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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들의 멸망
슥 9:1-7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2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슥 9:1-7 / [이스라엘 영토 확장의 예언] 여호와께서 하드락 지역을 통과해 가셨고, 다메섹을 거처로 삼으셨다. 아람 족속의 성읍들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2) 다메섹에 인접한 성읍 하맛도 주님의 것이다. 두로와 시돈이 아무리 영리하고 빈틈이 없다고 하여도, 그들도 주님의 것이다. 3) 비록 두로가 철저하게 무장을 하고, 지극히 부유하게 되어 은을 흙덩이처럼 쌓아놓고, 금을 길바닥의 돌덩이처럼 모아 놓았다고 하여도 4) 주께서 성의 군인들을 바닷속에 집어 던지셔서 그 성을 점령하실 것이다. 그때에 두로는 불에 탈 것이다. 5) 아스글론이 이런 일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다. 가사도 그 일을 보고 두려워서 벌벌 떨 것이며, 에그론도 무서워서 떨 것이다. 그 성의 희망이 수치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가사는 정복을 당하여 왕이 피살되고, 아스글론의 주민들은 모두 잡혀가서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다. 6) 아스돗에는 혼합 민족이 와서 정착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블레셋 족속의 자주권을 박탈하겠다. 7) 혼합 민족에게는 내가 짐승의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못하도록 가르치고, 돼지고기와 같이 부정한 고기도 먹지 못하도록 가르치겠다.' 그런 후에 그들도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새 지파로 채용될 것이다. 그때에는 에그론의 주민들도 여부스 족속과 같이 될 것이다.
성전이 완공된 이후 다윗 왕조의 회복과 부흥이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한 원수들에 대하여 엄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1-4) 하나님께서는 다메섹과 하드락, 그 접경 성읍인 하맛과 항구 도시로 유명하였던 두로와 시돈을 심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중 두로와 시돈은 고대 페니키아의 중심지로 나무, 금속, 석재, 염료 등의 상품으로 유명하였고 활발한 무역을 통해 풍성한 재물을 축적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이 두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였습니다(사 23:1-12). 그들의 지혜는 세속적 지혜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요새를 쌓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 은, 재물을 쌓기 위한 상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는 대신 자신과 재물을 굳게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그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약 200년 후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가 두로를 파괴하고 그 성읍을 불에 태움으로 이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겔 26-28장).
블레셋 주요 성읍에 대한 심판(5-7)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은 고대 블레셋의 주요 성읍들로서 유다의 서쪽 지중해 동쪽 연안에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그 성읍들은 두로의 처참한 멸망을 목도하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들은 두로의 멸망이 자신들의 운명이 될 것을 직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스글론은 두로의 멸망을 보고 무서워하고, 가사는 두로의 멸망을 보고서 마음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몸이 심히 아플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에그론은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14Km 동쪽 내륙에 위치해 있었지만 오늘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블레셋 사람들이 행하던 희생제물의 피와 제물을 먹는 행위를 제거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은 블레셋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처럼 하나님께 굴복하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적용: 불신앙과 악이 심판받는 날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날은 성도들에게는 해방과 승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날 독일 학생들은 유대인 대학살과 기타 나치 범죄들을 자세히 배웁니다. 반면 일본 학생들은 자기 나라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것은 배우지만 남경 대학살, 포로에 잔인한 대우, 미국인 포로 생체 해부, 일본군 군수 물자로 징집된 외국인 ‘위안부’ 등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습니다. 그 결과 중국, 한국, 필리핀 같은 국가에서는 아직도 그 원한이 스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죄가 많은 것은 분명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이 더 큰 악입니다. 사람은 통념처럼 ‘죄인’과 ‘의인’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죄인으로 나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과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그것입니다.
