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Biblebeliever
옥에 갇힌 한 성도가 주는 이스터에 대한 교훈
By Dr. Peter S. Ruckman
“그가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네 조의 병사들을 붙여 교대로 지키게 하니 이스터가 지나면 그를 백성들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행 12:4).
여러분이 읽은 본문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스터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 단어는 고대 바빌론에서 풍요의 여신이었던 이슈타르(Ishtar)에서 온 것이다. 이슈타르는 종종 아스타르테(Astarte)라고도 발음되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에스더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름은 “별” 곧 새벽별 혹은 저녁별로서의 금성(Venus)을 뜻한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이스터”라는 단어가 오류라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대 “성서들”에서 그 단어를 “유월절”로 바꿔 놓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해당 본문의 시점은 이미 유월절이 경과한 때라는 것이다. 행 12:3을 보라: “그 때는 무교절 기간(DAYS)이더라.” “무교절 날[DAY: 단수]”, 다른 말로 “유월절”(눅 22:1, 7) 대신 유월절에 따라오는 칠일 간의 무교절 기간을 언급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불렀다(눅 23:5-6).
둘째 문제는 본문에서 이스터를 지키는 자가 에돔 출신 이교도인 헤롯왕이라는 것이다. 헤롯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유대 백성이 지키는 성경적 절기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에서 기념하는 이교도 절기와 그가 섬기는 로마 정부의 절기도 같이 지켰다. 이 문제에 있어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하며 “선하고 경건하고 헌신된” 배교한 기독교 학자들의 의견은 “마귀에게나 던져줘야” 하는 것이다(빌리 선데이, 1927).
이제 행 12장에서 헤롯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행 12:1-2)를 살해하고 나서 그 일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한 것을 알았는데 그는 베드로도 체포해서 자기가 이스터 토끼와 달걀 찾기 의식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죽이려고 가둬둔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경험한 일을 통해 우리는 이스터에 관한 몇 가지 위대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사람들은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혀”(딤후 2:26)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슬러서 죄를 짓는 사람은 사탄에게 자신을 다스리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배하려면 먼저 마귀는 하나님께 가서 허락을 얻어야 한다(욥 1-2장을 보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키질하려고 찾았느니라”(눅 22:31). 마귀는 여러분의 육신의 본성을 이용해서 여러분의 자연인 본성과 생소한 무언가를 거부하게 만들 수 있다. 죄인은 타락하기 위해서 훈련할 필요가 없지만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거룩함에 이르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자연인은 태어날 때부터 사탄에게 붙잡혀 있다(엡 2:1-3).
행 12:5에서 얻을 수 있는 다음 교훈은 이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인류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은 죄의 육신이라는 감옥이다.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술에 취하며 초월 명상을 하는 등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바울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내가 설교했던 회중들 가운데는 마흔에서 쉰 살이 되도록 지옥 같은 생을 살았던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어 놓은 그 지옥 문을 닫기 위해 애쓰는 데 나머지 시간을 다 소비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일생은 대부분 침묵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옥은 지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지옥에 가기 전 지상에서 지옥의 맛을 보고 가는 것이다. 서글픈 사실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도 “종의 멍에”(갈 5:1)를 메고 육신적인 생을 살아간다.
세 번째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헤롯은 베드로를 처형하기로 작정하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히 9:27)라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다 죽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고 그것을 지키게 될 것이다.
“죽음은 오두막과 저택을 가리지 않고 난폭한 걸음으로 찾아오네, 현관문이 닫혀 있다 해서 죽음이 문을 두드리는 것을 주저할까?” 아니다, 친구들, 그렇지 않다. 정한 때가 되면 여러분이 어떤 기분이건 어떤 계획을 가졌건 죽음과 했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
문제는 여러분이 죽음과 약속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있다. 크리스찬은 소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는 하늘나라에 간다는 소망이 있으며 부활의 소망도 있다. 그는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살전 4:13) 않아도 된다.
