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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 : 22 - 표적을 구하고 찾으나
고전 1 : 22 - 표적을 구하고 찾으나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표적(헬, 세메이온)은 ‘증거, 표적’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놀랍고 신기한 어떤 일이 아니다.
표적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진리를 증거할 목적을 가진 이적을 의미한다.
1]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
* 마 12: 38 -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마 16: 1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 막 8: 11-12 -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 요 6: 30 -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하였는데, 표적(세메이온)이란 자연 현상을 초월한 경이로운 현상을 일컫는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하는데, 유대인만큼 이적을 많이 경험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족장 시대부터 출애굽을 거쳐 사사기, 왕정 시대, 포로 시대를 거쳐 그 후 해방되기까지 그들에게 놀라운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표적의 효과는 항상 일시적일 뿐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 12: 39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과 이적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다.
* 마 12: 39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해서도 이 땅에서 다윗 왕국을 회복시킬 강력한 왕으로 오시는 이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께서 이적을 베푸실 때 수없이 따라다니다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십자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신적인 왕국을 세우는 데 실패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표적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표적이 사라질 때 신앙도 사라지는 줄타기와도 같은 매우 위험한 신앙임을 알 수 있다.
2]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 행 7: 22 -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는데,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동시에 지혜의 대명사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 사도는 롬 1: 14에서 사람을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분할 때 헬라인과 야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결국 현세적 인생살이에 필요한 지혜에 불과하다. 이는 자신의 내세를 구원할 수 없는 제한된 지혜에 불과하다.
본 절에서 유대인이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이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곧,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영적 생명을 얻게 해주는 참 지혜를 구하지 않고 헛된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
3]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바울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다. 다른 것은 모두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그가 말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내용이 아니라 신앙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를 매우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 그의 서신들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그중의 하나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역사에서 일어난 다른 사건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사건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1)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
바울은 유럽의 대표적인 두 가지 사상을 예로 들고 있다. 하나는 유대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헬라 사상이다. 유대 사상은 종교적이며, 헬라 사상은 철학적이다. 두 사상은 지난 2천 년 동안 유럽의 모든 정신, 문화 세계의 근거가 되었으며, 기독교와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미 우리 기독교에는 유대교적 뿌리가 내면화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우리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배에도 역시 유대교가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헬라 사상은 교부 시대의 기독교와 연관이 아주 깊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어거스틴의 신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2천년 교리사는 이런 헬라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전되어 왔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분명히 유대교가 아니며 또한 헬라 철학이 아니다. 비록 유대교의 유산을 물려받긴 했지만 결정적인 점에서 유대교와 구분되며, 헬라 사상의 철학적 착상에서 신학의 깊이를 심화시키지만, 결정적인 점에서 헬라 철학과도 다르다. 그 준거가 곧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차원에서는 유대교와 같은 길에 서 있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며, 신앙을 철학적으로 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헬라 철학과 비슷한 사유의 길을 걸어왔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는 말씀이다.
(2)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
바울은 본문에서 유대인은 표적(기적)을 구한다고 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의 역사에는 이런 기적이 많았다. 특히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역사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천년 이상의 성경 역사에는 끊임없는 기적적인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다. 거론하자면, 이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한 기적을 경험했으며, 가나안을 정복해나갈 때도 역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뒤의 모든 역사도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로 이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적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와서도 당신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라고(마 12: 38) 요구할 정도였다.
이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다. 유대인들의 이런 종교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동의 지정학적 조건 안에서 자기들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손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약소민족인 그들의 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 바벨론으로 이어지는 주변의 강대국과 대결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기적뿐이었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선민인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증거가 바로 이런 기적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요구한다. 간혹 간증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드라마틱한 증거들이다. 사업이 망해 가는 중에도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니 오히려 사업이 성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런 극적인 체험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형태는 이런 증거를 확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은 우리를 어떤 확신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기에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원리들이 거의 똑같이 적용된다. 특히 요즘의 젊은 연인이나 부부들끼리 서로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증거를 요구한다. 그냥 마음이나 느낌만으로,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존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주 특별한 증거를 원한다. 예컨대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 100송이 장미를 받는다거나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를 받는 것을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 십자가를 전하는 기독교인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이 다르다고 말하는 바울의 주장은 정당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였지만,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종교는 기적을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십자가를 증언했다. 여기에 기독교가 종교를 넘어서는 근본 토대가 있다. 이 말은 곧 기독교는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구하고 있는 기적은 모두가 인간 중심이다.