< 설 교 >
하드락 땅에 임한 경고
스가랴 9:1~10 / 피영민 목사
서 론
이 세상에는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강한 나라도 있고 약한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과연 무엇이 진짜 강한 것인가에 대해 혼동이 올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바울은 자신이 약한 것이 실제로는 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강한 것이 사실은 약한 것이고 약한 것이 사실은 강한 것이라고 하니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본 스가랴 1~8장은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묵시적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9~14장은 시적인 서술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가랴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문장 기록형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스가랴 1~8장을 기록한 사람과 9~14장을 기록한 사람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는 묵시형태로 주실 수도 있고 서술형태로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묵시형태로 주시면 묵시로 기록하고 서술형태로 주시면 서술로 기록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기 때문에 문장의 기록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기록자가 다르다고 보는 것은 논리가 빈약한 것입니다.
어떤 문장형태로 기록되었든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1).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들도 가끔 만나면 성경을 읽고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깨달으려면 우선 믿고 순종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아봐야 괜히 아는 척만 하고 더 교만해져서 믿음을 갖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스가랴 9장 1절은 오늘 말씀의 표제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슥 9:1). 그런데 스가랴 12장 1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고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슥 12:1). 스가랴 9장 1절은 경고의 대상이 하드락 땅이고 스가랴 12장 1절은 이스라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드락 땅이 일단 어딘지는 잘 몰라도 이방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8~14장은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여기서 경고라는 말은 영어로 ‘warning’이 아니라 ‘burden’(부담, 짐)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Ⅰ. ‘하드락 땅’이란 무슨 의미인가?
스가랴 9장 1~10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어는 ‘하드락 땅’입니다. 하드락 땅은 스가랴 9장 1절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이 지명은 다른 성경이나 문헌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석들을 참조해보니까 하드락 땅을 대부분 시리아에 있는 한 도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첫째, 하드락 땅이라는 지명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하드락 땅의 정확한 위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드락의 어원적 의미를 정확하게 밝힌 사람은 A.D. 4~5세기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Jerome)이라는 사람입니다. 제롬이 번역한 성경을 벌게이트(Vulgate)라고 합니다. 제롬이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라틴어는 그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가 지배적인 언어였는데 벌게이트가 나오면서 라틴어가 중요한 언어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가 현재 영어, 독일어, 불어 같은 언어의 기원이 라틴어가 된 것입니다.
제롬의 견해에 따르면 하드락이라는 단어는 스가랴 선지자가 만들어 낸 상징적인 언어라는 것입니다. ‘하드’는 ‘strong’(강한)이란 뜻이고 ‘락’은 ‘weak’(약한)이란 뜻으로 결국 ‘하드락’은 강하면서도 약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드락은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강하면서도 약한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강한 자는 약해질 것이고 약한 자는 강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약한 분이지만 강한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세 가지 의미가 하드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B.C. 520~518년인데 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메대와 바사”입니다. 바벨론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선왕인 느부갓네살이 가지고 온 성전그릇을 가지고 술을 마시는데 담벼락에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결국 바벨론은 메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메대 바사는 페르시아와 메대 연합군을 의미하는데 페르시아가 메대보다 더 강했습니다. 다니엘 7장 5절을 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 넷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짐승이 곰이라고 했습니다. 이 곰은 어깨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어깨가 기울어진 곰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메대 바사입니다. 어깨가 올라간 쪽은 힘이 강한 페르시아이고 어깨가 내려간 쪽은 힘이 약한 메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다니엘 8장 3절을 보면 강가에 두 뿔을 가진 수양이 섰는데 한 뿔은 크고 다른 뿔은 작았습니다. 큰 뿔은 페르시아를 의미하고 작은 뿔은 메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드락이 의미하는 강하고도 약한 나라는 메대와 파사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스가랴 선지자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메대 바사를 향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사람들이 현재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이나 나라를 향해서는 은밀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메대 바사가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하드락 땅에 심판이 임하는 경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메대 바사는 결국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젊은 나이에 죽고 그의 네 장군들이 나라를 나눠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메대 바사는 강했지만 그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결국 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강하고 믿는 사람이 약해도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를 끌어내려 약하게 만드시고 약한 자는 높여서 강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드락이라는 것은 우리가 약해도 기죽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강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매우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에 나가보면 모니터 상표 대부분이 LG입니다. 그리고 길거리 간판에는 삼성로고가 크게 붙어 있습니다. 자동차도 이제는 현대 자동차를 길거리를 누비고 다닙니다. 벤츠나 BMW와 같은 독일 자동차를 제외하면 한국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알아줍니다. 이제는 외국에 나가서 괜히 모르는 영어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터키나 중국에 가보면 시장상인들이 한국말을 정말 잘합니다. 약했던 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강한 나라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강했던 러시아나 이집트도 요즘은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몇 개 못 따지 않았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이 이끌던 그리스도 복지를 한다고 하더니 결국 경제가 무너져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강한 자는 낮추시고 약한 자는 높이십니다. 그런데 아무나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약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 있는 자를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Ⅱ. 강한 자는 약해지고 약한 자는 강해진 구체적인 예
스가랴 9장 1~8절까지는 그 실제적인 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메대 바사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 주변 세 나라가 있는데 시리아(Syria), 페니키아(Phoenicia), 블레셋(Philistine)입니다.