베드로는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안정을 잃고 떨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단잠에 빠져 있었다. 형제여, 그는 편히 잠들어 있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폭풍우 가운데서도 잠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이미 제물로 드려질 준비가 되어 있고, 떠날 때가 이르렀도다”(딤후 4:6). 왜 그런가? 그는 곧 본향으로 가서 자신의 구주를 만날 것이기 때문이었다(빌 1:23). 그가 죽음을 “유익”(빌 1:21)이라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 12:6에서 배울 수 있는 다음 교훈은 이것이다 – “베드로는 두 병사 사이에서 두 쇠사슬에 묶인 채 자고 있었고.” 사람은 영적으로 잠에 빠지고 영적으로 매일 수 있다. 막 11장에 보면 한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는데 주께서는 그 나귀를 풀어서 데려오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것을 쓰시기 위해서”(막 11:2-3)이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 주께서는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요 11:44)고 말씀하신다. 이 두 사례는 모두 구원의 모형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왜 그들이 화를 내는지 아는가? 여러분이 그들을 단잠에서 깨우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새벽 3시에 여러분의 침실로 들어가서 여러분 귓가에 들이대고 “이봐! 어서 일어나라구!”하고 소리친다면 어떻겠는가? 여러분은 내게 부드럽게 반응하겠는가?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가 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알려줄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은 그들의 단잠을 깨운 것이다.
나는 사역을 시작한 이래 200-300명의 카톨릭 교도를 구령했는데 그들 중 열두 명 정도는 지금도 전임(full-time) 목회를 하고 있다. 내가 카톨릭 교도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 그들은 거의 유사한 패턴으로 반응한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그 다음으로 겁에 질리며 결국 구원받는다. 내가 구령한 모든 카톨릭 교도들은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우선 화를 내는데 이는 여러분이 그들의 수면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여 있다. 그들은 전통에 붙잡혀 있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로마를 방문해서 거기 세워져 있는 검은 색 베드로 석상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형상의 발가락에 입맞추었기에 그 발가락은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형상에게 가까이 가서 발가락이 입맞춤으로 인해 얼마나 “닳아 없어졌는지” 자기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어림잡아 보았다. 그가 그 발가락을 재어 보고 자기 자신도 입맞춘 후에 물러나자 그의 뒤에서 기다리던 40-50명의 사람들이 그와 똑 같은 행동을 했다. 그들은 전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자기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다.
언론이 그들의 믿음을 무엇이라 규정하든 간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매여 있다. 뉴스 미디어는 통합을 지지하는데 그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통합되어 있다. 언론은 낙태가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 주장하는데 그들은 “생식의 선택권”을 지지한다. 뉴스 미디어는 “남부연합 깃발을 금지하라, 그것은 인종주의의 상징이다”라고 말하고 그들은 그렇게 실행한다. 언론은 변태 성욕자들이 “결혼”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 언론 매체가 주도하는 일들이 정상적이건 아니건 그 일이 어떤 참사를 가져오건 사람들은 “유리 화장실”(TV)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헛소리들을 수용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울 교훈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니 감옥 안에 빛이 비치더라”(행 12:7). 불쌍한 늙은 행크 윌리엄스(미국의 컨트리 가수 겸 작곡가)는 “나는 빛을 보았네”라는 노래를 썼지만 그 자신은 일생의 하루도 빛을 보지 못했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죽기 직전, 어떤 대학생이 모는 차를 타고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가고 있었다. 때는 비가 내리는 밤이었고 차를 운전하던 청년은 행크가 밤 풍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행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나는 빛을 보았네”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행크는 이를 갈면서 “빛이 없다, 빛이 없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 눈을 어둡게 했기에 사람에게는 빛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탄은 빛을 요구하는 죄인에게 가짜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빛의 천사”(고후 11:14)로 변형시켜 나타나는데 그것은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요 1:9)이 아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율법과 증거에게라.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2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조명을 주신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가면 빛을 주며 그것이 우매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 119:130).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만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눈먼 불쌍한 죄인에게 “비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인 것이다(롬 10:17). 어떤 어린 소녀가 자기 동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에 와 봐, 지금 우리는 ‘rebible’을 하고 있어.” 물론 그녀는 “revival”을 잘못 말한 것이지만 “reBible”(성경으로 돌아가자)은 부흥을 위한 훌륭한 캐치프레이즈가 아닐 수 없다. 부흥이란 크리스찬이 성경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이 본문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다음 교훈은 구원은 순간적이다라는 것이다:
“급히 일어나라.”고 하니 쇠사슬들이 손에서 벗겨지더라”(행 12:7). 베드로는 즉시 구출되었으며 여러분도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자유롭게 된 것이다. 구원은 질질 끄는 긴 과정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리지만 여러분은 성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성품을 보시고 구원하신다면 여러분이 어느 정도로 선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만큼 선해야 한다. 결국 주의 독생자께서는 온 인류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마 3:1, 12:18, 17:5)라고 말씀하신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여러분은 아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사 64:6). 여러분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롬 10:3-4)와 비교한다는 것은 병원에서 쓰고 버린 피 묻은 천 조각, 혹은 주차장에서 나온 기름때에 찌든 걸레 조각과 비단으로 된 말끔한 정장을 견주는 것과 같다.
