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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베풀 왕의 임재
슥 9:8-17
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슥 8:8-17 / 그들을 모두 고향 땅으로 데려다가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전하게 살도록 하겠다. 그때에는 그들이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변함없이 진실하고 의로운 관계로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9) [성전 건축의 시작]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의 성전을 지으려고 주춧돌을 놓던 그날, 예언자들에게서 이런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아, 힘을 내어 성전 공사를 완성하여라! 10) 그때에 나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제까지는 너희의 모든 수고가 허사였다. 너희가 아무리 일을 하여도 품삯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너희의 가축들도 전혀 벌어들인 것이 없었다. 그때에는 범죄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도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다시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런 보장이 없었다. 그때에는 내가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분쟁을 일으켜 놓았었다. 11)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살아남은 이 백성에게 완전히 다르게 대해 주겠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2) `이제는 내가 오직 너희에게 평화와 번영을 심어 주겠다. 너희의 농사는 평화로운 시절을 맞이하여 풍년이 들고, 포도나무마다 열매가 풍성할 것이다. 온 땅은 풍년을 누리고, 하늘은 철마다 고른 비를 내릴 것이다. 살아남은 이 백성에게 내가 이 모든 복을 누리게 하겠다. 13) 유다와 이스라엘아, 이방인들은 저주하고 욕을 할 때마다 `유다 사람들처럼 가련한 신세가 되어라' 하였으나 이제는 그 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유다라는 말은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축복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처럼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이방인들에게 유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거나 실망하지 말아라! 오히려 힘을 내어 성전 재건을 계속하여라!' 14) 보아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의 조상들이 나의 분노를 폭발시켜 놓았을 때에는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결심을 바꾸지 않았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5) `그와 똑같이 오늘날에는 내가 다시 예루살렘 시민과 유다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기로 작정을 하였다. 너희는 내 마음이 다시 바뀔까봐 걱정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16) 오히려 너희는 내가 시키는 일들을 하여라. 너희는 서로 진실한 말을 하여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법정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라! 17) 서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궁리를 하지 말아라! 검은 것도 희다고 하는 따위의 거짓말은 아예 입에서 떼어 버려라! 이런 것들은 내가 모두 미워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심판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초림하실 메시야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8-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진을 치십니다. 그래서 적군과 포악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권세를 지닌 정복자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눈으로 친히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받은 모든 백성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왕으로 초림하실 메시야는 성품이 공의로우셔서 왕으로서 모든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공정하게 보응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왕으로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귀를 타실 겸손하신 분입니다(삼하 7:12-16; 시 2:6; 사 9:6; 미 2:3).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은 뭇 사람을 섬기는 자로 오시는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의 화살을 끊으시는 평화의 구현자시며, 원수를 무찌르는 전사로서 갇힌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오라(12-17) 이방 나라에 포로 가운데 있으면서도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회복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열심과 인내를 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요새 즉 그들의 방어시설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시 28; 62).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철저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품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힘과 방패와 요새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과거의 모든 고난을 다 잊고도 남을 정도로 그들에게 완벽한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긴 활과 끼운 화살로 삼고 이방을 정복하게 하시며, 용사의 날카로운 칼과 같이 복음을 힘차게 전파할 것이며, 나팔소리와 함께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시며, 왕관의 보석 같이 하나님의 땅에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아름답고 강건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평강과 구원을 베푸실 유일한 왕이십니다.
아담은 ‘사람’, 셋은 ‘놓여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게난은 ‘거처’, 마할랄렐은 ‘하나님의 찬양’, 야렛는 ‘내려오다’, 에녹은 ‘봉헌되었다’, 므두셀라는 ‘죽음을 떠나보낸 자’, 라멕은 ‘맛보다’, 노아는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열 명의 이름 뜻은 10대를 거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메시지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의 선포이며 그 구원의 방식으로 씨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자, 그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고 있는 구약의 복음 계시입니다.
< 설 교 >
물 없는 구덩이에서 두 배의 축복으로
스가랴 9:9~17 / 피영민 목사
서 론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은 사복음서에 전부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9장 9~17절까지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우리에게는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큰 왕이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데 그 중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사회에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그런데 그 왕은 교만한 왕이 아니라 겸손하며 수수한 왕입니다. 보통 왕들은 말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말을 타고 다니는데 그 왕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공의로운 분이시며 그분의 손에는 구원이 있어 구원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왕국이 있어야 됩니다. 겸손하시며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어떤 왕국입니까?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10). 예수님의 왕국은 병거나 말이나 활로 유지되는 왕국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군사적인 무기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저마다 핵무기를 보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무력적인 방법으로 왕국을 통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고 말씀으로 세워지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는 왕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10절에서는 왕국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9장 11~17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왕국의 백성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왕국의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표이며 그림자입니다. 그 실체는 신약시대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Ⅰ. 왕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포로”들이었다
왕국의 백성들은 구원받기 이전에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슥 9:11~12). 왕국의 백성들은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던 죄수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인하여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유다 백성들이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인하여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은 B.C. 538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고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다 백성들을 건져주셨느냐? 그 이유는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가 복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짐승의 피로 언약을 인준하고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내용 가운데 유다 백성들이 언약을 어겨 포로가 되어도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마음을 돌이키면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신 30:3). 너희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했지만 언약의 피로 인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일차적인 의미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멸망과 지옥에서 건짐 받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언약을 맺는 것은 그림자이고 예표에 불과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써 언약을 맺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부활하게 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결코 어기지 아니하시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다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는 옛날 동방의 왕들이 사람을 죽일 때 빠뜨린 곳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할 때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는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습니다. 너무 깊어서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 없는 구덩이에 있다는 것은 3일만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기도를 해도 물을 마시고 하면 40일까지도 할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 이상 못합니다. 이처럼 물 없는 구덩이는 왕들이 죄수를 죽이려고 만든 장소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빠지면 아무리 돈이 많고 쾌락을 즐기면서 기분이 좋아도 3일이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 가운데에도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슥 9:12). 어떻게 이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되었느냐?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을 살려주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가랴 9장 12절을 보면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장이란 단어의 뜻은 피난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주셨고 구덩이 속에서 꺼내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죄수들은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마련해주신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부처님, 알라, 귀신에게 피하면 완전히 망합니다.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시 61:3). 이렇게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내시고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피로 죄사함을 받으며 언약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Ⅱ. 왕국의 백성들은 두 배의 축복을 누린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슨 축복을 주시느냐?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슥 9:12). 과거에 당했던 슬픔의 두 배로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사람들과 다릅니다. 갑절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갑절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원수들을 물리치는 승리를 주십니다. 원수와 싸워서 진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무조건 이겨야 됩니다. 탁구를 쳐도 축구를 해도 이겨야 됩니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슥 9:13~15). 그냥 봐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를 활로 삼으시고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온의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B.C. 167년에 일어난 마카비 혁명을 뜻합니다.
헬라에는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점령할 나라가 없어서 억울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B.C. 336년에 왕이 되어서 20살에 전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를 점령하고 10년 만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부하로 있던 네 명의 장군들 중심으로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카산더가 갖고 터키 쪽은 리시마코스가 갖고 팔레스타인 땅을 중심으로 북쪽 시리아는 셀류시드가 장악하고 남쪽 애굽은 톨레미가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을 가지고 셀류시드와 톨레미가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다니엘 11장에 이 전쟁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팔레스타인 땅은 톨레미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톨레미는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셀류시드 왕조의 사람들이 톨레미를 밀어내고 B.C. 200년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자 유다 백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B.C. 175~164년까지 통치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가장 악했는데 이 사람이 애굽을 치다가 실패하자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성경을 불태우고 유대인의 절기를 금하며 성전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워서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티오코스에게 잘 보여서 대제사장이 되려고 했던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집안을 격동시켜 이들과 맞서 싸우게 하십니다. 모딘이라는 동네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스(Mattathias)는 아들이 5명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대인 중에서 돼지의 피로 제우스 신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일으킨 혁명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맛다디아스의 집안을 하스몬이라고 부릅니다. 맛다디아스는 1년 만에 죽고 5명의 아들들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마카비 혁명에 가담하게 됩니다.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신앙의 핍박이 올 때 강하고 용맹을 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3년 만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시리아 군대를 쫓아내고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마카비 행전에 기록해놓고 수전절에 이것을 읽어주었습니다.