시리아의 중요한 도시는 다메섹과 하맛인데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고 하맛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다메섹과 하맛이 지금은 번창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너희를 약하게 만드실 것이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페니키아는 이스라엘 서북쪽의 지중해에 붙어있는 나라입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유명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이 사람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슥 9:2~4) 페니키아는 얼마나 놀라운 나라인지 지혜가 많아서 무역을 통해 은을 티끌같이 벌고 정금을 거리에 진흙같이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는 자기를 위해 보장을 세웠다고 나와 있는데 큰 요새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두로가 지중해 연안에 붙어있었는데 침략을 많이 당하니까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섬을 사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높은 성벽을 쌓고 신두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배가 없으면 공격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이곳은 멸망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배가 없으니까 육지에서부터 흙으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앞에다가 성벽보다 더 높게 흙으로 담을 쌓아 공격하여 B.C. 333년에 그곳에 살던 1만 명을 죽이고 3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페니키아는 아프리카 북부에 카르타고라는 도시도 만들었습니다. 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B.C. 3세기에 일어난 포에니전쟁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알프스산을 넘어 로마를 압박했던 유명한 장군입니다. 그런 장군이 있던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5절 이하에는 블레셋 도시들이 나옵니다. 아스글론, 가사, 에글론, 아스돗 이 네 도시들이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도덕적으로 부패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렉산더 대왕을 보내 그들에게서 임금을 제하여 버리고 거민들을 사라지게 하고 잡족이 거하는 도시가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블레셋은 망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가고 그 땅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시리아도 망하고 페니키아도 망하고 블레셋도 망했습니다. 강한 나라들이였지만 하나님께서 알렉산더 대왕을 보내 모두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못살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올림픽에 나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이 강한 나라가 되었느냐? 바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는 약해지고 약한 자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슥 9:8). 알렉산더 대왕이 B.C. 333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했겠습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침공하려 했던 알렉산더 대왕에게 대제사장이 제사장복을 입고 알현한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절을 하며 여호와를 섬기는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자 예루살렘을 그냥 지나갔다고 요세푸스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주셨고 메대 바사는 강했지만 약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Ⅲ. 메시야는 약하나 강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면 약한 분이시지만 사실은 강한 분이십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마태복음 21장 1~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옷을 길거리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내용이 마태복음 21장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9장 9절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국가의 어느 왕이 나귀를 타고 다닙니까? 왕들은 말 중에서도 준마를 타고 다니지 나귀를 타고 다니는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약해보이는 존재로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야는 약해보여도 약한 분이 아닙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10). 당나귀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 앞에 칼도 물러가고 병거도 물러가며 활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적이고 범우주적인 통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만큼 큰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만큼 큰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약해보이고 목사들이 약해보여도 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통치하는 참된 왕이시고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분은 무기를 가지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복음을 가지고 정복하시는데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슥 9:10). 심지어는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슥 9:6~7). 여부스 사람은 원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민족인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이스라엘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세웠다고 나옵니다. 약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야가 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 론
오늘날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강해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약해보입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는 하드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강한 자를 끌어내릴 것이고 당신을 섬기는 약한 자를 높이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강한 자가 약해지고 약한 자가 강해지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흥하고 망하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능력을 힘입는 자는 약해도 강해지고 가난해도 부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병들어도 건강해지며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죽겠지만 다시 생명의 부활을 하여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악을 즐기는 사람들은 지금 아무리 강해도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의 참된 강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약하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강해질 것입니다
겸손
슥 9:1-8 / 금빛돌
스가랴서는 1장에서 8장까지 전반부와 9장부터 14장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성전건축을 시작하지 2년이 지난 후에 성전건축이 반 정도 되었을 때 성전건축과 관련된 8가지의 환상과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는 성전건축이 다 끝이 나고 난 다음 40년이 지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제 성전건축이 끝이 나면 더 이상 주위의 이방나라들을 통한 위협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이 끝이 난지 40년이 되어도 여전히 주위의 이방나라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 9장의 말씀입니다.
