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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uropa Universalis 원문보기 글쓴이: 우리모두
오블리스 노블리제가 실종된 한국 사회에 큰 희생을 한 조선 말기의 한 명문가문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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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영, 시영 형제 - 명문가의 망명과 독립운동에 투신
1. 킹왕짱 뼈대있는 가문.
이 글의 주인공은 이회영 6형제입니다. 구한말 이조판서 이유승의 6명의 아들, 건영, 석영(1855년생), 철영, 회영(1867년생), 시영(1869년생), 호영이 그분들이죠.
이중 차남 이석영은 아들이 없던 이유승(이석영 부친)의 사촌인 영의정 이유영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이 이유영은 조선 5대 거부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조선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이회영 일가는 경주 이씨 소론 가문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삼한갑족(三韓甲族)출신입니다.
삼한갑족이란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한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뜻이죠.
(이회영의 10대조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입니다.)
이중 눈에 뛰는 인물은 4째 우당 이회영과 5째 성재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 사려깊고 신중하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행동대장과 같은 인물.
성재 이시영 - 이재와 법률에 밝은 관료적 능력이 우수.
큰 형님인 이건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집안일(조선독립운동)은 4남인 이회영이 주도를 하고, 다른 형제는 적극적으로 나서며 따릅니다. 이석영은 이유영의 양자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집안이 달라졌음에도) 이회영이 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합니다.
2. 식민지 이전에는 뭐했지?
이회영: 관직에 나가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독립협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고, 안창호(安昌浩), 이승훈,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등과 국권회복 비밀결사 신민회(대종교)를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저항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동청년학원을 만들어 교육에 힘을 쓰면서, 헤이그밀사 계획을 세워 고종에 건의 추진하였습니다.
이시영: 조선 말기 온건 개혁파의 수장이며 갑오개혁때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입니다.
1891년 문과에 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외부교섭국장을 지내는 시기에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이에 사직을 하고 형 이회영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 관직에 임명이 되어 평안남도 관찰사, 한성 재판소장, 법부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하는 등 법조계 주요 관직을 거칩니다.
(이는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법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는 바탕이 됩니다.)
3. 한일 합방 이후 독립운동 방향
불행하게도 1910년 한일합방이 됩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지난 몇년간 일제와의 투쟁을 합니다. 하지만, 백성의 의병 전쟁은 막강한 일제의 군사력에 처참하게 괴멸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실력의 차이를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에 조선 민족 만의 무력적 방법으로는 일제에 상대가 될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죠.
민족 지도자(신민회도 포함)는 실력양성론과 (무력적) 준비론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실력 양성론은 자본주의 중심(산업, 기술, 교육)으로 실력을 양성을 하자는 것으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합니다.
아직은 능력이 부족하니 치욕스럽지만,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역량을 보존하고, 민족의 실력을 길러서 일본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게되면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입니다.
근본적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으며, 독립은 먼 훗날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픈 의병 활동이나 무장 투쟁은 민족의 역량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독립운동무용론도 나왔습니다. 이를 일제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을 하죠.)
이에 반해, '가만히 실력만 길러서는 않된다 경제 기술적 능력을 추구함과 함께 군사적 역량도 키워서 머지않아 일제와 다른 나라(중국 또는 러시아)와 분쟁이 일어날 때, 그 상대국과 적극 협력하여 일제와 싸워 이겨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 무력적 준비론입니다.
준비론 지도자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과 단독으로 대적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지 않아 중국, 미국,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할때, 그간 양성한 독립군으로 호응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자는 주장을 기반으로 하여, 무력 양성이 기본 목표로 하지만, 경제력 향상과 근대 교육, 근대 의식으로의 혁신 등 총체적인 실력양성을 목표로 합니다.
(군사적 준비를 하지만, 실력양성론에서 말하는 실력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륙 침략을 시도하는 일제는 중국, 러시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언제 전쟁이 터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 못지 않게 유럽도 긴장 관계였으며, 유럽이 먼저 터져버리죠.(1차 세계 대전))
즉, 무력적 준비론에서는 독립(또는 독립을 위한 일제와의 독립전쟁) 가까운 미래로 생각합니다.
고딩 시절 국사에서 무장투쟁론(무력적 준비론)이 (조선 민족만으로) 일제와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구하는 것과같이 표현하였는데, 사실 무력적 준비론 지도자들도 일제와 일대일로 맞짱을 떠서 이길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른 강대국과 협력을 통한 독립 쟁취였죠.
