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 위기의 UW 한국학과를 되살린 이익환 동문(문리대 ’58)
한인사회, 주 의회, 보잉사 등에서 $350만 달러 확보
이선명 재미서울대총동창회 회보 주필
미국에서의 한국학 태두 자리를 견지해 오던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UW)가 영국의 옥스포드 대, 프랑스의 파리 대 등과 더불어 한국학과의 폐쇄 위기에 처하자, 미 서북부 지역의 한인사회에서는 물론 미 주류 정계에까지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2년여에 걸쳐 혼신의 노력 끝에 총 350만 달러에 가까운 모금에 성공, 폐쇄 직전의 한국학과를 되살린 것은 물론 한국학 프로그램을 총괄 운영할 한국학센터까지 가동시킨 한 동문의 미담이 서울대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이 미담의 주인공인 이익환 동문은 문리대 정치학과 출신으로서 UW 한국학 살리기 캠페인 위원장을 맡아 지난 2년여 동안 한국 국제교류재단 기부금 100만달러, UW의 매칭펀드 90만 달러, 워싱턴 주의회 50만 달러, 항공기 제작 보잉사 30만 달러, 한인사회 모금 33만 달러 등, 총 350여 만 달러를 확보하여, 모금 목표액 200만 달러를 크게 초과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동문은 한인사회의 각계 각층이 한국학 살리기 운동의 후원자로 나서도록 동원하는데 걸출한 지도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한인사회의 조직과 그 역량을 기반으로 하여 미 주류 정계까지 움직이는 탁월한 지혜를 보여 만인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모금과정은 감동의 연속
특히 이 동문이 주도한 모금과정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먼저 이익환 동문이 관여하고 있는 무역회사 ‘아케이’ 사가 1만5천 달러를 쾌척 했고, 곧 이어 그는 2003년 서울을 방문, 외무통상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의 총재 이인호 대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그는 한국일보와 협력하여 한인사회에서 적극적이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자신이 UW 출신인 그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스는 “UW의 한국학과는 바로 우리의 자부심이다” 이었다.
먼저 스노호미 시 노인회가 “UW의 한국학 프로그램은 한인 손으로 존속시켜야 한다”며 노인단체로서는 거금인 1천3 달러를 모금했다. 에버우두 축구회도 1천 달러를, 워싱턴주 한인여성 부동산인협회는 ‘한국학 살리기 경매’를 벌여, 총 1만117 달러를 UW에 전달했다. 워싱턴주 서울대 동창회도 5백 달러를 기탁했고, 또 2005년에는 개업 1주년을 맞은 LA의 북창동 순부부도 하루 식당 수입에서 2천 달러를 보내왔다.
타코마 새생명교회는 “사회참여가 곧 선교”라며 1만 달러를, 한인학교 협의회가 3천 달러를 모금하는 등 모금 과정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 동문은 워싱턴주 프랭크 찹 하원의장을 설득 50만 달러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했고, 뒤이어 보잉사 등에서 거금이 들어와, 결국 총 모금액이 당초의 목표액을 크게 넘어서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무역업으로 입신한 지성인
이익환은 1958년 문리대에 입학, 정치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의 기자로 잠시 활동하다가 한일국교 정상화가 되던 1965년 도미,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하와이에서 약 2년간 머문 그는 1967년 본격적인 학업을 위해 워싱턴 주 시애틀로 이주하여 워싱턴주립대학(UW)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시애틀에는 한인들의 수가 100 명이 채 안 될 때였다. 그는 여러 유여곡절로 대망의 박사학위를 따지 못한 채 1980년 귀국하여 가업을 도우면서 약 2 년간 서울 생활을 했다. 한국어가 서툰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도미하여 시애틀에서 무역업을 시작한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이 노동집약적인 소비재 제품생산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어서 사업이 잘 됐다. 초기에는 배낭, 의류 등을 수입했고, 그 후로 운동화 등도 수입하고 어물을 수출했다. 한국의 노동집약적 제품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생산업자들이 스리랑카, 멕시코 등지로 공장을 이주하는 바람에 그는 공급선을 따라 이들의 제품을 계속 수입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화 정책이 심화되면서 제조업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밀착되고 중계상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어 일반 소비재 무역은 어렵게 되었다. 알래스카 지역에서 수입하는 어물 비즈니스는 든든한 파트너가 있어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나 이제는 거의 리타이어 한 상태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익환 동문이 다니던 워싱턴 주립대학은 조선이 일제치하에 있던 1943년 한국어과를 신설, 미국의 유수한 대학 중에서도 한국학을 가장 먼저 시작한 대학이었다. 시애틀은 해상 루트로 극동지역과 미국 사이의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옛날 인삼 상인들이 가장 빈번하게 찾던 지역이기도 해서 미국의 아시아 시장 창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대학은 자연히 극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그래서 1909년 워싱턴주립대학은 중국어과를 신설했고 몇 년 후에는 일본어과를 개설하여 미국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학구면에서 뒷바침하는 Oriental Studies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3년 워싱턴주립대학이 한국어과를 개설한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 같다. 이 학과에서 정보장교 등을 트레이닝, 한국에 파견했다.
