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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 첫 무죄 판결
2004년5월21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양심
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받아 무죄를 선고
받은 정병무씨와 정씨를 도와온 방송인
양지운씨가 함께 법정을 나서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병역
기피자 3명에 대해 법원이 2004년 5월
21일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 판사는
이날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병역소집을
거부한 혐의로 기소된 오모씨에 대해 “입
영 또는 소집을 거부하는 행위가 오직 양심
상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라
는 헌법적 보호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경우
에는 병역법상 징집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같은 종교 신자로 양심
적 병역기피를 주장하는 조모씨에 대해
서는 “소명이 충분하지 못하다”며 법정
최고형인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
했다.
병무청은 이날 ‘양심적 병역기피 무죄 선고
에 관한 병무청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보
환경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다
면 병역의무 이행의 기본질서가 와해돼 국
가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며 “종교적
신념에 의한 대체복무를 인정할 경우 종교
상 특혜시비가 있을 수 있는 만큼 병역의
무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특정 종교인
들에 대한 병역상 혜택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2015년서울대에 450억원 기부…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명예이사장 별세
▶2010년 일본의 금성 탐사 위성
아카츠키를 태운H-IIA가 발사되었다.
▶2010년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1 억 유로에 달하는
그림들이 도난당했다
▶2009년오은선,
히말라야 고봉 11개째 등정
2009년 5월 21일 국내 대표적 여성 산악인 오은선(43.블랙야크)씨가 히말라야 고봉 14개 중 11개를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오 씨는 이날 오후 1시30분(현지시간) 무산소로 히말라야 8천m급 고봉 14좌 중 7번째로 높은 해발 8천167m 높이의 다울라기리 정상을 밟았다. 오 씨는 7천300m 높이의 제3캠프에서 새벽 1시30분에 출발해 12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오 대장이 11개봉 등정에 성공함에 따라 세계 여성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14좌 완등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현재 호주의 겔린데 칼텐브루너(39)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36)이 12개 봉을 등정해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오 대장이 비록 경쟁자들에 비해 1개봉이 뒤처진 상태이지만 등반 시기 등을 고려하면 오 대장이 유리한 고지에 올라와 있다.
히말라야 14좌는 1986년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처음으로 등정한 뒤 국내에선 박영석·엄홍길·한왕용씨가 차례로 완등했지만 여성 산악인은 아직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다.
▶2009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휴대전화 인터넷 서비스시작 발표.
▶200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대법관
9명의 다수 의견으로 '존엄사"를 인정 -
국내 첫 존엄사 인정
▶2007년민노당 노회찬 의원 불구속 기소
▶2007년이철행 원불교 종사 별세
▶2005년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별세
▶2004년한국계 첼리스트 구세라씨
줄리아드 석사 2년 연속 수석,
윌리엄 슈만상 수상
▶2004년백혈병 극복한 이호씨
산악인 허영호씨와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등정에 성공
오랜 투병생활 끝에 백혈병을 이겨낸 20대 청년이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해발 5,642m) 등반에 성공했다.
1994년 급성 임파구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5년에 걸친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낸 이호씨(23). 이씨는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의 주선으로 백혈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지난달 14일 서울을 출발, 21일 유럽 최고봉 등반에 성공했다.
“정상에 올랐을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등반때 저를 괴롭힌 악천후를 떠올리면서 이제 세상에 내려가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악인 허영호씨(50)가 대장을 맡아 이끈 등반대는 백혈병 치료를 마친 한국인 청소년 4명, 러시아 청소년 2명과 함께 했다. 대원 중 정상 정복에 성공한 것은 허영호 대장과 이씨뿐이었다.
“호흡이 곤란하고 지속적으로 두통이 찾아오는 고소증에 적응하기가 몹시 힘들었다”는 이씨를 가장 괴롭힌 것은 평균 초속 30m의 강풍. 얼음과 눈으로 덮인 급경사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얼마를 굴러 떨어져야 하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이씨는 “넘어질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장님이 페이스를 맞춰가며 잘 이끌어줬다”면서 허영호 대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씨는 “예전에 충남 대천 집에서 투병생활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열이 나면 서울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이젠 건강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2일 부모님을 뵙고 서울에 올라온 이씨는 “빚까지 내며 뒷바라지하신 부모님의 고생을 잊을 수 없다”면서 “훌륭한 건축가가 돼 꼭 효도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광운대 건축학과 4학년에 복학할 예정인 이씨는 “이번 등반 성공이 수술비가 없어 치료를 못받는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 첫 무죄 판결
▶2004년‘부부의 날’ 제정
▶2003년 알제리 강진 700여명 사망.