이 사상은 이후 조선 무장 투쟁 독립군은 여러 강대국(중국 공산당, 중화민국, 소련, 미국 등등)과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4. 간도로의 이주
신민회 내부에서도 실력양성론과 준비론이 갈라졌는데, 이회영은 무력적 준비론자였습니다.
그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표로 선산을 제외한 가문의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을 합니다.
조선 최고의 거부 이유영의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도 동생 이회영의 뜻에 따라 모든 재산을 처분합니다. 어마어마한 토지와 재산을 갑작스럽게 처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석영은 40만원이란 거금을 준비합니다.
1910년 당시 40만원은 1990년의 물가를 기준으로 300억(쌀값기준)~800억(소값기준) 정도였다고 합니다.
(1990년쯤 서울 집 한채 가격이 대략 3천만~6천만정도였다고 합니다. 집 1000~2000채 가격이라는. -_-;;;; ㅎㄷㄷㄷ)
자금을 준비한 이회영은 모든 집안 식구, 형제,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1910년 12월 말에 조선을 떠나, 차, 마차, 썰매 등을 타고 한달넘게 이동을 하여 1911년 초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서간도 지명) 근처의 추가가(鄒家街:추씨 집성촌)에 정착을 합니다.
이회영 일가뿐만 아니라 독립군 기지 건설을 목표로 한 사람은 간도에 많이 진출을 합니다. 이렇듯 독립군 기지를 간도에 많이 생기게 된 이유는
1) 조선인이 많을뿐만 아니라, 대부분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간도에는 주로 2종류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일제 치하를 피해 독립운동을 위해 온 '지식인'과 토지를 강탈당하고 경작지를 가지기 위해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소작농' 입니다.)
2) 일본의 잦은 문제 발생으로 일본인에 대한 토착민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3) 조선 접경지역으로 거리상 전쟁발발시 호응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4) 당시 간도를 조선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5) 대부분 산악 험지라, 보안의 이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게릴라전을 펼치기(라기 보다는 산에 숨기)에도 유리했다고 합니다.
5. 신흥 무관 학교 설립.
정착을 하면서 추가가에 호의를 얻고 돈을 주고 많은 토지를 매입합니다. 이 토지는 이후 조선인의 정착과 독립 기지 유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후 경학사 조직(1911년 4월)하고, 곧 신흥강습소(1911년 5월)를 설치합니다.
'경학사'는 이주해오는 조선인에게 농사짓는 법과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인의 교류 및 협력을 조직 시행합니다. 이 경학사는 이후 1916년 초 '부민단'(이주민 자치 단체)로 발전하고, 1919년 3.1운동이후, '한족회'(주민 자치단체)로 발전합니다.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는 이회영이 만든 사실상 같은 단체)
'신흥 강습소'는 이름은 '강습소'이지만, 사실상 군사학교입니다. 일제의 감시, 토착민의 견제와 텃세를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명칭을 붙인 것입니다. 이후 1912년 7월 통화현 합니하에 상당한 시설을 갖춘 학교 설립하며 '신흥무관학교'로 변경합니다. 여기서 군사 교육과 중등 교육을 배우며, 농사를 짓는 3년 과정의 학교입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중국인이 아니면, 땅을 가질수가 없어, 이석영 형제는 중국으로 귀화를 하려 하였습니다. 조선 국적보다 조선독립운동이 훨신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죠. 하지만, 이회영 형제는 귀화조건(한 곳에서 5년이상 거주 등등)이 까다로워 중국 국적을 가질수 없었습니다.
이에 큰 곤란을 겪던 중에 원세개(위안 스카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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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1882)때 청 군대와 함께 들어와(대원군을 중국으로 납치한 사건을 아시죠? 이놈입니다.-_-) 조선 주둔 청나라 군의 최고 책임자로 조선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 원세개는 조선 명문 거족과 많은 친분을 쌓는데, 그중 관직에 있던 이유승(이회영 부친), 이시영과도 상당한 친분을 갖게 됩니다.
청일전쟁 때 중국으로 도주한 원세개는 군대신식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청나라 군의 신식군대화에 크게 기여를 합니다. 후일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당시는 청 정규군. 원세개 사망뒤 그 부하들이 독립하여 군벌을 형성합니다.)을 장악하고, 이를 기초로 북양군의 수뇌로써 정계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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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이시영 형제가 당시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인 원세개(위안 스카이)를 찾아가 부탁을 해 원세개의 지시에 의한 동삼성 총독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토지 등록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신흥 '강습소'란 허명 대신, 정식 이름이 '신흥무관학교'를 내걸수 있었죠.