어떻게 작은 숫자로 큰 왕국인 시리아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하고 번개처럼 화살을 쏘아 시리아 군대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슥 9:15). 우리 성도들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와 귀신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거짓된 종교와 사상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마약을 먹게 하고 동성연애를 하게 하며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그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호위하심과 신속하신 활동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이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사람들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원수가 생기고 가정에서도 원수가 생깁니다. 하지만 어떤 원수라도 우리는 이길 줄로 믿습니다.
둘째, 특별한 사랑을 주십니다.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슥 9:16). 면류관도 좋은 것인데 면류관에 박힌 보석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는 면류관에 박힌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면류관의 보석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셋째, 대를 이을수록 번영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슥 9:17). 저는 목사지만 제일 걱정되는 것이 자녀들 문제입니다. 제 자녀들이 잘못되면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서 자녀들이 저러냐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바르게 자랄까?’가 목회자들의 가장 큰 고민인데 저는 스가랴 9장 17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소년과 처녀는 자라나는 신세대를 가리킵니다.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니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기게 하시고 면류관의 보석처럼 사랑해주시며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Ⅲ. 왕국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승리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됩니까? 스가랴 9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슥 9:15). 동이라는 것은 커다란 양동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제사를 드리면 그 피를 동이에 받는데 그 피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제물을 많이 드리고 감사가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감사를 입에 달고 다녀야 됩니다. 요즘 날씨가 상당히 더운데 덥다고 짜증을 내면 다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더워도 감사하고 자녀가 대학에 떨어져도 감사하고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도 감사하면 흑암이 물러가고 축복이 오게 됩니다.
번제단이 사각으로 되어있는데 모퉁이에 뿔이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뿔에 피가 묻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헌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피묻은 제단 모퉁이는 헌신하는 일꾼들이 많아졌고 백성들이 속죄하며 경건하게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감사하고 헌신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지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슥 9:17). “For how great is his goodness, and how great is his beauty” (ZEC 9:17, KJV).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 허물과 잘못을 어려움이 온 것이지 왜 하나님을 욕하십니까? 우리의 허물과 잘못으로 인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이것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물 없는 구덩이에 살면서 조만간 죽어 지옥에 떨어질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승리와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감사하고 헌신하며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하고 자랑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슥 9:9-17 살전 5:1-9 눅 1:26-38 / 인명진 목사
오늘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2천년 베들레헴에 오셨던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이고, 그리고 구름타고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이란 내려오다는 의미하는 라틴어'adventus'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대림절은 대개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대림절 기간 동안 주님의 처음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렘임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순전한 신부처럼 단장하는 기간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맞이한 성탄은 그 자체가 우리의 큰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절기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기다린 것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무너지고 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땅에 있는 소망이 끊어지고 나니까 하늘의 소망이 보인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지켜 줄 것으로 믿었던 유대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왕 되는 것으로는 우리를 죄와 어둠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의 왕이 이 땅에 강림 하시는 꿈을 가졌습니다. 여기서부터 메시야 대망사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이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흑암 중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겠고” 메시야가 오실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대망사상은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 더욱 더 깊어져 가고 구체화되어 갑니다. 바벨론 포로살이의 고달픔을 통해 돌아갈 조국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귀환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고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재건하겠다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꿈꾸었던 고국과 고향이었기 때문에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들이 꿈꾸는 다윗 왕과 같은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오셔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저들이 기다렸던 그분을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이사야에서부터 시작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스가랴 예언자에게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예언자입니다. 스가랴와 함께 귀환한 지도자들이 총독 스룹바벨, 느헤미야, 학사 에스라, 선지자 학개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다윗의 혈통에서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르네상스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꿈꾸었던 회복의 르네상스는 꿈으로만 끝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하고 있던 꿈이 다 깨어졌을 때 하나님은 더 구체적인 계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페르시아가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전통왕국 이집트가 있었고, 서쪽에는 새로이 발흥한 헬라제국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세계열강 3대 제국이 팔레스틴 땅에 집중되었습니다. 저들이 꿈꾸는 다윗은 왕국은커녕 세계열강의 밥이 되고 있었습니다. 땅 위에 세우려는 다윗의 왕국은 결국 꿈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눈에 보이는 성전이 무너지고, 다윗 왕국의 꿈이 무너졌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이 땅 위에 세우는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대망사상이고, 이것을 신앙고백적으로 표현한 것이 묵시록 혹은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무너졌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땅에 것이 없어졌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보이는 문이 다 닫혔다고 해서 애통하지 마십시오. 무너지고 없어지고 닫혀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너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세워집니다. 땅에 것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것이 세워집니다. 세상의 문의 닫혀지면 하늘의 문이 열려집니다. 우리 교우 중에 김만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당뇨가 심하여 시력의 90% 정도를 잃은 분입니다. 얼마 전 이 성도님과 함께 구역모임 가기 위해 차를 같이 탔습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을 물었습니다. 요즘은 관악구에 있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가서 점자를 배우고, 새로운 직업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라 했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매일 관악구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하는데 자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버스를 어떻게 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김만석 집사님이 신기한 답변을 합니다. “목사님! 시력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새로운 청각이 살아나서 버스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타야할 버스를 알아 차려요. 눈 뜨고 있을 때에는 소리가 구분되지 않았는데, 시력을 잃고나니 미세하게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시력의 문이 닫혀지니 듣는 귀가 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상황은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세운 스룹바벨 성전도 무너졌고, 느헤미야가 쌓았던 예루살렘 성벽도 무너졌고, 마카비 왕조를 통해 독립을 꿈꾸던 것도 처참하게 무너졌고, 백성들의 꿈도 산산조각 났습니다.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흑암을 뚫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이 땅에 강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신약성경을 첫 서문을 열면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 말씀은 상황에 맞게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다렸고, 다윗도 기다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시작이라.” 그리고 이어서 지루한 족보가 14대씩 3번에 42번의 “낳고”가 나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성경을 일독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신약성경을 펼칩니다. 성경을 열자마자 지루한 족보 이야기가 나오면서 “낳고, 낳고, 낳고 이야기”가 마흔 두 번이 나옵니다. 의미 없이 낳고 읽으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결국 “낳고”라는 말은 저에게 잠만 낳을 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족보와 함께 등장하는 “낳고” 라는 단어는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시작되던 아브라함 때부터 기다렸던 예수, 찬란한 다윗의 왕국 때에도 기다렸던 예수,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 눈물지으며 기다렸던 예수, 열강의 다툼 속에서 기다렸던 메시아 예수, 그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꿈꾸었던 메시야는 인간이 왕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시는 나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 나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나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사람의 씨로서는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나야 죄 없으신 참 하나님, 참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Vere Deus, Vere Homo”,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완벽한 플랜을 짜고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시킬 동정녀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때 하나님 눈에 가장 먼저 띤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 하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라는 이름 자체는 “괴로움, 슬픔, 쓰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써서 마시지 못하는 우물을 “마라”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은 마라라는 말을 헬라어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마라의 우물물이 써서 먹지 못할 때 믿음의 사람 모세가 한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니 그 물이 달아졌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기지고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생이 써서 먹지 못하는 마라의 우물물과 같았지만 그에게 믿음의 가지가 던져져 단물이 되었고, 그의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를 믿음의 가지를 제거하고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마리아의 인생은 그의 이름처럼 고통과 눈물과 아픔이 반복되는 삶이었습니다. 처녀가 아비 모르는 아들을 낳는데 누가 그 여자를 복 있다 말하겠습니까? 나라와 정권을 뒤엎는 사람을 역모자라 부르는데, 온 세상을 뒤엎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역모자입니다. 한 나라의 역모자도 능지처참인데, 인간의 세계를 거역하고 세상의 역모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 아니니까? 마리아는 온 세상을 거역하는 역모자의 어머니인데,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몸을 빌려 태어난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이미 난도질을 당한 것입니다. 어찌 이 여인을 고상한 여인이요, 복 있는 여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름 그대로 고통이요, 눈물이요, 아픔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영광으로, 아픔을 훈장으로, 눈물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부터 믿음으로 준비했고, 예수님의 사역 뒤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큰 사역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의 기다림과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야, 무서워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그에게 주실 것이니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마리아는 두렵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저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너의 위에 내려오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어 주실 것이다. ”