▶2003년 동백아가씨 작곡 백영호씨 사망.
▶2001 년 영국 1 분기
사상 최대 무역적자 기록
▶2001 년 미국,
중동분쟁 종식 "미젤보고서"발표.
▶2000년 시 리아 전총리 자살
▶2000년대한극장 철거
좌석수 1924석이란 엄청난 크기로 대형극장 시대를 주도했던 대한극장이 2000년 5월 21일 ‘징기스칸’ 상영을 마지막으로 멀티플렉스(상영관 6개 이상에 각종 편의-오락시설을 갖춘 극장) 변신을 위해 철거에 들어갔다.
1956년 건립된 대한극장은 1개 극장에서 몇달씩 롱런하며 관객몰이를 해온 단일 개봉관 시대 대형극장의 상징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복합관이 들어서고 시설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한극장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대한극장의 철거로 이젠 국내에서 온전히 70mm 필름 영화를 감상할 기회도 사라지게됐다. 대한극장은 그동안 ‘닥터 지바고’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대작들을 70mm로 상영해왔다.
▶1999년방일영 조선일보사 전 고문,
금관문화장 수여
▶1998년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1996년탄자니아 여객선 빅토리아호에서
전복 돼 5백여명 사망
▶1991년인도 라지브 간디 폭탄테러로 사망
라지브 간디 전 인도총리가 1991년 5월 21일 남부의 타밀 나두주에서 지방유세 도중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온 네루 일가는 가족 중 3명을 비명횡사로 잃은 비운의 가문이 됐다. 라지브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었다. 라지브 간디의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 전 총리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동생 산자이 간디 역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네루 전 총리의 외동딸이었던 인디라 간디는 당초 두아들 중 권력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차남 산자이 간디를 후계자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산자이가 뜻밖의 죽음을 당하자 평소 정치에 무관심했던 장남 라지브 간디가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인도는 라지브 간디의 암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직전까지 몰려 국정의 방향타를 잃고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한 국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인도 국민의회당은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냐 간디에게 당 총재를 제안, 적극 권유했으나 그녀가 이를 거절. 인도 독립 1세대 정치인인 나라시마라오 전 외무장관이 임시총재로 그 역할을 대신했다. 2004년 현재 국민의회당 당수인 소냐 간디는 5월 18일 총리지명 포기의사를 밝힌 바 있다.
▶1990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예능보유자 명고수 김득수 사망
▶1989년89로터리클럽 세계대회
서울서 개막
▶1987년시인 김해강 사망
▶1984년앰네스티 인터내셔날 엘살바도르
에서 5년간 4만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1984년재경대학 총장,
학원사태관련 공동성명 발표
▶1982년전두환 대통령 개각 단행
▶1981년새세대육영회 창립(회장 이순자)
▶1980년국무총리서리에 박충훈 임명
▶1977년미국 카터 대통령 철군계획 반대
한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 해임
▶1975년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청와대에서 회담
▶1974년산야 태국 내각 총사퇴
▶1964년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발생
1964년 7월 2일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
사건의 피고들에 대한 결심공판이 열렸다.
1964년 5월 21일 새벽 공수단 제1특전단 소속 최문영 대령이 지휘하는 장병 8명과 공수단 출신 민간인 2명이 완전무장하고 법원에 난입, 소동을 벌였다.
이들은 20일 낮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벌인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에 참가한 주모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많이 기각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치근 담당검사와 양헌판사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법원청사에 난입했으나 양 판사가 퇴근했다는 말을 듣고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양판사집까지 찾아가 위세를 과시, 공무중인 판사를 협박했다.