이러한 서간도의 여러 곳에 막대한 토지를 매입하고, 여러 무관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에는 이석영의 막대한 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6. 1919년 3.1운동 이후 정세 변화.
이회영 일가는 3.1운동 이후, 고조된 정세 속에 부민단은 한족회(주민자치, 거류민단체)로 발전하고, 임시정부로써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군정부는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생겨난 상해 임정 산하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지휘하는 역활을 담당하게 됩니다.
1차대전 종결과 3.1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보다 활발하게 추진되어,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로 오면서,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5월 고산자(孤山子)에 더 큰 시설을 갖추고 본교로 이전합니다.(합니하는 분교) 이후 군사교육에 치중하여 3개월 6개월 단기 과정의 하급장교 과정을 만드는 등 무관학교로의 면모가 더욱 강해집니다.
7. 1919년 신흥 무관학교의 위기(마적의 습격과 윤치국 치사 사건)
1) 마적의 습격
중국 마적 장강호가 무관학교를 습격하여, 교관과 생도를 납치를 합니다. 이들의 거액의 몸값을 요구를 하여 한족회에서 이를 지불을 하는데, 이로 인해 한족회에 엄청난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과 무관학교로써 위신과 사기하락을 가져옵니다.
(마적 장강호는 군사력으로는 볼때, 마적이라기 보다는 정규군보다 강한 군벌로 보기도 합니다.)
2) 윤치국 치사 사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하다보니 보안 유지를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이회영은 보안을 매우 중시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보안 유지로 인해 고산자, 합니하 군사학교의 생도는 서로 다른 학교의 생도를 전혀 몰랐을 정도였죠.
어느날 고산자 신흥 무관학교에 스스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윤치국이라는 조선인이 나타나 학교를 둘러보는 등 여러가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합니다. 이에 고산자 무관학교에서 체포를 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윤치국이 사망을 합니다. 이후 윤치국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8. 1920년 일제의 개입과 중국의 탄압
1920년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봉천을 방문 중국과 함께 '중일합동수색대'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살해합니다.
또한, 친일한일민간단체 인 보민회를 조직하여, 이들이 독립운동자 수색에 편의를 제공하게 합니다.
일본 장교 中野와 마적 장강호(위의 무관학교를 습격한 마적과 동일 인물)가 이끄는 습격부대로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고 학살합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운동이 근절되지 않았다는 판단으로 일제가 직접 간도에 침략하여 조선독립운동가를 말살을 하려는 '대토벌'계획을 세우고, 10월 2일 장강호의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사살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재만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즉시 군대를 진군하여 조선독립운동가를 색출 학살합니다.
일본군을 피해 이동중인 북로군정서와 이를 토벌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청산리 전투(10월 21일)입니다.
이 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고, 일본군의 전략은 조선독립군 토벌에서 재만조선인 제거로 변경됩니다.
1920년 11월 일본군이 만주에서 조선인을 모두 죽이는 경신대학살을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만주의 조선인 조직은 모두 와해가 되고 신흥무관학교 역시 폐교가 되고 사관생들은 뿔뿔히 흩어집니다.
이회영 형제 일가 역시 목숨을 걸고 만주를 탈출하는데 성공을 하지만, 만주에 만든 기반은 모두 버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9. 신흥 무관 학교가 성공한 이유.
북로군정서를 이끈 간부중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범석,박영희 장군등)이며, 서로군정서 역시 많은 수가 신흥무관학교출신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이후 광복군 활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 등 수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여러 독립운동에 헌신을 합니다.
1910년대 간도에서 수많은 독립 기지와 무관학교 설립 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를 하였지만, 신흥 무관 학교만 유일하게 성공을 하였죠.
이 이유를 살펴보면,
1) 설립 주체: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본인이 단신으로 간도로 온 것에 비해, 가족이주로 인한 정착에 대한 의지가 크고 단결성이 높았으며 문제 해결능력이 우수했다.
2) 재정: 대부분의 무관학교가 1-2년내에 재정상의 이유로 폐교된 것에 비해, 처음 설립시 약속되었던 신민회의 자금지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석영의 재력만으로 설립 및 운영이 되었다.
3) 서간도의 특징: 험준한 산악 지역인 서간도는 대부분 소작인이었으므로, 사회 경제적 기반이 균질하여 계급적 갈등이 적었다.
