴었고, 재난과 환난이 매우 많았고 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1. 무역이 종식되었다. 할 일이 없었고, 따라서 얻을 것도 없었다. 개혁의 "이 날들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다." 땅의 소산은(비록 그것이 오랫동안 묵혀져서 더 비옥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빈약하여서, 농부는 그의 곡식을 거둘 추수꾼을 고용할 기회와 그것을 집으로 운반할 무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가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매매할 상품들이 없어서, 사람들이나 짐승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 노동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양식을 구할 길이 없었다.
2. 여행이 위험하여, 바다와 땅에서의 모든 상업이 단절되었다. 아니, 아무도 해외로 그들의 친구들을 방문하러 나갈 수도 없었으니, "해받음으로 인하여 출입이 평안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과 암몬인들, 그리고 그들의 다른 악한 이웃들은 작은 패거리로 그들에게 침입하여, 손댈 수 있는 모든 것을 채갔다. 도로는 강도로 가득했고, 도시와 시골에도 집도둑들이 가득했다. 그리하여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재물도 집 안과 집 밖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3. 우정이나 좋은 이웃이그들에게 없었다.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라." 이 일에는 큰 죄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 전쟁과 분쟁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그 안에 또한 큰 불행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 안에서 그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에 적당한 보복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 대한 "악한 영" 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악한 영을 보내사 서로 괴롭히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던져 버리는 자는 이웃 사랑의 위로를 상실한다.
Ⅲ. 그들이 이제 막 하려고 하는 선행을 진행하기 위해, 그리고 아직 그들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 어떤 격려가 있는가를 보자. "이리하여 너희는 괴롭힘과 상함을 당해왔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한 길을 바꾸시리라(11절). 이제 너희가 의무로 돌이키니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상하게 하셨던 날수에 따라 너희를 위로하리라. 썰물이 다시 넘치리라."
1.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변론을 계속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그들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대하시냐 못대하시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그가 되도록 만드신 그대로 우리에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전 날들처럼 하나님에게 거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이전 날들처럼 우리에게 거역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싸우는 자들은 완고한 자들"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모든 선한 일들을 풍부하게 경험할 것이다(12절). 뿌려진 "씨앗은 번식할 것이며" 큰 수확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마음의 기쁨이 될 것이요, "땅이" 산물을 내리니, 이는 마음을 강건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필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장식과 기쁨을 위해서도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리라.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라." 그것 없이는 땅이 수확을 내지 못한다. 이 사실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그들이 그분에게 의존해야 함을 끊임없이 암시해 준다. "곡식을 남기지 않는 폭우" 라는 말이 있으나(잠 28:3), 여기서는 "부드러운 이슬이" 땅을 적셔 "추수꾼에게 씨앗과 먹는 자에게 식량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그들은 사람들이 돌아 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남은 자, 잔여자" 로서 매우 적은 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므로, 그는 그들에게 알맞은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보살피실 것이다. 이는 조금 전에 이 예언자의 동료가 말한 것을 확인해 준다(학 2:16, 19).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소유물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이웃에게서 그들의 신용을 회복할 것이다(13절). "너희는 이방 가운데서 저주거리가 되었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비방하고 저주했으며, 욕을 퍼붓고, 그들이 당하던 큰 치욕을 이유로 그들에게 재앙을 기원했다. 혹자는 그들이 저주받은 자의 모형이어서, 만일 사람이 그의 원수에게 가장 심한 저주를 할라치면 "신이 너를 유다인처럼 만들리라" 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라. 너희의 황폐와 분산이 너희의 멸시에 끼쳤던 것만큼, 너희의 회복은 너희의 영예를 위하여 빛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욕먹고 짓밟힌 만큼 칭찬받고 존경받을 것이며, 멸시받고 버림받은 만큼 보호받고 사랑받을 것이다." 섭리가 그들에게 미소짓느냐 얼굴을 찌푸리느냐에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에게미소짓거나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으로 삼으사 명백히 축복하여, 호의를 보이시고 영예를 입히시는 자들은 우리도 역시 존경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호와의 축복받은 자는 땅의 축복을 받을 자요, 우리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여기서 이것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약속되었다. 왜냐하면 열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두 지파와 함께 포로 생활에서 돌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에 왔던 자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 매우 많은 사람들이 후에 그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사태가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보았던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로결심할 것이다(14,15절). 그들의 모든 위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가졌던 사랑의 생각으로부터 기인된다(렘 29:11). 이 약속들을 이전의 위협들과 비교해 보라.
