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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2.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4.2.5. 골드 해변의 영국군
오마하 해변에서의 참혹한 전투에 가려 별달리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역시 꽤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영국군은 골드 해변을 킹, 지그, 아이템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기상 때문에 전차를 바로 상륙시키지 못하여 초반에는 독일군의 반격에 꽤나 고전하였다. 그러나 코만도 부대의 활약 및 전차들의 상륙에 힘입어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15분 만에 주노 해변을 확보한 캐나다군이 곧장 우회하여 달려와 독일군을 소탕해 준 덕분에 오히려 한 시간 일찍 상륙한 옆 해변의 미군보다 더 빨리 주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골드 해변에서의 영국군은 약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은 359명의 전사자와 574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고작 200여 명의 사상자만이 나온 것을 보면 오마하 해변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미 1군이 오마하 해변에서만 기록한 사상자 수가 4천 여명이고, 다른 해변의 사상자 수를 모두 합해 보았자 2천 명이 조금 넘을 정도다.
4.2.6.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미군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지 불과 15분(!)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여 해변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회기동하여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이나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위에 서술한대로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었고, 이는 오마하 해변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 수인걸 감안하면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의 방어가 운 좋게 허술해서 15분만에 장악한게 아니라 적의 거센 저항을 제때 지원된 중장비들과 캐나다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뚫어낸 거라고 봐야할 것이다.
상륙작전 성공 후 3일 뒤인 6월 9일에는 '멀베리(Mulberry)'라는 이름의 조립식 인공항구가 노르망디 앞바다에 가설된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륙 이후 군수물자를 공급할 항구를 얼마나 빨리 점령하느냐였다. 노르망디 해안에 직접 선박을 정박시키고 물자를 하역하는 작업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더군다나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한 만큼 악천후로 물자 상륙이 중단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노르망디 인근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는 안을 채택할 경우 엄중한 독일군의 방어를 격파하고 기뢰를 제거해 안전을 확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상륙작전 이후 유럽본토 내부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진공을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이 필수였다. 결국 연합군 수뇌부는 여러가지 변수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노르망디에 인공항구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42년 초 처칠은 연합작전본부장인 해군원수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 즉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부두시설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가능성 여부를 두고 논쟁하지 말고 어려움은 스스로 풀어나가라"고 하면서 부두 개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명령을 받은 마운트배튼 중장과 예하 참모진은 그런 시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만 1년 이상을 보냈다. 당시 마운트배튼 제독의 참모였던 존 휴즈-할렛 해군대령이 노르망디 해안 밖에 블록십(blockship, 항구 등을 막기 위해 침몰시키는 폐색선)들을 이용해 인공항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인공항 건설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12척의 낡은 수송선을 썰물 때 해변에서 가까운 4.5m 깊이의 바다에 일렬로 가라앉혀 1.5㎞에 이르는 방파제를 만들었다. 또 암호명 '피닉스'로 명명된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썰물 때 바다에 빠트려 방파제를 조성했고, 암호명 '봄바르돈'인 물에 뜨는 방파제를 항구의 또 다른 보호막으로 삼았다.
상륙직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2개의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오마하 해변에는 미군이 건설한 멀베리 A, 그리고 골든 해변에는 영국군이 건설한 멀베리 B를 각각 미국과 영국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웨일'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25톤 중량의 잔교들을 배열해 잔교마다 한 척의 전차상륙함을 접안시키거나 40톤짜리 처칠 전차를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멀베리 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된 후 6월 9일 건설되었는데, 2주도 안지난 6월 19일에 노르망디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멀베리 A가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멀베리 B는 살아남아서 약 6달뒤 안트베르펀 항구를 점령할 때까지 연합군의 거의 유일한 항구였고, 안트베르펀 점령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개월 동안 약 250만명의 장병과 50만 대의 차량, 400만톤의 물자를 하역시킴으로써 연합군 승리의 초석을 마련한다.
