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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세상에 대한 헌신: 칼뱅주의, 노동, 자본주의(3)
칼뱅주의와 자본주의: 프랑스 사례
1550년대 프랑스에서 칼뱅파의 거점은 도시였다. 칼뱅주의는 주로도시에 거주하는 숙련공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호소력을 발휘했다.프랑스 귀족 계층 중에도 칼뱅의 개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이들이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귀족들은 원래 상인이었다. 장사하며 번 돈으로 말년에 귀족의 작위를 사고 귀족의 생활양식을 몸에 익힌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칼뱅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주요 인물인 앙뒤즈 남작과 바루 남작은각각 1535년과 1545년까지 상인이었다." 어쨌거나 개혁의 대의를지지했던 귀족들은 '오래된 귀족이 아니라 '새로운' 귀족인 편이었다. 개중에는 부르주아였다가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칼뱅의 지지자 대부분은 기능인, 소매상, 도제 상인공장주, 시골 공예가를 포함하여 다양한 직업군으로 이뤄진 공인계층이었다.
칼뱅파로 회심했다가 다시 가톨릭교로 돌아간 플로리몽 드 레몽은 "하룻밤 새 훌륭한 신학자가 된 금세공인, 석공, 목수, 그 밖의처량한 임금 노동자들을 신랄하게 비꼬는 글을 썼다. 1540년부터1560년까지 프랑스에서 이단 혐의로 소환된 사람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70퍼센트에 이르는 대다수가 이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지도부도 모두 귀족출신이고 귀족들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부지런히 몸을움직이는 하층 계급과 연결고리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3계급 대부분이 성직자 계급에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칼뱅주의를 지지하면서부터는 그런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교회를 개혁하는 데 희망을 걸었던 것 같다. 프랑스 도시들에서 활동하던 칼뱅파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성직자 계급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공인들이 이제 막 태동한 중산층을 대표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가치와 염원은 칼뱅의 종교 사상을 통해 존엄성과 종교적 가치를 부여받았고, 이들의 경제적 미래는 당시 제네바시에서 채택한 것처럼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정책 채택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봉건제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대착오적인 사회관을 고수하는 교회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제네바에서 나온 새로운 사상이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사상처럼 보였다. 칼뱅주의가 프랑스 경제를 해방하고, 나아가 칼뱅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소시민'들을 해방할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당대에 프랑스 안에도 이런 정책을 간청하던 이가 있었다. 베르나르 팔리시 Bernard Palissy는 《진정한 처방 Recepte véritable》이라는 책에서 프랑스 농업을 탈바꿈시켜서 16세기 초 프랑스를 괴롭혔던 것과 비슷한 식량위기를 예방할 정책을 제시했다." 1560년부터 1580년까지 파리시의 밀 가격에 관한 연구는 이 기간에 얼마나 자주 위기가 발생했는지를 보여 준다. 팔리시는 과학적 원리에 따라 만든 비료의 장점을 옹호했고, 나아가 일반적인 프랑스 경기 침체의 문제, 특히 프랑스 농업의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밝혔다. 농업은 개발도 덜된 데다 자원도 부족해서 제2차 산업으로 확장할 수 없는 상태였다. 농업에 자본을 투자해야만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농업 투자와 생산성 향상은 토지와 그 자원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데서 생긴 문제를 해결해 줄 방책이었다. 토지를 집중 개발이 가능한 상품이 아니라 지료를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수입원으로 간주했다. 자본은 프랑스 안에도 있었지만, 비생산적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토지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했다. 노동은 소작농에게만 맡겨 둘 것이 아니었다. 토지 소유 계급인 부르주아들 역시 일을 해야 했다.