(1) 그들이 "죄로 그를 격분시켜" 분노를 발하게 하였을 때, 그는 "그들을 징벌하리라" 고 말했고, 또 그렇게 하셨다. 그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가져오는 것이 그의 선포된 의도였으며, 그들이 그에 대한 반역을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들에 대한 경고를 돌이키지 않고, 율법의 조문이 시행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것은 결코 급작스럽고 성급한 결정이 아니라, 항상 생각의 산물이며, 그 하나님의 뜻 쪽에는 의논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일 죄인이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돌이키시지 않을 것이다.
(2) 이제 그들이 봉사로 그를 기쁘게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선을 행하리라" 고 말했다. 그러면 그는 그가 위협에 있어서처럼 그 약속에 진실하지 않을 것인가? 의심없이 그는 진실하리라.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으니," 너희가 예언자들이 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들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Ⅳ. 그들이 이 격려를 활용할 방도를 보자.
1. 그들로 하여금 이 약속들이 그들에게 주는 위로를 취하게 하라.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15절).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9절). 함께(13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1) 그들이 일에서 곤란들을 겪는다하여 그 일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또 그 일이 계속 어렵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잘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이 그들을 일으켜 활력과 원기를 가지고 나아가게 하라.
(2) 그들이 원수에게 노출된 위험이 그들을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자기 편에 두어 자기들을 위해 선을 행하시도록 하는 자들은 "인간이 그들을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 그들로 하여금 저 약속들이 그들로부터 요청하는 의무를 행하게 하라(16,17절). 이전 예언자들이 위협된 진노를 고려하여 그들의 선조들에게 재촉했던 동일한 의무들을(7:9, 10) - 이 예언자는 약속된 긍휼을 고려하여 - 그들에게 재촉한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방식과 시기에 너희를 위해 행하실 것을 행하시리니,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되, 너희가 의무를 양심적으로 이행한다는 조건에 근거하여 그리하라.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이것은 계약에서 너희가 지킬 역할이다. 이들은 너희가 완수하고 성취하며 지켜야 할 것이다. 너희의 문에 빗장을 지르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조류가 멈추지 않게 된다."
(1) "너희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말고 항상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사리가 그런 대로, 너의 지식이 미치는 대로 말해야 한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 곧 매매할 때나 일상 담화시에 거짓말처럼 보이는 모든 말을 두려워하라." 이 훈계를 사도가 인용하며(엡 4:25), 이유를 이렇게 뒷받침한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 공공의 정의를 집행하도록 위임된 자들은 아무도 그것에 의해 그릇되지 않도록 주의할 뿐만아니라, 피해입은 자들이 그것에 의해 시정되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라." 성문에 앉은 재판관들로 하여금 모든 재판 진행에 있어서 진리와 화평의 두 가지를 관여하도록 하라. 그들로 하여금 정의를 수행하고, 불화를 조정하고 귀찮은 청원을 이끌 수 있도록 주의시키라. 그것은 평화를 위해, 불화한 자들을 화목하게 하는 진리의 재판이며, 진리와 일치되며, 그 이상을 나아가지 않는 평화의 재판이 되어야 한다.
(3) 아무런 이유없이 그의 이웃에게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7장 10절에서 살핀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악을 행하는 데로부터 우리의 손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살펴 심중에 우리의 이웃에게 "악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잠 3:29). 상해와 악심은 생각 속에서 즉 그 배태에서부터 박멸되어야 한다.
(4) 큰 경이가 맹세에 대해 표해져야 하며, 그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거짓 맹세를 결코 하지 말라. 아니,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즉 그것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그것에서 멀리 떨어지라. 다른 사람에게 맹세를 부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짓 맹세를 하도록 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너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거짓 맹세하도록 하고, 너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거짓 맹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모든 타락하고 사악한 행실들에 대해 매우 충분한 이유가 부가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임이라. 따라서 하나님께서 너희의 친구가 되시기를 기대한다면 너희는 그들을 미워해야만 한다."