일단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상륙작전의 초기목표인 셰르부르 항구로 미군이, 영국군은 노르망디의 중심도시인 캉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지휘를 육군 B집단군사령관 롬멜과 서부방면사령관 육군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사람이 함께 맡고 있었고, 이 두 사람의 지휘권까지 동급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논쟁으로 기갑부대의 즉각적인 투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어 독일군의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D-데이 오후까지도 OKW는 상륙지점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상륙 작전 얼마 전에 각종 통신 장비와 철로를 파괴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들은 가차없이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는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독일군이 첫 반격에 나선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세밀하게 계획되지 않은 명령, 실타래처럼 엉킨 지휘권으로 인해 휘하사단들은 자기가 B집단군인지, 서부방면군인지 소속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당연히 명령권자가 없으니 사단들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D-데이 첫날 반격에 나선 부대는 캉으로 출동한 육군 제21기갑사단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격도 단 하루만에 보유전차 146대가 76대로 줄어드는 막심한 피해를 보곤 캉에 틀어박혀야 했다.
D-Day+1일 서부전선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무장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가 캉으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D-Day+2일 캉 주변지인 바이외가 영국군에 함락되면서 캉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한편, D-데이 당일 서부전선 최강의 부대였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이 노르망디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무려 160㎞ 밖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교도사단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벌벌 떨면서 야밤에 전차가 자력주행으로 노르망디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 병력은 내륙에 밀려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도 그쪽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분전도 있었다. 6월 13일 캉으로 가는 시골마을 빌레르보카쥬를 통과하던 영국 육군 제7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쥬 전투에서 미하엘 비트만 SS기갑중위가 이끄는 101전차대대 소속의 전차 9대에게 기습을 받아 28대의 전차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연합군의 캉 진격은 또다시 늦춰지게 되었다.
한편 D-Day 당일 및 그 이후 상륙 교두보가 만들어질 당시, 교두보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격은 거의 없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논쟁 작전 등을 통해 독일 공군의 항공기 생산력은 크게 떨어진데다 연합군 공군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독일 공군은 교두보 공격은 커녕 당장 서부전선에 배치된 항공기 및 기지의 방어에도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사례로 D-Day 당일, 단 2대의 FW-190이 기총 소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FW-190 중 1대를 조종한 사람이 독일 공군의 에이스인 요제프 프릴러 소령이었다. 노르망디 상공을 꽉 채운 연합군 항공기들을 피해서 살아 돌아온 건 프릴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천운에 가까웠고, 그 천운 덕인지 프뢸러 소령은 종전시까지 살아남았다. 프릴러 외에도 제10 고속폭격비행단 등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프릴러의 예와 마찬가지로 거의 의미없는 출격이었다.
4.3.3. 연합군의 진격
그리고 상륙작전시에는 고려하지 못한 노르망디 특유의 지형이 연합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당장 연합군은 시가지도 아닌 곳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보카주라고 불리는 1m에서 4m 정도의 키작은 과일나무가 밀집한 벽으로 가득한 노르망디의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이 이곳저곳에 저격수나 대전차포를 매복시켜 뒀다가 한두발 쏘고 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압도적인 공군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6월 22일 미 육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고 사령관인 육군중장 카를-빌헬름 폰 쉴리펜(Karl-Wilhelm von Schlieben) 장군과 해군소장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 제독이 항복하면서, 30일에는 완전히 셰르부르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 전에 헤네케 제독의 명령에 따라 해군 폭파반들이 항구를 개박살내놓아서 항구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6월 25일부터는 캉을 노리는 영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중간에 독일군이 히틀러의 재촉에 못이겨 반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영국 육군 대신 해군의 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을 신나게 맞고 후퇴해야 했다. 덤으로 방어태세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간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헛소리만 듣고 왔고, 룬트슈테트는 서부방면군 사령관에서 짤렸다(…).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 공군은 5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아예 캉을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며, 결국 폭격을 참지 못하고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캉을 버리고 튀었고, 캉은 영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생로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 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타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연합군은 심하면 몇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쏟아내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도 계속 증원돼서 노르망디 교두보를 완전포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연합군은 슬슬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입안된 것이 '굿우드 작전'이었다. 영국군이 캉 인근의 독일군 부대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에 미군이 생로 남쪽으로 진격해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동원된 병력도 무려 3개 완편 기갑사단에 첫날 4,500대의 항공기가 8천톤에 달하는 폭탄을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7월 18일 영국군이 굿우드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군의 조급증이 병크를 불러왔다. 딱 3km짜리 진격로에 3개 사단이나 병력을 밀어넣은 탓에 교통정체가 발생해 진격로가 꽉 막혀버렸고, 폭격에서 살아남은 독일군이 대전차포의 파도로 정면의 영국군을 물고 늘어지자 진격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런 상황은 20일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20일 폭우가 쏟아져 진격로가 진창이 되면서 딱 3일만에 작전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동안 영국군은 300~500대의 전차와 4,000여명의 병력을 잃는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은 1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굿우드 작전은 독일군을 영국군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미군 관할구역의 방어력이 떨어지게 된다. 결국 미군은 최소한 2대 1의 우세를 코브라 작전에서 누릴 수 있었다.
