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만나는 이삼 스님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학교문화예술대학원 교수)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이삼 스님이 왼쪽 팔과 왼손만으로 대금 연주하는 것이 TV로
소개되어 스님을 아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두 손으로 대금 구멍 막는 것도 어렵다고 하는데 이삼 스님은 한쪽만 가지고 산조대금보다 더 큰
정악대금을 멋지게 연주하고 있으니 정말 초인적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잠깐, 실제로 대금을 불어본 사람은 이말을 이해하실 것이다.
대금은 자세잡는 것에서부터 구멍을 완벽히 막고 자유자재로 연주하기 까지
때로는 팔이 잘려나가는 고통이 동반되는 수가 있다.)

(EMBED
이삼 스님을 만나 본 사람이나 그의 연주를 들어 본 사람들은 대개 그가 보통을 훨씬 넘는
비범한 사람임을 느낀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지금도 물건을 옮긴다거나 가야금이나 거문고
같은 악기를 만드는 것을 보면 우선 힘이 장사고 집중력과 추진력이 대단하다.
그는 쉬지 않고 대금을 불고 꾸준히 악기를 만든다.
음악에 쏟는 정력과 시간이 엄청나다.
어떻게 보면 음악 행위 그 자체가 이삼 스님에게는 수행의 한 부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삼 스님은 옛날 지식인들이 수양의 음악으로 하던 정악을 한다.
(수행의 방식은 간화선의 화두잡기, 호흡에 몰입하는 비파사나, 소리에 몰입하는
음적행........등 수백, 수천가지가 있다.)

요즘 국악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산조나 시나위는 하지 않는다.
신나는 음악보다는 마음을 다스리고 정서를 도야할 수 있는 음악을 한다.
옛날 같으면 선비 계층에서 선호하던 음악이 정악이었다.
욕심이라든지 사특한 마음을 없애고 정대한 자기 본성의 선한 마음을 도야하기 위해 하는 음악이
정악이다. 그래서 정악은 ‘바른 음악‘이고 ‘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음악’이다.
정악을 하면 ‘바른 마음‘이 도야되고 ‘바른 마음’의 상태에서 표현하면 정악이 된다.
때문에 정악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바른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며 발달시킨
음악이다. 하여 이삼 스님의 대금정악은 전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의 스승 녹성이 불었던
그 가락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녹성 김성진은 20세기 후반 한국 대금정악의 최고봉이었고 인간문화재였다.
꽤 여러 명의 제자를 가르쳤지만 대부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학생들이었지 외부 인사나
스님 같은 신분의 제자는 거의 없었다. 이삼 스님이야말로 특별하게 녹성의 제자가 되었고 또 녹성이
아주 정성껏 가르쳐 준 애제자가 되었다. 인연을 중시하는 불가에서 볼 때 이삼 스님과 녹성과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다.
불교로 해탈하고자 불도에 귀의한 이삼 스님이 염불이나 참선 못지않게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
대금정악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삼 스님은 본명이 이영래이고 1949년생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기타와 피아노, 색소폰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런 사람이 20세 되던 1969년 수원 용주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다음 은사인 각성 스님을 따라 봉원사로 와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것이다.
1975년 국립국악원에 거문고를 배우려고 갔었는데 사정상 배우지 못하고 비용을 적게 들이고
배울 수 있는 단소를 배우기 시작했다. 단소를 조금 배운 다음 78년 대금을 배우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녹성 김성진 명인에게 배우게 되어 정말 알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녹성은 외부 사람을 거의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악사 연습실에서 배우기도 하고, 가야금 하는 황병주 연구실을 빌려서 배우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78년부터 93년까지 근 15년을 그렇게 알뜰히 배워 대금정악의 레퍼토리 거의 전부를
3차례쯤 배웠다. 녹성 선생은 이삼 스님에게 취법이나 프레이징 방법까지 세밀히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이삼 스님은 음악의 속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까지 지도 받았다.
술을 좋아하셨던 녹성 선생은 자주 제자와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제자 또한 그런 스승을 위해 늘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었었다.
함께 여행을 하며 가르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도 음악을 얘기해 주기도 했으니 얼마나 지성으로
가르쳤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삼 스님도 그런 스승의 사랑과 가르침 때문에 89년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는데도 대금을 놓지 않고 계속 불고 있다.
스승이 가시고 난 지금 스승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스승이 남겨주신 대금정악을 계속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스승이 가르쳐 준 대금정악의
악보를 일일이 필기하여 정간보로 출판했다.
“녹성 성진의 진짜음악이 이것이다” 하고 실제 연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삼 스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운 것을 계속 연습하며 녹음 준비를 하고 있다.
이삼 스님은 악기 만드는 기술 또한 대단하다.
80년부터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김기수 같은 대가에게 대금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황병주에게 가야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가졌던 독주회에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크게 감동을 받고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아하 이삼 스님은 음악으로 포교 하는구나”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부디 건강하여 스승의 대금정악은 물론 좋은 악기, 좋은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기를 바란다.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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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정악[大?正樂]
정악으로 연주하는 대금곡의 총칭.
지정번호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지정연도 1968년 12월 21일
기능보유자 서울 김성진