여기서 금지된 이 일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것들" 가운데서 발견된다(잠 6:16-1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진노하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위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미워하시며,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나쁘게 되고 매우 배은망덕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금해야 한다.
물 없는 구덩이에서 두 배의 축복으로
슥 9:9-17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은 사복음서에 전부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9장 9~17절까지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우리에게는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큰 왕이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데 그 중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사회에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그런데 그 왕은 교만한 왕이 아니라 겸손하며 수수한 왕입니다. 보통 왕들은 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말을 타고 다니는데 그 왕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공의로운 분이시며 그분의 손에는 구원이 있어 구원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왕국이 있어야 됩니다. 겸손하시며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어떤 왕국입니까?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10).
예수님의 왕국은 병거나 말이나 활로 유지되는 왕국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군사적인 무기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저마다 핵무기를 보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무력적인 방법으로 왕국을 통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고 말씀으로 세워지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는 왕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10절에서는 왕국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9장 11~17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왕국의 백성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왕국의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표이며 그림자입니다. 그 실체는 신약시대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Ⅰ. 왕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포로”들이었다
왕국의 백성들은 구원받기 이전에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슥 9:11~12).
왕국의 백성들은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던 죄수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인하여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유다 백성들이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인하여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은 B.C. 538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고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다 백성들을 건져주셨느냐? 그 이유는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가 복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짐승의 피로 언약을 인준하고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내용 가운데 유다 백성들이 언약을 어겨 포로가 되어도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마음을 돌이키면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신 30:3).
너희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했지만 언약의 피로 인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일차적인 의미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멸망과 지옥에서 건짐 받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언약을 맺는 것은 그림자이고 예표에 불과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써 언약을 맺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부활하게 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결코 어기지 아니하시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다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는 옛날 동방의 왕들이 사람을 죽일 때 빠뜨린 곳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할 때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는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습니다. 너무 깊어서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 없는 구덩이에 있다는 것은 3일만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기도를 해도 물을 마시고 하면 40일까지도 할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 이상 못합니다. 이처럼 물 없는 구덩이는 왕들이 죄수를 죽이려고 만든 장소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빠지면 아무리 돈이 많고 쾌락을 즐기면서 기분이 좋아도 3일이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 가운데에도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슥 9:12). 어떻게 이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되었느냐?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을 살려주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가랴 9장 12절을 보면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장이란 단어의 뜻은 피난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주셨고 구덩이 속에서 꺼내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죄수들은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마련해주신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부처님, 알라, 귀신에게 피하면 완전히 망합니다.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시 61:3).
이렇게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고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피로 죄사함을 받으며 언약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Ⅱ. 왕국의 백성들은 두 배의 축복을 누린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슨 축복을 주시느냐?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슥 9:12). 과거에 당했던 슬픔의 두 배로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사람들과 다릅니다. 갑절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갑절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원수들을 물리치는 승리를 주십니다. 원수와 싸워서 진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무조건 이겨야 됩니다. 탁구를 쳐도 축구를 해도 이겨야 됩니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슥 9:13~15).
그냥 봐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를 활로 삼으시고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온의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B.C. 167년에 일어난 마카비 혁명을 뜻합니다.
헬라에는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점령할 나라가 없어서 억울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B.C. 336년에 왕이 되어서 20살에 전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를 점령하고 10년 만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부하로 있던 네 명의 장군들 중심으로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카산더가 갖고 터키 쪽은 리시마코스가 갖고 팔레스타인 땅을 중심으로 북쪽 시리아는 셀류시드가 장악하고 남쪽 애굽은 톨레미가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을 가지고 셀류시드와 톨레미가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다니엘 11장에 이 전쟁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팔레스타인 땅은 톨레미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톨레미는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셀류시드 왕조의 사람들이 톨레미를 밀어내고 B.C. 200년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자 유다 백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B.C. 175~164년까지 통치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가장 악했는데 이 사람이 애굽을 치다가 실패하자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성경을 불태우고 유대인의 절기를 금하며 성전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워서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티오코스에게 잘 보여서 대제사장이 되려고 했던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집안을 격동시켜 이들과 맞서 싸우게 하십니다. 모딘이라는 동네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스(Mattathias)는 아들이 5명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대인 중에서 돼지의 피로 제우스 신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일으킨 혁명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맛다디아스의 집안을 하스몬이라고 부릅니다.