행 12:8 – “띠를 두르고 네 신을 매라.” 구원받은 후 크리스찬은 신분에 적합한 “의복”을 착용해야 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계 19:8).
“그러므로 서서 진리로 너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엡 6:14-15).
크리스찬은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네 겉옷을 걸치고 나를 따르라”(행 12:8). 소경 바디매오가 구원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다(막 10:50-52). 예수께서 마태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자 마태는 그의 “세무소” 일을 던져 버리고 자신의 구주를 따르는 새 직업을 택했다(마 9:9).
여러분이 구주를 따른다면 주께서는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이다. 내가 구령을 시작하게 만든 인물은 회심한 카톨릭 교도인 글렌 셩크였다. 글렌 셩크는 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을 회심시키는 사역을 했다. 한 번은 눈이 많이 쌓였을 때 그가 자기 부대원들과 함께 정찰 활동을 끝내고 복귀하고 있었다. 많은 눈이 내렸기에 그들은 부대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들이 갈림길에 이르러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글렌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방향을 여쭈었다. 주께서는 글렌에게 감동을 주셔서 왼쪽 길로 가라고 하셨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알다시피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주 행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때 글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왼쪽으로 가라고 분명 말씀하셨다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는데 왜냐하면 다음 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글렌의 대원들이 우측 오솔길로 들어서자 기관총 3정을 거치한 독일군 참호가 그 길 바로 밑에서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렌이 주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대원들은 죽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까지 제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말하기를”(행 12:11). 예수께서는 탕자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눅 15:17)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전까지 탕자는 탐심과 정욕으로 인해 정신이 나가 있었다. 바울은 죄인이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
더욱이 죄인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 “이제 내가 확실히 알았노니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나를 구해 내셨도다”(행 12:11). 이제 그는 하늘나라로 가는 것에 대해 “~하기를 희망한다”거나 “~라 생각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요일 5:13).
바울은 말했다. “이는 내가 믿은 분을 알고, 내가 위탁한 것을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베드로의 경우 그의 이 경험은 상징적으로 부활을 경험한 것이다(참고. 히 11:19). 부활의 증거는 봄철이 되면 북쪽 지방보다 여기에 더 많이 나타난다. 봄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겨울 내내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나는 여러분이 이 자연 현상을 자신과 연관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무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선인은 무덤에 붙들어 둘 수 없다”(You can’t keep a good man down). 여러분이 구원받았고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소유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의 보증을 갖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형제들,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았던 내 날들은 구원받은 이후의 생애와 비교할 수 없다. 구원받기 전 나는 매일 술에 빠져 살았고 하루에 5-6개비의 담배를 피웠으며 디스크자키로 일하면서 더러운 음악을 틀어주고 밤에는 댄스 밴드에서 드럼 연주자를 했다. 또 기회가 생기는 대로 음행을 저질렀었다.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족을 주시고 내가 제정신을 찾게 하셨으며 나를 설교자로 부르셨고 내게 정원을 주시고 사냥, 낚시, 하키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셨다. 구원받기 전에 내 친구들은 내가 늘 술에 취해 있는 것과 만성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가는 것을 보았었지만 구원받은 후에 나는 신학원 방학이 되면 아이들을 방문해서 “차 대시보드에 보면 토끼 인형이 있으니 가져가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요 5:24; 요일 3:14).
“옥에 갇힌 나날 동안 내 영은 오래도록 기다렸네.
죄의 결박에 단단히 묶인 채 나는 잠들어 있었네;
그때 당신의 눈에서 뿜어지는 빛에 나는 정신을 차렸네 –
내가 일어났을 때, 지하 감옥 안에는 빛이 가득했네;
나를 묶고 있던 사슬이 벗겨졌고 내 심장은 자유를 찾았네
나는 일어났고 문을 열고 나와서 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네.
찰스 웨슬리
첫댓글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히 9:27)라 말씀한다.###
가룟 유다에게만은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가룟 유다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본문과 관련없는 댓글은 노코멘트입니다.
눅22:1 -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눅22:7 -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행12:3 -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12:4 -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잘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은 누가의 두번째 편지입니다.