팔리시의 책은 이미 제네바에서 채택한 재정 대책과 노동관을 분명하게 지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책은 또한 프랑스 공인들이 칼뱅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종교적 요인이나 사회적 요인 못지않게 경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아주 분명하게 밝힌다. 칼뱅주의는 단순히 귀족 계층과 프랑스 교회의 기성 권력에 적대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만약 프랑스에서 시행된다면 프랑스 경제를 탈바꿈시킬 정책을 갖춘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생산자 겸 행동가'로 묘사할 수 있는 무정형의 거대 집단인 프랑스 공인들은 칼뱅주의가 프랑스 사회에서 생산 계층의 가치와 염원을 지지하고 정당화해 주는 신념 체계라는 사실을 파악한 듯했다. 이들의 현재 상황과 미래 전망은 프랑스 교회와 영주들로 대표되는 사회 기득권층에 의해 철저히 제한되었다. 기득권층은 공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진보하지 못하게 장벽을 세웠다. 제네바는 1535년 혁명으로 사회 기득권층을 해체하고 공인 계층이 온갖 제약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칼뱅은 지엽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프랑스를 떠나 제네바로 피신하고 싶지는 않고 그저 부러운 눈으로바라보던 사람들은 1550년대와 1560년대 제네바의 종교, 정치, 경제 체제를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영향권 안에서 프랑스의 가치를 정립하려 했다. 프랑스가 칼뱅주의에 매력을느낀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칼뱅의 종교 사상 때문이다. 그러나또 한편으로는 1535년 제네바 혁명으로 도입된 새로운 정치 질서와 경제 질서 때문이기도 했다. 이 질서는 칼뱅의 사상이나 행동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러나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대개 이 질서를칼뱅주의의 구성 요소로 간주한다. 사실 '칼뱅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주제는 칼뱅의 종교적 태도와 제네바의 기존 경제정책 및 기관이 역사 속에서 우연히 합쳐진 혼합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칼뱅과 제네바는 대중의 상상 속에서 '칼뱅주의'와 한 덩어리로 합쳐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칼뱅주의에는 칼뱅이 아니라 제네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중요한 경제적 요소들(정치적 요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이 포함되어 있다.
칼뱅주의 노동관과 자본주의
17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와 칼뱅주의는 사실상 같은 공간에 있었다. 사회 이론가들은 바로 이 현상에 주목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그때까지 문화적 동질성을 갖추고 있던 플랑드르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란과 스페인 가톨릭 왕국의 재정복으로 갈가리 찢겼다. 200년 동안, 프로테스탄트를 채택한 지역은 북적이고 번영했지만, 가톨릭을 고수한 지역은 경기 부진과 낮은 생산성을 보였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산업과 자본의 잠재 능력을 개발한 이는 칼뱅파였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이들은 포괄적으로 프로테스탄트라고 총칭해서 말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더 특별히 칼뱅파가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에 루터주의를 강력히 지지했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와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2세 아돌푸스도 자국의 재정 자원과 산업 자원을 결집하고 싶을 때는 네덜란드 칼뱅주의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칼뱅주의자 겸 자본주의자인 네덜란드 귀족이 곧 스칸디나비아에 자리를 잡았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유럽 북부와 남부 사이, 아일랜드 북부와 남부 사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 칼뱅주의가 번성한 곳에서는 자본주의도 번성했다.
베버의 논문은 관찰 가능한 사실과 명백히 일치한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련성은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분석의 전제로 쓰인다. 따라서 그것은 입증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 설명해야 할 사항이다. 17세기 초 유럽의 경제 엘리트들이 칼뱅파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가톨릭 국가에서도 그랬고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도 그랬다. 산업과 재정을 집약할 수 있고, 도시와 국가의 상업 생활에 꼭 필요한 자극을 주입할 수 있는 운동은 칼뱅주의뿐인 것 같았다. 자본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칼뱅주의가 간접적으로 조성했다는 말은 꽤 그럴듯하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경향을 종교적으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이 시기의 종교 사상에 익숙한 기독교 신학자는 칼뱅주의 영성과 베버가 찾아낸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다룬 방대한 문헌에 진지한 비판을 쏟아 내는 책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그 책은 특정 종교 교리와 태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신학 지식이 없는 저술가의 작품이다. 베버 스스로 이러한 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논문 전반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사고방식'에서 '소명'이라는 칼뱅주의 교리로 아무렇게나 논의를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베버는 이 둘의 관련성을 자주 주장하되, 좀처럼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한 번도 이론적으로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칼뱅의 추종자들이 새로 강조한 예정론은 그 자체로 새로운 교리로 오해받곤 했다. 마치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이 종교개혁 이전에는 없었고,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한쪽에서만 아는, 신학적으로 참신한 개념으로 오해받은 것처럼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357-373쪽), 후기 칼뱅주의 사상에서 예정, 선택, 섭리와 같이 '부르심'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여긴 이유가 있다. 신학적 체계화 및 방법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체계만큼 빈틈없는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과 독일에서 두 운동이 경쟁한 탓에 (358-361쪽) 사회적 실체로서 칼뱅주의를 루터주의(특정 문제에 관하여 조금 다른 견해를 밝혔던)와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위스 사학자 헤르베르트 뤼티(Herbert Lüthy)는 '칼뱅파의 예정 개념을 성공의 길로 보고 섣불리 정신분석을 시도하려고 거꾸로 달려드는' 역사가들의 성향을 한탄한다. 이들은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초기의 신학적 기반에서 칼뱅파의 예정 개념을 따로 떼어 내려고한다. 칼뱅의 이중 예정 교리는 14세기 아우구스티누스 르네상스(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과 관계가 있는, 신학적으로 참신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칼뱅만큼 엄격한 이중 예정 교리를 강력히 옹호했던 14세기의 두신학자 그레고리우스 드 리미니와 우골리노 디 오르비에토는 자기들이 지지하는 예정론 때문에 경제적 행동주의나 원시 자본주의자의 태도로 기우는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베버는 절대적인 이중 예정 교리를 옹호하는 수준이 각기다른 칼뱅파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르미니우스파는 이 교리를 사실상 버렸지만, 정통 칼뱅파는 이 교리를 고수했으며 심지어 보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연합주'라 불리던 네덜란드 북부 일곱 개 주에서 놀라운 부를 창출한 것은 아르미니우스파의 암스테르담이었고, 칼뱅파의 헬데를란트는 낙후된 지역으로 남았다.베버의 이론에 따르면 그 반대가 되어야 했는데 말이다.