그리고 친척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임신을 믿음의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슴에 품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속도위반”을 했다고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고,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앉는다고 하면서 정죄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율법으로 보면 마리아는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으냐 마땅했습니다. 더군다나 약혼한 요셉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단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마리아라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처녀가 잉태했다면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좀 미련한 사람을 찾아봐 주십시오. “하나님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야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망신만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복음“이지 마리아 복음은 아닙니다. 마리아 복음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우리나라 전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흡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광장이라는 소설을 쓴 최인훈이라는 극작가가 이 전설을 극화해서 “옛날 옛적에 훠어히 훠어히”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옛날 탐관오리의 횡포에 못 이겨 깊은 산 속으로 숨어 화전을 일구어 먹고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 어느 날 태기가 있었고 때가 되어 아기를 낳았습니다. 새 생명의 출산의 기쁨도 컸으나 아기가 자람에 따라 한 가지 근심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것은 이 아기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자라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은 신동 또는 장수라고 불리는 구세주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 신동은 겨드랑이의 날개로 날아다니며 세상의 못된 탐관오리를 쳐부수고 새로운 세상, 개벽천지를 이룬다는 기다림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겐 오히려 이 신동의 탄생과 자라남이 걱정과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악한 무리와 싸워 상처 입을 아들의 고난이 두려웠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관군이 먼저 부모 된 자기를 붙잡아 역적의 부모라고 능지처참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오히려 화전을 일구어 목숨을 연명하는 생활이 신동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 신동의 어머니는 잠자는 아기의 목을 눌러 그 숨을 끊었습니다. 메시야의 꿈도 개벽처지의 꿈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자를 잉태케 된다고 천사가 말했을 때,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칠 곤고와 고통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동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비난도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아들이 비수와 같이 어미의 가슴을 찌를 그 아픔을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온 세상의 권세를 거슬려 역모한다는 비난을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원하며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이 두 살 아래의 어린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 내릴 때, 한 분 메시아를 품에 안고 베들레헴을 탈출했습니다.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신해야하는 서글픔보다 자신의 아들 때문에 많은 어린이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이 사건 앞에서도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고백으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주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아이를 잠재우기 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어렸을 때 신앙교육이 죽음의 자리까지 이어지도록 영혼 교육에 힘썼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양육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분을 모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교회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다면 어떻게 양육하겠습니까? 결론은 마리아에게 가서 배우라 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던 위대한 마리아였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의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사역이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마리아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다 같이 요한복음 2장 5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안절부절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순종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마저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복종시키는 믿음이 없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기 전에 마리아의 마음은 수없이 죽었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소리는 마리아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끔찍하게 산채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의 고통을 못이겨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칠 때 마리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에도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가슴에 못이 박히는 마음으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이름의 뜻대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 믿음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일생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믿음으로 승화시킨 여인입니다. 상처를 흉터로 남기지 않고 훈장으로 바꾼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까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믿음의 여인입니다. 일생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로 시작해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로 끝맺은 여인입니다.
시인이자 환경운동가였던 작고한 설악의 시인 이성선 시인의 시 한편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둔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또한 마지막 날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2천년 전 메시야를 온 마음과 온 몸으로 품었던 마리아처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고백으로 메시아 예수를 기다리고 다시 오실 재림주 예수를 기다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난과 아픔과 눈물마저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생애에 가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네 갇힌 자들을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슥 9:9-12 / 김서년 목사 벧엘교회
오늘은 3월 1일로써, 우리 민족이 일제하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3․1절 제9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우리 조국이 광복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이 3․1절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 이 3․1절이 주일과 겹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조금 전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그 의미를 우리 마음속에 되새기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스가랴는 기원전 520년에서 518년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함과 함께 해방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그러한 때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맞이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무기력하여서, 해방과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조국의 재건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도 하지 못한 채 ― 그저 외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전전긍긍하면서,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기 재산 모으기와 자기 살 궁리를 하기에 바빠서 ― 불안한 물질주의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이 해방직후의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일제 치하 36년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귀한 해방과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귀한 가치를 모르고 서로가 자기 이익만을 채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6․25를 당할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6․25의 그 쓰라린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계속되는 혼란과, 6․25가 일어난 지 이제 6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통일이 되지 못한 채, 그저 가슴 답답한 일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 조국 광복 7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자연히 우리는 이 ‘70년’이란 숫자에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70년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70년이란 숫자 때문에 막연하나마 어떤 기대를 걸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이렇게 70년만 되면―포로에서의 귀환과 같은 어떤 좋은 결과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러한 산술적 햇수에 대해 전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50년 희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50년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긴 세월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50년에 대한 ‘희년의 법’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노예 되었던 사람이 50년이 되어 희년을 맞이하면 자유가 주어집니다. 토지는 원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빚은 다 탕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50년’이란 희년의 숫자 앞에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됨과 함께 분단이 된 후, ‘50년-희년’이 되는 해는 1995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또 6․25에 대한 희년의 해는 2000년이었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크나큰 일이 그 때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방문했던 대통령-그 개인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외에는, 통일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대신에 6․25에 대한 사과를 김정일에게 묻지 말아야 한다는 요상한 얘기들만이 그 때 주장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5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당시에 김정일은 어린 아이였으니,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 않느냐는 그런 요상한 논리였습니다.
만약 그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3․1절’ 같은 것은 아예 지킬 이유도 없고, ‘태평양전쟁’이니 ‘침략’이니 ‘강제징용’이니 ‘위안부’니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교과서에서 그런 것을 빼고 가르친들 아무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이 성립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전교조 같은 데에서는 그런 논리를 펴고 있지 않습니까?
왜 희년의 해가 지났는데도 이런 혼란만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해주는 ‘희년의 효력’은 이제는 상실되고 만 그런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해 주시는 ‘희년’이라고 하는 것은 ‘꼭 50년’이라고 하는 산술적인 햇수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그들은 50년이 아니라 400년을 애굽에 머물렀어야 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희년의 해가 지나고도 20년을 더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왜 희년의 해를 맞이하였는데도, 그들은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였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서 한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희년의 축복을 맞이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희년의 축복은 ― 민족이든 개인이든 ― 그 희년의 축복과 그 의미를 아는 자, 그래서 맞이할 준비가 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년, 또는 70년이 꼭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우리는 ‘3․1절 96주년’을 맞이하였고, 우리는 지금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 있은 기간이 모두 얼마였습니까?
