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균의 석이병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떡>원본보기
“내가 풍악(楓岳, 가을 금강산의 이름)에 여행 가서 표훈사(表訓寺)에서 자게 되었다. 주지가 밥상을 차렸는데, 떡 한 그릇이 있었다. 이것은 구맥(瞿麥)을 곱게 빻아 체로 아주 많이 친 다음에 꿀물과 석이를 함께 뒤섞어 놋쇠시루에 찐 것이다.”1)
이 글은 1611년 음력 4월, 허균(許筠, 1569~1618)이 집필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나온다. 허균이 금강산으로 여행을 간 때는 1603년 가을이었다. 당시 허균의 형편은 유람을 즐길 만큼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금강산으로 떠나기 전에 재종형인 허체(許褅)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균은 이렇게 적었다. “당로자(當路者, 권력자)가 저를 액운에 빠뜨려 몰아냈습니다.”2) 그해 허균은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역사 기록과 편찬 담당)과 지제교(知製敎, 국왕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를 겸직할 정도로 요직에 있었다. 그런데 음력 8월에 질녀의 혼사와 관련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표훈사의 주지 담유(曇裕)는 허균이 오는 줄 미리 알고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3)
먼저, 허균은 ‘구맥’을 석이병의 주재료로 보았다. 구맥은 ‘술패랭이꽃(Fringed Pink)’의 다른 이름으로, 한의학에서는 약재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구맥만 가지고서는 떡을 만들 수 없다. 떡은 모름지기 곡물이 주재료가 되어야 한다. 곡물을 가루 내어 여기에 소금이나 부재료를 섞은 다음에 시루에 안쳐서 찌든지, 아니면 절구에 익힌 곡물을 넣고 공이로 수십 차례 쳐서 차지게 만든 다음에 손으로 모양을 빚거나 곡물 가루를 익반죽하여 틀에 넣어 찍어내거나 기름에 튀긴 음식이 바로 떡이다.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의 <치선(治膳)> 편에서 ‘풍악석이병(楓嶽石耳餠)’을 소개하면서 허균이 ‘구맥’이라고 한 것을 두고 “이것은 바로 패랭이꽃(石竹)의 꽃씨이니,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이맥(耳麥)을 잘못 알고 쓴 것 같다”4)
다음으로 중요한 재료는 석이이다. 석이는 주로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바위에 붙어사는 버섯으로, 마치 검은색 종이를 구겨서 찢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모양이 귀를 닮아서 한자로 ‘石耳(석이)’라고 적는다. 그런데 허균은 한자로 ‘석이(石茸)’라고 적었다. ‘이(茸)’의 원래 발음은 무성하다는 뜻의 ‘용’이다. 그러나 버섯을 뜻할 때는 ‘이’라고 읽는다. ‘石耳(석이)’라고 쓰면 자칫 ‘귀’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풀 초(艹)’를 붙여서 ‘石茸(석이)’로 적기도 했다. 허균도 그러한 관행을 따랐던 것이다.
귀리를 곱게 빻아서 체에 친 뒤 거른 귀리가루를 다시 빻아 체를 치면 매우 고운 가루가 된다. 여기에 다진 석이버섯을 넣고 섞은 다음에 꿀물을 조금 붓고 손으로 덩이가 지지 않게 흩뜨린다. 이것을 놋쇠시루에 안쳐서 쪄낸 떡이 바로 석이병이다. 귀리가루는 맑은 회색에 가까운데, 여기에 곱게 다진 석이버섯을 섞어 꿀물을 타면 옅은 황색으로 변한다. 이것을 시루에 쪄내면 마치 황색 떡에 검은 점이 박힌 듯한 석이병이 완성된다.