9장 1-4절에 나오는 하드락, 다메섹, 하맛, 두로,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이방도시들의 이름들입니다. 3절을 보시면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고 합니다. 두로가 얼마나 부요한가 하면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까지 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4절을 보시면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란 하나님께서 헬라제국의 알렉산더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북부지방을 물리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 이 예언이 역사가운데 그래도 이루어져서 이들 도시들은 다 멸망하였습니다.
또 5절부터는 이스라엘남부지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히 6절에 보시면 블레셋이 나오는데 이 블레셋은 대대로 이스라엘나라의 가시노릇을 했던 족속입니다. 이 블레셋이 오늘날로 말하면 팔레스타인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6절 하,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결국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이 되는데, 블레셋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을 성지순례를 다녀왔던 분들은 이스라엘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블레셋 즉 팔레스타인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지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방나라들은 멸망을 당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보호해주시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8절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실재 있었던 일입니다. 헬라제국의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하였는데, 이스라엘주위나라들은 멸망을 시켰는데, 예루살렘을 쳐들어오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꿈이 나타나서 치지 말라고 하셔서 예루살렘은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치지 못하도록 했겠습니까? 8절 하 반절에 보면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 당신의 눈으로 친히 보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나라들이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은 멸망당하지 않고 보호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예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이 세상의 모든 이방나라들과 사탄의 권세는 다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눈으로 친히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가운데 돈을 의지하고 육신을 의지하고 권세를 의지하는 교만한자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조건 보호하신다는 말씀으로 보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아래에 보면 나귀를 타고 오신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호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만한 이방나라와는 달리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역사나 미래의 역사나 현재의 역사가운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멸망을 시키십니다. 그런데 겸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신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고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교만한 부분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낮아진 모습으로 겸손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눈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는 그 높은 곳은 항상 멸망으로 내려가는 미끄럼틀 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낮은 곳을 주목하시며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낮아진 자로서 겸손하게 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왕관의 보석 같은 인생
스가랴 9:1-17
본문 해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리는 땅 (1~8) : 심판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가 자기 지혜로 요새를 짓고 은금을 쌓습니다. 힘과 부로 자기를 지키고 과시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내려 그들을 심판합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지만, 지금은 말씀의 무게에 짓눌려 무서워하고 아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나라들이 불타는 것을 봅니다. 땅만 주목하던 사람들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을 우러러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긍휼의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친히 파수꾼이 되셔서 그분의 처소를 지키시고, 포학한 자에게서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성도는 대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2. 네 왕이 네게 임하시리라 (9~17) :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는 훗날 절대 권력자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시온에 임하시는 왕은 겸손하지만 또한 공의로우셔서 모든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화평으로 온 땅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왕이 오심을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물 없는 웅덩이에 갇혀 소망 없이 말라 갈 때, 대속 제물의 피로 언약을 맺은 것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왕의 요새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의 예배를 통해 세상을 정복해 나가십니다. 언약의 피가 가득한 자리에서 백성이 즐거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 목자가 양 떼를 구원하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형통함과 아름다움으로 여호와의 땅에서 왕관의 보석같이 빛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세상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며, 교만이라는 어리석은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소망 없던 제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약속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겸손은 크든 작든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자비에 대해 늘 찬양하는 자세를 유지하게 한다. - 앤드류 머레이
묵상 에세이 : 가시밭길 같은 인생에 깃든 소망
두살 때 소아마비를 않은 후, 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나. 대학 시절 ESF라는 선교 단체에서 성경 공부를 하며, 장애를 가지고 가시밭길을 걷던 내 삶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신앙 서적을 읽었는데, 마흔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며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간호사 이야기였다. 비바람이 사납게 치는 밤, 갱이 무너지고 광부들이 갇혔다는 소식에 그 간호사는 급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치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몇 년 후 휠체어를 타고 다시 나타난 그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광부들을 치료해 주었다. 누군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죠?" 하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주님이 나를 지켜보시며 미소 지어 주시면 나는 평생이라도 이렇게 살 수 있어요."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에도 나를 지켜보시며 내게 미소 지어 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전능하시지만, 자신의 무한함을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스스로 가두시고, 결국 흙으로 돌아갈 나약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그 겸손한 사랑 때문에 나는 고난 속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작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의 도움과 지지로 당당히 서 있다. 주님이 주신 소망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현실을 아름답게 채우는 것이 나의 의무요, 내가 기쁘게 살아가는 삶의 공식이다.
