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수 김용임의 감칠맛 나는 노래로 더욱 유명해진 목계나루는 충주의 관문이자 경상‧강원‧충청‧경기‧한양을 연결하는 남한강 물류의 중심지였다. 경상도에서 어떻게 남한강을 이용했을까 싶겠지만,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조선조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죽령‧하늘재‧새재를 넘어서 한양까지 가자면 육로보다는 남한강 뱃길을 더 많이 이용했다. 낙동강으로 내려가서 남해와 서해를 돌아 한강을 거슬러오는 뱃길도 있었지만 멀고 거칠어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다. 목계나루는 1928년 조치원-충주 간에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했다.
유홍준은 목계나루를 ‘조선의 5대 나루’라고 소개해놓고는 나머지 4개 나루를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만사휴의(萬事休矣). 기를 쓰고 관계 자료를 찾아본 건 행여 삼강나루도 ‘조선의 5대 나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더니, 나이가 들수록 고향과 고향 친구들 그리는 마음이 시나브로 깊어만 간다. 대구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려 몇몇 친구들을 만나도,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향수와 함께 진정성이 가득 배어 있어 좋다.
목계나루 건너편에 있던 가흥창은 목계나루와 병행하여 발달한 남한강 최대의 물류창고였다. 가흥창은 춘천 소양강창, 원주 흥원창과 함께 조선시대 한강의 3대 조창(組倉)이었다. 전국의 조창에서 올라온 물류는 모두 한양 양화나루의 광흥창에 집결되었다가 왕실을 비롯하여 필요한 곳으로 옮겨졌다. 서울지하철 6호선 대흥역과 상수역 사이에 있는 광흥창역은 옛 광흥창에서 역 이름을 따왔다.
<이 글과 아무 상관없지만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 올린다>
가흥창을 비롯한 전국의 조창에는 판관(종5품)이 배치되어 관리했으며, 봄‧가을 두 차례 조정에서 감창사(정‧종6품)를 파견하여 부정행위를 감사했다. 그러나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느냐며 큰소리칠 수 있는 부류가 바로 난봉꾼과 세리(稅吏) 아니던가? 오늘날에도 국세청 공무원들이 수십 년째 부패지수 1위를 고수해오고 있듯이, 조선도 조운(漕運) 관계자들의 부패가 가장 자심했던 모양이다. 정약용 선생은 공복들의 도리를 논한 「策問」에서 조운책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통탄했다. 「策問」은 오늘날에도 훌륭한 법관들이 판결의 잣대로 삼는 전적 가운데 하나다.
‘호조의 세입 가운데 제대로 도착하는 것이 열에 네댓이요, 제때 도착하는 것이 열에 서넛이다.’
부패하여 들어먹거나 무사안일하여 일을 제때 처리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4월에 개최된 <중원 고구려비> 설명회장에는 당대 제일의 역사학자, 금석학자, 한문학자, 미술사가, 고고학자 등이 모두 모였다. 고구려비 발견 자체만 해도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병도‧이선근‧최영희‧이기백
김철준‧변태섭‧신석호‧임창순‧권오돈‧황수영‧진홍섭‧김정기‧김동현‧안휘준‧김석하‧차문섭‧서길수
이 가운데 앞줄의 이병도‧이선근‧최영희‧이기백 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역사학을 망친 친일 사학자들로서, 지금 이 시각에도 왜놈들이 억지를 부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정설인 것처럼 가르치게 만든 원흉들이다. 특히 이병도는 우리나라 사학계의 태두로서, 왜놈들의 식민사관을 철저하게 주입시킴으로써 이 나라 사학계를 식민사학자들이 지배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왜색종교인 천리교의 골수신도였는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도 왜국에 건너가면 천리교부터 찾아가 맨발에 무릎을 꿇은 채 참배함으로써 왜국에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그 후배들은 지금도 교단에서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들 친일 사학자들의 행적은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할 작정이다. 역사학 관련 저술가 이덕일은 이들을 ‘매국사학자’라고 부른다.
<중원 고구려비>는 1978년에 발견된 <단양 적성 신라비>와 함께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였다. 그러나 두 비가 모두 건립시기를 밝힐 수 있는 부분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고구려가 남하하여 중원 일대를 정복한 시기나 신라가 고구려를 축출하고 중원을 확보한 시기를 밝혀낼 수 없었다. <중원 고구려비>는 충주의 아마추어 문화재 애호가 모임인 예성동호회가 찾아내어 더욱 화재가 됐었다.