17세기 이후에 집필된 요리책에는 대략 네 가지 유형의 석이병 만드는 법이 나온다. 그 첫 번째 요리법이 바로 허균의 <도문대작>에 나오는 ‘금강산(풍악) 표훈사 석이병’이다. 귀리가루와 석이가루를 섞어서 시루에 찌는 방법이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출처를 ‘《허집(許集)》’이라고 밝히고, 허균과 관련된 내용은 전부 빼고 대신에 풍악의 표훈사 중이 만든 것이라고만 적었다. 이후에 편찬된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고사신서(攷事新書)》,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도 몇 글자가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두 번째 석이병 요리법은 허균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음식디미방(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 나온다. 표훈사의 석이병과 마찬가지로 석이를 섞어 넣었지만 주재료는 멥쌀과 찹쌀이다. 찹쌀에서 나오는 단맛을 염두에 둔 탓인지 장계향은 따로 꿀물을 넣지 않았다. 세 번째 석이병 요리법은 유중림이 《증보산림경제》에서 소개한 것이다. 유중림은 앞서 언급한 ‘풍악석이병’ 외에 ‘떡과 국수(餠麵諸法)’ 부분의 맨 처음에 또 다른 ‘석이병’ 요리법을 적어두었다. 대추 · 밤 · 꿀로 만든 소를 넣은 찰떡 두 조각을 넓게 펼친 석이버섯과 합쳐서 쪄낸 떡이다. 네 번째 요리법은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오는 석이병 만드는 법이다. 《규합총서》는 여러 판본이 있고, 석이병 요리법도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단자’처럼 만드는 요리법이고, 다른 하나는 석이가루를 섞어서 찐 떡이다.
문헌마다 요리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들 석이병의 공통점은 이름 그대로 석이버섯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허균보다 후대의 인물인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은 석이버섯이 맛있는 먹을거리이긴 하지만, 이것을 따려다 바위에서 추락하여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부서지기도 하고 죽는 사람도 자주 생긴다면서 백성에게는 ‘부역의 독’이라고 보았다.5)金時習, 1435~1493)은 볶은 석이가 마치 고기를 먹은 듯하고, 먹고 나자 속마음이 시원하다고 시로 읊조렸다.6)
허균은 표훈사의 석이병을 두고 평하기를 그 맛이 “매우 좋아서 경고(瓊糕)나 나시병(糯柹餠)마저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구나”7)8)柹餠, 곶감을 떡에 비유해 부르던 이름)’을 섞어 만든 떡이다. 실제로 두텁떡과 곶감찰떡은 부드러우면서도 달다. 허균은 가을에 표훈사에서 먹었던 석이병이 이들 떡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다.
허균은 <도문대작>의 서문을 1611년 음력 4월 21일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현(咸悅縣, 지금의 익산시 함라면)의 초가에서 썼다. 어릴 적부터 입맛이 남달랐던 허균은 막상 유배지에 와서 보니 “쌀겨조차 부족했고 밥상 위의 반찬이라곤 썩어 문드러진 뱀장어나 비린 생선에 쇠비름과 미나리뿐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간신히 두 끼를 먹다 보니 종일 배가 고팠다.”9) 결국 허균은 “여러 음식을 종류대로 나열해 기록하고 때때로 보면서 고기 한 점을 눈앞에 둔 셈”10)
허균은 조선 팔도 각지의 맛있는 식재료와 음식을 소개하면서 맛과 향에 대한 자신의 품평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장소나 요리법,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같은 세세한 내용을 기록했다. <도문대작>의 구성을 보면, 오늘날의 백과사전처럼 내용별로 분류를 한 유서(類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즉, ‘병이지류(餠餌之類, 떡 종류)’, ‘과실지류(果實之類, 과일 종류)’, ‘비주지류(飛走之類, 새와 짐승 종류)’, ‘해수족지류(海水族之類, 수산물 종류)’, ‘소채지류(蔬菜之類, 채소 종류)’의 순서로 식재료 혹은 음식의 이름을 항목으로 삼고 내용을 적었다.
‘병이지류’에는 11가지의 떡 · 과자 · 죽 따위가 나온다. 앞에서 소개했던 ‘석이병’이 떡 종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떡뿐 아니라, 안동의 다식(茶食)과 전주의 백산자(白散子) 같은 과자, 엿[飴] · 대만두(大饅頭) · 두부, 그리고 방풍죽(防風粥)과 둘죽(粥, 들쭉으로 끓인 죽) 등도 떡 종류에 들어 있다.
