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집회를 통하여 부르짖으며 드린 기도의 응답이 사회법에서의 온전한 판결로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기도의 간구가 늘 예배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온전한 예배가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성도에게는 성령의 임재로 인한 은혜이기를 바라는 것이 성도의 최고의 예배자의 지향점이요 예배의 본질임을 더 이상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로 볼 때 지난 주 토요일의 추수감사절 예배는 쉽게 잊혀 지지 않는 예배의 압권이다. 집사님의 성가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과종 과일과 헌물과 함께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빌4:18) 예배였으리라. 황 목사님의 설교와 성도들과 함께 올린 찬양도 잘 빚어 올린 풍성한 예배여서 마치 프리즘을 통한 생명의 빛들의 잔치였던 것이다. 출애굽기 17장의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는 장면”은 영적 비밀의 압권이다. “치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나카”인데 원뜻은 “쳐 죽이다: 상하게 하다”의 뜻이고 “마시다”이 원어는 “솨타”인데 “잔치를 베풀다”이다.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상징한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공생애중 첫 표적이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이며 마태복음의 천국 잔치가 혼인잔치로 그려지는 이미지의 배경을 제공해준다.
지난번의 집사님의 솔로 곡에서 “주 날개 밑에 거하라”를 성경의 고사를 통해서 묵상한데 이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묵상하였다. 유명한 시편 23편을 노랫말로 표현한 것임을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은혜의 시이다. 혹 어떤 작가는 300여 페이지에 걸쳐서 시23편을 해부하여 깊은 은혜의 영적비밀을 풀어냈지만 광야의 동기생들과 함께 우리식으로 묵상을 나누기를 바란다. 잘 올려진 찬송은 정말로 설교의 한 편만한 메시지를 담아 낼 수 있음에 집사님의 달란트가 너무 귀하다.
먼저 “여호와”의 히브리 문자에 가까운 원음은 “야훼”가 더 가깝다. 야훼는 4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인데 알파벳을 풀어쓰면 하나님의 권능을 뜻하는 알파벳 요드(yode)와 사람을 뜻하는 알파벳 와우(waw)의 앞뒤로 빛을 뜻하는 알파벳 헤트(heth)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야훼 속에 담긴 영적 비밀을 알고 있는 영성가인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시27:1)라고 시로 고백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문자 속에 담겨진 빛은 말씀이요 생명이시고 권능으로 두르신 문자 그대로의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 것이다. 야훼를 영어로 번역하여 “I am who I am”(스스로 있는 자) 라고 번역하였으니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 같다. 또 다시 보호를 요하는 다윗의 시에서는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139:5) 는 야훼의 속뜻과 함께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시23:5)과 어울리는 짝 말씀( 사34:16)이다. 이사야도 야훼 속에 담긴 비밀을 풀어서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58:8)와“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58:10)라고 기록하였으니 성령의 내주하심을 입은 성도의 삶을 이미 3000~2700에도 이미지화 시켰던 것이다. 굳이 계시를 이미지화로 격하(?)한 것은 수채화 같은 시편23편과 더불어 영감 있는 聖曲과 감사의 예배가 너무도 멋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양떼”를 위한 목자의 삶은 부지런하다. 대개 이스라엘의 초지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목자는 양들이 거할 초지를 살피기 위하여 먼저 산꼭대기로 가서 양들이 먹일 물웅덩이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쉴만한 물가는 자연적으로 마련되어진 웅덩이가 아니라 목자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서 돌과 흙으로 만든 “인위적으로 쌓은 물웅덩이(물가)이다. 또한 목자는 봄이 되면 땅 속에서 나와 풀을 먹는 양들을 물어뜯는 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양들의 코에 기름을 발라주며 여름의 파리 떼 공격에 속수무책인 양들에게 기름을 발라주어 파리 떼로부터 보호해 준다. 양 털을 밀어 주지 않으면 기생충에 시달리기 때문에 제때에 양털을 깎아주어야 한다. 불과 1미터 앞의 거리밖에 볼 수 없는 지팡이기에 늘 음성이나 지팡이를 던져서 길을 가리켜주어야 한다. 오직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없다. 더군다나 목자는 산꼭대기의 푸른 초장으로 양떼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골짜기를 거쳐서 지나야 하는데 이때 산들의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무기가 막대기이다. 다윗은 소년 시절의 목동 생활로 누구보다도 이런 목자의 삶을 알기에 시편23편의 내용을 수채화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수채화의 잔잔한 정적인 정경 속에는 목자의 정성이 양떼 하나하나에 가해진 부지런한 몸놀림이 있는 동적인 장면이다.
