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아내 친구가 왔다.
간만에 반가운 해후였다.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까운 카페로 갔다.
점심을 잘 먹었다면서 아내 친구가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좋았다.
카페는 차분하고 고즈넉했다.
사람은 별로 없었다.
홀 중간 정도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두 여성이 벽쪽에 앉았고 나는 통로쪽 의자에 착석했다.
나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착석한 자리가 통로쪽이라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그 벽면에 A.E.Houseman(1859-1936)의 詩가 적혀 있었다.
"와우"
그 카페에서 오랜만에 그의 시를 다시 보았다.
나는 지체없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으로 담았다.
내용은 이랬다.
When I was one-and-twenty
I heard a wise man say
"Give crowns and pounds and guineas but not your heart away
Give pearls away and rubies but keep your fancy free"
But I was one-and-twenty
No use to talk to me
A.E.Houseman
나는 웃음이 나왔다.
학창시절에 선생님들이 우리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쏟아냈던 훈계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연애질 하지 말고 착실하게 공부나 열심히 해라"
"해찰하지 말고 앞만 보고 똑바로 정진하라"
"학생의 본분은 '공부'뿐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말씀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어디 세상일이 선생님들의 당부처럼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던가.
조금 더 커서 청년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또 우리에게 조언했다.
"사랑은 너무 아픈 거라고, 절대로 상대에게 깊은 '情'을 주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그런 충고에 동의할 수 없었다.
피가 끓는 청춘기 때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몹시도 연애가 궁금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것도 뜨겁게 오래 오래 하고 싶었다.
간절했다.
실제로 고교를 졸업하고 스무살 때,
내 인생 첫미팅에서 동갑내기 한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와 연애 8년, 결혼생활 30년째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것도 하늘이 맺어준 운명이지 싶다.
나는 서울에서, 그녀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유일한 소통은 편지뿐이었다.
엄청 써댔다.
해병대 시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하루 빡쎈 훈련이 끝나고 드디어 서부전선에 적막한 어둠이 깔렸네"로 시작하는 군사우편을 숱하게 보냈다.
서신의 첫머리는 늘 비슷했다.
매번 "서부전선에 어둠이 내리고 누군가가 그리워 가슴이 저릿한 저녁에, 어쩌고 저쩌고~"로 시작했었다.
참 많이도 팔아 먹었다.
'서부전선', '해병의 뜨거운 가슴', '외로운 밤', '짙은 그리움', '징그럽게 안가는 세월' 등등.
지금 생각해도 "피식~ "하고 웃음이 터진다.
나도 그리 살았는데 내 '자식세대'나, 그보다 훨씬 어린 '조카세대'에겐 오죽하겠는가 싶다.
두말 하면 잔소리겠지.
다시 '하우스먼'의 詩로 돌아가 보자.
단순무식한 내가, '하우스먼'의 詩를 내 나름의 감성과 접근법으로 풀어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담아 보았다.
사람마다 해석과 감흥은 다를 것이다.
내가 스물 하고도 한 살 때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생과 사랑'에 대해 들었네
온갖 영예와 재물을 상대에게 다 줄지라도
깊은 情만은 주지 말라고
값비싼 보석이나 애장품을 사랑의 증표로 건넬지라도
절대로 어딘가에 '拘束'되거나 '속박'당하진 말라고
그러나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
나는 그때 '인생과 사랑'에 막 눈 뜨기 시작한 나이였으니
그런 훈수나 조언 따위가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
(누가 뭐라든, 나는 뜨겁게 사랑하고 싶었고 내 전부를 다 바쳐 미치도록 불태우고 싶었다네)
내가 '하우스먼'의 詩를 가슴으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감성을 이렇게 느꼈다.
모름지기 어떤 詩라도 그 작품을 감상할 땐 단어 자체에 매달리면 안된다고 본다.
시인의 더운 가슴과 촉촉한 感性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다가서야만 제대로 感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국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에서도 줄곧 우등생을 달렸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몹시도 의지했던 '엄마의 죽음'은 그를 끝모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게 했던 '천붕'같은 충격이었다.
아무리 씻어내려 애써도 결코 옅어지지 않았던 마음속 심연의 '트라우마'였고, 그의 여린 영혼에 원죄처럼 달라붙었던 삶과 죽음의 '기요틴'이었다.
'런던대'를 거쳐 '케임브리지대'에서 '라틴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상과의 영원한 별리 직전까지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매진했던 '하우스먼'.
그는 평생 독신으로 외롭게 살면서 깊은 사색과 독서 그리고 낭만적 염세주의의 詩를 쓰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귀천시까지 그리 살았던 영국의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젊어서 한 때는 'Sexual Minority' 성향을 보이기도 했었다.
L.G.B.T 중에서 그는 G(gay)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반응이 전무하자 모든 걸 포기한 채 학문과 문학의 세계에 묻혀 지냈던 고독한 '인텔리'였다.
이 시의 제목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When I Was One-And-Twenty'다.
내가 제대로 짚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술적인 나이, '스물한 살'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본다.
단지 나이가 글재의 중추였다면 간결하게 'Twenty one'으로 썼을 것이다.
아마도 '弱冠'의 청년이나 '芳年'의 숙녀처럼, 나는 '인생과 사랑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굳이 'One-And-Twenty'로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英詩'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상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렴 어떨까.
"이 땅의 청년들아"
사랑은 때때로 많이 아프고 눈물겨운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다 죽어버릴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상대에 집중하거라.
'청춘'이란 그런 때다.
인생이 긴 것 같아도 지내놓고 보면 '一場春夢'에 불과한 것.
경험 많고 나이든 'Wise man'의 드라이한 조언도 중요하지만, 청춘의 시기엔 네 가슴이 가라고 명하는 곳으로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게 맞다고 본다.
그곳이 '사막'이든, '툰드라'든, '사반나'든 무슨 상관이랴.
세상의 그 어떤 훈계나 조언조차도 너희들에겐 'No use to talk to me'겠지.
넘어져 코피가 나고 팔꿈치가 깨질지라도 또 일어나 또다시 사랑하고 또 사랑하거라.
그리고 도전하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
세월이 흘러 '而立'과 '不惑'이 지날지라도 그런 생의 '태도와 자세'를 지속적으로 견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인생의 문이 열리고, 영혼의 빗장이 풀리며 너희들의 삶이 '정서적인 풍요', '감사', '균형'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청춘들아.
'When I Was One-And-Twenty'
'하우스먼'의 시 한 수를 접하며, 젊은이들의 '인생과 사랑'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았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너희들의 뜨거운 가슴과 반짝이는 눈빛이 이 아름다운 봄날에 더욱 예쁘게만 느껴진다.
건투를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One-And-Twenty
오늘 아침은 Twenty라는 단어가
살짝 차가운 날씨를 덥히는것 같습니다.
멋진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