‘과실지류’에는 배 · 귤 · 감 · 밤 · 대추 · 앵두 · 자두 · 복숭아 · 포도 · 수박 · 참외 · 모과 등 28가지에 이르는 과일이 나온다. 먼저 과일의 이름을 적고 맛이 좋은 생산지를 적었다. 가령 ‘밤(栗)’이란 항목에서는 상주에서 나는 밤은 작지만, 껍질이 저절로 벗겨져서 속칭 ‘겉밤’이라고 한다면서, 이에 비해 밀양에서 나는 밤은 크고 맛이 가장 좋으며, 지리산에서도 주먹만 한 큰 밤이 난다고 적었다.11)金橘)은 맛이 시고, 감귤(甘橘)은 금귤보다 조금 크고 달며, 청귤(靑橘)은 껍질이 푸르고 달며, 유감(柚柑)은 귤의 일종인 감자(柑子)보다 작지만 매우 달다고 했다.12)
‘비주지류’에는 웅장(熊掌, 곰발바닥) · 표태(豹胎, 표범의 태) · 녹설(鹿舌, 사슴의 혀) · 녹미(鹿尾, 사슴의 꼬리)와 같이 왕실에 진상되었던 귀한 식재료가 적혀 있다. 허균은 지금도 맛을 내기가 어려운 곰발바닥을 두고 “요리를 잘하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회양(淮陽, 북한의 강원도 회양군)의 것이 가장 좋고, 의주와 희천(熙川, 평안북도 희천군)이 그다음이라고 했다.13)14)
허균은 ‘해수족지류’에서 민물과 바닷물을 가리지 않고 46가지의 수산물을 적어두었다. 그중에는 청어처럼 식재료의 변천사까지 상세하게 적어둔 것도 있다. 가령 청어의 경우, 네 곳에서 어획되는데, 지역마다 청어의 생김새와 맛이 다르다고 하면서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다. 허균은 이에 대해 덧붙여 “명종 이전만 해에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괴이하다”고 하였다.15)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말에 시작된 소빙기(little ice age)의 영향으로 해주 근해에서 청어가 사라졌다고 한다.16) 일종의 천재(天災)였으니, 허균의 ‘괴이하다’는 표현이 적절했던 셈이다.
‘소채지류’에서 허균은 황화채(黃花菜) · 순채[蓴] · 무[蘿葍] · 거요목[苜蓿] 등의 명산지와 맛에 대해서는 썼지만, 고사리 · 아욱 · 콩잎 · 부추 · 미나리 · 배추 · 송이 · 참버섯 등은 “어디 것이든 모두 맛이 좋으므로”17)黃角) · 청각(靑角) · 참가사리[細毛] · 우뭇가사리[牛毛] · 다시마[昆布] · 올미역[早藿] · 감태(甘苔, 김의 한 가지) · 해의(海衣, 김의 한 가지) 등의 해초를 이 종류에 포함시켜 적어놓았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의 분류로 식재료와 음식을 나누었지만, 여기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차(茶) · 술[酒] · 꿀[蜂蜜] · 기름[油] · 약밥[藥飯], 그리고 28가지의 서울 세시음식이 그것이다. “경주에서는 보름날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있다”는 짧은 글로 약밥의 유래를 함축했다. 그런데 술 항목에서 태상주(太常酒)와 자주(煮酒) 두 가지만 적어둔 점이 의아하다.18)愛酒家)였지, 대주가(大酒家)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허균의 부친 허엽은 1575년 음력 7월에 동인(東人)의 종주(宗主)가 되었다.19) 명조대 말과 선조대 초에 훈구파를 밀어낸 사림파가 1575년(선조 8)에 동인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졌다. 동인의 실제 종주는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이었지만, 동인에 속했던 젊은 사류(士類)들이 대사간이었던 허엽을 종주로 내세워서 그렇게 되었다. 부친뿐 아니라, 허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 허성(許筬, 1548~1612)과 작은형 허봉(許篈, 1551~1588)의 관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때문에 허균의 집에는 동인에 속했던 사람들이 ‘칭념(稱念, 본래 잊지 말고 잘 생각해달라고 부탁한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청탁의 뜻을 담아 음식물 따위를 보내는 행위를 일컬었다)’으로 보내온 제철음식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문대작>의 서문에도 나온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사방에서 별미 음식을 예물로 보내는 이들이 많았기에 어린 시절 진귀한 음식을 두루 먹어보았다.”20)
이뿐만 아니라 허균은 “자라서는 부잣집에 장가가서 땅과 바다에서 나는 온갖 음식을 다 맛보았다”21)芝峯類說)》을 편찬한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그의 손위 동서였다. 혼인한 뒤 허균은 처가가 있는 서울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임진왜란 때의 피난과 몇 차례의 지방 근무, 그리고 지방에서의 유배 생활을 제외하면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지냈다. 그래서 그런지 <도문대작>에는 서울과 경기도의 식재료와 음식이 가장 많다.
