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포천과의 끈질긴 인연
1. 누님이 포천으로 시집을 가다
내가 포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이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었지만 누님의 시댁이 포천이었다
매부는 수원에 살았지만 본가가 포천에 있었다
포천시내 신읍리라는 곳이 본가였다
누님의 시댁과 우리 고모부와 한 집안이었다
정릉사셨던 고모가 늘 포천에 간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 매부네 집이었다
우리 고모부가 누님 시아버지의 아저씨뻘이었다
그렇게 포천과의 첫 인연이 생겼다
누님의 중매는 포천에 사시던 매부의 고모가 했다
매부의 고모부가 우리 집안네였고 내게 형님뻘이셨다
같은 이씨집안이었는데 종친회에서 마주쳤던
매부의 고모와 우리 어머님이 서로 얘기를 나누시다가
중매를 하기로 하신 거였다. 선을 보고 바로 날을 잡았다
누님이 26살, 매부가 30살이었다. 당시로는 노처녀 노총각
해를 넘기지 말자고 혼사를 서둘렀다
우리 아버님과 매부의 아버님도 서로 잘 아는 사이셨다
일사천리로 혼사가 진행됐다 그게 1972년 가을
내가 대학 2학년 때였다
포천에서 오시는 분 들을 감안해서 종로5가에 있던
이화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접살림은 수원에 차렸다
매부가 수원에 있는 원예시험장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2. 포천에서 군복무를 하다
1974년 2월10일날 내가 입대를 했다
논산훈련소 26연대에서 6주훈련을 마치고
다시 가평 현리에 있던 수기사 신병교육대로 갔다
거기서 다시 호된 훈련을 8주동안 받아야했다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은 게 포천 이동이었다
국망봉 아래 위치한 기갑여단 101기보대
장갑차부대였다. 정비과로 발령을 받았다
그 때가 1974년 여름이었는데
다음해인 1975년 6월까지 그 곳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전 기갑여단이
통째로 포천 하심곡이라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원래 8사단 오뚜기부대 10연대가 있던 자리였다
서로 부대를 맞바꿨다고 들었다
포천읍에서 무럭고개라는 고개를 넘어가면 있는 곳
깊이울이라는 저수지가 있는 하심곡이라는 곳이었다
거기서 1975년 6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근무했다
휴가를 나오거나 하면 포천 신읍리에 있는
누님의 시댁엘 들렀다
연년생으로 샘을 하느라 몸이 안 좋았던 조카를 보러 갔었다
마루에 놓여있던 쌀가마니 위에서 아물거리던
바짝 마른 조카녀석이 생각난다. 내가 입대할 때 백일이었다.
지금은 52세의 의젓한 회사 사장님이 됐다
이동에서나 하심곡에서나 호된 훈련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맹호부대로 더 잘 알려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훈련이
아주 빡셌기 때문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거의 매주 10km 완전군장 기록구보에 기록사격을 했다
20발에 14발 이상을 맞춰야 합격이었다
다행이 나는 늘 18발 이상을 맞췄다
3. 두 번째 직장의 사업장 들이 포천에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갔던 직장이 본사는 공릉동에 있었지만
사업장 들이 주로 포천에 산재해 있었다
원종계를 보유한 대규모 농장이었기 때문에
뻑하면 포천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다
포천의 곳곳에 위치했던 사업장 이름은 지명을 따서 지었다
송우양돈장, 송우부화장, 통일대부화장, 신월부화장
고모농장, 정교농장, 유교농장, 마산농장, 마전농장
설운농장, 그런 식이었다
송우리, 신월리, 고모리, 정교리, 유교리, 마산리, 마전리
설운리 등에 원종계 농장, 종계농장, 부화장 들이 산재했다
포천군에서 가장 땅을 많이 소유한 기업이라고 했다
그 사업장 들을 다 누비고 다녔다
본사 기획실에 근무하며 감사도 나가고
사업장의 사진도 찍어서 광고물도 만들고
슬라이드 사진을 찍어 세미나 자료도 만들고 그랬다
가끔은 농장 직원 들을 위해 교육도 하러 다녔다
거의 포천에서 살다시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씩 시간을 내서 하심곡에 있는 부대를 찾아가
과거 함께 근무했던 선임하사님들도 만나고 그랬다
무척 반가워 하셨다. 포니를 타고 가면 부러워했다
그렇게 그 회사에서 만 3년을 근무했다
1979년 4월부터 1982년 4월까지...