4.3.5. 독일군의 퇴각
7월 24일, 굿우드 작전 다음에 개시될 예정이었던 미군의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하필 작전 개시일에 짙은 구름이 껴 오폭의 위험이 있다고 여긴 리 말로리 장군이 공군의 폭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일부 폭격기가 그대로 폭격을 가해서 레슬리 맥네어 장군 같은 일부 오폭사상자가 나왔다. 육군 쪽에서도 폭격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나와서 소규모의 혼란스러운 공격을 하다가 소득 없이 물러나기도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신병기인 M4A1(76)셔먼을 첫 투입 하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히려 독일군 쪽에서 발생했다. 당시까지 부대건제를 유지하고 있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은 이 실수가 작전개시 신호인 줄 착각했고, 폭격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피해가 경미한데다가 이어진 육군의 공격 역시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전차들이 기어나와 공격개시선에 늘어선 7월 25일, 진짜 폭격이 개시되면서 기갑교도사단은 90%나 되는 병력이 싸그리 녹아내렸다…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90년대 이후 당시 문서를 검토한 결과 8월 1일 기갑교도사단에는 수리중인 것을 포함해 67대의 전차와, 적어도 10대의 돌격포가 있었다. 기동가능한 전차 수량도 7월 23일 31대에서 8월 1일에는 27대로 단 4대 줄었을 뿐이다. 어쨌든 미 육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교두보 돌파에 성공한다.
결국 패잔병들만 남은 독일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노르망디 지역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 및 오히려 반격을 통해 돌파한 미군을 차단하고 다시 연합군을 노르망디 교두보에 묶으라는 현실성 없는 명령을 내려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구제불능
5. 결과
연합군은 노르망디 지역에서 무려 두 달을 묶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달간의 혈전 끝에 서부전선 독일군의 정예병력이 녹아버림과 동시에 전투경험이 전무하던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미 육군, 공수부대, 캐나다군을 비롯한 영연방군, 자유 프랑스군 장병들이 정예병으로 거듭났으며, 히틀러의 사수명령으로 인해 현지에 묶인 서부전선의 독일군 잔존전력을 팔레즈에 몰아넣어 섬멸하였다. 이를 팔레즈 포켓이라고 부른다. 이후 프랑스 해방까지 독일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패주를 거듭하게 되었다. 하지만 드라군 작전으로 남부 프랑스에서도 전선이 열렸음을 감안할 때, 각개격파당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후퇴를 감행해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게 나음을 알고 후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1944년 8월에 안트베르펜과 로렌 인근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발터 모델 장군의 완강한 방어로 인해, 아르덴에서 독일군이 서부전선 주력을 날려먹을 때까지 서부방벽에서 고전했다.
6. IF 시나리오
일단 노르망디 상륙은 실패할 수 있었을까라고들 흔히 생각하는데 실제로 실패할 뻔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만약 독일이 연합군의 기만전술에 속지 않았더라면, 채널 제도를 요새화하는 대신 해안선의 방어를 굳히는데 총력을 기울였다면, 또는 독일군의 방어 시설이 일찍 완공되었더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디데이에 독일군이 제대로 반격을 감행했다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고.
진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어떠했을까?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가정 - 1945년 8월에 독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독일이 항복, 소련군이 서진을 계속해서 프랑스까지 먹는다.
