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한자] 行先地(다닐 행 / 먼저 선 / 땅 지)
일본만의 문화적 토양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는 쓰지 말아야
여행과 관련된 문장을 보면,行先地라는 말이 곧잘 눈에 띈다.
또한 뉴스에서도 종종 '行先地를 밝히지 않고' 운운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말이라서 그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한자어인데도 한자의 훈으로 보면 오히려 혼란스럽다.
行先地는 換乘(환승) 待合室(대합실) 手續(수속) 割增(할증) 貸切(대절) 등처럼 이제는 그 대체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현대의 교통수단이 대개 일본을 경유해서 유입되고 일반화되다 보니,이와 관련된 용어들도 자연스럽게 일본식 한자어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기야 학술용어는 물론이고 법률,경제,건설,상업 등처럼 일상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용어들의 상당 부분이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일본에서 일반화되면서 뜻이 재정립된 것들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일본식 한자어라 해서 눈살을 찌푸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서양 문화의 이식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한자어의 대부분은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동양의 고전에서 뜻을 취해 번역어를 만들었거나,한자의 보편적인 훈을 이용해서 조어를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行先地처럼 한자의 훈 그 자체만으로는 단어의 뜻을 쉽게 알 수 없는 일본식 한자어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있다.
行先地의 行先은 일본어의 ゆきさき(行き先·유키사키)에서 き를 뺀 것이다.
이때의 先은 '목적지' 또는 '상대편'이라는 뜻이다.
先物(선물)이나 先拂(선불)의 경우에는 일본식 한자어라 해도 先이 '먼저'라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해하기 쉬우나,한자로만 보면 行先地의 先에는 '목적지'라는 훈이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引受(인수)나 引上(인상),手當(수당)이나 手配(수배),赤字(적자)나 銀行(은행) 등도 이와 마찬가지여서,일본식 한자의 용례나 일본에서 그 용어가 만들어지게 된 전후 사정을 모르면 한자 지식만으로는 이들 말이 왜 그런 뜻을 갖게 되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식 한자어라 해서 무조건 쓰지 말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行先地처럼 일본만의 문화적 토양에서 만들어진 말들은 쓰지 않아야 하고,쓰지 않을 수 있도록 알맞은 우리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광복된 지 이미 59년이 흘렀다.
<김성진·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