한절 묵상 : 스가랴 9장 9절 말씀
슥9:9 <구원을 베풀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보내시는 지도자는 화평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공의와 구원을 베푸실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방 위에 군림하며 정치적 영광을 누리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메시아의 희생과 대속을 통해 평화의 복음을 전하려 하셨습니다. 성도는 남을 밟고 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하며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진정한 성공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슥 1:7-17 / 장빈 목사
먼저 스가랴서 1장 1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 1:1 / (읽기) /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언서의 첫 단어 자리에 이방 나라 왕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예언서의 초두에 이방 나라 다리오 왕의 통치 이년이라 적다니요, 어인 일인가요? 그랬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전만 하더라도 선지자들이 자기 나라의 통치 연한으로 활동 연대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만, 망국 백성이 된 지금, 스가랴는 그들을 지배하는 식민 종주국의 통치 연한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 선지자 스가랴는 이 서글픈 현실을 파타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이렇게 외쳤습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 1:2-3 / (읽기) / 선지자의 안타까운 호소, 한 마디로 어서 돌아오라는 겁니다.
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한 분 더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학개입니다. 학개와 스가랴, 스가랴와 학개는 늘 함께 기억되는 이름인데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환상의 영적 콤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스가랴서의 바로 앞 책인 학개서 1장 1절을 보시면, 역시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초하루에 학개가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다리오 왕 이년 팔월, 학개는 이년 유월, 그러니까 학개가 스가랴 보다 두 달 먼저 예언 활동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학개 선지자의 활동은 4개월 만에 끝이 난 반면,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은 2년 이상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선지자 학개가 시작한 일을 선지자 스가랴가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해서 더욱 빛나는 아름다운 콤비인데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 하나는, 내가 시작한 일이라고 해서 꼭 내 손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집착은 버리라는 겁니다. 그럼요, 나는 나에게 맡겨 주신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런데 더러는 내가 시작했으니 반드시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집착하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 나를 통해 시작하신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 완성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와 보실까요? 스가랴서 1장 7절인데요, 거기 보니,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이십사일에 선지자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였다고 하는군요. 1장 1절의 기록과 비교할 때 3개월의 차이가 있는데요, 그랬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첫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후 3개월 만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환상을 통해 말씀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여덟 가지의 환상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요, 선지자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여덟 가지 환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매우 중요한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정리하고 갑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여덟 가지 환상을 본 주체가 선지자 스가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환상을 보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1장 8절을 보실까요? 거기 <내가>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별표 다섯 개, 환상은 누가 본다? 내가 본다! 그렇습니다. 환상은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서 내 대신 환상을 봐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 하나님 보여주시는 환상을 내가 꼭 보리라 다짐하시고 꼭 보게 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거기 8절에, 내가 환상을 언제 보았다? <밤에!> 이 말씀을 뒤집어 볼까요? 밤에는 무엇을 보라? 환상을 보라! 여러분, 요즘 밤이면 밤마다 무엇을 보십니까? 내 인생의 밤이라 생각되는 날들 동안 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오, 우리가 캄캄한 밤에 보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환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 사시면서, 엉뚱한 것만 쳐다보지 마시고, 하나님 보여 주시는 환상을 많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여 날마다 보여 주시는 놀라운 환상 속에서, 꿈을 이루며, 마침내 승리하는 한 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선지자 스가랴가 여덟 가지의 환상을 보긴 했지만, 각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인가? 분명 내가 보긴 보는데, 도무지 보여주시는 환상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얼른 주님께 여쭙는 일입니다. 