4) 보안유지의 성공: 철저한 보안 유지. 그로 인한 윤치국 치사 사건과 같은 악영향도 적지 않음.
(한용운 수기. 한용운이 만주지방을 여행중, 안면이 있는 이회영, 시영 형제를 만나기 위해, 신흥 무관학교를 찾아 갔으나 당시 이회영, 시영 형제는 일제를 피해 도피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중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발포로 총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살았다고 합니다.)
5)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인 원세개의 도움
10. 이후 활동.
- 이건영
첫째. 1913년 일제의 색출 작업에 피해있다가 1914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에 들어와 안착하여 살았습니다.
1940년에 홀로 노환으로 사망..
- 이석영(1855~1934?)
2째. 조선 최고의 부자의 양자로 갔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서간도 합니하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과 독립운동에 재산을 모두 소비하고, 1920년 탈출 이후, 봉천, 북경, 상해 등지를 떠돌며 심각한 가난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을 지원합니다.
("일주일에 3끼의 식사를 하면 행복한 한주이다"라는 기록이 있음.)
슬하에 이규준, 이규서, 2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장남 이규준은 이회영과 함께 다물단(독립테러단체) 활동을 주도중 사망(1927)합니다.
극심한 생활고에 의한 중병에 걸린 이석영은 이호영(6째)에 의해 (강제로 -_-;;) 조선으로 들어와 병을 치료합니다.
병이 회복된 뒤 다시 중국으로가 다른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려 하였으나, 호영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금강산 관광을 핑계로 받은 여비로 중국 상해로 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_-;; 70이 넘은 나이에 가출이신가요?)
그러던 중에 자신의 하나 남은 아들, 차남 이규서가 이회영(4남)의 아들 이규창에 의해 처형을 당했는데, 이후 이 사실을 알고 낙담하여 사라져 여기저기를 떠돌다 상해에서 굶어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 이철영
셋째. 1924년 병환때문에 조선에 들어 왔으나, 1925년 병사함.
- 이회영(1867~1932)
4째. 1913년경 간도에서 일본의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피할 때, 모두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선으로 들어와 한성에서 독립자금모금 및 간도로 보내는 일을 합니다. 당시 일본에 몇번 잡혔으나 워낙 명문가이면서, 보안을 워낙 철저히 하여, 독립운동 증거가 미비하여 풀려났습니다.
이후 친척으로써 고종을 만나 고종의 중국으로의 망명하여, 조선 독립의 구심점 역활을 할 계획을 세우고,
(아들 이규학을 고종의 조카이며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과 혼인하였습니다. 이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지금 민주당 이종찬 전 의원.)
고종의 추인을 받아 진행중에 고종의 급사를 하게 됩니다.
(당시 친일파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고종의 중국 망명 추진설은 이회영의 기록 등 몇몇 곳에 나와있다고 합니다.)
1919년 상해로 와서 독립운동 조직을 구성하는 과정에 참가합니다. 이회영은 임시정부를 반대하고, 기존 독립단체의 연합을 주장하나, 임시정부가 설립이 되고, 이회영은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다른 독립운동을 모색합니다.
추진하던 모든 독립운동이 좌절이 된 1923년 57세의 나이로 아나키스트로 전향을 하고, 24년 신채호, 김원봉, 김창숙과 뜻을 같이 하고, 의열단에 관여를 합니다.
이회영은 아들 이규학과 이석영의 아들 이규준과 함께 다물단을 만들어 의열단과 연합하여 항일 테러 활동을 합니다.
대표적으로 25년 일제 밀정 김달하 암살 사건과 28년 박용만 암살 사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은행 털이 등이 있었습니다.
(박용만은 독립운동가인데, 이회영쪽 주장으로는 당시 일본에 의해 매수되어 첩자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 괴뢰 정부인 만주국이 생기면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위험해지자 오히려 만주로가 만주 독립조직을 정비하려 합니다.
모두가 말리지만, 만주로 가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만주로의 이동을 철저한 보안속에 추진을 합니다.
만주로 가기 전날 어려운 처지에 병환이 있는 2째형 이석영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고 만주로 가지만, 역에서 일제 경찰에서 잡히고, 다음날 사망했다는 통지가 됩니다.
이후 이규학이 내막을 알아본 결과, 이석영과 같이 살고 있던 이석영의 차남 이규서와 연충렬이 이회영과 이석영의 만나는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에 밀고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이규학이 이규서와 연충렬을 처단을 합니다.