<중원 고구려비>는 자연석을 기둥 모양으로 다듬은 뒤 사면을 갈아서 글자를 새긴 비석이다. 높이 2m, 폭 55cm, 두께 33cm의 비석에 예서체로 새긴 글자가 730여 자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274자를 해독했다. 비문은 군데군데 마모되거나 깨져나간 글자가 많아 완전 해독에는 이를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해독된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5월 중 고려(고구려를 스스로 고려라고도 했음) 태왕(=황제)은 조왕(組王)의 명에 따라 신라의 매금(寐錦. 왕)과 세세토록 형제처럼 화목하기를 원하여 하늘에 맹세함을 지키고자 동쪽으로 왔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신라) 매금의 상하가 우벌성에 이르니, 교를 내려 300명을 모집했다. 신라 토내당주(직함)는 토내 중인들을 움직였다.’
문맥을 분석해보면 391년 왜구가 신라에 침공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5만 군사를 파병하여 물리쳐준 적이 있었는데, 이후 신라에 주둔군을 남겨 형제처럼 지냈던 사실(史實)을 기록으로 남긴 듯하다. <중원 고구려비>에 의해 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했다는 사실과 함께 ‘12월 23일 갑인’이라는 명문(銘文)으로 비를 세운 시기가 12월 23일이 갑인일인 장수왕 68년(480)과 문자왕 15년(506)으로 압축되었다.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문자왕 연간에 장수왕 때의 역사를 비문에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풍이 잘 되는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던 <중원 고구려비>는 현재 컨테이너 같은 전시관 안에 통풍과 햇빛이 차단된 채 죄수처럼 갇혀 있다.
<이렇게 보존되던 고구려비가>
<중원 고구려비>가 컨테이너 전시관에 갇히게 된 사연은 기가 막히다. 2004년 문화재청장에 취임한 유홍준은 <중원 고구려비> 보존 실태를 살피고 와서 건축가 승효상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 날로 풍화가 심화되어가고 있는 전국의 석조문화재들을 오랜 세월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승효상은 적당한 광선을 쐬고 통풍은 되되 산성비와 강풍은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유홍준이 그 방법에 동의하자 승효상은 통풍과 채광이 충족되는 세련된 전시관 설계도를 포함한 기본계획서를 작성, 제출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3천만원 이상의 용역이나 설계는 조달청을 통해 공개입찰을 거쳐야 했다. 정부의 현행 공개입찰제도는 최저가(最低價) 조건이 충족되면 품질이 떨어지고, 품질이 충족되면 입찰에서 탈락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결국 유홍준은 <중원 고구려비> 전시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청장 직을 물러났다. 유홍준이 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8집을 다 읽고 나면, 그는 문화재청장 재임 4년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세월만 허송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가 만약 정약용 선생보다 먼저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策問」에 등장하여 심한 질타를 받았을 터이다.
<이 컨테이너 전시관 속에서>
<이렇게 갇혀 지낸다. 이 공사 과정에서 관계 공무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떡고물이 떨어졌을지...>
2010년 조달청은 엉뚱한 설계도를 낙찰시켜 <중원 고구려비> 컨테이너 전시관을 준공했다. 유홍준이 물러난 뒤에도 승효상의 기본계획서를 간직하고 있던 어느 문화재청 공무원이 업자와 결탁하여 이를 유출했고, 업자는 그 계획서를 적당하게 베껴서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엉터리 방법으로 전시관을 건축한 것이다. 채광과 통풍은커녕 학술적 연구조차 용이하지 않은 구조다. <중원 고구려비> 전시관은 결국 이 나라 공직자들의 무사안일과 무능과 부패를 한껏 드러낸 복마전이 되고 말았다.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에 임명되지 않아 비각을 원래대로 두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걸...
지난 9월, 정부는 최저가 입찰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종합평가 낙찰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같은 공무원들이 제도가 바뀐다고 얼마나 달라질지, 거기에는 또 얼마나 교묘한 부정부패가 끼어들지, 이 나라 정치계와 공직세계를 생각하면 그저 막막할 뿐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걸 보면,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첫댓글 글쎄 말일세.
그냥 두면 될 걸,
왜 그리 돈들여 가둬놓는지 말일세.
친구덕에 역사를 배우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