선지자 스가랴가 그렇게 했습니다. 1장 9절을 보실까요? 선지자 스가랴가 말합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주님, 제가 보긴 보았는데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여 주신 이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환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입니다. 본 다음엔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하는 건데요, 이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실컷 좋은 환상을 보고서도 해석을 잘못 해서 이단이 되거나 사탄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상을 보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 엉뚱하게 해석해서 엉뚱한 결론으로 가지 마시고, 먼저 주님께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선지자 스가랴가 환상을 보여주실 때 마다, 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께 여쭙자, 즉시 천사를 통해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여쭙기만 하면, 우리 주님, 천사를 통해 그 의미를 다 설명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1장 9절 맨 마지막 대목을 보면, 주의 천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십니다. 이미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환상을 붙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든 것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 사시면서, 늘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응답 속에서 일마다 형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상 속에서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을 보는 주체는 분명 나 자신이지만, 내가 환상을 보는 것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환상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지요. 정말입니다. 그 누구라서 하나님 대신 환상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환상을 잘 보고, 잘 이해하여, 그 환상을 따라 순종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상을 보여주십사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 보여 주시는 환상 한 자락 보지 못하는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금년 한 해, 하나님 보여 주시는 환상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지자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첫 번째 환상은 무엇이었나? 일단 본문을 먼저 읽을 텐데요, 이 장면을 영상에 담는다고 생각하시고, 감독의 입장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기 바랍니다. / 1:8 / (읽기) / 가장 먼저 홍마를 탄 어떤 분이 등장하는군요. 배경은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가 많은 어느 골짜기이고요, 그런데 그 뒤로 또 홍마, 자마, 백마가 또 보이는데요, 이어지는 환상을 미리 당겨 읽으면,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탄 또 다른 분들이 등장하는 거죠.
문제는 환상적인 환상이 내 눈에 보이긴 하는데, 그 환상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해서 선지자 스가랴, 바로 주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주여, 이들이 다 무엇입니까?> 그러자 우리 주님, 천사를 통해 말씀해 주시는데요, 일단 직접 들어봅니다. / 1:10 / (읽기) / 먼저 화석류 나무 사이에 홍마를 타고 선 자가 대답합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다. 아하, 홍마, 자마, 백마를 탄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천사들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탄 사람들이 화석류 나무 사이에 홍마를 타고 선 그 분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 1:11 / (읽기) / 저들이 보고하는 말,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더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평온했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러자 그 보고를 듣고 있던 홍마를 탄 가장 크신 그 분이,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여호와 하나님께 탄원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 1:12 / (읽기) / 지금 홍마를 타신 그 분이 무어라 하십니까? <아버지,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렵니까?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벌을 받아 망한 지 70년이 지났건만, 세상은 그런대로 평안하고 정온하다 하니, 이대로 가다가는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데요, 아버지, 정녕 이대로 저들을 잊으시려는 겁니까?>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드릴 수 없는 탄원 기도이지요.
그러자 다음 순간, 어김없이 하늘 아버지께서 즉시 대답해 주십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홍마를 탄 그 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어봅니다. / 1:13 / (읽기) / 거기 <선한 말씀>과 <위로하는 말씀>에 표시하시고요, 역시 별표 다섯 개, 여러분, 말씀이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70년 동안이나 죽은 듯 지내던 저들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내는 영적 힘이 바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 하신 것이요, 결코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 사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위로하는 말씀으로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 캄캄한 밤인 듯해도,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 속에서, 새 길을 찾으시고, 새 복을 찾으시고, 하여 환상 속에서 마침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새벽 마다 나누는 인사죠? 다시 굳센 믿음으로 신년 덕담 한번 나누십니다.