베버가 비중 있게 해석한 '노동관'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뱅파 노동관의 기원은 목회적인 동시에 신학적이다. 초기 종교개혁에서 논의했던 핵심 질문 중 하나는 하나님의은혜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전에 했던 행위나 전에 세운 공로를 조건으로 은혜를 베푸시는가? 만약 인간의 행위보다 은혜가 앞선다면, 어떻게 '반反율법주의'(적당한 표현이 없으니 영적 무정부주의라고 해 두자)의 위협을 피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은혜와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잇는 핵심 고리를 끊지 않고 선물과도 같은 은혜의 성격을 옹호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초기에 이 문제에 관해 합의가 이뤄졌고, 칼뱅은 그 관점을 계승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 없는 선물로서,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앞서서,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진다. 그렇지만 은혜는 변화시키는 특질, 그것을 받는 사람 안에서 원하는 효과를 내는 능력이 있다.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갱신과 갱생 과정(칼뱅 시대부터 '성화'로 알려졌다)의 핵심은 신자가 선한 일을 하도록 동기와 힘을 불어넣는 것이다. 신자 안에 은혜가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지가 선행이라고 보았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뱅은 은혜가 순전한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은혜는 선물이지 보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의무가 없다. 은혜라는 선물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너그러움이다. 은혜는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칼뱅에 따르면, 예정론은 선물과도 같은 은혜의 특징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III.xxi.1).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합당한 만큼 확실하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다음과 같은 대조적인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밝혀 준다. 곧 하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의 소망으로 받아 주시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으신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은혜는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렇다면 명백한 의문이 떠오른다. 그가 선택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은혜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이 탐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은혜의 존재는 은혜의 결과를 통해 알아챌 수 있는가?
베버는 칼뱅이 이런 질문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를 보면 정반대다. 칼뱅은 불신앙과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구적인 특징이라고 말한다(III.17-18). 칼뱅은 그러한 의심을 반박할 신학적 또는 영적 수단을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그리스도 안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도 한 방편이다(III.24). 그러면서도 칼뱅은 '선행'이라는 좀 더 실제적인 수단도 활용하라고 호소한다. 칼뱅은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그런데도 선행을 확신의 근거로 이해하게 허용한다.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통치하시는 증거”가 될 수 있다(IIIxiv.18). 신자들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IIIxiv.6-11). 오히려 그들의 구원이 행위로 입증된다(III.xiv.18). “선을 행하게 하는 은혜야말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IIIxiv.18). 행위를 선택의 증거로 여기는 이 경향은 중요한 목회적 의미가 담긴 노동관을 명확히 표현하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신자는 세속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자기 양심에 확언해 줄 수 있다.
자신이 선택받은 자가 맞는지 불안해하는 마음은 칼뱅주의 영성의 보편적 특징이고, 일반적으로 칼뱅과 설교자들과 영성 작가들이 심도 있게 다루는 주제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대답은 대체로 같다. 선을 행하는 신자들은 실제로 선택받은 자들이다. 테오도르 드 베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써 소명과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선행은 소명과 선택의 근거가 아니다. ... 하지만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과 따라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우리 양심에 증언해 준다."
이번에도 요점은 같다. 행위는 구원을 증명하지만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행위는 구원의 결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귀납적 추론 과정을 통해 신자는 선행이라는 결과에서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추론한다. 인간이 하는 도덕적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신자가 자신이 실제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여 불안해하는 양심을 안심시키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관념은 보통 '실천적 삼단논법'으로 서술되는데, 다음과 같은 논거로 이루어져 있다.
