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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공원에서 길을 잃었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나는 잠시 멍해졌다.
길을 잃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행복과 이성이라는 것이 문득 그리워졌다. 막막했다. 분명 머릿속 사고회로는 전화를 받는 그 순
간에 멈춰버렸는데 심장이 계속 욱신거렸다. 뜨겁고 가려운 눈을 깜박이자 어느 새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번 깜박이면 네 방울이,
세 번 깜박이면 여섯 방울이 흘러내리다가 기어이 눈을 감아버린 탓에 눈물이 둑에 터진 봇물 마냥 마구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팔로 눈
을 부볐다. 눈물의 내음이 묻어났다. 염분 섞인 짭짤함이라기 보다는 고통이 베어난 씁쓸한 내음... 그 애가 이민을 갔던 8년 전 그 때와 같
다. 나는 8년 전 그 때 맡은 내음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늘아."
"..."
"망부석이라도 될 참이니?"
"..."
"일어나... 바다... 분명 너 이러는거 원치 않을 거야. 분명..."
"누나."
"응.."
"거짓말이죠."
나의 목소리가 푹 젖어있었다.
"거짓말이죠. 그래.. 분명 거짓말이야. 누나, 저요 어제 분명 바다의 메일을 받고서 이 공항에 온 거예요. 바다가 3년 전에 죽었다고요? 그
럼 여태까지 꾸준히 날아온 메일은 뭔데요?"
"...죽었어. 여태까지의 메일들은 다 내가 보낸 거야."
"왜 말 안해줬어요... 왜... 대체 왜!"
공항을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이 나와 소라 누나를 흘끗흘끗 쳐다보고 지나갔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으니까..."
"네?"
"후... 네가... 마음아파 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바다의 언니인 소라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누나..."
그렇게 그 날 우리는 눈 및이 눈물에 절어 벌겋게 벗겨질 때까지 울어댔던 것 같다.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 흑.. 내가 다 울 테니까 너는.. 우, 울지 마... 우앙!'
바다가 이민을 가던 날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정말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미 바다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내가 우는 걸
보지 못하겠지. 날 놀리지도 못할거야...
하지만 그 사실이 더 슬펐다. 내가 바다를 볼 수 없고, 바다가 나를 볼 수 없는 것. 내가 바다를 향해 미소지을 수 없고, 바다가 나를 향해
미소지을 수 없는 것. 내가 바다를 놀릴 수 없고, 바다가 나를 놀릴 수 없는 것.
그게 더 잔인한 것이였다.
*
'하늘아, 문자왔당!'
6년 전 바다가 저장해준 문자 알림음.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아침부터 울고 싶지는 않았는데 문자가 왔다며 내 폰이 울리는 바다의 목소
리에 마음이 다시 한 번 찢어졌다. 찢겨진 마음을 모아 겨우겨우 본드로 이어붙였다. 몸 안에 본드 냄새가 진동한다.
"우욱..."
그래. 지금 토할 것 같은 이유는 분명 마음을 이어붙일 때 쓴 본드 냄새가 너무 독한 탓일 것이다.
한참의 헛구역질 끝에 기어이 문자 알림음을 바꾸었다.
'주인님, 메세지 왔어요!'
젠장. 유치원생도 안 된 것 같은 꼬마애 목소리인데 바다의 목소리 같지만 해서 또다시 바꿨다.
'답장이 시급합니다.'
제기랄! 대체 왜... 이런 딱딱한 여자의 목소리까지 바다의 목소리같은 거야...
나는 결국 핸드폰을 무음으로 맞추고 나서야 아까 나를 잠에서 깨우고 울게 했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하늘아. 우리 오늘 좀 만나자. 놀러와 분식점 알지? 거기서 기다릴께.☆>>
내키지 않았다. 바다와 쌍둥이인 소라 누나는 바다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더욱 꺼려졌다. 처음 받아보는 소라 누나의 문자이지만 문자 맨
끝에 별을 붙이던 바다의 버릇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문자 내용에 또다시 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내 발걸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내 사고회로가 어제 이미 멎어버렸기 때문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된 탓인가 보다.
그리고 분식집에는 검은 생머리를 예쁘게 빗어내린 소라 누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밤하늘보다도 검고 찰랑이던 긴 생머리가 눈이 부시도록 잘 어울렸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누나의 앞에
앉았다.
"누나."
"응, 하늘이 왔구나? 너는 소고기 김밥 좋아하지? 아줌마! 여기 소고기김밥 한줄이랑 떡라면 한 그릇 주세요!"
욱씬-
당연하다는 듯 내 몫으로 소고기 김밥을 시키고서 자신의 몫으로는 떡라면을 시키는 소라누나가 내 가슴을 참 시리게도 한다.
"하늘아! 김밥만 먹으면 체해. 내 몫으로 떡라면 시켰으니까 국물이랑 같이 먹어!"