구약성경의 모든 기적적인 사건들을 보라. 그것은 인간이 잘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아이 성이 무너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늘 이런 관심으로 살아간다. 이 세상살이도 그렇고 종교 생활도 역시 그렇다. 이렇듯 기적을 구하는 종교적인 사람의 눈에 십자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을 위해서 어떤 확실한 증거를 찾아가고 있는 마당에 이런 잘 사는 일과는 상관없는 사건은 가능한 기피해야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죽었다는, 없다는 증거에 가깝다. 그렇다면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실패의 징표라 할 십자가를 전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삶은 패배주의라는 말씀일까?
기독교의 삶이 유대 종교가 추구하고 있는 승리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패배주의도 아니다. 십자가는 외면상 분명히 인간의 패배다. 2천년 전 그 당시에 누가 생각해도 이 십자가는 실패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패배주의, 즉 패배의 합리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과 신뢰다.
예수님 이외에도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다. 그들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전혀 다른 의미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로마군에 의해 죽었다. 일종의 애국심 때문에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애국심이나 단순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의한 결과였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프로그램화된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함으로써 갈 수밖에 없었던 죽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4) 신앙생활의 기준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나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다. 이러한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내가 얼마나 잘 되는가에 있다. 그러한 결과를 놓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살게 되면 만사가 잘되고, 심지어는 물질의 축복도 받으며 산다고 주장한다.
요즘 기독교 안에서 소위 <청부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청부론을 주장하는 동기는 순수하지 못한 것 같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이 물질적인 관심에 빠져 있다. 로또 복권 현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시대적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는 신앙 형태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양심껏 노력해서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 있으며, 그것을 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청부론의 일부분이 옳고, 그러나 일단 부를 축적한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같이 기독인으로 떳떳한 일은 못 된다는 점에서 청부론의 한계가 있다.
더구나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여전히 기적을 구하는 종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런 부(기적)에 대한 논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생각의 차원을 다른 데 놓는 일이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에 우리 삶의 토대를 놓아야 한다. 이것이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구별되는 초점이다. 여기 모인 청년들의 삶은 각양각색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적게 한 사람도 있고, 재정적으로 넉넉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사랑하는 짝을 만난 사람도 있고, 혼자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니까 기적을 통해서라도 채워 달라고 기도한다면, 아직 유대인들의 종교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크게 책망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인으로 살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즉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마음을 두는 삶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도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셨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라는 말씀이다. 내 삶이 얼마나 윤택하게 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키라는 말씀이다.
(5)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달리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 이 양자는 구하는 게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다. 유대인들의 기적이나 헬라인들의 지혜나 모두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입이다. 다만 유대인들은 그런 것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얻어보려는 것이며 헬라인들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얻으려 한다. 이렇듯 인간의 사유 능력에 기대서 어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인간이 그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본질에 속한다. 이게 바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철학이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헬라(이방)인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일컫고 있는 이방인들은 헬라인과 로마인을 중심으로 한 모든 문명인을 가리킨다. 문명이 발달할 곳에서는 철학이 발달한다. 그런 철학에 근거해서 예술, 법,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이런 문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의 품위다. 인간의 능력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내용들을 확보해내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십자가는 인간의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일 뿐이다.
십자가는 종교와 철학이 일구어놓은 인간 문명과 반대의 길에 있다. 따라서 당연히 십자가는 미련하게 간주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 세계는 늘 문명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만 전개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여기서 시시콜콜하게 열거할 필요도 없다. 이 세계가 얼마나 화려하게 변화되어 가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는 지나칠 정도로 시장경제나 상품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끊임없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도 이런 시대정신에 영합하고 있다.
교회가 문명을 모방하고 부러워하며, 세련된 겉모습을 치장하는데 마음이 분부하다. 이렇듯 문명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작은 교회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목 회에 성공했다느니, 실패했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인간의 모든 기준과 평가를 무효화시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힘의 질서와 문명의 질서에 기울어져 있다.
저는 오늘 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문명 생활을 매도하려는 게 아니다. 바울도 역시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인간은 자기의 삶이 안정되고 가능한 대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세련된 문명 안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기독인이라고 해서 역시 이런 요구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종교심과 철학적 지혜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런 영향을 받더라도 근본은 다르다. 우리에게 여전히 유대인 같은 습관이 남아 있거나 헬라인 같은 태도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사실에서 구별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사건은 종교와 철학이 생산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부활 생명이 담보되어 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4-25절). 종말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본성과 철학적 지혜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다. 그게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것을 알아 가는 이것에 바로 우리 삶의 의미와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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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사람은 망설이지만 시간은 망설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오늘도 내일도...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최고의 하루를 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