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18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난지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때 였습니다.
80년은, 고등학교 졸업을하고 재수를 할때입니다.
라디오와 TV에서, 계속 광주 5.18 보도가 들려왔습니다.
방송을듣고,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성당입구부터, 5.18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군인.경찰에 사살된 사람들을 알아보지못하게 얼굴에는 흰색페인트칠을 해놓은 사진,
젊은 여성의 가슴을...(기억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설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때, 개신교에서는 향린교회에서도 시위에 함께 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과 명동거리를 애워쌌습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삼천만 잠들었을때 우리는 깨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5월하늘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수많은 사람들은, 일명 민주가(데모가) 라고하는 노래들을 부르며 시청으로 청와대로
행진을 했습니다.
시청광장에는 아마도, 어린아이와 어른신을 제외한 모든 서울시민들이 모였을것입니다.
당연히, 경찰차들이 바리케이트를 쳐서 막았고 경찰들과 흔히 백골단이라고 부르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 저기서 평~
(잠깐, 전화좀받았습니다)
경찰들은, 최루탄을 연신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또, 하루는 박종철. 이한열 두사람의 소식이 전해졌고
연세대학교에서 시청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민중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아현고가도로가 무너지지않을까 염려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시청앞에 도착한 우리시위대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전봇대같은겄으로 시청문을 때렸고
다행히 시청문을 부시지는 않았고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시청 옥상에 올라간 일부 시민들이 태극기를 조기로 바꾸었습니다.
서울시내, 명동은 물론 종로! 수많은 시민들이 큰소리로 민주화를 외치며 행진할때면
여지없이 최루탄이 등장했고, 백골단들이 쫓아오면 골목으로 골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종로 뒷골목으로로 시민들과 도망갈때 식당을하시는 분들이 수건과 물을 주었고 식당뒤로
숨겨주기도 했습니다.
백골단에 쫓겨서 도망갈때 과일장사를하시는 리어커를 넘어트려서 울고 계시는 모습도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작은 역사의 한장이 되었지만 모두 이유있는 함성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친구 한명이 전경이었던 일,
명동성당에서 시위하는 아들과 대치하는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그 모습은 흘러간 세월을
말할수있었습니다.
김대중님 총재시절때 수차례 감옥살이를 하셨고 추방하기까지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김영삼님 총재시절때 "전두환이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이말은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김영삼총재가 다동의 어느 건물에서 나오자 정경들이 바로 닭장차에 태웠던
그때의 모습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들이 흐르고, 남영동을 다녀왔습니다.
박종철열사가 갇혀 있었던 방, 도망가지 못하도록 창문에 철쇠로 막아놓은 모습...
노무현 대통령님의 발인하던날 옮기기전의 YTN 방송국 높은 층에서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수 많은 색의 포스트-잇 종이를 날렸던 기억은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다시 노찾사의 노래를 들어봅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해봅니다...
첫댓글 권력에 눈이 어두워 호위호식 하려고
박정희 졸개들이 눈에 뵈는 것 없었다.
헌법과 법률의 절차도 쌍그리 짓밝고
헬리콥터 장착 기관총, 총검으로 마구 갈기었다.
지금 전두환과 그 잔당들이 호의호식하고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터미널에서인가 저 소식을 TV에서 보고있을때
한 할머니께서, 개새끼도 저리는 안죽인다...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개새끼도 저렇게는 안죽인다!
1978년 한전 입사해서 서울 보급소 근무시 한양대앞을 지나가는데 땡크 가정문에 배치되었지요 ㆍ그때가 계엄령 기간같어요
한대 정문앞에 전차가 있었다면, 마천동에서 왔겠지요.
특전사본부가 거기에 있었던 시절이라서요,
계엄령, 저도 기억합니다...
그 해 5월17일
공덕동4거리에서 아현동 4거리로
승용차로 지나가는 출근 길
반대편 여의도로 향하는 학생들,
여의도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로 우측에 붙어
질서있게 가고 있엇고
경찰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시 여의도 방향으로의 교통은
지금과 같이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교통통제하며
그 들이
평화롭게 진행하도록
유도하는걸 보고
이제는 시민의식도 성숙해지고
경찰도 시민의 지팡이라는
본연의 사명감을 찾았고
대한민국에 희망찬 5월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셨는데, 결국은 아니었지요..
공덕동과 아현동, 많이 갔었지요.
국민들의 귀와 눈을 막은 뉴스보도에 고 2였던 전 ,정말로 북한이 쳐들어와 광주를 폭도들과 함께 초토화 시킨 줄 알았답니다.
방금도 남편과 그런 얘길하며,
분개하고,안타까움에 치를 떨었답니다..
저도, 전쟁났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화가 납니다.
불끈불끈!
화! 나는 분들 정말 많습니다...
누군가는
그때 그시절
양심선언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용기를 가지고
발포명령은 누구였다~
나는 그사람 명을 받았다
라고~
가슴속 울분을 참을 수 없습니다
같은 동족 끼리
그렇게 잔인 할수 있을까요!!!
총탄자국은있는데, 쐈다는놈은없습니다...???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는 하는데
이와 관련되어 반대하는 글을 올리면
잡아간다고 해서 말도 못하고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무조건 찬성의견만 말해야 하는 세상.
참 더러운 세상 입니다.
네! 무조건 굽신대며 살던 시대였습니다...
체제를 부정하는 폭도라 부르지도 못하고
명령에 따라 진압하다 시민군이쏜 총에
죽은 영령들은 폭군이 되는 아상한나라.ㅉ
나도 마셔 보았네
최루탄 ㅠ
저도, 많이 마셔보았습니다.
죽이더만요... ^^
" ♪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에 붉은 피
두부처럼 짤려나간 어여쁜 너에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왜 쏘았지 (총) 왜 찔렀지 (칼) 트럭에 실고 어딜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에 핏발 서려있네...♪"
아~ 심장이 벌렁거리고
핏줄이 부풀어 오름니다.
40년이 지났어도
광주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는데
반역의 무리들은 아직도 떵떵부리며
미소를 짓는 현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름니다.
80년 봄,
저도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죠.
전 국민학교 때부터 반공 멸공 승공..의
세뇌교육을 뼈속까지 받아 왔고
언론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티브이로 보면서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들의
소요사태로 평가를 했었지요.
이후 진학하면서 저의 세계가 확장되고
역사의식과 진실에 대한 눈이 뜨이면서
20대 이후 지금까지 저는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시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망월동 묘역에는 두번 참배를 했었습니다.
결혼전에 한번 찾아 뵙고,
신혼여행 때 아내랑 가서
님들에게 소주잔을 올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아나키스트님과 저는, 재수 동기생입니다.
우리 모두, 멸공. 반공.
"자수하여 광명찾자"
이렇게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저도, 오래전 KTX로 광주(송정역)에 내려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물어 물어
망월동을 찾았었습니다.
총칼에 돌아가신 그분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소주 한잔을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담배 한개피 드려볼까하다가 불날것같아서 접었습니다.
마음, 마음뿐이었습니다.
총칼에 돌아가신 그 많은 영령들이 하늘나라에서 천국과 극락에서 영원히 거하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제가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쪽지 올렸습니다)
아나키스트님!
좋은 답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