36년간입니다. 그런데 희년의 해는 50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라를 잃은 지 50년이 되기도 전인 ‘36년 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왜 이 기쁜 ‘해방의 희년’을 ‘50년’이 아니라 ‘36년’만에 허락하여 주셨을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스가랴 선지자는 당시 현실에 안주하고, 그저 자기 살기에만 급급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더 이상 구덩이 속에 웅크려 있지 말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미 독립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대 자연과 함께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는도다.” ― 이런 구절은 ‘기독교적인 사상’이 물씬 풍겨나는 대목으로서, 바로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지 않습니까?
사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들 중 절대다수가 다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당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중심하여서 새로운 자각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히 이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각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 이와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한 ‘희년을 위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 50년까지 기다리지 않고, 36년 만에 ‘희년의 축복’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스가랴는 “구덩이에서 뛰쳐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 옛날 이 땅의 크리스찬 선각자들은 조선 민중을 향하여 “음침한 옛집에서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 자신을 향하여, 또한 우리 민족 모두를 향하여, 지금 외쳐야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구덩이에서 뛰쳐나오라!”
“음침한 옛집에서 뛰쳐나오라!”
“더 이상 구덩이 속에 숨어있지 말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뛰쳐나오라’는 메시지가 전하는 첫 번째 내용은, 물론 갇혀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유하라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그 자유를 주시는 ‘요새’―곧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고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무엇에 포로가 되어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또 여러분 자신은 지금 무엇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까?
기미년 때 조선의 크리스찬 선각자들이 “음침한 옛집에서 나오라”고 외치던 해방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스가랴 당시의 이스라엘은 멀리 보는 시야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전쟁으로 무너져 있는데도 재건할 생각이 없었고, 포로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조국에로 돌아와 있는데도 서로가 합심치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일과 안일을 추구하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스가랴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민족을 향하여 바로 이 사실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 가운데는 ‘도로시․데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던 사람입니다.
저도 물론 ‘케 세라 세라’란 노래를 부른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목사님이 소개해준 책을 읽는 가운데 그 여자가 ‘기독교 평신도 전도인’으로서 크게 칭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로시․데이는 학생시절, 사회주의에 심취되어 한때 미국 공산당과도 연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전도집회를 계기로 하여, 어렸을 때부터 믿었던 복음신앙을 다시 회복한 다음부터는 열렬한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 때 뉴욕 유니온 광장에서 공산주의자들 5만 명이 데모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도로시․데이는 ‘기독 청년 전도대’를 구성하여 친히 앞장서서 이 5만 명의 공산주의자 전원에게 전도지를 돌리는 위험한 일을 해내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많은 전도사업을 하였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을 ― 영화배우로서, 가수로서 베버리 힐스의 저택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가?
제가 읽은 그 책에서는 “바로 그의 신앙과 확신 때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한데―이것이 확실한데, 이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그래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그냥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대답이었습니다.
도로시․데이가 늘 자주 입에 올린 성경구절이 있는데, 요한복음 8장 36절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데이는 이것을 분명히 믿었고, 그러기에 그 사실을 선포해야 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평생을 통해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풀려나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실 복음서를 살펴보면, 거기 나오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기사는 모두가 무엇엔가 붙들려 있던 그 상태―그 구덩이에서 자유를 얻은 이야기들임을 알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노년이 갖는 불안이란 얽매임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삭개오는 이기주의의 올무에서부터 풀려나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은 죄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한 복음서에는 귀신들린 자, 악령에게 붙잡힌 자들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모든 기사들은 다 ‘무엇인가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에 붙잡힌 상태에서―그 구덩이에서―예수로 말미암아 해방을 받는’ 기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 대하여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무엇에 붙잡혀 있는가?
나를 가두고 있는 악령은 무엇인가?
내가 얽매여 있는 그 구덩이는 무엇인가?
여러분, 깊이 생각하고 진단해 보세요. 예수께로 나아가 풀려져야 합니다. 그 구덩이에서 뛰쳐나와야 진정한 희년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너의 그 구덩이에서 뛰쳐나오라”고 부르십니다!!
다음으로, 스가랴가 “뛰쳐나오라”고 외치는 내용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라’고 하는 뜻입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말하지요.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자들아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이 말씀은 곧 구원의 요새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이 구덩이에서 해방되어―새사람이 되어―새롭게 사는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미 독립선언문’에도 보면, 조선인이 구악에서 뛰쳐나와 부끄러움 없이 세계와 발맞추어 나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진리의 시대가 오는구나….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돌아오는 이 마당에, 변화하는 세계의 물결을 타고 우리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노라!”
옛날 임금에게는, 또 권력을 잡은 독재자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리를 감추며 제멋대로 하려드는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제정 러시아 때 ‘피터 대제’는 ‘캐더린’이란 여자가 꼭 마음에 들었지만, 그 여자가 귀족이 아니어서 왕후로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꽤를 내어 한 사람을 캐더린의 오빠로 만들고는, 이 사람의 공로를 조작하여 제후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캐더린을 갑자기 귀족의 동생으로 둔갑시켜서 왕후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제왕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억지로라도 사람을 바꾸었습니다만, 그러나 역사는 그 허위성을 영구히 남김으로 부끄러운 일로서 기억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역사를 속이며 양심을 속이는 일들이 다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과 외모를 바꾼다고 해서 한 인간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경제가 부흥하고, 돈을 벌어 좋은 집에 산다고 해서 그 인간이 변하여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음의 변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장 10절에서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 ‘속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오히려 동물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 하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일정한 계절이 되면 아름다움과 젊음을 갱신하지 않습니까? 새들은 깃털을 바꿉니다. 뱀들도 껍질을 갱신합니다. 심지어는 진딧물까지도 낡은 껍질을 벗어버립니다. 그래서 모두가 젊었을 때의 싱싱함과 아름다움을 회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요즈음은 성형수술이 발달하여서 머리 위로 잡아당기고 귀 뒤로 잡아당기고 하면서 주름을 좀 없애보겠다고 야단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수술한 연예인들이 TV에 등장한 모습들을 보세요. 제대로 활짝 웃음 짓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세월이 흐를수록 퇴색해버리고 보기 싫어지고 갈수록 주름이 잡혀가는 이 피부―오직 이 한 피부만을 가지고 무덤에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바꿀 수 있고, 또 바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겉은 아무리 꾸며보아야 낡아지고 후패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바꾸어야 할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 4:16).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겉’을 꾸미는 일에서부터 ‘속’을 새롭게 하는 이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속을 새롭게 하는 바로 여기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나아가 우리의 민족과 나라가 축복 받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속을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오점은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또한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신앙은, ‘과거를 지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새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구덩이에서 놓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 6: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욱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십시오.
더욱 더 그를 바라고, 더욱 더 그에게 의지하고, 더욱 더 그에게 헌신하며 충성하십시오.
예배를 새롭게, 헌신을 새롭게, 생활을 새롭게 하십시오.
우리 주님―오직 주님만이―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희년의 축복은 ‘50’이라는 산술적 햇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략 하에 포로 되어 있었지만, 기미 독립선언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자각과 준비가 있었을 때에 훨씬 더 앞당겨 졌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70년’ 동안이나 포로 되어 있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 절반밖에 안 되는 ‘36년’만에 해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가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그래서 통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50년이 지났어도 ‘통일의 해’는 주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덩이에서 뛰쳐나와 진정한 준비를 갖출 때에는, 언제고 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우리 민족적인 희년의 기쁨을―그 축복을―우리는 분명히 받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같은 그런 70년이, 올해 우리가 맞는 바로 이 70년이 그러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각하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 겨레가 갇혀있는 그 구덩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붙들어 매고 가두고 있는 그 구덩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비젼을 가지십시오.
그 비젼을 향해 열심히 충성하며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경제현실, 정치현실, 사회현실을 탓하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그 모든 구덩이에서 뛰쳐나가십시오.
