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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가라반달의 성모님 3
콘치따가 아기 예수님을 처음 보았다고 한 때는 7월 3일이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조약돌을 가지고 즐겁게 놀았다고 말한 것은 어린아이들의 심성과 꾸밈없는 진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일기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는 많은 특징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기 예수님과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몸짓과 얼굴 표정에도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중에 성모님께서 이따금씩 아기 예수님을 소녀들의 팔에 안겨 주실 때 그들의 자세와 움직임이 아기를 안는 행동과 일치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하였다. 소녀들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꼭 껴안자 아기 예수님이 움직였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또한 소녀들은 아기 예수님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하였고 실제 아기 예수님의 몸과 닿지도 않았다고 말하였다. 나중에 성모님께서는 발현이 끝날 무렵이 되면 자주 소녀들에게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하실 것이다. 소녀들은 이 경험도 근본적으로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이것들은 분명 이 세상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아울러 소녀들의 상상을 초울한 것이 분명하였다.
성모님께서 얼마나 자주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오셨던가? 콘치따는 이런 일이 "이따금"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대개는 성모님 혼자서 오셨다. 다음은 1962년 12월 8일의 발현 때에 콘치따가 성모님과의 대화 중에 했던 말이다. 여기에서는 귀여운 어린 아이다운 면이 엿보인다.
"하지만 아기가 왔다간 지 오래 되었잖아요! 그런데 아기는 조금도 크지 않았군요. 지난 번과 똑같애요. 아기는 어디에 있었죠? 어디에 있었어요? 아기가 오지 않을 때는 어디에 있는 거예요? 하늘 나라는 어디예요? 아니면 구유에요? 그는 어디에서 살아요?"
탈혼상태의 행진처럼 세 번의 부르심(llamadas)도 가라반달의 발현의 특징으로 루르드나 파티마의 발현과 매우 다른 점이다. 13세의 산골소녀 콘치따는 이것을 "기쁨의 감정"이라고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이는 아스투리아스의 바로 데 프라네스, 슬픔의 성모회의 호세 라몬 가르시아 데 라 리바 신부의 최근 <회고록>(Memoirs)에 나와 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그는 약 200번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자주 가라반달을 방문하며 기록한 이 보고서에서, 돈 호세 리바는 직접 목격한 이 "부르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행복", "내적인 기쁨", "기쁜 흥분의 일종"으로 표현하였다.
소녀들은 감추려 하였지만 가라반달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면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예수회 신부 루이스 마리아 신부와 라몬 마리아 안드레우 신부도 참석했을 때 소나무 숲에서 찍은 8밀리미터 필름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짧은 천연색 필름은 그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그래서 더욱 신빙성이 보증된다) 매우 흥미롭고 가치있는 기록이다. 이 필름은 수없이 복사되었고 몇 개는 미국에서 상영되었다. 부르심의 목적, 특히 나중에 있을 무아경 속에서 한 행진의 목적은 이 발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고 가라반달 사건이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8월 16일 수요일 - 다음 날 밤 8시인가 9시에 복되신 동정녀 께서 보통 때처럼 아주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우리 넷에게 말씀하셨다.
"루이스 신부가 지금 와서 너희들과 얘기할 것이다."
잠시 후 신부님이 와서 우리를 한 사람씩 불렀다. 우리는 신부님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고 목소리만 들었다. 그 목소리는 신부님이 세상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우리에게 충고를 해 주며 잠시 얘기하는 동안 신부님은 형제 라몬 마리아 안드레우 신부님에 관해서도 얘기하였다. 신부님은 불어, 독일어, 영어를 몇 마디씩 가르쳐 주었고 또 그리스어로 기도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복되신 동정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다음 날에도 우리가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인데, 두려워 말고 그 목소리를 따르라고 하셨다.
루이스 신부의 "목소리"와 나눈 대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1964년 11월 27일 콘치따가 라몬 안드레우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일은 이후에도 10번 내지 11번 더 있었다. 처음 몇 번은 라몬 신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첫번째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간략하게 기록된 콘치따의 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은 매우 좋은 정보를 제시하였다.