허균의 나이 24세 때인 1592년 음력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서울에 살던 허균은 홀어머니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함경도 방향으로 피난을 갔다. 음력 7월 7일에 단천(端川,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에 이르렀을 때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출산 이틀 뒤에 왜군이 들이닥쳐 허균 일가는 밤새도록 북쪽의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임명역(臨溟驛)으로 옮겼다. 그러나 10일 저녁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를 뒷산에 임시로 묻고 다시 피난길에 올랐지만 갓난 아들도 얼마 못 가 잃었다. 허균의 생애에서 이 일은 가장 비통한 사건이었다. 특히 아내 김씨의 죽음은 이후 그의 삶에서 한으로 남았다.
허균이 홀어머니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원산을 거쳐 함경도 방향으로 피난 간 경로이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이 1592년 음력 7월 7일에 도착한 단천이다. 《동국여도(東國輿圖)》, <남북관도(南北關圖>, 1책 16절. 채색 필사본. 34㎝×47㎝,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출처: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런 험한 일을 당한 허균은 난리를 피해 다시 외가가 있는 강릉에 돌아와 지내면서 기이한 해산물을 골고루 맛보았다. 앞에서 소개했던 방풍죽을 비롯하여 여항어(餘項魚) · 붕어[鯽魚] · 천사리(天賜梨, 배의 일종)는 강릉에서 맛본 것이다. 여항어는 연어과의 민물생선인 열목어로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이항어(飴項魚)’라고도 적었다. 허균은 이 여항어를 두고 “산골에는 어느 곳이나 있는데, 강릉의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고 했다. 붕어는 “강릉의 경포가 바닷물과 통하기 때문에 흙냄새가 안 나고 가장 맛있다”고 적었다. ‘천사리’라는 배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성종 연간에 강릉에 사는 진사 김영(金瑛)의 집에 갑자기 배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는데 열매가 사발만 하였다.”22)
특히 강릉에서 맛본 방풍죽은 정말 맛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뒤에 요산(遼山)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번 끓여 먹어보았다”23)遂安郡, 지금의 황해북도 수안)을 가리킨다. 허균은 1605년 음력 9월 6일부터 이듬해 음력 3월까지 수안군수로 재직했다. 이때 방풍을 얻어서 강릉식으로 죽을 끓여보았지만, 맛은 “강릉에서 먹던 맛과는 어림도 없었다.”