더욱 더 열심을 내며, 더욱 더 충성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희년의 축복과 기쁨을
우리는 진정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스가랴 9:9-10, 요한일서 4:7-11, 요한복음 15:9-10 / 장윤재 교수 / 이화여대교수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만 10년 동안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던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연예인 등 유명인들이 공장이나 농촌 혹은 어촌 등 힘든 노동의 현장을 찾아가 일하고 거기서 받은 일당 전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일당으로 받은 현금봉투를 뿔이 달린 말 인형을 타고 올라가 하트 모양의 모금함에 넣으면 기부 총액이 표시되는 훈훈한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거기 출연한 배우들은 '삶의 현장 체험'이 끝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루 동안의 고생이 끝나면 본래 자신의 안락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현장'은 일시적 체험 프로그램에 불과했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주간에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그리고 십자가 처형 등, 하나님 구원의 우주적 대사건들이 숨 막히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도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프로그램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인간 현장 체험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고백하기에, 그 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오셨고 또 부활, 승천하여 다시 하나님이 자리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을 하나님의 인간 삶의 현장 체험 정도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대역사는 우리의 삶과 분리된 피상적인 교리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 극본, 예수 주연, 빌라도 조연'이라는 수난 드라마의 관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198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the Christ")이 개봉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잘 아시다시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목수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자나 책상이 아니라 로마의 법을 어긴 사람들을 매다는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였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30분가량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앞에 천사가 나타나 당신은 구세주가 아니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통의 인간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보통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늙어 죽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베드로와 유다에 의해 그것이 사탄의 유혹이었음을 깨닫고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예수님이 단지 신의 아들이었기에 예정된 순서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 이긴 후 자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받아들였기에 위대한 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수적인 교계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인간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이른바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이라 비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성서에, 특히 '사랑의 서신'이라 불리는 요한일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믿습니다. 신약성서 요한일서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둘째, 이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셋째, 그 사랑의 절정이 독생자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넷째,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이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한일서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줄이면 그것은 (오늘 설교제목처럼) '사랑하기 때문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예언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을 찍으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니라"(히4:15). 실로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배고픔을 알고, 화낼 줄 알고, 모든 종류의 유혹과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이탈리아의 제노아(Genoa)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예수 동상이 하나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높은 언덕이 아니라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제노아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이 바다 속 깊은 곳에 수장된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예수상을 봉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언덕 위에 선 예수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울고, 함께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함께 짐을 진 예수 그리스도 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동상의 이름은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Christ in the Deep")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오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여행을 하시면서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 길이 죽음에 이르는 여행임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대가 합작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예루살렘 행을 꺼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앞장서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앞장서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던 자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칠 것을 아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죽는 길인 줄 알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사지(死地)로 들어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약해집니다. 진짜 사랑을 해보셨는지요?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약해집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가 힘이 없어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패러독스)'입니다. 이 역설을 잘 알았던 이가 솔로몬이었습니다.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아기라고 다퉜습니다(왕상3:16-28).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 그 아기를 둘로 갈라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진짜 엄마는 아기를 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누가 진짜 엄마고 누가 가짜 엄마인지 알았습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집니다. 솔로몬은 그 '사랑의 역설'을 알았기에 명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주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진실로]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도망칠 수도 있었고,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으며, 천군천사를 데리고 세상을 일시에 심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 깊기에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과 힘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힘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힘을 놓아버립니다. 권력을 놓아버립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고 힘을 뺍니다. 사랑하기에 나를 낮추고, 사랑하기에 내가 약해집니다. 그것은 연약해지는(weak)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민감해지고 때문에 그로부터 상처를 받기 쉬워지는(vulnerable)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밀어붙이기보다는 물러서는 것이, 더하기보다는 빼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힘을 빼는 것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일 수 있습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먼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목소리에서 힘부터 빼야 합니다. 남과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화할 때 힘을 빼야 합니다. 소통의 고수는 위력으로 상대를 누르지 않습니다. 겸손함과 세심한 배려 속에서 상대를 세워주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권력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그 권력을 놓아 버립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제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로 아끼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뺍니다. 자신을 낮춥니다. 집니다. 아니 져줍니다. 사랑하기에 약해집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보무당당하게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으시고 초라한 나귀를 타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지셨습니다. 힘을 빼셨습니다. 대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아야 하나 그가 그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독문의 말씀처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사53:5).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함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독일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인간의 약함' 위가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약함' 위에 세운 종교입니다.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사형수가 되어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리던 본회퍼 목사는 그런 인간 실존의 약함 위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위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함' 위에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여기 '약하심'을 '사랑하심'으로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사랑 때문에]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다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 신비로운 사랑 때문에 주님은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오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죽음의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비전문가'를 뜻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는 운동경기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소위 프로 선수가 아닌 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아모르'(amour)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자가 아마추어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경기를, 그 일을,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기에 행동하는 자가 바로 아마추어입니다. '사랑의 서신'인 요한일서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마추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마추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수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아마추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 아마추어 사랑을 나누면서 살라고 촉구합니다.
신구약성서는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묵묵히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표현합니다(행8:32, 사53:7-8). 예수님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각본대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삶의 현장 체험 프로그램을 찍으신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랑하기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깊이 사랑하기에 배반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무지한 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사랑이 깊으셨기에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한 자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강한 자는 약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약한 자가 강해집니다. 주님은 이 사랑의 신비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의 강함입니다. 이것이 수난의 신비입니다.
오늘 공동의 기도문으로 읽은 김소엽 시인의 <하나님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한 시입니다. "하나님이 / 나에게 보내주신 / 단 한번의 연서[戀書] / 연애편지 받고서도 / 그 뜻도 몰랐던 / 늦된 아이여 // 사랑은 떠나가고 / 홀로 있을 때 / 문득 / 당신의 생애가 / 하나님이 보내신 / 한 장의 / 연애편지였음을 // 답신을 보내려니 / 주소를 몰라 / 천상 내가 / 지니고 가야 할 / 편지 // 뒤늦게 / 하늘을 보며 / 남은 여생으로 / 답신을 쓰고 있네 // 당신은 / 하나님이 내게 주신 / 하늘의 / 편지."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연애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서신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顯現)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우주적 드라마가 시시각각 전개됩니다. 이 드라마는 하나님의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관객으로 참여하지 마십시오.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하루하루 걸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수난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고통을 이기고 승리합시다
슥 9:9 / 이근수 목사
서 론
원치 않게 사람이 고통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苦痛) - 몸이나 마음이 괴롭고 아픔
고통을 당할 때는 바로 희망을 가지고 회복할 때입니다.
고통의 종류
마음과 정신적 고통- 우울증, 불면증, 정신병, 자학증,
실패의 고통- 진학에 실패, 사랑에 실패, 사업에 실패,진급에 실패, 결혼에 실패,
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 각종 암, 고혈압, 당뇨병, 뇌경색, 뇌출혈, 중풍, 치매
경제적 고통- 사업부진, 취직안됨, 부도, 실직,
가정의 고통- 결혼실패, 고부간의 갈등, 부모 자녀 간 불화, 배우자 사별, 자녀사별, 가족 질병,
육체적 고통- 군사훈련, 노동,
고통을 만나면 무척 힘듭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때는 축복의 때가 가깝다는 뜻이다.
고통의 때는 축복의 때가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은 것이고,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까운 것처럼 고통이 깊을 때는 축복이 가까운 때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플 때 진통제를 씁니다.
머리가 아프고, 수술 후 통증이 심할 때, 암으로 고통 할 때 진통제를 투여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당하는 갖가지 고통을 면해줄 묘약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통제입니다.
우리는 고통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94장]
1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2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생명 되시네
우리는 고통당할 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 뒤편에 주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음을 기대해야 합니다.