또 6월 6일 새벽 최대령등 제1공수특전단 소속장교8명이 술을 마신후 순찰도중 동아일보사에 침입해 숙직중인 김광희 기자에게 법원난입 사건으로 구속당한 황길수 대위 등에 대해 인신공격성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약45분간 폭언을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7월 10일 제6군관구계엄보통군법회의는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판결공판을 열고 주모자 최문영 피고인에게 징역 5년, 관련자 4명에게는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장교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하사관등 1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1963년국제 공산당 해산
▶1961년혁명정부 용공분자 2천,
깡패 4,200여명 검거 발표
▶1961년미국 앨러배마주
인종차별반대 폭동
▶1960년대한교육노조연합회 결성
▶1960년괌도에서 2차대전중
살아남은 일본인 발견
▶1959년내각책임제개헌안 공고
▶1958년탈모 비누, 군납사건 발생
▶1957년인도서 아시아 최대의
우라늄광 발견
▶1956년미국 수폭투하 실험 성공.
비키니섬서
▶1947년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열렸지만 소련의 무리한 요구가 회의를 또 결렬시켰다. 소련이 공위 참가를 위해 등록한 남한측 425개 단체를 118개로 줄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회원 1만명 이하의 군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반탁운동을 `의사표현의 자유`로 간주하며 소련의 제의를 거부했다.
미소공위가 계속해서 공전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1.한반도 문제를 미영소중 4국회의에서 논의할 것 2.남북한에 각각 입법기관을 설치할 것 3.남북 입법기관 대표들이 논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남북분열을 조장하는 제안이라며 반대해 결국 2차 공위도 10월 18일 5개월 만에 결렬됐다.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3월부터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국 1947년 결렬됐다. 미군측 하지 중장(가운데)과 소련군측 스티코프 중장(오른쪽).
▶1943년뉴질랜드 한국 승인
▶1934년이라크의 키르쿠크 유전에서
팔레스타인 하이파항까지의
석유파이프라인 완성
▶1923년평양시내 전차 개통
▶1921년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 출생
▶1920년멕시코의 카란사 대통령,
우파연합 반란세력에 암살
▶1911년소설가 정비석 출생
“2차 모임은 댄스 파티인데 남편은 안 되고 애인 데려오세요.”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던 오선영은 명사 부인 모임에 끼게 되고, 자유로운 삶을 즐기는 여성들과 만난다.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파탄의 위기에 처하지만, 남편의 이해와 아량으로 가정으로 돌아간다.
정비석(1911~1991)의 소설 '자유부인'의 줄거리다.
1954년 이 소설이 출간되자, 한국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요즘은 TV에서도 막장 드라마가 예사로 방영되지만, 당시로선 불륜 문제를 처음으로 다뤘기에 충격파가 컸다.
정비석 [ 鄭飛石 ]
1911. 5. 21 평북 의주~1991. 10. 19 서울.
소설가.
주로 여성의 애정윤리를 다룬 대중소설을 썼고 만년에는 역사소설을 썼다. 본명은 서죽(瑞竹). 1922년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8·15해방 후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소설창작에만 전념했다. 1951년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위원장, 1965년 관광정책심의위원, 1970~71년 국제 라이온스 협회 한국지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 평소 '소설은 읽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5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지를 메운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다. 고희(古稀)를 넘긴 이후에도 왕성하게 글을 쓰다가 80세로 죽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어린 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한 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 卒哭祭〉가 입선되고,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 城隍堂〉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졸곡제〉는 죽은 아내와 과거에 나누었던 애정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성황당〉은 깊은 산 속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나가는 순이를 통해 원시 자연의 건강함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후 발표한 작품은 성격에 따라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과 사상적 갈등을 그린 〈저기압〉(비판, 1938. 5)·〈이 분위기〉(조광, 1939. 1)·〈삼대〉(인문평론, 1940. 2) 등이 있다. 둘째,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주제로 한 〈강태공〉(조선문학, 1939. 3)·〈귀불귀 歸不歸〉(동아일보, 1939. 3. 1~17)·〈고고 孤高〉(문장, 1940. 3) 등이 있다. 셋째,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된 대중소설로, 〈자유부인〉(서울신문, 1954. 1. 1~8. 6)·〈애정무한〉(1957)·〈여성전선〉(1974) 등이 있다. 대표작 〈자유부인〉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8·15해방 이후의 퇴폐풍조를 날카롭게 그린 세태풍속소설로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황산덕(黃山德)과 '자유부인논쟁'을 불러일으켜 사회문제로까지 비약되었다. 그의 나이 50세 이후에 쓴 역사소설로 〈명기열전〉(1977)·〈민비〉(1980) 등이 있고, 〈한국경제신문〉에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 잇따라 발표한 〈손자병법〉·〈초한지 楚漢誌〉·〈김삿갓 풍류기행〉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성황당〉(1945)·〈고원 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고, 수필집으로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노변정담 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 〈소설작법 小說作法〉(1946)이 있다.