바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길. 환청이 아니다. 바다의 목소리도 아니다. 지금 들린 목소리는 소라 누나의 목소리였다. 어째저
바다와 똑같은 말을 해 내 마음을 시리게 하는 건지... 나는 김밥이 나오자 마자 묵묵히 먹기에만 집중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지만 계속
시선이 소라 누나의 입가로 옮겨갔다.
누나라고 해 봤자 소라는 1992년 12월 31일 밤 12시 59분에 태어나고 바다는 1993년 1월 1일 새벽 12시 2분에 태어난 나와 동갑이라서 학
년이 같아도 내가 '누나'라고 부르게 된 것 뿐이지만 나는 늘 바다와 누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기 위해 이 호칭에 더 매달렸었다. 소라를 이
름으로 부르다가는 바다와 헷갈리게 될 것만 같아서.. 그만큼 누나와 바다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런데 딱 한가지, 둘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보조개였다. 바다는 소라에게 없는 귀여운 보조개가 오른쪽 입가에 살포시 페여있
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그런데 라면을 먹고 있는 소라의 오른쪽 입가에도 보조개가 페여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같은 위치
에...
"에이... 왜 그렇게 쳐다봐. 누나 얼굴에 뭐 묻었어?"
"보조개."
"응?"
"누나는 보조개 없었잖아요."
"..."
내가 화가 난 듯 보인 모양인지 누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후후... 만든거야... 너도 알지? 보조개란 일종의 장애야. 그곳 세포가 죽어서 주변 근육이 움직일 때 그곳만 움직이질 못하는 거
지... 볼펜으로 계속 꾹꾹 눌러주면 그곳 세포가 죽어 보조개가 생겨."
누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예쁘게 웃어보이곤 라면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젠장맞을... 저 서툰 젓가락질까지 바다와 같다. 또다시 옛
추억이 아른거렸다.
'바보.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냐?'
'핏, 그러는 하늘이 넌 젓가락질 잘 하구?'
'가만있어봐. 다 흘린다, 다 흘려. 내가 먹여줄께. 내가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지, 상전을 모시는 건지...'
바로 옆 테이블에서 바다에게 라면을 먹여주는 나와 그런 내게 라면에 있던 계란을 건져 주는 바다가 아른거려 얼른 고개를 휘휘 젓곤 김
밥을 하나 더 입에 물었다. 질길 리 없는 소고기 김밥이 참... 질기다.
*
식사를 마친 우리는 분식집 주변에 있던 커피숍에 들러 각자 마실 것을 테이크아웃 했다. 나는 바다의 머리색을 닮았던 아메리카노, 그리
고 소라 누나는.... 녹차라떼.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음료 취향까지 같다니. 문득 바다가 뜬금없이 '하늘아! 너무너무 사랑해!' 라며 나를 껴
안다가 바다의 손에 들려 있던 녹차라떼가 엎어져 등이 홀랑 데일 뻔했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때 난 등보다도 마음이 더 뜨거워져
녹차라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나도...'라며 바다를 꼭 껴안아 줬었다. 그랬는데... 이제 나를 그렇게 껴안아 줄 바다가 없다니. 허탈하기
그지 없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 같달까...
"저... 하늘아."
소라가 조심스레 하늘을 불렀다.
"네?"
"나 있지... 모레면 다시 출국하거든... 그러니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늦지 말고 오늘이나 내일 내로 다 말해. 응? 알았지?"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 버렸다.
"아... 하... 하늘아..."
소라 누나의 체취가 짙게 풍겨왔다. 바다의 새벽 안개 냄새...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할 수 없었다. 바다의 체취였다. 분명 바다를 껴안았을 때 느껴지던 체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옛날 느꼈던 바다의 체취보다
조금 더 깊고... 아프고... 슬픈 내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소라 누나가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계속 그렇게 소라 누나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아."
"....미안.."
"난.. 네 여자친구 바다가 아니잖아. 나를 바다로 착각하는 건... 바다에게도, 나에게도 예의가 아니야.마음 가다듬어... 바다가 죽어서 네
가 많이 슬프고 흥분해서 절제가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응? 그럼... 내일 보자..."
새벽 바다의 내음이 멀어져갔다. 손을 뻗어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였다. 바다 내음을 무슨 수로 손에 잡겠는가. 손틈 사이로 빠져나간 바
다내음은 손 안에 집념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 그마저도 거두어 흩어져 버렸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자꾸만 바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니, 자신이 없다. 자꾸 아른거리는 이 형상이 바다인지, 혹은 소
라누나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언니인 소라, 동생인 바다.
"왜..."
병에 걸려 죽었다는 바다,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에 온 소라.
"왜 구분할 수가 없는 거야..."
소라, 바다.
분명히 다른 두 사람인데 아까 분명 내 심장이 반응했다. 소라누나를 보고서 심장이 반응했었다. 아까 머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
에 몸이 먼저 소라 누나를 껴안았던 사실이 당혹스럽다.