고통을 받을 때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하나? 왜 나만 고통 받는가”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먼저 나보다 더 아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통 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 손잡고 일어 서세요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은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수 있잖아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수 있잖아요.
오늘은 주님이 고통당하신 고난주일 입니다.
주님이 무서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인격적 수모- 예수님은 무지한 인간들에게 더러운 욕지거리를 듣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29,30]
육체적 고통 - 로마 군병들이 옷을 벗기고,[28] 따귀를 때리고, 발길로 차고,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비탈길을 올라가며 쓰러지고 자빠지며 넘어지셨습니다.[31-34]
죽으셨습니다 [35-50]
두 손과 양발을 십자가에 못 박여 피를 다 쏟으셨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사 53:3]
“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은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자 소문이 퍼져 구름 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몄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태연히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순례자들이 손에손에 종려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찬양을 부르며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였기 때문에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서 카페트같이 길에 깔아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밟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높임을 받으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순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주전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예언했습니다. 왕이시고, 공의로우시고, 겸손하신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라고 한대로 종려주일에 모인 사람들은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음으로 종려가지를 들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호산나"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에 찬양, 나귀, 겉옷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께 드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하세요, 충성하세요. 그것이 축복을 심는 씨앗입니다. 축복의 씨를 심어서 자손들이 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축복을 받아 잘 된 집을 보면 믿음의 부모님들이 축복의 씨를 심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 팥 납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님은 초라한 마구간에 나셨고, 살인자 헤롯의 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셨고, 청년 때는 목수가 되어 혼자되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셨습니다. 호사라고는 해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공생애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실로 주님의 삶은 수고 슬픔 고통 죽음 뿐 이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새벽기도를 5시 20분부터 합니다.
기도하세요. 특별히 고난주간에 21끼 중 10끼 정도는 금식하세요.
특별히 교회 건축을 위해 집중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금식한 것으로 감사 헌금을 드리세요.
제자에게 배반당하신 선생님
설상가상으로 마지막에는 만찬을 받아먹고, 더러운 발까지 씻어주심을 받은 가롯 유다가 은 30을 받고 선생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 졸속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우는 자 / 조롱하는 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 배척하는 자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 / 죽이는 자
예수님께 호산나 찬양하는 자 / 비웃는 자
우리는 주님 편에 서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울고, 영접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고통은 나중이 좋다
처음에는 싫은 것이나 나중에는 감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든 것이나 나중에는 좋은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아픈 것이나 나중에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고난 주일에 묵상하는 십자가
예수님이 처형당한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잔인했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도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이겨야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철들게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쓸모 있게 합니다.
고통이 크면 영광도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자랑 합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사랑 합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증거 합시다.
고통은 정면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싫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내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돌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적용]
병들어 아플 때 -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을 참읍시다.
사랑에 실패했을 때 - 주님을 바라보고 참사랑을 만듭시다.
진학에 실패했을 때 -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공부합시다.
사업에 실패 했을 때 -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뜁시다.
경제적 고통이 있을 때 -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노력합시다.
고통 너머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을 소망하고 참읍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을 냅시다. 고통과 싸웁시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고통을 이깁시다. 승리합시다.
그래서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약속대로
슥 9:9 눅 2:3-7 / 이정익 목사
성경에는 많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약속 가운데 가장 큰 약속은 장차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학수고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 마침내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그 약속 그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환영해야 할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고 700년 전부터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 일에 대해서 100여 번이나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분이 오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다 풀어지고 해방 받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로마도 물리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영광과 자존심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두가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맞이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 최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예수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낳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53장에서는 그가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 전체에 메시야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됩니다. 그러니 마땅히 기다리고 환영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모두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배려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는 말입니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한문으로는 “成肉身(성육신)”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부분을 “하나님의 극난한 사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며 인간의 값을 인정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열렬히 맞이하고 환영했어야 합니다.
네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섭리의 주역이자 주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민족가운데 이스라엘 베들레헴 고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셨고 실제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기에 열광하고 환영했어야 마땅합니다.
결정적 하자
그런데 정작 그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환영도 축하도 영접도 하지 않았습니다. 700여 년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셨는데 누구도 몰랐습니다. 또한 맞이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무성의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결정적 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다음에 주님이 오실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은 모두에게 방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그 날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날에 둘이 함께 잠을 자다가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놓임 받고 둘이 함께 김을 매다가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놓임 받고 둘이 함께 맷돌을 돌리다 한 사람은 들림 받고 한 사람은 놓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을 벌써 알고 기다렸지만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이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오실 그 날에도 그런 현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여행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행 중에 아이를 낳는 분들이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병원에 가는 도중에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낳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여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여관은 있으되 아이를 낳도록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영접은커녕 냉대 속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냉대는 태어났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도와 목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천한 직업이 어부 목수 목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빈정대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소년시절에 갈등과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서 그리고 관심은 하늘에 있는데 몸은 세상에 있으니 얼마나 갈등과 고뇌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술 더 떠서 고발하고 방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 같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찾아가 환영해야 마땅한데 사람들은 오히려 고발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방해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까지도 예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직도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 400만 명의 유대인 중에서 단지 0.1%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합니다. 그 0.1%의 사람들도 나라 밖에서 예수를 믿고 건국 후에 귀국한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기독교를 유사종교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류를 범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그런 오류를 범한 것일까요? 그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고을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고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랬으면 마땅히 그곳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거기에 처소를 예비하고 전체적 연구 기관이라도 세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언 때문에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면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야지 어찌 시골의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자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동시에 지독한 편견입니다. 이 편견이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은 보석을 돌이라고 하고 돌을 보석이라고 우기게 만듭니다. 이 편견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여 예언과 계시를 무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기득권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내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인 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예수의 행적과 능력, 가르침을 보고 “이는 서기관과 같지 않음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와 소경, 나병환자와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병을 고치는 사람은 메시야라고 인정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병을 수도 없이 고치고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어찌 몰랐겠습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자 고소득층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기득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새 인물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제거해야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들의 안전의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기다림의 삶이 중요합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옆에 끼고 다니며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의 예언서를 매일 필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누구보다 더 빨리 알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알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관심은 신앙의 삶 보다는 뇌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영적안목이 흐려졌고 그 결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눈도 멀게 하고 그 시대를 보는 분별력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장한 각오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삼으려 하셨습니다. 그 모두가 타락한 세상과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9장 7절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그 귀한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용서는 크든 작든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큰 대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단지 말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어떤 부인은 남편에 죄를 짓고 그 죄를 고백할까 말까를 10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어렵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했느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그 순간 아내는 가재도구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나는 10년 동안 고민하다가 고백한 것인데 그렇게 시시하게 말 몇 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원작을 보면 초등학생 아들이 유괴되어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을 잡고 보니까 아이가 다니던 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에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마음을 안정시켜 보려고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교회의 여러 사람들은 용서하라고, 용서 안한다고 죽은 아이가 다 살아오겠느냐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냈지만 차츰 용서할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큰마음 먹고 교도소에 면회를 갔습니다. 가면서 살인범을 만나면 큰마음으로 용서한다고 해야지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살인범의 얼굴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믿고 다 용서 받았습니다.” 하더니 할렐루야를 외치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아이 엄마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습니다. 허무했습니다. 그래서 면회실을 나오면서 하늘을 향하여 외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저 놈을 용서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누가 저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저를 간단히 용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여인이 느끼는 허무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머니는 그 살인범이 사형 받던 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해 버립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값이 따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어 고통당하게 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어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댓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결단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부르짖을 때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까를 한번 생각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겠는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일본의 지다구라 라는 신학자는 아픔의 신학을 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데는 이런 결단과 아픔과 용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700년 전부터 예수를 보내겠다는 소식을 전하였는데도 막상 그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오신 예수를 덮으려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당시 왕 헤롯은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그 왕을 죽이려고 2세 미만의 아이들 14,000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와 그 시대 백성들이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대림절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오신 예수를 축하하고 만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과 성탄절은 기다림과 만남이 없으면 무의미한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예수님 오신 날 낌새도 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지 않던지 약속하신 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오신 예수를 가장 먼저 찾아와 만난 사람은 멀리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문만 열면 만날 수 있었던 여관집 주인도 몰랐는데 그 멀리 동방 오늘의 이라크 땅에서 온 사람들이 미리 알고 찾아와 만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동방박사들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천사들이 예수 태어나심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신앙의 삶에는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도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언제든지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감으로 천사들이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기다림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오신 초림의 날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시리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또 예언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 말씀대로 어느 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처럼 많은 이들이 허둥댈 것입니다. 성경은 그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이고 성탄절은 오시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인생
슥 9:9-10 / 백구영 목사
어느 잡지의 "좋은 이웃"이란 제목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몇 일 앞두고 아이들과 시골을 다녀오는 길에, 그의 낡은 차가 도중에서 서버렸습니다. 몹시 추운 저녁이었습니다. 그는 고생고생 끝에 겨우 한 작은 주유소를 발견했습니다. 늙은 주유소 주인은 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서는 3시간 이상이나 사방을 헤매며 부속품을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추위에도 무릅쓰고 손을 녹여가며 애써 손을 보아 시동을 걸어 주었습니다. 차주인은 너무나 고마웠으나 내심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 수중에는 돈이 35불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사정을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부속품과 수리비가 엄청날 텐데 실은 제 수중에 35불밖에 없어서요" 하고 머뭇거리자 노인은 혼자 중얼거리듯이 "35불밖에 없다……뉴욕까지 가려면 휘발류값도 15불은 더 들테고 도중에 모텔이라고 들러 쉬고 가려면 50불은 들텐데……"하더니 "수리비 1불, 부품값 1불, 휘발류값 1불 3불만 내고 가시구려" 하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어쩔줄 몰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하며 차를 타려는 나그네에게 노인을 손을 흔들면서, "메리 크리스마스!"하더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한 토막의 얘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절망의 시대에 들려온 따뜻한 소식입니다.