▶1907년중국혁명동맹회
광동성 황강봉기 실패
▶1906년알프스산맥을 뚫는 싱플로터널 개통식(이탈리아.스위스 국왕 참석)
▶1904년프랑스 정교분리문제로
대교황청관계 악화 바티칸대사 소환
▶1904년FIFA(국제축구연맹) 창립
▶1902년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1원권을 발행 한국에 유통시킴
▶1871년 신미양요
미 극동함대 콜로라도호
노획한 군기를 걸어놓은 미군
▶1871년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 시작
1871년 5월21일, 이른바 `피의 일주일`로 불리는 대살육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다. 프로이센의 꼭두각시 정부인 국민회의가 파리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투입한 것이다. 1년 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를 대신해 국민회의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파리 만은 그들의 통치권 밖에 있었다.
마네가 묘사한 `파리코뮌 학살`.
파리는 자치구를 뜻하는 코뮌을 발족시켜 프로이센에 굴복한 정부를 향해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었다. 패배에 따른 좌절감도 분노를 증폭시켰다. 노동자ㆍ학자ㆍ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코뮌의원은 친(親)프로이센ㆍ부르주아 정부에 철저 항전을 선언했다. 혁신적인 정책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한편에서는 파리 대주교를 살해하는 등 보수세력에 대한 과격한 투쟁도 서슴지 않아 곳곳에 유혈이 낭자했다. 적기(赤旗)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관망하던 국민회의 군대가 마침내 파리에 투입됐다. 피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시민들은 튈르리궁ㆍ오르세궁 등을 불태우며 죽음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3만여명이 학살돼 세느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주일 만에 진압된 파리코뮌을 놓고 좌파와 우파는 해석을 달리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며 추켜세운 반면 우파들은 `난동의 온상`이라며 비난했다. 이후 파리는 1977년까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시장을 두지 않았다.
▶1762년사도세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
조선조 19대 임금 숙종은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로부터 균을,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로부터 금을 얻었다. 숙종 사후 균은 경종이 됐고 금은 영조가 됐다. 그러나 세자인 균이 병약한 탓에 조정은 경종과 영조의 즉위를 둘러싸고 당파간의 죽기살기식 암투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영조를 지지했다.
1982년 11월 19일, 사도세자가 갇혀서
숨진것으로 알려진 뒤주가 발견됐다.
경종 즉위 후 승자가 된 소론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등을 일으켜 수십·수백의 노론파를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경종이 재위 5년 만에 병사하자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면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썼다. 그러나 고질화된 붕당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만무했다.
영조의 유일한 혈육인 세자 선을 둘러싸고 당쟁이 재연된 것이다. 영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자 세자를 등에 업으려는 소론·남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노론이 다시 맞붙었다. 한때는 총명했던 세자도 잦은 무고(誣告)와 되풀이되는 영조의 질책으로 정신병적 성향을 보이며 잇단 비행을 저지른다. 영조도 편집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영조는 못마땅한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1762년 5월 13일(음력) 뒤주 속에 가둔다. 초여름 8일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세자는 뒤주에 갇혀 절망과 분노를 토해내며 몸부림치다 숨을 거둔다. 5월 21일이었다. 사도(思悼)는 훗날 이를 후회하고 애도한다는 뜻으로 영조가 내린 시호이다.
▶ 1506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사망
신대륙 탐험,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2.4.17 에스파냐왕실로 부터 신대륙 탐험에 대한 후원을 얻다
1492년은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에게 행운의 해였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과 같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1492년 1월 2일의 일이었다. 에스파냐를 건설할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그 해 4월 17일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사벨 여왕의 콜럼버스에 대한 후원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쳤지만 결국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서로 좋아한다는 풍문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콜럼버스는 이 후원을 얻기 위해 그 동안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를 수년간 돌아다녔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출항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1세와 아라곤 페르난도 국왕.
이사벨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와 결혼하여 에스파냐를 공동통치하고 통일하였다.