<금년에도 말씀 안에서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동광 가족들께 한 말씀드리고 갑니다. 우리는 환상 중에, 하나님 주시는 선한 말씀과 위로하는 말씀을 받은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도 선한 말만 해야 하고, 위로하는 말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혹여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그것이 선한 말이 아니거든, 얼른 입을 닫고 그 말을 하는 대신 주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이 말이 당신이게 오히려 상처를 주는 말이거든, 얼른 입을 닫으시고 말하는 대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부모님들께 고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모님 여러분, 이 시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그전 아이들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녀 세대를 향하여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요, 우리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를 향하여 하는 말, 모두 선한 말이요, 위로의 말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선한 말씀, 위로의 말씀으로 양육하실 때, 우리 자녀들, 그 말씀 안에서 형통의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소망 담아 신년 덕담 나누기!
<주 안에서 자식 농사 잘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군요. 화석류 나무는 무엇이고, 홍마를 탄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점인데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화석류 나무란, 당시 초막을 지을 때 많이 사용되던 매우 흔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 흔한 나무가 골짜기에 널려 있으니 더 흔한 존재가 된 것이지요. 해서 누구 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나무, 어딜 가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 해서 누구도 소중하다고 여겨주지 않는 그런 나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고 감사한 것은, 홍마를 타신 그 분이, 백향목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흔한 화석류 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홍마를 타고 오신 분은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실 그리스도, 그러나 헤롯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 통해 오실 그리스도, 세상은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 화석류 나무 같은 인생들을 친히 찾아오시는 메시야, 바로 그 분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복음이요, 해서 희망의 메시지였던 것인데요, 더욱 감사한 것은, 홍마를 타고 오시는 그 분을 영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이거늘, 그 분이 그냥 오시지 않고 놀라운 복을 가지고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지금까지 환상적인 환상을 보여 주셨던 것인데요,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 함께 읽으며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 1:16-17 / (읽기) / 여러분, 올 한 해, 이 말씀 꼭 붙드시고, 이 말씀 가운데 약속된 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 가운데 세 가지만 기억하며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16절에서 스가랴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오기 전 모두 노예들이었습니다. 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갔습니다. 굶주리며, 매 맞으며, 평생 종으로 살며, 죽도록 일만하다 모두 불쌍하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망국 백성들인 저들에게 스스로 해방할 힘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해서, 저들은 오직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어떤 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돌아오게 해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노예로 잡혀 간 이스라엘처럼 지금 절망적인 환경 속에 신음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절대 낙심은 하지 마십시오. 절망은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십시오. 그 때 긍휼을 베푸시어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도 긍휼을 베푸시어 자유와 해방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둘째, 유다 백성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히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에 먹줄을 치고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저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영적 목적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정치적 해방 이후 영적 목적을 더해 주신 것입니다. 그 영적인 목적이 바로 내 집을 건축하라는 것이니,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궁극적 목적은 바로 아버지의 집을 건축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늘 아버지의 집을 건축하는 일꾼들입니다. 일꾼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적 일을 하는 일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2005년 한 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여기 아버지의 집을 더욱 중수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돌아온 유다 민족에게 하나님은 넘치도록 복을 더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17절인데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다시 넘치도록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어 종의 멍에를 벗겨주실 뿐만 아니라 여기 돌아오게 하시어 아버지의 집을 건축하게 해 주십니다. 이 때 그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 넘치는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잘 믿고 잘 순종하는 성도들이 있어 하나님의 성읍들에 넘치는 복을 주신다는 거지요.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 동광 교회가 있어, 우리 서울의 강남에 넘치도록 풍성한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를 믿는 성도들이 있어, 우리가 사는 이 땅 전체가 풍성한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바로 아버지의 집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모두 아버지의 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버지의 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여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 차고 넘치는 풍성한 복이 생수의 강이 되어 이 땅을 전체를 적시며, 그로 인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풍성한 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