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23년 2월 16일 목요일 16면
오탁번 전 한국시인협회장
문학사 최초 정지용 논문 써 주목
월북 문인에 관한 논의가 금기시되던 시절, 문학사 최초로 시인 정지용에 대한 논문을 쓴 오탁번(사진) 시인이 별세했다. 올해 80세.
15일 한국시인협회는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오탁번 시인이 지난 14일 오후 9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 ‘신춘문예 3관왕’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됐다.
1971년 정지용을 연구한 석사 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지용은 최근에야 1950년 9월 인민군에 의해 납북 도중 숨진 사실이 알려졌지만 당시는 월북 문인을 언급하는 게 금기였다. 오 시인 논문을 계기로 1980년대 월북 문인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해졌다.
고인은 이후 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98년 계간 ‘시안(詩眼)’을 창간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등 시집과, 『처형의 땅』 『새와 십자가』 『저녁연기』 등 소설집을 남겼다. 평론집 『현대문학 산고』를 비롯해 『헛똑똑이의 시 읽기』 등 다양한 산문집도 냈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 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 시 부문 대상(2011)을 받았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은 “시와 함께 살아간, 시로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 생애를 완성한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애도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 발인은 17일이다.
시안詩眼
창간사
(전체 1,675자며 200자 원고지 8.5매로 이루어진 한 문장)
무릇 한 민족의 예술혼이 가장 원형적으로 형상화되어 千秋에 길이 심금을 울리는 것이 바로 詩라는 사실은, 하늘과 바다를 섬긴 신화는 물론이요 부모형제를 노래하여 기리고 사랑과 이별을 눈물로 아롱지게 한 옛 향가나 가요에서부터 뚜렷이 짚어볼 수 있으려니와, 식민치하에서도 母國語의 피와 살과 숨결로 詩를 쓴 시인들이 한결같이 추구했던 것이 시의 威儀였음은 두루 아는 바이므로, 시의 威儀는 남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 천명을 다하여 귀중하게 지키고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은 새삼 췌언을 요하지 않거늘, 오늘날의 사정은 해방―분단―전쟁 그리고 남북대립이라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韓民族의 시정신이 이념의 선동구호로 변질되거나 한낱 언어유희의 수단이 된 채 國籍없는 떠돌이가 된 바 없지 않았으니, 지금 경향각지에서 숱하게 발간되는 시잡지가 많으나 시의 오묘한 정신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수준미달의 작품을 양산하면서 자기만족에 탐닉하거나 장사치들과 다름없는 배타적 구역을 서로 금그어 놓은 채 거간과 마름의 시비평이 발호하여 시인정신을 비하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경에 이르러, 시인들 마음 속에는 한결같이 정말 시잡지다운 시잡지 하나 없을까 하는 願望의 소리가 이심전심으로 번지게 되었으니, 이에 ‘좋은 詩를 알아보는 眼目과 識見’이라는 단 하나의 정신적 기치를 내걸고 계간시지 『시안』을 창간하는 바, 1938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야였던 당시에 극심한 용지 기근에 시달리면서도, 이태준, 정지용, 이병기 같은 분들이 우리말과 글을 되살려 참다운 민족예술을 도모하고 옛 선인들의 예술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창간했던 『文章』과, 1955년 민족상잔의 참화가 채 아물기도 전에 창간된 『現代文學』의 정신을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실로 무량하거니와, 1998년 오늘의 시점은 비록 분단시대가 지속되고 있고 한때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즐기다가 IMF라는 경제식민치하에 놓였다고는 해도 국민소득이 몇십 달러에 불과하였을 1938년이나 1955년의 궁핍한 시대와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넉넉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되,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정신적 가치를 훼손하여 종당에는 인간성마저 상실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으니, 이땅의 시인이나 시잡지를 내는 사람들이 스스로 옷깃을 여며 참다운 詩의 威儀와 詩人의 品格을 회복하는 일에 너나할 것 없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앞장서야할 때가 도래하였음을 통감하는 바, 잡지 내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꾀똥을 누거나 소맷동냥을 하거나 말만 앞세우는 달걀가리를 하는 것은 시인의 자존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까닭에, 속된 타협이나 안일의 비굴함을 잡죄고 잡도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눈비음하지 않은 채, 시야말로 그 민족의 원형적인 母性의 문학이므로 좋은 시인과 좋은 독자는 좋은 시와 좋은 시잡지를 반드시 알아본다는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季刊詩誌를 창간하는 것이므로, 木板으로 인쇄하여 노끈으로 책을 묶는 정성이 새로 태어나는 잡지의 쪽마다에 남김없이 묻어나도록, 모름지기 시를 사랑하는 江湖의 諸賢과 뜻을 같이하여 『시안』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날 수 있도록, 가없는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世紀末의 혼란을 새로운 21세기에 대한 꿈의 展望으로 승화시켜 통일 조국의 현대시사를 펼쳐 나가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매진할 따름인저.
(《시안詩眼》 창간호, 1998년 가을)
<옮긴글 >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의 유능한 시인 한분이 또 하늘 별이 되어 우리곁을 떠났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 그분이 가셨군요 편안히 가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