1968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는 서울 김성진(金星振:1916∼)이다.
정악이란 내용과 형식이 고상하고 우아하여 속되지 않은 음악이라는 뜻으로, 좁게는
《여민락(與民樂)》 《영산회상(靈山會相)》을 가리키나 넓게는 아악(雅樂) 전반을 말한다.
대금정악은 정악을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악대금으로 연주한다. 대금정악을 위한 곡으로는
독주곡과 다른 악기와의 협주를 위한 합주곡이 있는데, 독주곡에는 《청성자진한잎》
《평조회상(平調會相)》이 알려져 있고, 합주곡으로는 《현악영산회상》 《경풍년(慶豊年)》
《수룡음(水龍吟)》 《염양춘(艶陽春)》 《삼현영산회상(三絃靈山會相)》 《수제천(壽齊天)》
《동동(動動)》 등이 알려졌다.
대금정악 (大금正樂)
발행언어 한글 발행국가 한국
문서유형 문화예술자료
종목 : 중요무형문화재 20호
분류 : 음악
소재지 : 서울전역
정악(正樂)이란 궁정이나 관아 및 풍류방(각 지방의 풍류객들이 모여서 음악을 즐기던 장소)에서
연주하던 음악으로, 우아하고 바른 음악이란 뜻이다.
대금정악은 정악을 대금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금은 신라 삼죽의 하나로, 삼죽(三竹)이란 대금, 중금, 소금을 말하며, 이름 그대로 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 중에서 가장 긴 것으로 ‘저’ 또는 ‘젓대’라고도 한다.
쌍골죽(雙骨竹)이라는 속이 찬 대나무 밑둥으로 만드는데, 왼쪽은 막혀 있고, 위 첫마디에 입김을
불어넣는 구멍이 있다. 그 조금 아래에는 갈대 속으로 만든 얇은 청을 대는 청구멍이 있고 다시
그 아래로 구멍이 여섯 개 뚫려 있다.
주법을 보면 은은한 소리가 나게 낮게 부는 저취(低吹)와 청아한 소리가 나게 세게 부는
역취(力吹)가 있다. 다른 악기에 비해 음량이 풍부하고 음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서 국악기
중에서 대표적인 독주악기로 자주 쓰인다.
대금정악은 궁정음악 계통인 아악곡(나라의 의식 등에서 정식으로 쓰던 음악)의 전부를 다루고
있지만 모두 합주음악에 속하며, 본래부터 독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독주로 연주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곡목으로는 청성자진한잎, 평조회상, 자진한잎 등이 있다.
대금정악은 영롱하나 가볍지 않고 부드러우나 유약하지 않으며, 섬세하나 천박하지 않은 오묘한
맛의 가락을 지닌 전통음악으로, 그 가치가 크며 예능보유자로는 김응서가 인정되었다.

-김응서선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