허균은 문과에 급제한 해인 1594년 음력 5월 3일에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의주(義州)에 넉 달이나 머물렀다. 조선시대 의주는 명나라와 통하는 국경도시였다. 명나라로 떠나는 조선의 사신들을 따라가는 상인들도 의주에 많이 살았고, 무역을 위해 이곳에 온 중국인들도 많았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의주 음식을 많이 소개했는데, 대부분 중국인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24)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드는 대만두(大饅頭)와 중국과 맛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잘 굽는 거위구이, 그리고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에게서 배워서 매우 맛있게 만드는 황화채(黃花菜, 원추리) 요리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허균은 의주 사람들의 음식 솜씨를 높게 보았지만, 그가 정말로 좋아했던 지방은 전라도였다. 허균은 33세인 1601년 봄에 향시의 시관(試官)이 되어 호남 각지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시험 출제관이니 각 관아에서 대접을 잘 받았을 것이다. 또 같은 해 음력 6월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러 돌아다녔다. 그때 부안의 봉산(蓬山)을 몹시 좋아하여 그곳에 오두막을 짓고 살려고도 했다.25) 허균은 이 출장길 도중에 부안에서 기생 계생(桂生, 1573~1610, 호가 ‘매창’)을 만났다.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26)27)
이런 연유였을까? <도문대작>에는 세 가지의 부안 명품 식재료가 나온다.28) 하나는 사슴 꼬리인 녹미(鹿尾)이다.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다음으로 오징어[烏賊魚]이다. 서해에서 간혹 잡히는데, 지금의 고창군 흥덕과 함께 부안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적었다. 마지막으로 도하(桃蝦)라는 민물새우이다. 부안과 옥구 등지에서 나는데, 색이 복숭아꽃 같고 맛도 매우 좋다고 했다.
<도문대작>에는 부안뿐 아니라 전라도의 맛있는 식재료와 음식도 적지 않게 나온다.29) 전주 인근에서 나는 승도(僧桃, 승도복숭아)는 크고 달다고 했다. 감류(甘榴, 석류)는 영암과 함평에서 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적었다. 나주에서 나는 무[蘿葍]는 맛이 배와 같고 물기가 많다고 적었다. 감태[甘苔, 김]는 호남에서 나는데, 함평 · 무안 · 나주에서 나는 것이 매우 맛이 좋아 엿처럼 달다고도 했다. 죽순절임[竹筍醢]은 노령산맥 남쪽에서 잘 담그고, 맛도 매우 좋다고 적었다. 순(蓴, 순채) 역시 호남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작설차(雀舌茶)는 순천의 것이 가장 좋고 다음이 변산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도문대작>에서 언급된 지역은 동해 · 남해 · 서해를 비롯하여 조선 팔도에서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다. 허균은 <도문대작> 서문에서 “벼슬한 뒤로는 남북으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이런저런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쯤 되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음식이라면 고기며 나물이며 먹어보지 않은 게 없다”30)
<도문대작>의 서문을 쓰고 나서 이틀 후인 1611년 음력 4월 23일 허균은 <도문대작>이 포함된 《성소부부고》 64권을 모두 엮었다. 그해 음력 11월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가 부안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612년 음력 12월 15일에 일본의 동정을 명나라에 알리는 진주사(陳奏使)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613년 봄에는 다시 호남을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명나라통’인 허균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그의 나이 46세 때인 1614년 음력 3월 8일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나서, 이듬해인 1615년 음력 1월 11일에 광해군에게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였다. 이때부터 허균은 광해군의 대북파(大北派)와 같은 편이 되어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1617년 음력 10월부터 허균은 역모 혐의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618년 음력 8월 24일 서울의 서소문 밖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는 옥에 갇히기 전날 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성소부부고》의 초고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원고들을 전했다. 그 속의 <도문대작>도 고스란히 남아서 오늘날 우리는 1611년판 조선시대 ‘식신로드’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26권, 설부(說部) 5, <도문대작(屠門大嚼)> : 石茸餠. 余游楓岳, 宿表訓寺. 主僧設蒲供有餠一器. 乃細舂瞿麥, 以篩篩之百帀, 然後調蜜水幷雜石茸, 蒸之於鍮甑.
허균,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文部) 18 · 척독 하(尺牘下), <여허형자하(與許兄子賀) 계묘(癸卯)> : 當路阨弟黜之.
허균, 《성소부부고》 제9권, 문부 6·서, <여석주서> : 夕休於表訓寺. 主僧曇裕設蒲供以待.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제8권, <치선(治膳)>, ‘풍악석이병(楓嶽石耳餠)’ : 此卽石竹花子非也. 似是耳麥之誤也; 농촌진흥청, 《증보산림경제Ⅱ》, 농촌진흥청, 2003, 161쪽.