반론 - 당시 소련군의 역량 및 보급문제까지 감안하면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설령 베를린을 점령하고 그대로 서진을 한다치더라도, 아직 프랑스와 서부지역 주둔 독일군 등 방해요소까지 다분한데다가, 미영프 지도자들이 이런 소련군의 서진을 그대로 묵인했을리가. 트루먼의 경고에 홋카이도 침공을 취소한 그 스탈린이다. 무엇보다도 종전 당시까지 소련군을 피해 미군에게 항복하려고 처절한 전투를 치뤘던 독일군인데, 차라리 동쪽으론 소련군을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자발적으로 영국과 미국에게 문을 열고 투항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덴마크와 스위스 국경까지가 동독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있지만 그보다 원폭 맞은 뒤에 소련군을 막으면서 연합군에게는 항복해서 이들이 무혈입성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Greenhill's Alternate Decisions - 노르망디에서 대패한 후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루스벨트도 재선에서 떨어지는 등 연합군 수뇌부가 대거 교체되고 더불어 언합국 군민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상륙을 막은 독일로선 귀중한 시간과 더불어 서부전선에서 소모되었을 병력들을 고스란히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됨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늦추는데 성공했었을테고 더불어 종전 당시까지도 독일이 계획 중이던 로켓 기술 등을 실용화시켜서 전선에 배치, 영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히고 소련과의 강화를 물색했을 것이다.
반론 - 위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에겐 핵이 있다. 소련도 더 큰 희생을 치룰지언정 독일과 강화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르망디 상륙이 실패하더라도 기간이 최대 2, 3년 미루어질지언정 독일은 끝내 패전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 기간동안 연합군에게 조금 더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뿐. 실제 역사와 동일하게 독일 공군의 등뼈가 부러지고 나면 결국은 대도시가 하나씩 지워지다가 베를린에 핵이 떨어질 뿐이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 - 위에서 나온 것처럼 연합군에게 적잖은 타격을 주고 전쟁을 더 오래 끄는 만큼 연구 중이던 무기들도 전선에 배치하여 영미로 하여금 피를 더 쏟게 했겠지만 사실상 원폭 투하 후 항복하지 않은 일본과 진행될 몰락 작전이 유럽에서 비슷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총도 없어서 죽창이나 활 따위로 무장한 일본과는 달리 그 독일이니 시간은 더 끌었을테고, 실제 미 수뇌부의 계획으론 몰락 작전이 1945년 11월에 진행되어 최소 1947년에 마무리지을 예정이었으니 독일의 경우 못해도 1948년에는 끝났을 것이다.
당신들의 조국의 영화판에선 상륙이 실패하여 병력을 말아먹은 뒤 아이젠하워와 처칠이 실각해 독일이 영국군과 평화조약을 맺고 소련군을 막아낸 것으로 나온다. 물론 이게 가장 실현 가능성이 없다.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된 시점에서는 이미 전세가 완전히 연합국 측에 기울었기 때문에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같이 독일이 연합국을 쌈싸먹을 수준의 엄청난 기술력을 얻지않는한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연합군을 독일 내륙에 들어오는걸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독일에게 가장 좋은 희망은 아예 노르망디 상륙 작전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였다.
7. 기타
• D-Day의 어원은 departed, decision, 여러가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고, 1944년 6월에 침공을 하려는 중, 6월의 기상상황이 좋지 않아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당시 종군기자의 말에 의하면 (정해지지 않은)Day-(정해진 침공날짜)Day가 합쳐져 D-Day가 된 것이다. 관련 서적만 읽어봐도 결행이니 결정이니 뭐니 하는거 증언해준 영국, 프랑스, 캐나다 병사들부터 지휘관 입에서도 그런 말은 안 나온다. Day-Day가 맞는 표현이다. 같은 의미로 날짜가 아닌 특정 일의 개시 예정 시각은 시각을 뜻하는 Hour에서 따와 H-Hour라고 한다.