4. 요즘도 찾아가는 포천
요즘은 맹호부대 부대행사를 하면 찾아간다
기갑여단 창설기념일이나 여단장 이취임식 등을 하면
전우회 선배로서 축하를 해 주러 가게 된다
여단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적도 있다
사단장으로부터도 감사장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사단장시계가 세 개나 된다
내가 근무할 때 운용했던 장비들도 모두 현대화 됐다
APC(장갑차)는 M113에서 모두 최신식 K-21로 교체됐다
M113은 월남전에서 활약했던 APC다
전차도 M48A2C에서 모두 K1A2또는 K2로 바뀌었다
차보대도 없어지고 모두 기보대로 개편됐다
그 밖의 장비들도 모두 최신식 국산으로 교체됐다
내가 근무했던 정비과의 커다란 정비고도 철거되고
왠만한 큰 수리는 여단 정배중대나 사단 정비대대에서 해 주고
수리부속품 조달도 모두 랜선으로 신청하고 가져다 준다고 한다
허구헌날 공용증을 끊어서 여단이나 사단으로
부속품을 받으러 다녔던 수고가 없어진 것이다
허름한 막사도 모두 다 헐어내고 최신식 건물로 개조됐다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 때 심었던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 나무가 됐다
인근 산은 물론이지만 부대 내에도 그 때 심었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다
5. 맺는 말
갑자기 수원 사시는 누님과 통화를 하게 되어
포천얘기를 하다가 이 글을 쓸 생각을 하였다
엊그제 포천 사는 매부 친구들 부부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벌써 돌아간 분 들도 여럿이라고 했다
하긴 매부가 나보다 10살 위인 83세시고 누님이 79세다
몇 해 전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처분해서
누님댁은 거부는 아니지만 준거부가 됐다
아직도 꽤 많은 땅이 남아있다고 한다
누님이 포천으로 시집을 가시고
내가 포천에 있는 맹호부대 기갑여단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포천에 주력 사업장이 있는 회사에 입사해 근무하고
다시 2010년부터는 맹호전우회에 들어가서
모부대를 찾아가는 식으로 포천과 인연을 맺고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인연이었을까?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전혀 인연이 없었던 포천이
1972년부터 지금까지 나와 인연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 누님과 통화를 하면서 포천 이야기를 듣고
불현듯 포천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었다
한 때는 포천의 이동갈비를 먹으러 자주 올라 갔었다
백운계곡 꼭대기에 있는 송씨네집이 단골집이었다
철다리를 건너 개울가 평상에 앉아 갈비를 먹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돌아가신 장인어른과 올해 97세 되신 장모님을 모시고
심심치 않게 올라가던 그 곳이 그립다
거기 갔던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첫댓글 포천과의 인연이 깊네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추억들을 뒤돌아보게 되지요
나와 인연이되어준 지역들이
제2의 고향처럼 정감이가고
다시찾아가보고 싶어지기도하고
살아온날들속에
유독 인연이 많은 지역에서
또 나를 많이 성장시키기도 했을테지요
지나간추억들은 어떤형태로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1974~1976년까지 군대생활을 했고
1979~1982년까지 직장생활을 했고
2010~현재까지 전우회 활동을 하는 곳
포천출신 매부와 늘 포천얘기를 하고
누님은 지금도 포천으로 성묘를 다닙니다
요즘은 조카들이 운전을 해서 간다네요