맛다디아스는 1년 만에 죽고 5명의 아들들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마카비 혁명에 가담하게 됩니다.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신앙의 핍박이 올 때 강하고 용맹을 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3년 만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시리아 군대를 쫓아내고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마카비 행전에 기록해놓고 수전절에 이것을 읽어주었습니다.
어떻게 작은 숫자로 큰 왕국인 시리아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하고 번개처럼 화살을 쏘아 시리아 군대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슥 9:15).
우리 성도들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와 귀신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거짓된 종교와 사상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마약을 먹게 하고 동성연애를 하게 하며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그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호위하심과 신속하신 활동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이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사람들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원수가 생기고 가정에서도 원수가 생깁니다. 하지만 어떤 원수라도 우리는 이길 줄로 믿습니다.
둘째, 특별한 사랑을 주십니다.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슥 9:16).
면류관도 좋은 것인데 면류관에 박힌 보석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는 면류관에 박힌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면류관의 보석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셋째, 대를 이을수록 번영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슥 9:17). 저는 목사지만 제일 걱정되는 것이 자녀들 문제입니다. 제 자녀들이 잘못되면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서 자녀들이 저러냐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바르게 자랄까?’가 목회자들의 가장 큰 고민인데 저는 스가랴 9장 17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소년과 처녀는 자라나는 신세대를 가리킵니다.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니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기게 하시고 면류관의 보석처럼 사랑해주시며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Ⅲ. 왕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승리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됩니까? 스가랴 9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슥 9:15).
동이라는 것은 커다란 양동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제사를 드리면 그 피를 동이에 받는데 그 피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제물을 많이 드리고 감사가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감사를 입에 달고 다녀야 됩니다. 요즘 날씨가 상당히 더운데 덥다고 짜증을 내면 다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더워도 감사하고 자녀가 대학에 떨어져도 감사하고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도 감사하면 흑암이 물러가고 축복이 오게 됩니다.
번제단이 사각으로 되어있는데 모퉁이에 뿔이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뿔에 피가 묻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헌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피묻은 제단 모퉁이는 헌신하는 일꾼들이 많아졌고 백성들이 속죄하며 경건하게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감사하고 헌신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지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슥 9:17). “For how great is his goodness, and how great is his beauty” (ZEC 9:17, KJV).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 허물과 잘못을 어려움이 온 것이지 왜 하나님을 욕하십니까? 우리의 허물과 잘못으로 인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이것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물 없는 구덩이에 살면서 조만간 죽어 지옥에 떨어질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승리와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감사하고 헌신하며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하고 자랑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민들이어야
슥 8:9-17 / 박성완
시편 시 45:16-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 팬 베이커 교수는, 사람들이 관계의 정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좋을 땐 사용하는 언어도 비슷하지만, 관계가 나쁠 땐 경멸감을 나타내는 한 두 개의 공통된 언어를 빼면,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가령 팬 베이커 교수팀은 유명한 정신의학자이지요. 프로이트와 융이 7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분석했지요. 그 결과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때는, 편지 속에 등장하는 명사나 대명사 등이 대게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그 경멸감을 다는 단어를 제외하면, 쓰는 단어들이 크게 달라졌어요. 똑 같이 시를 쓰는 연인이고 부부였던 실비아 플러스와 테드 휴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이가 좋을 때는 두 사람의 편지 등에 쓰는 언어가 비슷했지요. 하지만 사이가 악화되자 사용하는 언어들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팬 베이커 교수는 유명인사가 아닌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비슷한 실험을 하고 비슷한 결과를 얻었는데요. 가령 에세이를 쓰게 하는데, 쇼핑 같은 가벼운 주제의 제목을 주면 학생들은, 뭐 같다 이를테면 일종의 같이, 가벼운 단어들을 많이 썼지요. 하지만 딱딱한 주제를 주면 대부분이 다 어렵고 건조한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대상에 따라서 자신들의 언어도 비슷하게 바뀌는 거지요. 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실험결과일 텐데요. 팬 베이커 교수는 그런 현상에 <언어 스타일 어울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언어스타일 어울림> 때문에 연인이든 동료 든 스승과 제자든 간에, 그들의 대화를 잠깐만 들어봐도, 그들의 관계가 어떤 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문득 한 격언이 생각이 나네요. “같은 농담을 듣고 웃는 부부는 절대 헤어질 염려가 없다.” 이 말이요. 같은 농담에 똑 같이 웃는다는 거, 언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뜻이겠지요. 언어 스타일이 같다는 건 사이가 좋다는 뜻일 테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헤어질 염려도 없는 거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요, 그 반대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언어가 비슷한 건 사이가 좋다는 뜻이니까, 사이가 좋으려면 언어를 비슷하게 맞추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상대의 언어에 비슷해지려고 하다보면, 상대방의 말이나 말이 품고 있는 뜻이나 뉘앙스를 더 잘 듣고 이해하려고 하게 되니까, 당연히 사이가 좋아지겠지요. 요즘 누군가와 소원해졌다든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든지 한다면, 언어의 공통정도와 차이 정도부터 점검해 보시면 어떨까요?
