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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아이함례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하였음에도,
법원 배심원 판결은 백인경찰들에게 무죄를 선언한것에 대한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변한것이다.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캔음료수를 절취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와 실랑이 끝에 주먹으로 안면을 수차례 강타당하자
두 씨가 라타샤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그 소녀가 사망한 것이 흑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사태였으며 미국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 ABC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 '두순자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여 폭동을 악화시켰다.
언론공세로써 흑인들의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이날 저녁부터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초기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경찰력으로도 막을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미 정부는 주방위군 6,000 여명과 연방군 1,000 여명을 투입했다. 하지만 진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주방위군과 연방군이 사태를 장악하기전까지 31명이 사망하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3010명이 연행되었다.
LA 폭동은 근본적으로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인구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열악한 생활 여건에 시달려왔다.
흑인 가구당 수입은 미국 평균치의 60%밖에 안되고, 실업률은 2배를 넘긴다.
25년 동안 공화당 행정부 아래 지속된 가진 자만을 위한 보수적 인종 정책이 갈등을 부채질했다.
와중에 교포들만 애꿎게 집중적인 화를 입었다.
흑인촌도 불사하는 억척스러움이, 그리고 흑인촌에 코리아타운이 인접한 게 `죄'였다.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초토화됨으로써 북쪽 백인 주택가에 불똥이 튀지 않게 하는 방화벽 구실을 했다.
미국 언론은 경찰력이 보호해주지 않는 가게를 지키려고 총격전도 불사하는 한인들을 클로즈업하면서
사태를 한-흑 갈등으로 호도하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한인들은 더 이상 흑인 폭도들에게 이민1세대,2세대인 자신들의 전재산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한인들은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유학생들 그리고 인근 지역 그리고 원거리에 살고 있는 해병전우회 한인, 특전사 전우회,
코리아타운 매장주(매장 세곳중 한분은 월남전 참전용사) 그리고 유학생을 주축으로,
12~24시간 운전을 하여 중무장하고 코리아 타운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슬픔도 있었다. 코리아 타운이 폭도의 공격을 받았던 둘째날(4월30일) 밤
한 한인상점을 지키기 위하여 중무장하고 한인타운으로 가던 한인학생이
약탈꾼으로 오인돼 코리아타운을 지키고 있던 방어대의 총을 맞고 숨진
이재승(당시 19세)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기도 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지킨다. 미국 경찰도 그리고 미국 방송사는 더더욱 믿을수 없다"
한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재산이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 그리고 약탈 당하여 텅텅빈 매장을 보면서도
아직 까지 약탈을 당하지 않은 한인가게들을 구하기 위하여 중무장하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 방어대를 만들어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옥상에는 모래자루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여 저격병들을 배치하였고
한인 코리아 타운 각 매장 앞에도 모래자루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고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폭도들의 진입을 차단했다.
한인 코리아타운에는 어느덧 해병전우회,특전사전우회,코리아타운 매장주, 그리고 유학생들
그리고 한인1세대인 할아버지들 까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들기 시작을 했고
이들은 해병전우회,특전사전우회들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을 했고
한인라디오방송 그리고 무전기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차량을 개조하여 흑인폭도들이 약탈을 하려고
하면 즉시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흑인폭도들에 대하여 대응사격을 하면서 한인상점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아주머니들은 총탄이 날라다니는 과정에서도 방어대들의 식사를 위하여
음식 광주리를 머리에 올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김밥과 주먹밥 이었지만 할머니,아줌머니들에게는 총탄이 무섭지 않았다.
한인 매장은 그들의 모든것이었고 그것이 약탈과 방화에 사라지는것은 죽음 보다 싫었다.
그리고 이민1세대인 할아버지들 에게도 흑인폭도들의 총탄은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들에게는 한인매장 그것이 전부였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같은 상황은 내 재산을 지키야 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LA폭동 3일째 미국 메이져 방송사들은 한인 코리아타운의 총격전을 집중 보도하면서
한인상가의 지붕에 설치된 M3자동화기,머신건들을 집중보도했다.메이져방송사들의 집중보도를 통해
한인코리아 타운에 잘못 들어 갔다가는 죽을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인타운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한인들이 피해를 받았을때 모른척하다가 백인들 구역으로 오니 그제서야 주둔군인을 투입시켰다.
LA 흑인 거주지 사우스 센트럴 지역을 포함해 LA에서 피해를 본 업소가 1만여개였으며
이중 2천800개가 한인업소였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한다.
NBC 뉴스의 헬기가 한 한국인 슈퍼 상공을 촬영하고 있는 도중 찍은 화면.
그 화면에는 한국인들이 한 상점을 중심으로 대공초소를 방불케하는 진지를 구축하고
손에 스나이퍼 라이플, 미니건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TV로 나가서 흑인들은 그 쪽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폭동이 가라 앉은 후에 미국 경찰들이 그 뉴스를 보고 총기를 압수하러 갔는데,
권총을 제외한 나머진 모두 비비탄 총이었다
미니건은 플라스틱 봉으로 급하게 만든 거라고 설명하였다.
야구 방망이보다 못한 플라스틱과 장난감 총을 들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과 가족과 상점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