'하늘아! 바다는 하늘을 사랑해서 스스로 하늘 빛을 담은 거래.'
욱씬-
'난 스스로 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에... 네가 날 사랑하던 말던 난 널 사랑할 수 밖에 없어...'
"우욱..."
제길. 또 헛구역질이 나온다.
'넌... 내가 다른 사랑을 해도 괜찮다는 거냐? 그 때 그 말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했던 말인거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핸드폰을 집어 소라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약간 잠에 잠긴 듯한 바다의, 아니 소라 누나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하고싶은 말... 누나가 가기 전에 하랬었지."
"응? 으, 으응..."
"하고싶은건? 해도 되는거야?"
"물론...이지..."
"지금 나와, 누나."
"뭐?"
"바다가자, 우리..."
"..."
"응? 바다 가자구... 바다..."
뭔가 조르는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꼭 가고싶었다. 가서... 하늘을 담았던 바다를 보며 바다의 체취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바다
새벽의 안개 내음을 미치도록 맡고 싶었다.
"...그래, 가자. 지금 준비해서 나갈께..."
나는 굳이 꾸미지 않고 남방 하나만 걸친 다음 간단히 가방을 챙겨 소라 누나를 마중나갔다. 약간은 쌀쌀한 가을 바람이 내 몸을 스쳤다.
"왔어...?"
하늘색 가을 원피스에 커다란 모자. 예쁘다... 정말 예쁘다... 정말 바다같다...
*
차를 운전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기차를 타자고 주장해서 나란히 기차를 타고 익숙한 바다에 갔다. 옛날에 바다와 함께 바다에 갈 때
는 운전을 할 줄 몰라 늘 기차를 타고 갔었으니까... 기차 안에서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가는 또다시 모래사장의 모래
들처럼 흩어져 버릴까봐... 소라 누나에게서 바다의 모습을 찾는 내가 한심했지만 그런 한심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이 내음이 사라지는
것만은 죽어도 싫었기에.
*
바다는 시원했다. 바다의 새벽안개가 불쾌하기 보다는 상쾌했다.
"예쁘다..."
소라 누나는 아예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치맛바람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누나."
"응?"
"누나는 모르겠지만... 이 바다요."
"...응."
"바다랑 늘 왔던 곳이예요."
"..."
"바다한테 고백받았던 곳이고..."
"..."
"첫키스도 이곳에서 했어요."
바다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누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있죠... 저요... 누나가 옛날 그 바다로 보여요."
"...뭐?"
"이상하죠? 자꾸... 누나랑 바다랑 겹쳐보여요.."
"하지만 난..."
누나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의 이 한심한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기에...
"네, 알아요. 누나는 바다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누나... 소라야... 나 어떡해... 너를 보면 바다의 얼굴이 보여... 널 안으니까 바
다의 향이 났어..."
소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괜한 말을 한 모양이다.
"...미안. 나 이만 가볼께."
뒤돌아 서려는 소라를 향해 서둘러 손을 뻗었다.
다행히도 소라의 손이 잡혔다.
"놔 줘... 놔... 줘..."
"소라야..."
머리가 명령했다. 잡아야 해, 잡아야 해, 잡아야 해.... 그리고 나는 내 머리와 이성을 이기지 못한 채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말았다.
".....!"
엄청난 따뜻함이 내 입에 전해졌다. 순식간에 잡아당긴 건 손이였지만 내게 가장 가까이 끌려 온 부분은 입술. 소라 누나에게서 나는 옛
바다의 황홀한 향이 후각 뿐만이 아니라 내 머릿 속까지 휘저었다. 소라 누나의 입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따스함에 나는 황홀감에 젖어들
었다. 신기한 일이였다. 바다와의 첫키스처럼 나는 정신의 끈을 놓아 둔 채 더욱 누나에게 파고들었다. 누나 역시 이런 나를 밀어내지 않
았다. 나는 정말 이 순간만큼은 바다를 사랑했던 어릴 적 하늘로 돌아갔다. 요즘 매연에 섞에 회색빛이 되어버린 혼탁한 하늘 같이 바다와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라 누나에게 빠져 버린 치사하고 더러운 하늘이 아니라, 어릴 적 봤던 가을의 티없이 맑던 하늘처
럼 순수한 하늘로... 그런데 그렇게 한없이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내게 정신을 번쩍 깨운 것이 있었다. 내 뺨에 느껴지는 물기... 나는 내가
울고있나 하는 생각에 눈을 떴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였다. 울고 있는 것은 소라누나였다. 누나의 눈물이 흘러내려 내 뺨으로 옮겨 내렸
던 것 뿐이였다.
"누.. 누나..!"
내가 놀라 누나에게서 떨어지자 마자 엄청난 한기가 엄습했다. 다시 한 번 누나의 따스함을 전해받고 싶어해 하는 한심한 내 자신을 책망
했다.