"...나는 실로 망연자실하였다. 내 앞에서 소녀들은 발현 때 들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내 형제의 죽음과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사제의 장례의식에 관해 세세한 사항까지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루이스 신부의 장례식때 고인에게 옷을 입히는 전통적인 관례에서 약간 예외가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내 형제의 머리에 성직자가 쓰는 사각모자를 씌우지 않았고 그의 두 손에 성작 대신 십자가를 쥐어 주었다. 소녀들은 이렇게 바꾼 이유까지도 알고 있었다."
라몬 신부는 루이스 신부가 소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콘치따가 말한 외국어에 대해서도 재미있고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아이들은 여러 번 외국어로 말하였다. 그들 중 한 명이 그리스어로 성모송을 바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전문을 인용하기 좋아하는 두 가지 인용문이 있는데 "1962년 6월"로 날짜가 적힌 콘치따의 편지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제가 루이스 신부님에게 얘기했던 두 가지를 신부님에게 말해야겠어요. 루이스 신부님은 제게 당신이 매우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이곳으로 오기를 원하겠지만 주교님께 계속 순종해야 한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실 주교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사제들이 가라반달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콘치따가 일기에서 "신부님은 형제 라몬 마리아 안드레우 신부님에 관해서도 얘기하였다"고 말했을 때도 이 점이 분명하게 시사되었다.)
두번째 인용문에서 콘치따는 루이스 신부가 그녀에게 소녀들의 이름을 불어로 쓴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가 불어로 된 다음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단언하였다.
희망, 희망, 별빛 밝은 하늘에,
우리 어머니 나타나시어 미소지으신다.
희망, 희망, 마리아께서 말씀하셨다.
당신 성자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이 시구들은 1871년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프랑스 퐁멩(뽕멩)지역의 시가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들은 가라반달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와 모든 마리아 발현의 의미를 전해 준다. 라몬 신부는 소녀들이 자기 형제 루이스 신부의 "목소리"와 주고 받은 또 하나의 대화를 기록하였다.
"언젠가 나는 소녀들이 탈혼상태 속에서 내 형제 루이스가 신심약속의 고백(수도허원에 관한)을 하지 않고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소녀들은 나와 나의 허원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서약을 한 정확한 날짜와 정확한 장소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시간에 허원한 예수회 신부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세세한 것까지 정확하게 얘기하는 것을 본 나의 놀라움을 여러분도 이해할 것이다. 소녀들이 여기에 관해 전혀 듣지 못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 이 모두가 진정 놀라운 일이라는 사실에는 의혹이 있을 수 없다. 또 나는 감히 말한다. 놀랍고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10월 18일의 일기에서 콘치따는 이렇게 말하였다.
"까예하의 우리가 꾸아드로라고 부르는 곳에 복되신 동정녀께서 나타나셔서 내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순간 라몬 마리아 안드레우 신부는 의심하고 있다." 내가 매우 놀라자 그분께서는 그가 의혹을 품기 시작한 장소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10시쯤 되어 사람들과 네 소녀들, 그리고 라몬 신부는 마을의 진흙 길을 지나 가파르고 미끄러운 돌로 뒤덮인 까예하를 따라서 350야드나 되는 먼 길을 걷기 시작해 소나무 숲으로 향한 험준하고 위험한 길을 올랐다.
목적지까지 반쯤 왔을 때 라몬 신부는 자신이 갑자기 몹시 고통스럽고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 영신적 위기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이상한 일을 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별탈없이 길을 반쯤 갔을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내적 고통이 일어났다. 굳이 표현하자면 어떤 고통스러운 압박과 우울한 감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무언가 삭막함을 느꼈다. 과거는 불투명해졌다. 선명하고 뚜렸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두어 달 전에 있었던 내 형제 루이스의 죽음 뿐이었다.