스가랴 9:9-10의 말씀은 암울하던 시대에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활동한 지도자입니다. 스가랴는 외세의 영향과 동족간의 갈등으로 성전재건이 중단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며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성전재건은 성전뿐만 아니라 성전을 짖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자세가 먼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성전과 성전예배도 하나의 웃음거리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00년후에 실현될 메시아 신앙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8-14의 말씀은 그 예언이 500년후 실현된 장면입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할때, 허다한 천군 천사가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신 첫 번째 크리스마스 캐롤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수백년 전에 예언되었고 수백년 후에 실현된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은 물질적 축복의 잔치입니다.
스가랴 9:9 상반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하신 말씀이었고
누가복음 2:11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오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물질적 축복과 물질성의 성별을 축하하는 잔치입니다.
기독교는 반 물질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육신을 입혀 역사 안으로 보내셨다는데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영원이 시간이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여기에 성탄의 메시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육과 물질성은 부패하고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만물은 본래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로 인해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창조하신 물질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성의 본래의 선한 모습을 회복하시기 위해 물질성을 멸하시는 대신 자신이 스스로 물질이 되셔서 저주를 풀어주시고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통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육과 물질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물질은 참 주인과 함께 있으면 축복이 됩니다. 물질이 노름꾼과 함께 있으면 노름빚이 되고, 물질이 술꾼과 함께 있으면 술값이 되고, 물질이 욕심꾼과 함께 있으면 재앙이 되듯이 물질성도 주안에 있을 때 새 생명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탄생은 도덕적 가치의 잔치입니다.
스가랴 9:9 하반절에 보면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하였고,
누가복음 2:12 에 보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세상의 자연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모두 바꾸어 놓으신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백마를 타고 아라비안산 명마를 탑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이 하룻밤에 몇 백만원씩하는 호텔 스위트룸에 눕습니다.
그러나 왕중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말 구유위에 누우셨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권위를 비웃으시고 새 가치와 새 권위를 세우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은 나날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파손되고 하나의 상품으로 선택받고 있습니다. 힘만이 정의요 소유만이 가치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탄생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 핍박 받는자, 지난날엔 저주 아래 있던자들이 이제는 복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획득본능의 세상에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고, 소유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영원히 보존하게 하였으며 높고자 하면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높아지게 하셨습니다.
자연적인 도덕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셨고 현대 문명의 행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도덕적 가치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 새 가치관을 받아 드리고 그 새 가치관 속에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동의만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이고 새 삶인 것입니다.
섯째, 예수님의 탄생은 영적 평화의 잔치입니다.
스가랴 9:10 하반절에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것이요" 하신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 2:14절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중에 평화로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평화"를 영적 평화라고 하는 것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2000년전에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셨는데, 왜? 아직도 세상이나 교회나 가정에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인간들은 인간적 평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역사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정복의 역사에서 화해의 역사로 바꾸어 놓으셨고 악의와 공포의 역사에서 선의와 평안의 역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평화란 본질상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무력으로 평화를 지키려고 합니다.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혹은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수없이 실패를 경험한 고전적 방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란 반드시 피차의 동의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누구든지 굴종이나 강제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도덕적 방법만이 도덕적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철칙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피아를 떠나서 예수님안에 있을때만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번 죤스(Barne Jones)라는 화가가 그린 "베들레헴의 별"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을 어떻게 변하시켰는가하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표면상으로는 마라아가 어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있는 평범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의 뒷 배경은 앙상한 나무, 텅비고 황량한 벌판, 얼어붙은 고드름이 그려져 있고 마리아의 앞에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앞과 뒤가 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뒤에서 주님의 앞으로 나와서 물질적 축복의 잔치, 도덕적 가치의 잔치, 영적 평화의 잔치의 기쁨을 누리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아멘.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받으신 예수님
슥 9:9-10 / 이근수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 주일이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엄청난 인파가 목청을 높이어 예수님을 찬양한 날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만이 아니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3년의 삶속에서 이렇게 높은 대접을 받으신 것은 처음입니다. 길 좌우편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가시는 길은 실은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번 예고하신대로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내일 부터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하루 하루 주님이 죽음의 길로 가신 주일입니다.
주님은 초라한 마굿간에 나셨고, 살인자 헤롯의 군대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란을 떠나셨고, 청년이 되어서는 목수의 일을 하면서 혼자 되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셨습니다. 언제 한 번 호사라고는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30세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이 당한 아픔과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할 때에 "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삶은 수고와 슬픔과 고독과 아픔과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쓰디쓴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목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 시간에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살이라 하셨고, 잔을 주시면서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라고 하시면서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이시오 선생님이신 주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면 사람들이 너희를 내 제자인줄 알아본다고 하셨습니다.
배반하는 이탈자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만찬을 받아 먹고 냄새 나는 발을 닦아주시는 사랑을 받은 그 밤에 12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가 돈 받고 주님을 배반 하려고 어두운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후 그 밤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 하셨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주님은 내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
주님이 기도하시다가 그 밤에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칼을 의지하고 졸다가 선생님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그 뒤를 멀찌기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졸속 재판으로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조롱을 당하시고 원수들이 가시 면류관을 찌글러 눌러 씌었기 때문에 붉은 피가 머리와 이마 에서부터 줄줄 흘러내려 얼굴과 옷을 시뻘겋게 물들였습니다.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채찍에 맞아 쓰러지고 고꾸라 지면서 골고다 죽음의 언덕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양손과 양발에 못박히고 허리를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콸콸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
예수님을 위하여 우는 자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자
예수님을 원수로 배척하는 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하는 자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는 자
호산나 - 저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를 구원해 보라고 비웃는 자
고난주일에 나는 주님 편에 서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복된 인생을 삽니다.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구주되심을 천하에 선포한 날입니다.