"난 바다가 아니야... 네가 부르는 대로 소라라구! 네가 너무나도 사랑한... 바다가 아니라... 소라란 말이야... 놔 줘. 나 갈거야... 이렇게
된 이상 나, 네 얼굴 못 봐."
내가 정말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소라누나는 바다가 아니다. 소라 누나가 당황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텐데...
"미안.. 미안... 내가 헛소리를 했어. 내가 미친 짓을 했어. 내가 죽을 짓을 했어. 소... 아니, 누나. 정말 미안해! 제발... 떠나지만 말아줘...
바다처럼 떠나지만 말아달란 말야..."
하지만... 소라누나는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또다시 멀어져 간다. 바다내음... 방금 전만 해도 내 입가에 가득 머금었던 바다내음... 파도소
리만 남은 시린 가을 바다에서 나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느꼈다.
*
분명 어제 잔 시간이라곤 바다로 가는 기차에서 5분 정도 잠깐 눈을 붙였을 때 뿐이였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보다도 바다... 아니. 소라를 보고싶다는 욕구가 더 컸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다만을 사랑했건만,
나는 어째서 단 하루라는 시간만에 바다의 누나인 소라를 사랑해 버린 걸까. 바다를 향한 나의 수십년의 사랑은 고작 이것 뿐이였던 걸
까...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답이 나오기는 커녕 오히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문제 수만 많아져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때
핸드폰이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하늘아... 문자 왔어...'
"씨발! 왜 또 이 목소리가... 어라?"
이상하다. 난 분명 바다의 목소리가 마음이 아파 문자 음을 바꿨었다. 게다가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기까지 했었다.
"소라누나가... 녹음했었나..."
아니다. 이건 분명... 바다의 목소리다. 옛날에 바다가 녹음해 줬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바다... 야..."
울컥.
"바다야... 왜... 울어... 왜울어... 왜..."
그 짧은 문자알림음에 함축된 수십, 아니 수만 방울의 눈물.
"으.. 으으..."
바다는 죽었는데. 바다는 분명 죽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바다의 목소리가... 녹음이 된단 말이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나는 주체없이 흐르는 눈물을 대충 슥 닦아내고서 문자를 확인했다.
"제길... 제기랄!"
난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우아아악!"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차고 올라 고함을 질렀다.
"...한바다!"
*
그 애와 처음 만난건... 그래. 초등학교 입학식... 나는 바다의 손을 꼭 잡고서 초등학교를 탐험하고 있었다. 너무 빨리 온 탓에 텅 빈 운동
장. 우리는 엄마에게 초등학교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한 후 들뜬 마음으로 학교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체육창
고 앞. 우리 자매는 그 곳에서 한참동안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곳을 쳐다보았다. 학교 구석에 박혀서는 잡초로 둘러싸여 있고, 호박넝쿨
이 지붕에서부터 내려와 꽤나 호러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체육창고. 우리는 어린날의 솟구치는 호기심에 체육창고 위로 올라가는 대모
험을 하기로 했었다.
"내가 언니니까 먼저 올라갈께. 바다야, 너는 여기서 보고 있다가 언니가 안전하다고 하면 그때 올라와!"
내가 선택한 올라가는 방법은 호박넝쿨타기. 나는 어릴적 그 고사리같은 손으로 호박넝쿨을 잡고서 낑낑대며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
나 역시나 역부족. 거의 다 오른 상태에서 넝쿨을 놓친 나는 체육창고 지붕에 아슬아슬 매달리고 말았다.
"어, 언니!"
"바, 바다야... 빨리 엄마좀 불러와..."
"으, 응! 기, 기다려 언니!"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 때 내 손을 잡아 끌어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위험하잖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나를 끌어올려준 애는 체육창고 지붕에 있던 한 남자아이였다. 남자애는 위험하다는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가버렸지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잡았던 손이 아직도 따스했다.
"언니, 언... 어? 언제 올라간거야!"
"소라야, 위험해! 엄마가 받아줄 테니까 뛰어내려!"
중학교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7살 때 이미 남자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본다고 한다. 기왕이면 동생과 같이 학교에 입학하라는
주변 어른들의 말에 따라 고작 몇 분 차이로 입학식에 나온 나였으니 그 때 나의 나이는 9살. 어린 꼬맹이의 순수한 사랑이였다.
*
그 애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중학교 1학년 때. 참 운나쁘게도 그 애는 바다와 같은반이였다. 그리고 참 마음아프게도 바다
는 말했다.
"언니, 저기 보이는 저 남자애 있잖아.. 하늘 멍하니 보고있는 저 애. 이름이 하늘이다? 이름 멋있지? 나... 쟤가 진짜진짜 좋다? 언니, 비밀
이야!"