콜럼버스, 신대륙 총독이 되게 해줄 거라는 이사벨 여왕의 약속 받고, 항해 시작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금과 향료의 나라 ‘동양’이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탐험을 시작한 후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1492년 8월 3일 금요일 8시. 살테스의 강어귀에서 모래톱을 가로질러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풍향이 자주 바뀌는 강한 바람을 타고 해질 무렵까지 48마일, 즉 16리그를 항해한 후, 카나리 제도 쪽으로 항로를 잡고서 남서쪽과 남미서쪽으로 항해했다.”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를 복원한 모습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했고, 탐험을 꼼꼼히 기록한 첫 번째 <항해일지>를 후원자인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왕에게 바쳤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하는 그 신대륙은 사실은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신세계’ 혹은 ‘신대륙’이라는 표현은 그의 뒤를 이어 탐험한 서구 사람들이 사용했던 표현이었고, 또한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 속한 서반구는 몇 천 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도 아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이미 5백 년 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넘어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캐나다 해변까지 가 본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이룬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아메리카(그가 죽는 날까지 인도와 같은 동양이라고 믿었던)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찾아 대서양을 가로 질렀고, 콜럼버스 다음 세대 유럽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만의 ‘신세계’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오백 년 전에 왔다 간 바이킹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탐험과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식민지와 이주의 땅을 얻게 했고, 아메리카 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게 한 신호탄이었다. 이 발견은 올림픽의 금메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 업적으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로 남아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딴 도시와 더불어 각국의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위인으로 남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451년 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기에,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소년의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무역 항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콜롬버스가 ‘동양’을 찾아 떠난 이유는 기존의 무역 항로에서 벗어나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들여올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가 사용한 지도. 149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왼쪽)
마르코폴로의<동방견문록>여백에 적혀있는 콜럼버스의 메모(오른쪽)
콜럼버스, 신대륙 향해 전에 지도 제작자로 이름 얻고, 에스파냐어 배우고, 선박 조종도 익혀
꿈을 실현시켜 줄 결정적인 계기는 인생의 큰 위기가 지나고 나서 오기 마련이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지금의 중국인 카다이, 인도, 그리고 일본인 지팡구였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비단과 향료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육식 식탁에 반드시 필요한 향료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과 거래가 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이동 경로가 멀고 험한 탓에 동양의 물품들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러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에스파냐와 인도는 가까우며, 적당한 바람만 있으면 며칠 만에 닿을 수 있다"
콜럼버스는 이 시기에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몽골 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을 만날 생각을 했다.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이제 ‘그레이트 칸’을 만날 것”이라는 구절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중국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리고 피에르 추기경의 책 <세계의 형상>을 읽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획득해 나갔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오류가 있는 정보도 있었지만(그 오류조차도 콜럼버스에게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에너지가 되었다.) 그는 드디어 대서양을 가로질러서 동양으로 가겠다는 포부를 세웠고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알려진 토스카넬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대서양 횡단의 뜻을 품었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에스파냐와 인도의 시작은 가까우며, 적당한 바람만 있으면 분명 며칠 만에 닿을 수 있다.” 그가 계산한 수치는 실제와는 4배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지만, 이 오류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 될 줄은 콜럼버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어서 배를 타고 인도에 가 좋은 향료와 황금 그리고 가톨릭을 전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와 그의 동생은 자신들의 항해를 도와줄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콜럼버스는 아들 디에고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오가는 천신만고 끝에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1492년에 그 뜻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항해를 같이 할 핀손 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팔로스 최고의 선원이었다. 마르틴 알폰소 핀손과 비센테 야네스 핀손의 도움으로 선원들을 모았다. 의사, 목수, 은세공사, 에스파냐 황실의 사절, 아랍어 통역사까지 모두 90명의 인원이 모였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 핀손 형제가 탄 핀타호, 니냐호가 에스파냐에서 대서양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이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아직까지는 미지의 ‘검은 바다’인 대서양을 향했다. 그들에게 첫 항로인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도 있었고, 낮게 드리워진 구름을 육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금방 도착한다는 선장 콜럼버스의 말과는 달리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더욱 거칠어졌다. 콜럼버스는 9월 24일의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 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
10월 달이 되자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자는 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콜럼버스는 말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 목숨을 걸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육지를 첫 발견한 사람은 핀타호에 타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였다. 그가 “육지가 보인다”라고 외친 순간은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그곳이 인도나 일본과 같은 동양이라고 믿었다고 해도 말이다.