‘선택받은 모든 사람은 선택의 결과로서 어떤 표징을 보인다. 그런데 내게 그런 표징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선택받은 자 중 하나다.’
이 실천적 삼단논법은 신자의 삶에 어떤 표징(signa posterioraiora)이 나타나는 데서 선택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근거를 찾는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표징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자신과 이 세상에 증명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상당하다.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도 표징을 보이는 방식 중 하나다.
'언약 신학'이 도입되면서 이 관념은 더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되었다. 상당히 많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언약 신학'이라는 개념은 칼뱅주의 영성과 목회신학을 더 단단한 신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 케임브리지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1558-1602)는 <한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지 심판 아래 있는지 밝혀 주는 논문>이라는 엄청난 제목을 붙여 1589 년에 발표한 글에서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조건에 관하여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이다. 이 언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께 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조건을 이행하면 당신이 그의 하나님이 되겠노라고 맹세하셨다. 인간은 주께 충성을 맹세하고 둘 사이에 맺은 계약 조건을 이행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하나님은 신자들과 계약을 맺으셨고, 이 계약으로 신자들은 도덕적인 행동을 한다는 조건 아래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즉시 신자들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해도 된다.
따라서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행동주의를 지향하는 초기 칼뱅파의 성향은 중요한 신학적 토대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신자는 자신의 소명을 이뤄 내고, 선택과 관련하여 마음의 평화(청교도들이 항상 소중히 여기지만 얻기 어려운 것)를 얻을 수 있다. '소명 vocatio'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선을 행하라는 명령은 꼭 이 세상의 특정 직업(예를 들면, 푸주한이나 제빵사나 촛대 제작자가 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자신과 이 세상에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존 데이비드슨(John John Davidson,1549-1603) 이 이 노동관의 근거를 잘 설명해 준다. 그가 쓴 《교리문답catechisme》에는 이런 진술이 나온다.
스승: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제자: 성화를 통해 거듭남의 네 번째 열매를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 자신과 이웃의 덕성을 북돋는 것입니다.“
17세기 중반,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을 막론하고 유럽 교들 사이에서 일상 윤리에 관한 전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교리나 교회 정치 문제에서 어떤 차이가 있든지 주요 교회들, 즉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와 칼뱅과는 모두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자질을 하나같이 강조했다. 바로 도덕적 진지함, 헌신, 양심적 태도다. 이 시점에서 칼뱅주의를 구별 짓는 것은 도덕적 진지함이 아니라 도덕적 진지함이 담당하는 신학적·영적 기능이다.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는 개념은 칼뱅주의의 특징이고 이것의 독특한 존재론적 의의는 칼뱅주의 예정론이 불러일으킨 불안과 관련이 있다. 이 교리가 세속적 행동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이론적으로 예정은 정적주의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장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를다. 어떤 이가 선택을 받았다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애플 이유가 뭔가? 그러나 사실 선택의 결과는 정반대다. 선택받은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고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노동을 대하는 이런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자세 덕분에 16세기에 칼뱅파는 진보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칼뱅주의의 이 차별성은 상당한 역사적 침식을 겪은 듯하다. 이 시기에 정통 칼뱅파의 예정 교리와 이 교리가 낳은 불안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집단들(아르미니우스파, 메노파, 독립과 경건과 헤이지파 등)도 세속적인 활동에 전심전력하는 듯했다. 노동을 통해 선택받은 것이 사실임을 보여 줘야 한다는 이론적 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칼뱅주의와 비슷한 사회 활동 양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일상적인 활동에 헌신하고 투자하는 칼뱅주의의 독특한 특성이 신학적 기반에서 분리된 채 본래의 종교적 뿌리와는 관계없이 서유럽 사회에 흡수된 듯했다. 16세기와 17세기 초반에만 해도 칼뱅주의의 독특한 특성이었던 것이 1650년경 북유럽 부르주아의 공통 화폐가 되었다.
칼뱅파 노동관의 신학적 기반이 침식되면서 17세기 중반 훌륭한 칼뱅파 사업가 중 많은 이가 실제로 정통 칼뱅주의 종교관에서 멀어졌다는 트레버 로퍼의 논평에 신빙성이 생겼다" 베버는 칼뱅파가 적극적으로 이 세상일에 헌신하는 밑바탕에 예정 교리와 거기서 비롯된 존재론적 불안이 있다고 이해했는데, 이제 그들이 지지하는 '칼뱅주의'는 그런 엄격한 교리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헌신했지만, 원래 그 헌신을 불러일으킨 종교적 동기는 대부분 증발해 버린 듯했다. 세속적인 태도는 계속 유지하면서 그 태도가 원래 뿌리박고 있던 종교적 토대는 거부하거나 잊어버리거나 제쳐 두었다. 노동과 세속적 행동주의에 관한 17세기 후반의 일반적 태도(더는 칼뱅주의만의 독특한 특성이 아닌)는 일찍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문제가 불러일으킨 불안의 잔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불안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한 덕분에 칼뱅주의는 갑자기 서유럽 경제활동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17세기가 흘러가면서 다른 이들도 칼뱅주의의 태도와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신 종교적 압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종교적 압박이 있었기에 그런 태도와 방법이 나온 것인데도 말이다.