찌르르. 그래. 중학생이였던 나는 그 때 그 순간 '찌르르'하는 아픔을 느꼈다. 바다의 반에 있던 나는 바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걸
음 뒷걸음질 치다가 내 교실로 뛰어가 버렸다. 도망가 버렸다. 왜 하필 '하늘'이는 바다와 같은 반이 된 걸까. 왜 하필 바다도 그 애를 좋아
하게 된걸까.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바다가 아팠으면... 하는 철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참 방정맞게도 그날로 바다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소, 소라야!"
나와 바다를 잘 혼동하는 엄마는 바다를 나인 줄 착각하고서 내 이름으로 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엄마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나는 드
디어 깨어난 바다와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나 벌받나봐.."
"벌받다니.. 그게 무슨말이야?"
"언니.. 하늘이 좋아하지? 아니, 사랑하지?"
"..."
"아까 학교에서 언니 표정 보고 짐작했어... 근데 언니가 좋아하는 애를 내가 좋아하게 되 버렸잖아.. 그래서 벌받나 봐. 나... 암이래..."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바다가 암이라니. 오히려 벌받아야 할 것은 나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벌받아야 할 건 나야.. 흑.. 나라고!!!"
"어, 언니..!"
"내가.. 내가 벌받을께. 내가 네 대신 바다를 할께. 바다가 되서... 바다로서 하늘이랑 사귈께. 네가 다 나으면... 그 때 너랑 나랑 바꿔치기
하면 되잖아. 응?"
"후후.. 언니도 참... 안 그래도 되."
"아니, 그렇게 하자. 나, 그렇게라도 안 하면 네 얼굴 못 봐... 나 사실 네가 아프기를 바랐단 말이야. 너도 하늘이를 좋아하니까... 그런 못
된 생각까지 했어. 흑.. 으흑..."
내가 바다의 품에 안겨 울자, 바다는 어른스럽게 나를 토닥여 주었다.
"언니.. 내가 아픈건 언니 탓이 아니야. 굳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그거.. 너무 큰 벌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내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잠시나마 하늘이와 함께 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까지 크나큰 벌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역시 바다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인지 나와 잘 어울렸고, 나는 바다를 대신해 하늘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아팠다. 날 향한 듯한 그 부드러운 눈은 내가 아닌 바다를 위한 것이였고, 날 부르는 듯한 그 따뜻한 음
성도 내가 아닌 바다를 담고 있었다. 바다야, 바다야, 바다야... 늘 나는 바다였다. 그리고 당연히 바다는 내가 되었다. 바다에게 하늘이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 사귀는 사이가 되기도 전에 하늘이를 바다의 병실로 데려와 소개시켜 주었다.
"자, 여기 이쪽이.. 내 쌍둥이 언니 소라야."
"소라누나, 안녕하세요."
바다에게 존댓말을 쓰는 하늘이. 그 날 바다는 대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나는 오히려 더 죄스러운 짓을 한 것 같아 그 날 이후로 하늘이
를 바다에게 데려가지 않았다. 바다가 다 나을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으며... 그러나 내가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게 된 것은 바다에
서였다. 계속 바다를 부르는 하늘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움직였다.
"하늘아! 바다는 하늘을 사랑해서 스스로 하늘 빛을 담은 거래.."
'나는 널 사랑해서 스스로 너에 대한 사랑을 내게 담았지...'
"난 스스로 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에... 네가 날 사랑하던 말던 난 널 사랑할 수 밖에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난 네가 바다를 사랑해도 널 사랑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난 그날 하늘이와 첫키스를 했다. 엄청난 행복감과 슬픔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사랑해, 바다야. 바다야, 사랑해..."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하늘이... 그래. 네가 사랑하는 건 소라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바다야...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결국 외국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이민을 가기로 한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
나게 되었고, 나와 하늘이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였다.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 흑.. 내가 다 울 테니까 너는.. 우, 울지 마... 우앙!"
'네가 울지 마... 바다도 울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울테니까.. 내가 혼자 다 아플테니까...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둘은 울지 마....'
줄줄줄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하늘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그게 한이였다.이민을 간 8년간, 그게 한이 되어 내 자신을 자꾸 책망
했다. 언니 노릇은 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8년이 지나고, 바다는 결국 죽었다. 눈물보다 허탈감이 먼저 차고올라왔다.
'너 아직 하늘이랑 제대로 대화도 못 해 봤잖아... 왜... 왜 먼저 가... 대체 왜!'
바다의 말이 옳았다. 이건 참... 너무나도 큰 벌이였다. 엄마에게 내가 바다가 아닌 소라였다는 말을 하는 것도 참 힘들었지만 이미 내 뼛
속까지 깊숙히 파고든 '바다'라는 존재가 내가 소라로 돌아오는 것을 참 힘들게 했다.
한국에 오는 순간까지 나는 바다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말 안해줬어요... 왜... 대체 왜!"
하늘이의 한마디가 내 심장을 후벼판다.
"...으니까..."
"네?"