그럼 누가가 유월절과 무교절의 관계를 어떻케 이해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는 유월절을 무교절에 속한 절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유월절은 무교절중에 첫번째 날이 됩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잡으려 할때는 무교절일이라 함은 무교절 첫날인 유월절의 시작을 의미하며 베드로는 유월절 첫날에 잡혀 옥에 갗히게 되며 절기를 따라 유월절이 끝나는 날에 백성앞에 끝어내고자 한다함은 무교절 첫날을 지내고 재판하려 한다는 뜻이지 이방절기인 이스터를 지낸후 죽이려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
말씀을 아는 누가가 부활절을 말하기 위함이라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나스타손~(부활-아나스타시스 의 현재부정사)-이라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12:3~4은 무교절의 첫날인 유월절을 말하며
3절의 무교절이라는 말 역시 첫날 유월절을 의미합니다.
이방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kjv1611은 파스카가 이곳에서만 이방절기 이스터라고 어떻케 이를 알았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본론으로 말해서 킹1611에서 말하는 이스터는 억지로 해석하여 상경을 비틀어 버린 오역입니다
@성도의 본분 무교절 기간(DAYS)이라고 이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무교절(DAY)과 기간(DAYS)은 다릅니다.
이미 반박된 억지를 되풀이하는 것은 소모적입니다. 생산적인 댓글이 아닙니다.
@ourdailybread 그러니까요
무교절 기간내에는 유월절이 포함되어 있잔아요
무교절 기간의 첫날이 유월절이라고 누가는 첫번째 편지에서 증거하는데 무슨 문제인지요.
헬라어를 몰라서 누가가 부활절(아나스타소~ㄴ)을 롤라서 파스카라고 기록했을가요?
@성도의 본분 초대 교회에는 후대에 카톨릭 전통으로 생겨난 "부활절" 절기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건 착각이고.
누가는 실제로는 헤롯이 지키던 이교 절기 이스터가 유대인들의 파스카 기간과 겹쳤음을 고지한 것이고 킹제임스 역자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이스터로 쓴 것입니다.
@ourdailybread 님!
지금 무교절 기간(7일의 첫째날이 유월절이라고 누가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뭔 부활절이라는 소리를 말하는지요?
님이 이스터는 부활절이라고 말하니 이를 비꼰것 뿐입니다.
무교절기간의 첫날이 유월절입니다(눅22:7)
양을잡는 무교절이라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양을 잡는날은 유월절이지요?
전혀 이해되지 않으세요?
무교절은 유월절을 포함하는 절기라고 누가는 말한다.
즉 무교절 기간안에는 유월절도 포함된다.
무교절시작은 유월절의 시작이다
무교절의 첫날 유월절에 베드로가 잡혔고 유월절이 지나면 재판하려 한다.
이해않되시면 어쩔 수 없는 한계이십니다
@성도의 본분 무교절 기간 중에 헤롯이 이스터를 지켰다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향상된 계시입니다. 물론 문헌학적 역사적 배경 자료를 근거로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으면 그것이 진리입니다.
본인은 킹제임스 성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방하는 질문에는 길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당신네 알렉산드리아 학파 목사들에게 가서 같이 킹제임스 성경 뒷담화 까면서 교제하시고 이 글에는 댓글 그만 다시오. 더 답글 안 답니다.
@ourdailybread 님!
성경을 바로 보세요.
사도행전을 헤롯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누가가 기록합니다.
성경 기록자가 이방절기를 차용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의미하는 파스카를 이스터라고 기록했는가 입니다.
누가가 구약의 말씀을 몰라서 이방절기를 설명하기 위해 유월절을 차용하여 사용해요?
지나가던 강아지가 웃습니다.
이날이 이스터라면 파스카 말고도 다르게 기록할 말들이 있습니다.
당시 누가가 이방신들을 몰라서 성경절기인 파스카로 기록했어요?
왜그러십니까?
--------------------------------------------------
킹제임스1611이야 말로 유월절을 이방절기로 만드는데 앞장선 일등공신입니다.
@ourdailybread 님이 속한 이송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네요?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49&wr_id=163&page=4
--여신 이스터는 오스테라(Ostera), 아스타르테(Astarte), 이쉬타르(Ishtar) 등 변형된 여신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의 이름은 모두 헬라어로 기록 할 수 있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 할 수 있는 이름을 팽개치고 전혀 관계없는 절기인 유월절(파스카)로 기록한답니까?
누가가 지금 미쳤나요?
이방절기를 유대절기로 표기하는 신앙적인 타락이 아니고는 그같이 기록 할 수 없답니다.
킹1611이 넘 나가서 유월절을 이방절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