• 1962년작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은 180분의 상영시간에 D-DAY 당일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고전 걸작이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유일하게 격전이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처절할 정도로 실감나게 연출해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히트를 친 이후로 배틀필드 1942, 메달 오브 아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등 2차 대전을 다룬 게임에서는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화에도 이지 중대의 첫 전투로 등장한다. 이쪽은 공수부대를 초점으로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강하작전을 묘사하고 있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마켓 가든 작전을 제외한 5개의 캠페인은 모두 노르망디 상륙부터 팔레즈 포켓까지의 시점을 다룬다. 문서 참조.
•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인의 사진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직전인 1944년 5월에 발생한 에피소드. 영국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에 십자말풀이 문제가 올라왔는데 여기에는 '유타', '오마하', '오버로드'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상륙작전 및 주요 상륙지 등의 암호명이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고 문제의 출제자인 학교 교사 레너드 다우와 신문 편집담당자를 MI5가 잡아가 코에 감자튀김을 넣었지만, 결과는 무혐의였다. 기밀 유출과는 무관한 우연의 일치였던 것. 이 부분은 2015년 6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2007년 3명만으로 오마하 비치를 재현한 용자들이 화제가 되었다. CG의 힘은 위대했다. 정확히는 BBC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타임워치》(Timewatch) 시리즈 제작진의 용자짓.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집편 〈피의 오마하〉 촬영 때의 일이다. 이 때 해설자는 탑기어 호스트인 리처드 해먼드.
•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계획되기 전에는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이 될 것이란 걸 예측했다고 한다(!). 물론 옛날에도 노르망디는 영국군의 주요 상륙지였다. 하지만 노르망디가 칼레보다 전략적으로 떨어지는 위치였던 데다 히틀러는 전략 전술과 관련된 군 관련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그럴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히틀러 자신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2011년 11월 29일 이란 시위대가 영국 대사관을 습격했을 때 영국 대사관은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8세의 유화 초상화 같은 역사적 유물이 파손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문서가 도난당했다. 이 문서의 도난에 대해 영국 외교관들은 "혁명수비대의 번역사들이 충분히 오랜 시간을 들여 이것이 70년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침공 작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고 다른 이들은 혁명수비대가 이 문서들과 다른 문서들로 인해 혼란을 겪길 원한다고 대꾸했다(…).
• 20세기 최고의 사진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정에 직접 타서 다른 현역 병사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마하 해변의 지옥도를 생생히 촬영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촬영 이후 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과정에서 기술자가 실수로 온도를 너무 높게 맞추는 바람에 대부분의 필름이 녹아 버렸고, 남아 있는 사진은 10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파의 이 사진들은 오마하 해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종군기자로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하였는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골 때리게 만드는 일화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되기 전 5월 25일 런던에서 등화관제 도중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아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나흘 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병원을 몰래 빠져나온다. 그 후 작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을 동행취제하면서 그가 소속되어있는 소대가 가장 먼저 노르망디 땅을 밟아야 한다고 부추겨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종군기자는 총을 휴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전 당시 총을 들고 독일군 몇몇을 직접 사살하기도. 그 이후로도 건물 안에서 포격을 당하는 와중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하는데, 헤밍웨이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포격을 당하는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등, 무모하고 객기어린 행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 현충일 기념 배너에 국군 철모 대신 독일군 철모 짤을 넣은 것이 넷 상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66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오마하에 상륙한 보병, 유타 해안에 상륙한 보병, 그리고 해변 방어에 참전한 독일군 생존자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방송 후반에 이셋이 만나자 우리가 그날 같은곳에 있었다는 것에 놀랬다고 한다.
• 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나치가 시대를 벗어나는 오버 테크놀러지로 무장하고 있기에 반대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도 연합군 측에서 156,000명이 전사한 반면 독일군 측에서는 겨우 89명만 전사하는 참패로! 이 사상자수 때문에 이 세계관에선 D-day에서 D가 dead를 뜻하며 이후 독일은 1946년 3월 15일 이 전승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투입된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해 파리에 건립함으로써 당시 아직 남아 있었던 연합군에게 빅엿을 선사한다. 소련도 독일의 오버 테크놀로지 덕분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한 탓인지 바그라티온 작전은 딱히 언급이 안 되었다. 물론 9개월 뒤 모스크바 함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