"후... 네가... 마음아파 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우는 모습일지라도... 널 보고싶었으니까. 욕심쟁이인 내가 바다가 죽었다고 말하면 네가 공항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두려웠으니까...'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지만 내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 날이 되자마자 무작정 바람이
에게 연락했다.
<<하늘아. 우리 오늘 좀 만나자. 놀러와 분식점 알지? 거기서 기다릴께.☆>>
보내고 나서야 후회했다. 최소한 문자에 별은 붙이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바다가 죽었다지만 나는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
의 '벌'을 받는 것으로서 끝까지 바다인 척 해야 하는데 내가 소라라고 밝힌 이 시점에 내가 바다일 때의 문자 습관을 그대로 쓰다니... 하
지만 하늘이는 내가 문자에 별을 붙인 것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섭섭한 감정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하늘이가
나의 습관을 잊어버린걸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바람이가 나의 보조개를 보고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는 정말이지 울 것만 같
아 그걸 참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나의 보조개를... 기억하고 있구나. 나를 잊지 않았구나...... 그런데 그 때 죽어버린 바다가 떠올
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난 벌을 받고 있는 거잖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더 이상 한국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늘이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나는 바다에게 정말
면목이 없다. 더 들키기 전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하늘이에게 슬며시 말을 붙였다.
"나 있지... 모레면 다시 출국하거든... 그러니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늦지 말고 오늘이나 내일 내로 다 말해. 응? 알았지?"
그 순간 내 전신을 덮쳐 오는 하늘이의 진한 체취.
"하... 하늘아..."
'안 돼... 안된다구...'
정말 힘겹게 하늘이를 밀쳐냈다.
"난.. 네 여자친구 바다가 아니잖아. 나를 바다로 착각하는 건... 바다에게도, 나에게도 예의가 아니야.마음 가다듬어... 바다가 죽어서 네
가 많이 슬프고 흥분해서 절제가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응? 그럼... 내일 보자..."
그래. 하늘이가 안은건 소라가 아니라 바다야. 바다를 생각하며 안은 거지, 절대 날 사랑해서 안아준 게 아니야. 그러나 그 날 새벽, 갑작
스레 걸려온 하늘이의 전화에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
"바다가자, 우리..."
바다..라... 우리가 사랑을 나눴던 곳. 아니, 바다와 하늘이가 사랑을 나눴던 곳.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거절하지 못하고 하늘이를 따
라 바다로 갔다. 기차에 나란히 앉았다.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피곤했던 모양인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
는 하늘이. 이윽고 하늘이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아기같은 미소로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늘 바다에 갈 때의 버릇. 하늘이는 늘 기
차에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곤 했다. 이 모습...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겠지. 너의 체온... 이제 영원히 느낄 수 없겠지. 너의 체
취... 이제 영원히 맡을 수 없겠지... 서글픈 마음에 하늘이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슬쩍 빼냈다. 그리고서 8년 전처럼 내 목소리를 녹음했
다. 어차피 무음 처리가 되어있으니 영원히 모르겠지... 하는 마음에서 한 일이였다.
드디어 도착한 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라 약간 어두운 빛이 감도는 바다였지만 탁 트인 이 넓은 공간이 가슴 시리도록 좋았다.
하늘이와 늘 놀러왔던 바다. 하늘이한테 고백했던 바다. 하늘이와 첫키스를 한 바다.
너무나 많은 추억들이 묻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제 이 추억들을 지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을 테니... 저
기 저 조개구이집에 추억 하나, 여기 이 커나란 소나무 밑에 추억 하나, 저기 있는 큰 바위에 추억 하나, 이 모래 밑에 묻어 둔 조개껍데기
에 추억 하나, 이 조약돌들 하나하나에 추억 하나, 저 바닷물 한 방울 한 방울에 추억 하나... 빌어먹을.
추억이 너무 많아서... 다 지울 수가 없다. 어떻게 이 많은 추억들을 지울 수 있어... 어떻게... 다른사람도 아닌 하늘이와의 추억을 지울 수
있어...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진 탓에 고개를 들어 새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그런데 하늘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누나."
"응?"
'내 목소리... 떨리지 않았나? 내가 울 것 같다는 거... 들키지 않았겠지...'
"누나는 모르겠지만... 이 바다요."
"...응."
'모를 리가 없지.. 너에 관한 일인걸.'
"바다랑 늘 왔던 곳이예요."
"..."
'나와 늘 왔던 곳이잖아...'
"바다한테 고백받았던 곳이고..."
"..."
'내가 네게 고백했던 곳이고...'
"첫키스도 이곳에서 했어요."
'네가 내게 선물한 가장 큰 행복이였어..'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 하늘이는... 내가 죽은 바다를 생각하느라 눈시울이 붉어진 줄 알겠지.
"그런데 있죠... 저요... 누나가 옛날 그 바다로 보여요."
"...뭐?"
"이상하죠? 자꾸... 누나랑 바다랑 겹쳐보여요.."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사고회로가 완전히 정지되어 버렸다. 내가... 옛날 바다로 보인다구? 내가... 너와 함께했다는 걸... 알게된
거야?