저의 젊은 시절이 녹아있는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
청솔님
포천의 가족사를
섬세히도 쓰셨네요 가족들과의 인연이 깊으시군요
제가아는 포천은 의정부 사시던 아들의 장인 장모가 전원주택을 짓고 잘 살고 게시 답니다
또 트롯 가수 임영웅의 고향 이라는 것과
맛있는이동갈비
집들이 있다는것
언제가도 좋은곳
"산정호수"가 있지요
참 좋은 포천입니다
매부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포천입니다
이한동씨 집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동갈비는 후에 생겼지요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불고기였지요
산정호수에도 자주 갔었습니다
그 곳이 제 첫째, 둘째 직장 다닐 때
제가 맡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종계병아리 영업을 하러 다녔습니다
양계장 있는 곳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솔님이 쓰시는
모든 글들은 삶의 이야기방에
아주 잘 어울리는 글들이라
읽기가 참 편해서 좋습니다
오래전 막내가 포천에서
교사를 할때 몇번 간적이
있었는데 저가 워낙 막걸리를
좋아 해 명품 이동 막걸리를
냉장고에 가득 넣어 놓고
실컨 먹고 온 기억들이 납니다
아이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늘 따뜻한 댓글로 응원해 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포천의 이동막걸리가 아주 유명했지요
군대생활 하는 동안 실컷 마셨습니다
유일한 낙이었다고나 할까요
안주는 길쭉한 손가락과자가 전부였지요
아니면 취사반에서 얻어온 김치
그래도 그 막걸리가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기우님 ^^*
가까운 동네 포천 얘기 잘 봤습니다.
투바위 고개 기슭에 있는 천보공원묘원에 장인-장모, 처 작은아버지 부부 이렇게 네분이 계셔서
일년에 대여섯번은 갑니다.
아 그러시군요
자주 다니시는 곳이군요
포천이 괜찮은 고장입니다
감사합니다
포천의 현리라는
곳 군부대에 신병훈련소가 있어서 저도 아들이 보고싶어 갔었네요.
백운계곡의 맑은 물
포천이동갈비도 푸짐하고요.
누님이 포천 땅부자로
건강하게 83세 79세로 건강하게 사시니 흐뭇하네요.
현리에서 훈련 받으셨다면 제 후배네요
현리에 있는 게 맹호부대입니다
저도 그 곳에서 훈련받았습니다
백운계곡은 여름에 가야 제 맛입니다
계곡 건너가서 나뭇그늘아래 평상에서
갈비를 뜯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히지요
올 여름엔 한번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매부네 집이 포천에서 양조장을 했습니다
토지도 제법 많아서 친척들이
그 땅을 많이 부쳤다고 하드라구요
옛날엔 별로였는데
요즘 워낙 땅값이 많이 올라서요
그래서 일부러 조금 남겼다고 하드라구요
네 누님댁은 편안하게 잘 사십니다
조카들도 다 잘 풀렸구요
감사합니다 별꽃님 ^^*
저도 포천에서 군생활 했답니다
저는 포천입구 6군단 통신대 였지요 ㅎ
그러셨군요
네 6군단 잘 알지요
대진대학교 들어선 자리
통신 주특기셨군요
저는 기갑정비였습니다
장갑차 정비
정비과에서 차량계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포전과의 인연이 깊으십니다.
오래전
전 친구들과 그곳에 가서 이동 갈비를 먹고 싸우나를 하러 좀 다녔지요,
글 잘 봤습니다..
건강하십시요,
네 제가 포천과 인연이 깊습니다
이동갈비에 온천이 코스였지요
호사하셨네요
감사합니다
기갑부대서 근무를 하셨고
포천이 제2의 고향이다 싶을정도로 인연이 깊군요.
자상한 군의생활 이야기 잘읽고갑니다.
네 그랬습니다
포천에서 젊은 시절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포천엘 다니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망중한님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