성경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한 것은 목자와 양의 숙명적인 속성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영적인 상징인 것이다. 시편 23편의 정경 속에 나타나지 않은 중요한 상징적이고도 영적인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4절)로 표현된 단어이다. 목자들은 지팡이와 막대기는 반듯이 올리브 나무로 만든다는 것이다. 한글성경은 감람나무라 번역하였지만 이는 한자로 된 중국의 성경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막대기와 지팡이의 영적 비밀은 반듯이 히브리어를 통해서야 그 숨겨진 은혜의 보고를 열수 있는 열쇠이다. 올리브나무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는 줄기와 접목된 부분이 두툼하여 다듬어서 목자의 막대기(호테르)로 만들고 이것으로 맹수를 잡으며(삼상17:40) 양떼의 방향을 잡기위해 던지는 소리로 양들이 듣고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또한 지팡이(”네쩨르”)는 올리브 나무뿌리에서 나오는 가지를 취하여 만들고 허리에 차는 “호테르”(막대기) 보다는 조금 더 길어서 이것으로 목자의 왼손에 쥐고서 골짜기의 위험지역의 흙과 물의 깊이를 재면서 안전하게 인도하는 데에 사용한다. 이 네쩨르(지팡이)는 올리브나무의 뿌리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자라는데 한두 개를 제외하고 모두 잘라주며 하나는 반드시 묘목으로 자라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과 형통을 노래한 시로서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128:3)의 표현은 올리브나무의 뿌리의 형상을 빗대어 올리브나무의 풍요한 기름과 축복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테르(막대기)는 양들을 인도 보호하시는 그리스도로써 “네쩨르”(지팡이)는 자기 생명을 어린 묘목으로 그 다음세대에 이어가게 하는 다윗왕조 계열의 메시야와 구원함으로 구속의 생명을 상징하는데에 탁월하게 표현된 영적 비밀인 것이다. 이미 성령의 충만함은 다윗의 입을 빌어 이 한편의 서정적인 시에 은혜의 비밀을 숨겨 놓은 것이다.
유대인의 복음을 향해 맞추어진 마태복음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구절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기록하였는데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23) 는 말씀이다. “나사렛”의 어원은 “나쯔라트”인데 이 단어는 “네쩨르”(올리브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를 뜻한다. 즉 마태복음 2:23은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가 바로 구원자이신 “메시야”임을 중의법으로 표현하여 히브리어 속에 담긴 문자로써 증거한 것이다. 집사님의 찬송에 너무나 감동되어 은혜의 한 주간을 보내는데 기드온의 용사로서 기도에 정진함을 가질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공급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찬송 중에 울먹임을 진정시키시는 모습과 아내 되신 집사님의 지긋한 눈빛이 한결 더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슴에 새롭다. 이런 찬송과 예배로 성도의 기도가 향연이 되어 천사로부터 보좌 앞 금 제단에(계8:3) 올라가서 견고한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응답이 되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예배의 감격이 다시 살아나네요... 기쁨의 예배후에 이렇게 좋은결과가 있어 계속 감격이 이어지는거 같아요... 그런데 그 감격을 이렇게 글로 풀어내신 님도 참 대단한 달란트를 가지신것 같은데요....?? ^^
와~우 기도의힘이 응답으로 나타날것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