그 후 서부 지역 몬터레이에 군사외국어 학교가 개설되었다. 얼마 후 동부의 하바드 대에서 Edward Wagner 등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가르치던 서두수 교수가 50년 중반 UW로 와서 활동하면서 UW가 본격적인 한국학의 본산이 되었다. 서두수 교수는 연희전문에서 가르쳤고 후에 학장까지 한 분이다. 그리고 U-Penn에서 놈 촘스키 교수와 함께 한국학을 전공한 Fred Lukoff 언어학 교수가 1950년 초 UW로 옮겨 왔고, 또 서울대의 고병익 교수(후에 총장을 지냈음)가 교환교수로 와서 2, 3년 간 한국어를 교수했다. Fred Lukoff 교수의 부인이 한국여성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 UW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던 James Palais 가 1967년 서울에 와서 규장각에서 한국 역사,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 등 조선 근세사를 전공해서 미국의 한국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고, 그의 후학들인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카밍스 등이 70년 대에 UW에 와서 공부했다.
워싱턴 주립대학은 8만권의 한국관계 장서를 가지고 있어, 미국 국회도서관과 하바드 대 도서관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한국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와선 짐 팔레 등 진보적인 학자들이 포진한 서부의 UW의 한국학과는 동부의 하바드와 콜럼비아 대와 어깨를 나란히 한국학 연구에 앞장섰다.
그러나 199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소위 닷컴 버블에 김이 빠져 워싱턴 주의 세수가 크게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9.11이 터져 경제적 타격을 입자 워싱턴주립대학의 예산은 크게 줄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한국학 교수인 짐 팔레이 교수가 정년은퇴 하면서, 40여 개의 교수 자리를 채우지 못 하고 있던 UW의 한국학과가 폐지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UW는 미국의 한국학 태두
이익환 동문은 UW의 한국학 살리기 캠페인에 대한 요지를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UW이 가진 한국학 연구의 오랜 역사와 높은 수준 때문이지요” 라고 설명했다.
극동과 근접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이 대학은 1900년대 초부터 중국과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고, 1943년에는 한국어를 정식으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 후 UW의 한국학을 꾸준히 성장하여, 문화, 역사, 정치, 경제 등 여러 전문 분야로 확장되어 1970-80년 대에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학 요람의 하나로 발전했다.
한국학 중에서도 특히 한국 역사는 이 대학에서 30여 년간 재직하다 2년 전 은퇴한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교수 덕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재 하버드, 인디애나, UCLA, UBC (캐나다) 등 명문 대학에서 한국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들이 거의 대부분 UW 프로그램을 거쳐간 팔레 교수의 제자들이다.
“이런 훌륭한 자산을 가진 대학을 우리 곁에 두고 있다는 게 우리에겐 큰 행운이지요. 우리가 2세들을 키워 진학시킬 대표적인 대학인데, 한국학의 폐쇄란 있을 수 없어요.” 그의 입장을 단호했다.
“코리언 아메리칸의 영원한 스승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래 전 우리 동포들에게 ‘주인의식’을 갖도록 당부했습니다. 농장에서 품팔이로 오렌지를 딸 때도, 미국인 가정에서 청소를 할 때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생각해서 성심껏 일 하라고 강조했고, 또 선생은 스스로 솔선수범 했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같은 논리로 지금 UW의 한국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남의 일, 주류 사회의 일로만 치부하지 말고, 나의 일, 우리 사회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도산 선생이 말씀하신 ‘주인의식’의 실천으로 이어지겠지요.”
이 동문은 “이것은 우리가 후세에 남기는 하나의 문화적, 제도적 유산이 될 것이며, 여기에 우리의 자부심이 있다”고 역설했다.
미주의 많은 동문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고국의 많은 동문들도 우리의 자랑 이익환 동문에게 뜨거운 성원과 후원을 보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익환 동문의 연락처: 206-729-6107
첫댓글 UW란 University of Washington 을 말씀 하시는겁니까? 주필님? 이익환 동문님도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한번 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회장, 맞아요. University of Washington은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 주에 있는 명문 대학입니다. 이익환 선배님은 역사학회에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지요. 저의 글 끝에 그 선배님의 전화번호가 있으니 곧 전화로 인사를 드리세요. 무척 반가워 하실 겁니다.
오랜만에 들은 이익환동문의 소식 정말 감격하고 반가웠습니다. 대단한 일을 해 내셨군요. 우리가 기대한 이익환 동문의 역량이 나타나는군요. 부인 박귀희(농화학과 59학번) 동문에게도 축하드립니다. 귀희야! 너 가끔씩 이 카페에 들어와 보니? 하여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