주님이 평화의 왕으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신 날입니다.
선지자 스가랴가 외쳤습니다.
슥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절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겸손하셔서 새끼 나귀를 타신 평황의 왕 되신 주님은 에브라임의 병거, 예루살렘의 말, 전쟁하는 활을 끊으십니다. 그이 통치는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도 찬양합시다
우리도 종려가지를 꺾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합시다.
겉옷을 벗어서 그가 가시는 길 위에 펴 드리십시다.
우리들의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높혀드립시다.
우리들을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 찬양을 부르십시다.
고난은
처음에는 싫은 것이나 나중에는 감사한 것이다.
처음에는 힘든 것이나 나중에는 좋은 훈련이다.
처음에는 아픔이나 나중에는 기쁨이 된다.
고난 주일에 묵상하는 십자가
우리 주 예수님을 처형했던 형틀이었다.
십자가의 처형은 가장 비인간적인 잔인한 짓이다.
우리 주님이 이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질 차례입니다.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자는 고통을 당한다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이다.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크다.
313년의 콘스탄틴 로마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상징,
기독교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자랑하자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증거하자
고 난
홍성교회 목사님의 글 이 근 수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도 싫어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사도 바울도 고난을 싫어 했다.
하여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빼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주님은 고난을 피하지 못하셨고
바울도 가시를 빼내지 못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사도는 질병을 짊어지고 살았다.
나도 고난을 싫어한다.
갖 가지 질병
암과의 사투는 정말 무섭다
인간 소외의 고난
가난의 고난
모~두 싫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하면 새 생명을 얻는다
주님은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고
바울은 약한 중에 더 강한 자가 되었다.
나도 고난을 통과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생명을 얻어 풍성한 사람이 된다.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
슥 9:9 / 조남신 목사
누가복음23:33-38, 로마서3:23-24
예배로부름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스가랴 9:9).
개회기도 : 종려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세례식과 성찬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바라옵건데,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환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오니, 주님 받아 주옵시고 우리에게 고난의 신비와 부활을 보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니다.
설 교
>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또한 성례전이 베풀어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약간 짧게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종려주일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에요. 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그런데 그 당시 많은 무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어요. 그들은 예수가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이제 자기들을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렬히 환영을 했어요....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19:41).
> 종려주일이 지나면,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지요.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수요예배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못박기 전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들 마음대로 분장시키지요. 왕으로 분장시켜요(마태복음 27:27-31). 그래서 홍포(어의)도 입히고, 가시면류관(왕관)도 씌우고, 갈대(왕홀)를 들게 해요. 그들은 그토록 예수를 믿었는데, 왕으로 생각했는데,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실망감은 무서운 분노로 변했어요.... 그래서 조롱하고, 침 뱉고 때렸습니다. .....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예수님을 모시고 사십니까?
> 오늘의 설교제목은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 라고 정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이런 제목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부자와 빈자를 막론하고... 엘리트와 서민을 막론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때, 그는 세상을 보며 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 나는 이것을 담당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 다음 하늘을 보며 말씀하셨겠지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반면에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면서 의기양양하게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한번 내려와 봐라!"...서로 말하는 의미는 이처럼 달랐겠지만...
> 저는 오늘 새벽예배 설교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류의 생의 한 가운데에 이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도 모두 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관통해 지나가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도... 죄와 죽음의 문제도... 인간의 실존과 죄의 문제... 그로 인해 파생된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도...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사랑과 자비로 죽음의 세상을, 생명의 세상으로, 영생과 부활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 이 설교제목을 생각하며 저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노아의 홍수와 신약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것이 여기서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음을 봅니다. 성경에 보면,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충분히 침몰 당할 만큼..... 죄가 차고 넘쳤습니다. 노아시대에도 그랬고, .... 예수시대에도 그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요. 그러한 죄악의 늪에 빠지지 않을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죄는 우리 인생들을 죽음의 사건으로 몰고 갔어요. 모두가 죄인들이었으니,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었어요... 노아의 홍수때도 그랬어요. 창세기 6:6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모두 물로, 대홍수로 심판하실 계획을 세우셨어요. 이 대홍수에 침몰 당하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예외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침몰 당하지 않았어요(창세기 6:8). 그가 침몰 당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당대의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 그런데 이런 역사는 또 계속되지요. 신약시대에도 세상엔 죄악이 또 차고 넘쳤어요.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다시 말해서 새로운 약속의 시대에는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지지요.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죄가 우리의 온 몸에 구석구석 침투해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 죄를 샅샅이 씻어내기 위해선 예수님이 죽어야 했고, 그것도 온 몸 전체 구석구석 고통을 당하시며 죽어야 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인류에게는 손...발...허리...머리... 할 것 없이 ... 손에도, 발에도 죄는 거침없이 파고 들었어요. 옆구리에도 스물스물 유혹이 스며 들어왔어요. 머리에도 온갖 잡념과 못된 생각, 유혹, 죄악 등이 찾아 왔어요. 그래서 예수가 대신 손과 발에 못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게되고, 머리는 가시면류관에 찔리게되고,....
> 이것을 노아의 홍수 때와 비교해보면, 홍수 때는 죄인이 죽었는데, 예수시대에는 의인이 죽어요. 이것은 요즈음 말로 하면, 패러다임의 변화이지요. 생각의 전환! 발상의 전환! ... 그래서 구약시대에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살려서 방법을 완전히바꿨어요... 예수님은 죄인들을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죽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에 빠져 죽을 것 같으니까, 그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의인이 대신 목숨을 버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고통이었지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는지.....
> 로마서 본문(3:23-24)에선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지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 (플러스) ...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었느니라"
>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이해 할 수 없다고들 말을 합니다. 침몰 당하는 인간들을 구원했으니, 자기자신도 구원해보라고 예수님을 향해 놀려댑니다. .....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일곱 마디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 나와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동자는 용서의 눈동자였어요. 야유하고, 비웃고, 소리치는, 악에 복받친 인간들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눈동자는 관용의 눈동자였어요. .....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 용서와 관용이 우리들을 살리셨습니다.!!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 고난주간을 앞두고, 부활주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자비가 다시 이 지구에 내려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소망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침몰불가의 인간은 없다는데!!...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해야지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돼요.
>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마치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듯이 욥에게 하마 이야기를 해주셨던 적이 있어요(욥기 40:15). 피조물 중에 가장 강하고 힘있는 동물 중의 하나로 하마가 있다,... 이 하마는 요단강이 흘러 넘친다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요동치 않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요. 그러면서 그 하마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하물며 너희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면서 욥에게 용기를 주고 계시지요. 요단강은 항상 이런 식으로 넘실대며 너를 집어삼킬려고 하지만, 침몰당해선 안된다. 그러러면 방법이 있는데... 어떻게? 욥기 40:24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요. 정신을 팔지 말고,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라고요.... 노아처럼...... 노아는 세상이 범람해도 침몰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이 너희를 잡으려고 하고, 코를 꿸려고 해도 정신을 차리면, 누가 감히 그 코를 꿸수 있겠느냐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차려야지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우리가 정신을 차린다고 해서 살 수는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세요. 더 근본적인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침몰당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었고, 지금도 요단강에 삼키움 당하지 아니하고 살고있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 오늘 세례 받으신 분들, 오늘 세례받고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는 분들, 그리고 이미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고난주간을 앞두고, 부활주일을 앞두고, 또 교회창립주일을 앞두고, 우리 모두가 이 분을 영접하며 평생 이 분을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코 멸망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꼭 구원받으실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