베버 테제의 근본적인 난제는 한쪽에는 노동관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본의 축적과 재투자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명확한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노동관은 '실리' 활동과 관계가 없다. 칼뱅파 노동관을 아주 제한적으로 경제에 응용한다 해도 그 바탕에는 금욕주의가 있다. 베버는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이 금욕주의를 정통 칼뱅주의 영성의 특성으로 보았다. 신자에게 노동으로 얻은 재정적 보상을 즐기지 못하게 하면, 손에 들어온 자본을 축적하거나 재투자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칼뱅주의는 선택을 매듭짓고 적절한 세속적 활동을 통해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자신과 이 세상에 증명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 활동의 구체적인 방식은 열려 있었다.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이 방식은 역사적 우연의 문제로 시대와 역사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1603년부터 1640 년까지 잉글랜드 칼뱅주의 (일반적으로 청교도주의로 알려진)의 특징은 돌풍처럼 휘몰아친 정치적 행동주의였다. 정치 활동은 의회파와 왕당파의 싸움, 찰스 1세의 처형, 청교도 연방의 시작으로 정점을 찍었다.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의 말대로 정치는 "행동으로 이뤄진다. 1660년에 청교도 연방이 실패하고 찰스 2세가 복위한 뒤, 청교도들은 자기들이 잉글랜드 정계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깨닫고, 문만 열려 있으면 어떤 분야에든 뛰어들어 전심으로 노력하고 헌신했다. 정계에서 물러나기로 신중히 결정한 덕분에 청교도주의는 경제적 활력의 시대를 맞았다. 중요한 사실은 베버가 칼뱅주의와 경제적 행동주의의 관계를 입증하는 사례로 1660년 이후에 집필 활동을 한 잉글랜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와 존 버니언에게 주로 의존했다는 점이다. 베버는 단순한 역사적 우연 위에 크고 튼튼한 이론상의 구조물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세상을 긍정하는 칼뱅의 신학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필연적인 듯하다. 잉글랜드 설교가 겸 신학자 존 웨슬리 John Wesley는 이 관계를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이치라는 게 있는데, 어떤 종교의 부흥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산업과 절약을 낳게 마련이고, 산업과 절약은 부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가 쌓이면, 교만과 분노와 세상에 대한 사랑도 다 함께 쌓이는 법이다." 웨슬리는 번영이 신앙에 어려움을 불러올 것으로 여기지만,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초석인 산업과 절약을 낳게 마련”이라고 믿는다.
칼뱅주의와 자본주의가 정확히 어떤 관계든 간에, 칼뱅주의가 서구 문화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노동, 특히 육체노동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물품을 얻는 불가피하고 지루한 방편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 중에 가장 칭찬할 만하고, 이 점에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활동이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으면,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삶의 전 영역에 비판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할 수 없는 자들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제네바로 피신한 프랑스 귀족들처럼 일할 의지가 없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노동'은 '보수를 받는 일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원과 재능을 부지런히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은 심오한 영적 활동, 생산적이고 사회에 유익한 형태의 기도라 할 수 있다.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이 노동이라는 한가지 행동으로 결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능을 수행하고 개인에게 구원의 확신을 안겨준다. 노동을 대하는이 새로운 태도는 실제로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이 태도는 소시민이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상적 활동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리처드 백스터는 "시간을 아끼라"고 했다.이 공통된 명령을 통해 칼뱅주의가 혐오해 마지않는 사회적 차별이없어지고 모두가 평등해진다.
'가능하다면 피해야 할 불쾌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활동'에서'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긍정하는 품위 있고 영광스러운 수단'으로 노동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는 칼뱅주의가 서구 문화에 남긴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다. 마지막 장에서는이 부분을 더 살펴보려 한다. 그런데 현대 서구 문화의 다른 측면중 칼뱅과 제네바시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현대 세계의 태도와 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칼뱅주의는 얼마만큼이나 영향을 끼쳤을까? 이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칼뱅이 현대 서구 문화에 끼친 영향을 몇 가지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