1492년10월12일 콜럼버스는 오랜 항해 끝에 신대륙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일본이나 중국의 해변이라고 믿으면서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제인 ‘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 동시에 이사벨 여왕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콜럼버스는 두 왕에게 존엄한 기독교 정신을 바쳤다. 그는 항해일지에 이러한 편지도 남겼다.
“두 분 폐하, 저는 그들의 언어를 잘 아는 독실한 종교인이 있으면, 그들이 모두 쉽게 그리스도 교도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두 분 폐하께서 일찍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을 멸망시켰듯이, 이 종족을 개종시켜 교회로 이끌기 위해 단호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결정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후에도(사람은 누구나 몸이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므로), 왕국은 이단이나 악으로 물들지 않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두 분 폐하께서는 영원한 창조주의 왕좌 앞에 서시게 될 것입니다.”
신대륙에는 금광이 많다고 거짓말 한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영웅 대접
그는 첫 항해에서 발견한 섬들, 오늘날 미국의 플로리다 주 남쪽 해안가의 바하마 제도에 있는 조그만 섬들과 쿠바를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원주민들이 피우던 담배(쿠바의 시가는 지금도 유명하다.)와 해먹을 발견한다. 유럽에 담배가 첫 소개되었고, 해먹은 이후 선원들의 흔들침대로서 애용되고 있다. 콜럼버스는 이국적인 아름다운 풍광, 총 천연색의 바닷물고기에 감탄했다. 비록 금은보화를 찾지는 못했지만 온갖 진귀한 것들을 발견하고 수집해서 천진난만한 인디오들과 함께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원주민들의 땅이 에스파냐의 왕과 여왕의 것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다. 이것은 가혹한 식민지 시대의 막을 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원주민들의 모습을 콜럼버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작은 창 말고는 무기도 없었고, 태도도 호의적이었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한 남자가 모르고 칼날을 잡는 바람에 손이 베였다. 나는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고 싶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종시키고 싶다.”
그는 이렇게 칼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십자군 정신으로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이 첫 항해에서 39명의 선원이 다스리는 작은 식민지를 만들고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무사히 첫 번째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자, 그는 에스파냐의 영웅이 되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미리 왕에게 보낸 편지에 향료가 많고 금광과 여러 광산이 많았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이 콜럼버스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다.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왕국으로 향했다. 생선 뼈와 금으로 만든 장신구와 머리 장식을 한 인디언들과 화려한 앵무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이 용감한 모험가의 특이한 행렬을 보기 위해 농부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고용된 하인들이 순금과 호박을 들고 콜럼버스와 선장들의 뒤를 따랐다. 바르셀로나 왕궁에서는 콜럼버스가 들어서자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존경의 표시였다. 왕궁의 으리으리한 홀로 들어선 콜럼버스가 페르난도와 이사벨 앞에 무릎을 꿇자 두 사람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여왕의 오른편에 앉아 모험담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마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로 신대륙 찾아가자, 남아 있던 선원들은 원주민들한테 몰살 당한지 오래고·····
두 번째 항해에는 17척의 선박과 1200여명의 선원들이 모여 들었다. 이 항해에서는 좀 더 멀리 가서 반드시 금광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도착한 식민지에는 이미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한 뒤였다. 그들의 약탈과 강간에 화가 난 원주민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꿈의 땅인 줄 알고 같이 온 선원들은 슬슬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콜럼버스가 말한 금은보화가 없었다. 식민지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노예사냥이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1495년 초에 타이노 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예로 팔기도 했다. 그는 노예제도도 만들어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은 모두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게 했다. 원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의 질병인 천연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서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카리브해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콜럼버스는 모두 4번에 걸친 항해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항해부터는 서서히 몰락했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갈등이 있었지만, 콜럼버스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해 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해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콜럼버스의 영광의 날들도 노을로 물들었다. 페르난도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탐험가인 그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그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동양의 꿈을 꾸면서 파란만장한 55년의 세상을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아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542년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그가 일군 식민지인 히스파니올라에 새로 건립된 산토 도밍고 대성당에 콜럼버스의 시신을 옮겨 묻었다.
https://youtu.be/GdqWUIsmWPU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