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2,13―53,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4-16; 5,7-9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18,1―19,42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는 지인이 주신 난을 키우면서 화초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정성을 쏟을수록 푸르름을 드러내는 화초의 모습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그 생명을 바라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씨앗을 심어서 키우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꽃씨를 사다가 화분에 정성껏 심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 살피던 어느 날 드디어 싹이 돋아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곧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면서 꽃을 피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지요. 그러나 저의 기대감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돋아난 싹이 시들더니 그냥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에 씨앗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싹만 트고 곧 시들어 죽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씨앗에서 싹이 튼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시작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분명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고 원하는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싹만 튼 것을 모두 이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시작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 한 번 참석한 것만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기도 한 번 하고서는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약간의 기부와 작은 봉사활동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싹이 튼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당신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싹만 맺어버리고 그냥 시들어버리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거름이 되어 우리를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도, 또 많은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도록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결과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보다는 인내심으로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에드먼드 버크).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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