2. “새 날을 약속하심(9-17절)”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움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새해 첫 태양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 서광에서 무엇인가 신비한 기운이 쏟아져 감쌀 것 같은 환상을 가집니다. 새날에 대한 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새날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귀를 기우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 내용을 묵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새날은 평화를 심어주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날이란 역사에 전무후무한 새로운 시대를 암시하는데, 그 주된 내용은 평화였습니다.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상이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세상을 뜻합니다. 둘째, 거짓과 불의를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과 나라들은 저마다 정의롭고 바르다고 주장을 합니다. 문제는 모두가 바르게 살고 있다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다툼과 싸움은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모순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인정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말 중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공평무사한 선의의 경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올바른 운동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날의 주인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그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역사의 주인공처럼 나서자고 선동합니다만, 이것은 교만입니다. 지금 서구 기독교회가 몰락하고 그 전철을 한국 기독교회도 밟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자만한 때문에 벌어지는 필연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베드로 성당이나 여의도 어느 교회처럼 매머드 교회당을 짓고 세력을 뽑내는 일이 아닙니다. 공의와 사랑 하수처럼 흐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호 6:6, 12:6, 암 5:24). 비천한 마구간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되묻는 성탄절이어야 합니다.
일꾼들의 대한 약속
슥 8:9-17
“너 잘하는 게 뭐야?” 혹시 이런 내용을 말하거나 들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람이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도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많은 재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지 못하거나, 대가를 받으며 봉사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며 무조건 봉사하라고 말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롭게 되어야만 교회는 더욱 성전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고 있는 9~13절이고, 두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가 중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구약성경에서 “손을 견고히 하라”라는 표현은 종종 전쟁과 관련된 내용 속에서 사용됩니다(삿 7:11; 삼하 2:7; 16:21).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강한 마음을 품이라는 것이죠. 특히 “견고히 하라(qz:x', 하자크)”라는 표현은 학개 2장 4절에서 3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 여호수아,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스가랴서와 학개서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손을 견고히 하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처한 곤경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위로의 메시지가 됩니다.
10절은 성전이 재건되지 못했을 때의 특징을 크게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임금이 지급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내, 외부의 적들로 인해 포로 귀환 공동체의 상황이 매우 나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무역이나 경제적 교류를 할 수 없었죠. 이 모든 상황은 성전을 재건해야 할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상황이 뒤바뀔 것을 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12~13절에는 하나님이 새롭게 주실 은혜와 복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산물을 내기 위해 이슬을 내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민족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삼하 7장), 아브라함(창 12, 15장) 그리고 태초에 주셨던 것으로 성전의 재건과 함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또 심판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죠.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고,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공의와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이웃과 진리를 말하는 것, 진실한 재판, 분열과 다툼, 거짓 맹세와 같은 일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죄악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신 12:31; 16:21~11)와 같은 것이거나 우상숭배와 연결된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주를 위해 봉사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과 대가를 바라기보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열매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대가를 받는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게 그 재물을 사용해야겠죠.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은 마음과 신앙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정직함과 성실함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자리에 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