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망명한 청나라 왕자
광해왕 8년(1616),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여 만주 일원에 후금(1616~1636)을 건국한 뒤
동서남북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갔다. 그의 정복전쟁에는 장남 추잉, 차남 귀영개, 8남 홍타이시
등이 지근에서 보필했다.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추잉이 누르하치의 노여움을 사서 살해되자
귀영개가 장남 역할을 떠맡았다. 광해왕 11년(1619) 12월 17일, 의주부윤이 여진족의 내부사항
을 자세히 알리는 장계를 보내왔다.
누르하치의 차남인 귀영개는 조선과 화친을 주장하고, 8남 홍타이시는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치
자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홍타이시가 바로 훗날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청 태종이다.
광해왕 10년(1618), 후금의 공격에 쫓겨 멸망하기 직전의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청했다.
임진왜란때 우리가 도와주었으니 너희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뼛속
까지 배어 있는 중신들은 일제히 원병을 보내자며 벌떼같이 상소를 올려댔다.
하는 수 없이 광해왕은 강홍립을 도원수, 김응서를 부원수로 삼아 원병을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내 망할 것이요 누르하치가 결국 중원을 장악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던
광해왕은 강홍립을 따로 불러 피치 못해 원병을 보내기는 하지만 국제정세가 이러이러하니 여진
족과 싸우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다. 전장에 이르자 강홍립은 싸워보지도 않고 누르하치에게 항복
했다.
그러나 그러한 내막을 모르고 있던 부원수 김응서는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김응서를 사로잡은 부대의 대장이 바로 얼마 뒤 조선에 망명한 귀영개였다.
귀영개는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결기 있는 김응서는 장수가 항복할 수는 없으니
즉시 죽여달라고 외쳤다. 조선에 호의적인 귀영개는 김응서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그대
는 참으로 용맹하고 의로운 장수요.나와 함께 명나라를 쳐서 중원을 차지합시다.’ 하고 회유했지만
김응서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후 포로생활을 계속하던 김응서는 인조 2년(1624) 후금의
동태를 자세히 적어 조선에 보내려고 하다가 강홍립의 밀고로 후금 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인조 4년(1626) 누르하치가 죽자 이복형제인 귀영개와 홍타이시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
졌다. 이때 귀영개의나이는 43세, 홍타이시는 34세였다. 두 사람의 권력투쟁은 누르하치가 살아있
을 때부터 살벌하여 호전적인 홍타이시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광해왕도 장차 홍타이시가 권력을 장악할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광해왕은 후금에 계속 사신을 보
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침략에 대비하여 은밀하게 국방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광해왕 15년(1623) 4월, 4강 외교를 망친 문재인처럼 외교의 기본도 모르는
능양군이 반란을 일으켜 광해왕을 축출하고 보위를 찬탈한 뒤,광해왕이 기껏 쌓아놓은 후금과의 화
친정책을 뒤집어엎음으로써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누르하치의 죽음과 함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귀영개는 어느 날 각중에 후금 역사에서 사라져버렸
다. 광해왕이 계속 집권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귀영개를 맞아들여 외교적으로 활용했겠지만, 인조
는 관심조차 없는 자였으므로 조선왕조실록에조차 귀영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귀영개에 대한 후문은 영조 때의 문신이었던 성대중의 문집 「청성잡기」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
다. 귀영개가 귀국한 지 무려 100년 후의 기록이다. 귀영개는 홍타이시의 자객들을 피해 식솔들을 데
리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경기도 화성의 어느 산골에 숨어 지냈다. 인조도 보고를 받았지만 이미 숭명
반청(崇明反淸)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지라 귀영개를 일개 도망자 정도로 취급하고 전혀 돌봐주지 않
았다. 덕분에 귀영개의 조선살이는 비참했다. 기술이라곤 전투술뿐이어서 생계수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처도 마땅히 없어 사랑하는 외동딸을 박륵이라는 조선 장수의 첩으로 내주었다. 아마
도 딸을 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10여 년 동안 비렁뱅이 생활을 하던 귀영개는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에야 청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영개는 경기도 남양부사 윤계를 죽이고 청군에 항복했다. 윤계는 남한산성에 갇
힌 인조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던 중 귀영개의 기습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윤계 역
시 기개가 높은 장수였지만 만주벌판을 누비며 몽골군과 명군을 격멸했던 대장군 귀영개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윤계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한
3학사(오달제‧윤집‧홍익한) 가운데 윤집의 형이었다. 직접 조선으로 쳐들어와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 태종(홍타이시)은 이복형 귀영개를 받아주어 청나라로 데려갔다. 귀영개는 딸과 딸이 낳은 자식들
까지 모두 데리고 귀국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인조의 근시안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도 흉노와 같은
오랑캐가 항복해오면 너그러이 받아들여 그들의 정보와 기술을 이용했었다. 인조가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어도 귀영개는 외교 및 군사적으로 어마어마한 활용가치가 있었다. 그랬더라면 병자호란으로 수
많은 백성이 죽고 전국이 초토화되는 참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조가 오직 청 황실과 친하다
는 이유로 자신을 대신하여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소현세자를 독살하는 잔인한 짓을 저
지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귀영개가 조선으로 망명한 사실을 알면서도 청 태종은 귀영개의 아들들을 거두어 장수로 썼다. 태종
은 즉위 다음해인 인조 5년(1627) 귀영개의 아들 요토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조선을 침공하라 명했
다. 뛰어난 용장인 요토는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단숨에 평양성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태종에게 ‘조선
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니 더 이상 전화(戰禍)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하며 간곡하게 호소하여 윤허를
얻어낸 뒤 군사를 돌렸다. 아마도 전쟁이 길어지면 조선 어딘가에 숨어 지낼 아버지에게 피해라도 갈
까 싶어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이 있고도 인조의 무지는 개선되지 않아 결국 10년 후 병자
호란을 자초했다. 청나라로 돌아간 귀영개는 왕의 칭호를 받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