이회영이 사망 당시 막내 아들이 6살 이규동인데, 이규동의 아들이 열린우리당의 이종걸 의원입니다.
- 이시영(1869~1953)
5째. 6형제중 유일하게 독립된 조선땅을 밟을 수 있었던 분입니다.
이시영의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이후 회영과 달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를 합니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을 합니다.
해방 후 임시정부 1진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교육 사업과 정치 활동를 합니다.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만들어 1949년 신흥대학을 설립을 합니다. 이후 1951년 재정상의 문제로 조씨집안에게 넘어가면서 '경희'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희대학교입니다. 하지만, 경희 대학은 신흥 무관 학교를 전신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시영은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면서 초대 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부통령 후보가 김구, 이시영, 조만식이 있었는데, 김구는 스스로 거부하였고, 조만식은 좌익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시영의 임시정부 경력은 이승만의 부족한 정통성(임시정부)을 충족시켜주는 역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시영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사임을 합니다. 사임하는 이유는
1. 이승만과의 불화가 심하고, 실권 없는 부통령을 한계를 느끼고,
2. 한국전 당시 거창 양민 학살에 분노를 하고, 책임을 통감을 하였고,
3. 당시 국민 방위군을 급히 조직하였으나, 고위직의 비리로 예산이 집행되지 못함에 의한 국민의 큰 희생에 분노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이호영: 6째
독립운동 중 조선에 들어와 살다가 이석영(2째)의 치료를 위해 북경으로 가 이석영을 조선으로 데려와 치료를 합니다.
이석영의 중국행을 막지만, 이석영이 중국으로 가자 2명의 아들 모두 데리고 중국으로 따라 가 독립운동에 참가합니다.
1933년 아들 2명과 함께 자살을 합니다.
이 6분중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묻히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p.s. 학교 다닐때, 나름 국사를 좋아하고 열심히 했죠.(졸업할 때 받은 우수과목상중 하나가 국사입니다.)
그런데, 전 이회영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대학 현대사 시간에 이회영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서, 이런 분을 왜 몰랐을까 생각하고 알아봤죠.
독립협회 활동도 하고,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 사건 입안 및 진행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 사건에 사절단 이름만 나오죠.)
신흥 무관 학교를 만들어 운영했을뿐 아니라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만주 독립운동단체로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등이 나오고,
신흥무관학교와 함께 잘 협력해서 나갔다는 식의 내용이 나와서, 우리 조상은 독립운동을 일치단결해서 일사분란하게 했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 단체는 모두 1명(이회영)이 조직하고 운영에 관여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죠.
(오히려 독립운동가끼리의 파벌싸움에 자리싸움이라..)
항일 테러 단체로 의열단은 국사책에 나오지만, 다물단은 나오지 않죠.
죽기 직전까지, 굶어가면서도 총 한자루 쥐고 항일 테러 활동을 하며, 위험한 적진에 직접 뛰어든 이회영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독립운동을 할 조직도 자금도 모두 사라져, 더이상 할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보수가 싫어하는 좌익)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여 끝까지 독립운동을 합니다.
네. 이회영 선생은 보수가 보기에 좌빨(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좌익 아나키스트는 우익이 볼 때 빨갱이나 마찬가지겠죠.)입니다.
이시영 선생님도 계시지만, 이분도 이승만이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용해먹은 분위기가 강합니다.
이시영 선생의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구성원의 이미지를 초대 정부에 투영시키고, 그 이미지를 이승만 자신에게 투사시켜 독립운동을 이끈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의 이미지를 만들었죠.
(이시영 선생의 이미지를 뽑아낸 이상 더이상 이시영 선생이 눈에 뛰는건 이승만 입장에서 곤란한 일이죠.)
51년 이시영 선생이 부통령을 사직하자마자 그분의 모든 정치 활동이 좌절될뿐만 아니라 혼심의 힘을 다해 이끌던 교육 활동도 동시에 좌절됩니다.
첫댓글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내용이라 퍼왔습니다.
이 학교를 지페에 새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그게 우리들이 할수있는 최대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려 2000명이상의 하급장교가 배출되고 대부분이 조국독립해방전쟁에서 전사햐셨습니다 ㅠㅠ
멋진 가문이군요.
전 또... 조선일보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읽었습니다.
멋진 분들이군요.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한일합방'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에 의한 용어죠. '경술국치'라는 용어나 다른 어휘를 사용하는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