"네, 알아요. 누나는 바다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누나... 소라야... 나 어떡해... 너를 보면 바다의 얼굴이 보여... 널 안으니까 바
다의 향이 났어..."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나를.. 나를 어떻게... 날 네가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어...
"...미안. 나 이만 가볼께."
뒤돌아 서려는 나의 손이 하늘이의 크고 따뜻한 손에 잡혔다.
"놔 줘... 놔... 줘..."
마음에도 없는 말. 도리어 계속 잡아달라고 하고싶은걸.
"소라야..."
".....!"
하늘이의 따뜻한 입술이 내 입가에 닿았다. 8년 전 따스했던 온기 그대로. 뿌리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
다. 이건 무슨 눈물일까? 행복에 젖은 눈물? 이게 내가 아닌 바다를 향한 키스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슬픔에서 나오는 눈물? 아니면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쳐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무서운 감정의 눈물?
하지만 하늘이는 나의 눈물을 보고서 곧바로 내게서 빠져나갔다.
"누.. 누나..!"
누나라는 말... 참 아프구나. 옛날에 하늘이가 바다에게 누나라고 했을 때도... 이렇게 아팠을까?
"난 바다가 아니야... 네가 부르는 대로 소라라구! 네가 너무나도 사랑한... 바다가 아니라... 소라란 말이야... 놔 줘. 나 갈거야... 이렇게
된 이상 나, 네 얼굴 못 봐."
응.. 나 네 얼굴 더는 못 봐. 바다에게 이 이상 죄를 지을 수는 없어. 내가 널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널 더는 볼 수 없어.
"미안.. 미안... 내가 헛소리를 했어. 내가 미친 짓을 했어. 내가 죽을 짓을 했어. 소... 아니, 누나. 정말 미안해! 제발... 떠나지만 말아줘...
바다처럼 떠나지만 말아달란 말야..."
내 마음이 수없이 흔들렸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던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 표현이 맞는 말이라는
게 절절히 느껴진다. 눈물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서둘러 뒤돌아섰다.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 그리고 이
이상 하늘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나는 발걸음에 속도를 더해가며 그 가슴 시리게, 가슴 저릿하게 아프고 또
행복했던 바다를 빠져나갔다.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이 바다를...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붉은 핏빛 태양이 넓은 바다를 적셔가고 있었
다.
'바다야, 들리니? 바다가... 바다가 젖어들어가고 있어... 무지 슬픈가봐. 계속 끝없이 젖어들어가는 걸 보니... 혹시 네가 젖어들어가고 있
는 거니? 네가 흘리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젖어들어가고 있는 거니? 바다라는 게... 저기 펼쳐진 넓은 푸른빛 물을 말하는 거니,
아니면 네 이름을 말하는 거니?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바보같이.. 계속 울었다.
'혹시... 네 이름과 저 넓은 바다는 같은거니? 네가.. 이 넓은 바다인 거니? 그렇다면.. 혹시 그렇다면 네 눈물 닦아주고 싶은데... 닦아주고
싶어도 닦아줄 수가 없잖아. 네가 아무리 많이 울어도... 저 바다가 아무리 많이 울어도... 그 눈물 닦아줄 수 없는 거잖아. 내가 사랑한 것
부터가 죄인거니? 그래서.. 그래서 내가 벌받는걸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
며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내가 사랑하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도 닦아주지 못해.'
철썩철썩-
파도가 더 거세게 모래를 쳤다. 아니, 나의 마음을 쳤다. 마치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 주듯..
"아니, 조금도 괜찮지 않아! 흑.. 나 이제 어떡해.. 나 하늘이를 사랑하고, 평생 옆에서 함께하고 싶어. 이렇게 큰 벌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언니, 언니... 이 바보같은 언니...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건 언니가 아니라 나야. 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내가 만약 바람이였다
면 얼마나 좋을까. 큰 바람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저 얇은 실바람 한 줄기였다고 해도.. 언니의 볼에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말려 줬을
텐데. 우린... 너무 오랜 길을 돌아왔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게 분명한 바다의 목소리가 내 가슴속에 울려왔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바다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안녕,
바다야. 안녕, 하늘아. 안녕, 모든 추억들아...
*
이곳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끝까지 하늘이를 만나지 않았다. 이건 나의 선택이자, 단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일 뿐이다.
"Do you want some drink?(음료수 드실래요?)"
예쁘게 생긴 승무원이 영업용 미소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많은 수분을 흘린 탓에 수분이 필요하긴 했다.
슬쩍 보니 오랜지 주스와 포도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랜지 주스를 마시려는 생각에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내 뒷좌석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two Orange juice please.(오렌지주스 두 잔 주세요.)"
순간 숨이 턱 막혀버렸다. 내 귀가 아닌 내 심장이 반응하는 이 목소리는 분명...
