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0일 성공회 신문 기고글>
“침묵(Silence)”에서 “선교(Mission)”를 생각하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엔도 슈사쿠, 『침묵』, 홍성사 중에서)
서울 어느 산동네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살면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고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 영화 『미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서 그러한 삶을 살기로 ‘서약’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신부처럼 비폭력적 방식이건 혹은 멘도사 수사처럼 적극적 저항이건 간에 나에겐 모두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am)”라는 모토를 실현시킨 위대한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묵』은 마치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나의 신념에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왔었다.
2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 성주간이 시작되기 하루 전, 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침묵』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사일런스』를 봤다. 그리고 다시 미션을 생각해 본다.
영화는 마카오에 있는 성 바울성당을 배경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곳은 아시아 최초 유럽 스타일의 대학인 성 바울대학의 일부이자 예수회 동아시아 선교본부이기도 한 곳이다. 지금은 불에 타 상당부분 소실되고 정면과 계단 등만 남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웅장한 유럽풍 성당이었다. 이곳에서 신앙과 패기로 충만한 두 젊은 신부가 일본에서 행방불명 된 자신들의 영적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찾아 나서겠다고 자원한다. 그들은 일본인 키치지로를 만나서 일본으로 잠행해 들어가 박해를 피해 숨어살고 있던 ‘기리스단(吉利支丹:그리스도교 신자)’ 마을에서 영웅적인 첫 미션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의 미션은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되고 결국 잡혀서 갇히게 되었다.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도전을 받게 된다:
첫째, 국제관계 속에서 선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도전이다. 감옥에 갇힌 로드리게스 신부는 어느 날 잠시 풀려나 말쑥히 단장하고 재판관의 방으로 안내되어 그와 대화한다. 재판관은 질투가 심한 4명의 첩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한 남자가 이들 모두를 내쫓은 것이 현명한지 묻는다. 그러자 신부는 현명하기는 하지만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기독교에선 한 여자만을 택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한 여자만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응수한다. 재판관이 말하는 남자는 일본을 말하며, 4명의 첩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을 의미한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결정한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서양 각 나라의 대리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부가 말하는 한 여자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처럼 영화는 정치적 입장과 종교적 입장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순수한 선교’가 가능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이 일본의 심성 안에 뿌리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이다. 성화와 성물을 밟을 것을 강요하는 지배자들에게 신도들은 순교냐 배교냐 하는 양자택일에 몰린다. 용감하게 순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적지않은 이들은 부득이하게 배교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방식에 대하여 일본인들의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두 가지 마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내재화 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난 마음(사회적 규범)인 ‘다테마에’로는 일본 토속종교 신자라고 하면서도, 속마음인 ‘혼네’에선 기독교 신앙을 깊이 숨기며 살아간다. 일본의 ‘기리스단’은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자신들의 심성에 뿌리내리며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나갔다. 영화는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박해에 굴복하여 자신들의 서양인 정체성을 버리고 각각 ‘사완 오추안’과 ‘오카다 사네몬’이란 일본이름으로 개명함으로써 복음이 일본인의 심성 안에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도 영화도 의외의 반전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배교와 회개를 밥 먹듯이 하던 ‘키치지로’였다. 그에겐 어느 것이 혼네이고 어는 것이 다테마에인지 모를 정도로 때론 가롯유다처럼, 때론 베드로처럼 연약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긴 세월이 흘러 서양신부도 그도 그리고 주변인들도 다들 ‘배교’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때, 정기적으로 하는 신자 색출 의식에서 그는 자신의 품 안에 간직해 왔던 자그마한 성물이 발각되었다. 아무 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혼네가 드러난 것이다. 갈대와 같은 키치지로가 마침내 순교하게 된다. 인간의지의 강함과 약함이 신앙 안에서 역설로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는 듯 하다.
셋째, 구원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도전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진 고초와 어려운 환경보다 신부들을 더 괴롭힌 것은 자신들 때문에 잃어가는 일본신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처하는 신부들의 태도는 상반되었다. 가루페 신부는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다가 결국 그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페레이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때문에 죽어야 하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굴복하고 만다. 예수님의 기쁜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머나먼 이방인의 땅 일본에 온 신부는 오히려 고통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에 엄청난 번민과 혼란에 빠진다.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을 위해 순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지 고통스런 노동의 현실을 벗어나는 피안의 파라다이스로 도피하는 것인가? 또한 선교란 무엇인가? 자신 때문에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신앙을 견지한다는 것이 단지 선교사 자신의 영웅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내 신념을 버려야 하는 그 무엇인가? 소설과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우리들이 고민해야 몫으로 남겨준다. 다만 그 고민 속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길 은근히 암시할 뿐이다.
복음을 전하고 증언하는 선교는 이처럼 정치∙경제, 문화, 그리고 실존내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고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섣불리 말할 수 있거나 쉽게 들릴 수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래서 ‘침묵’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힘든 상황 속에 있는 우리는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왜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시냐고 절망스럽게 기도하지만, 어쩌면 하느님은 침묵이란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가 후에 『침묵의 소리』라는 책에서 “신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
십자가 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처절한 기도에 성부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신다. 그러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십자가 장면에서 비 한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성부 하느님은 성자의 절규에 이와 같이 응답하시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 행위가 ‘무위(無爲)’로 되어버린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싹’으로 돋아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시신을 모신 돌무덤은 비워지고, 화장터에서 불살라지는 ‘배교자’ 로드리게스 신부 시신의 손 안에 있는 자그마한 십자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