그런데 이 내적 고통스런 상태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내 생애에서 그와같은 정신적인 황폐함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이 네 아이들은 단지 병들었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 말하였다. "너는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이 모두가 낙후된 시골 사람들이 꾸며낸 서툰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알 수 있잖아!"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호기심 많은 눈을 들었다. 나는 "큰 기적"이 일어나 주기를 기대하였다. 소녀들은 오늘 10월 18일에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완전히 환멸을 느꼈다.
나는 걷다가 다시 얼마 동안 멈추었는데 그 시간은 기억할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군중, 소나무 숲을 향해 오르는 그들만을 느낄 수 있었다.
밤이었고 조용했는데, 나는 혼자였다, 혼자..."
"복되신 동정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어요. '그 신부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를 불러서 의심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또 여기 나타나는 것은 진정 나, 복된 동정녀라고 말해 주어라. 그러면 그는 믿을 것이다. 그에게 말하여라: '네가 올라오면 행복할 것이요, 네가 돌아 내려가면 슬픔에 잠길 것이다!'"
롤리가 말을 그쳤다.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가 덧붙였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콘치따에게 신부님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어요."
"콘치따가 미소지었다. "그런데 신부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녀가 다시 말하였다.
"네가 올라오면 행복할 것이요, 네가 돌아 내려가면 슬픔에 잠길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신부님이 생각하고 계신 것을 제게 모두 말씀해 주셨어요. 신부님이 그런 생각을 한 장소까지도요. 신부님은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제 중앙 아메리카로 돌아가야지.' 또 다른 장소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신부님은 많이 고통스러워 했지요.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이 말을 신부님에게 해 주라고 하셨고, 이제부터 신부님이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라고 하셨어요."
나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다음 날 콘치따는 갖가지 생각들이 내 마음을 엄습했던 정확한 장소들을 사진에서 지적해냈다.
라몬 신부를 인터뷰했던 G. 뒤 필리에는 그러면 콘치따가 지적해 낸 장소들이 모두 정확했느냐고 물었다.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했습니다'고 그는 대답하였다. 저날 저녁 콘치따가 내게 얘기한 것도 모두 그랬다. 특별히 나는 이 말을 기억한다. 성모님께서 내게 알려 주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제부터 신부님이 다시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반신반의와 의혹의 순간들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1961년 1월 18일과 19일 밤과 같은 밤은 없었다.
'가라반달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는 끝났고 이에 관련된 기록들도 완전히 배척당했다는 생각이 자주 떠올랐다. 이따금 권위있는 기관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내 개인적인 경험과 내가 목격했던 놀라운 사건들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대답하였다. '그런데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어...'"
1961년 11월 4일 토요일 - 성모님께서 소녀들에게 묵주기도와 참회를 하라고 명하시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롤리, 히야친따. 마리 크루즈 그리고 나 이렇게 넷에게 꾸아드로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명하셨다.
어떤 날은 6시에 갔고 어떤 날은 조금 늦게 갔다. 히야친따와 마리 크루즈는 아침 6시와 7시에 갔다. 롤리는 일정한 시간에 가지 않았다. 며칠 후 마리 크루즈는 일찍 일어날 수 없어서 8시에 갔다.
그렇지만 히야친따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계속 6시에 갔다.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갔다. 성주간 동안에 복되신 동정녀께서 내게 새벽 5시에 가라고 명하셔서 그렇게 하였다(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참회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꾸아드로에서 묵주기도를 하라는 성모님의 요청을 충실하게 따랐다. 성모님께서 이와같은 요청을 하신 지 두 달 후인 1962년 1월 11일에 쓴 편지에서 마리 크루즈는 호세 라몬 가르시아 데 라 리바 신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 저는 매일 아침 6시에 묵주기도를 바치러 갑니다. 성모님께서 제가 성모님을 다시 뵙기 시작할 1월 16일까지 매일 그 시간에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발췌:'가라반달의 성모발현'(콘치따의 일기), 요셉 펠레티에르 신부 / 백제랄드 신부 옮김, 아베마리아출판사)
https://youtu.be/dzaxUP7GZ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