"하.. 하늘아..."
*
서둘러 택시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으로 달렸지만 아무리 찾아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다. 왜 이리 늦게 깨달았을까. 핸드폰에 녹음되어있던
그 목소리는 분명 소라누나가 아닌, 옛날 나와 사귀었던 '바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탑승자 조회를 한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
다. 거기에 바다의 이름은 없었다. 소라누나의 이름만이 리스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분명 옛날 바다의 목소리였는
데! 하지만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일단 비행기를 타는 것 외에는 그녀를 만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마자 나는 서둘러
집에 전화해 미국행 비행기표를 손에 넣었다.
하늘이 도운걸까. 내가 앉게 된 자리는 바다의 바로 뒷자리. 비행기를 돌아다니며 바다를 찾을 생각이였던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
다.
*
"너... 너 뭐야!"
예의상 비행기 내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하늘이에게 대뜸 고함을 질렀다.
"짐 하나 안 싸고 온 거야?"
"응."
단조로운 하늘이의 말에 나는 기절할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대체 뭔데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건데?"
속상했다. 이 애가 대체 무엇때문에 나를 쫓아온단 말인가. 분명 바다를 쫓아왔겠지.
"소라누나... 사실 바다야?"
"뭐?"
"아니면.. 옛날 바다가 소라누나였어?"
내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만약 전자였다면... 나는 바다를 죽도록 사랑하는 거고."
"..."
"만약 후자였다면... 나는 소라누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거야."
"...흑..."
"...후자구나."
나도 모르게 하늘이의 품에 안겼다.
"으... 으... 으와앙!"
"울어... 더 울어... 여태까지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
"으.. 으흑.. 읍..."
나는 정말 실컷 울었다.
그 넓은 하늘의 품에 안겨 수십 리터의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
<<언니... 이 음성메시지를 언니가 볼 때 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후후... 다 죽어가는 목소리라 미안해. 하지만.. 이
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련맞을 정도로 착한 언니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음성메시지를 남겨. 언니, 나 정
말 진심으로 하늘이 좋아했어. 하지만 나보다 더 큰 사랑을 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누군줄 알아? 헤헤, 바로 언니야. 소라언니... 사랑
이란 건, 자신의 것이 아무리 커도 더 큰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양보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언니는 지금쯤 옥상에서 소리없
이 울고있겠지? 후후, 내가 바본줄 알아? 나도 언니가 매일 울고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구. 나 마음아파할까봐... 주먹을 입에 물고서 큰
소리도 못 내고 저 하늘 바라보며 끅끅 울어대는거.. 나도 알아. 언니, 언니의 벌은.. 언니가 그렇게 울고있다는 걸 알고있는데도 말리지
않은 걸로 대신할께. 그러니까 하늘이한테 가. 응? 알았지? 하늘이... 나 대신 많이 사랑해줘. 많이 사랑받고. 언니가 하늘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하늘이를 사랑하고, 하늘이가 언니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하늘이한테 사랑받을 테니까. 후아.. 너무 힘들다. 언니, 나 이제 그만
할께. 내 말 꼭 들어줘. 알았지? 하늘나라에 가서도 언니를 꼭 내려다 보고 있을테니까! 아, 그리고 바다는 한 번 쯤 와줘. 언니가 매일 말
했던 그 바다 말이야. 나,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께. 거기 와서.. 하늘이와 서로 사랑하는 모습, 많이많이 보여줘. 그럼 안녕..>>
"이... 이게 뭐야?"
핫,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내게 건네준 바다의 옛 핸드폰에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의 음성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바다... 소라 널 무지 좋아했나보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게된 하늘이가 붉어진 눈시울로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는
다.
"내 핸드폰, 무음이였던 거 알아?"
"응... 그래서 네 핸드폰에 녹음을 했던거고."
"그리고... 무음이였는데 네 문자가 오는 소리가 들렸던 거 알아?"
숨이 턱 막혀왔다.
"...우리를 이어주려 했던 바다의 마지막 선물인가봐."
소라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하늘이에게 도착했던 문자메세지.
무음임에도 불구하고 소라의 목소리를 전해 줬던 문자메세지.
소라도, 그 누구도 보낸 적 없는 기적의 메세지.
<<하늘, 소라, 바다, 그리고... 언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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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로 나눠 올리고 싶었는데 규정상 불가능해서 묶어올렸어요ㅠㅠ
댓글 하나가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첫댓글 으엉엉... 여러분, 이거 진짜 꼭 읽으세요! 길긴 해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ㅠㅠ 으엉, 너무 슬퍼요.. 마음이 저릿저릿하네요ㅠㅠ
엇, 메루리님! 여기서 또 뵙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으엉엉.. 분명 해피엔딩인데도 너무 슬퍼요ㅠㅠ
하핫, 심장이아파서님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소설이네요 잘읽고갑니다 ^^
악마정령사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쓸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