권두인(權斗寅), 《하당선생문집(荷塘先生文集)》 제3권, <잡저(雜著)>, ‘석이설(石茸說)’ : 菜之美者也. 茸之生必在深山窮峽懸崖絶壁無夤緣着足. (중략) 則墜落萬仞深壑, 身骨糜碎, 往往而死者, 相踵也. (중략) 則凡賦役之毒于民, 不直此也.
김시습(金時習),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제6권, <균심(菌蕈)>, ‘석이(石耳)’ : (중략) 悅口芻豢那擅美, 啖餘不覺肝膽涼. (하략)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其味甚佳, 雖瓊糕糯柹餠, 遠不逮焉.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都下時食. (중략) 秋有瓊糕, (중략) 柹栗糯餠.
허균, 《성소부부고》 제25권, <도문대작인> : 糠籺不給, 飣案者唯腐鰻腥鱗馬齒莧野芹. 而日兼食, 終夕枵腹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선집》, 돌베개, 2012, 182쪽.
허균, 《성소부부고》 제25권, <도문대작인> : 遂列類而錄之, 時看之, 以當一臠焉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선집》, 돌베개, 2012, 182쪽.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栗, 尙州有小栗, 皮自脫, 俗曰皮的栗也. 其次密陽大栗, 味最甘. 而智異山, 亦有大栗如拳云.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金橘, 產濟州, 味酸. 甘橘, 產濟州, 比金橘而稍大, 味甘. 靑橘, 產濟州, 皮靑而味甘. 柚柑, 產濟州, 比柑而小, 味極甘.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熊掌, 山郡皆有之, 烹飪不適, 則失其眞. 味唯淮陽最善之, 義州煕川又次之.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凡地產猪麞雉鷄等物, 邑邑有之者, 不必煩載.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靑魚, 有四種. 北道產者大而內白, 慶尙道產者皮黑內紅, 湖南則稍小, 而海州所捉二月方至, 味極好. 在昔極賤, 前朝末, 米一升只給四十尾, 牧老作詩悼之. 謂世亂國荒, 百物凋耗, 故靑魚亦希也. 明廟以上, 亦斗五十, 而今則絶無可怪也.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살았던 인물인 이색은 청어의 가격에 대해 쌀 한 말에 20여 마리라고 했다(이색(李穡), 《목은시고》 제14권 ‘부청어(賦靑魚)’ : 斗米靑魚二十餘).
김문기, <소빙기의 성찬(盛饌) : 근세 동아시아의 청어어업>, 《역사와 경계》 96호, 2015.
蕨薇葵藿薤芹菘朮松蕈眞菌, 處處皆佳, 故不別書云.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酒, 開城府太常酒最好. 而煮酒尤佳, 其次朔州亦好. 개성에서 잘 빚는다는 ‘태상주’가 어떤 술인지는 아직 확인이 안 된다. ‘자주’는 청주나 소주에 여러 가지 약재와 꿀을 넣고 다려서 만든 술이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8년(1575) 7월 1일 10번째 기사.
허균, 《성소부부고》 제25권, <도문대작인(屠門大嚼引)> : 余家雖寒素, 而先大夫存時, 四方異味禮饋者多, 故幼日備食珍羞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선집》, 돌베개, 2012, 181쪽.
허균, 《성소부부고》 제25권, <도문대작인> : 及長, 贅豪家, 又窮陸海之味.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선집》, 돌베개, 2012, 181쪽.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餘項魚. 山郡皆有之. 而江陵最大且好 ; 天賜梨, 成化年間, 江陵居進士金瑛家忽生一梨, 及結實大如碗.
석이병과 마찬가지로 허균의 방풍죽 요리법도 《산림경제》에 그대로 옮겨졌다(홍만선(洪萬選), 《산림경제(山林經濟)》, <치선(治膳)>, ‘防風粥’ : 乘露曉摘防風初芽, 令不見日. 精舂稻米煮爲粥, 半熟投之候其沸. 移盛于冷瓷碗, 半溫而食之. 甘香滿口, 三日不衰. 許集). 인용 출처도 《허집》으로 석이병과 똑같다. 다만, 허균이 강릉을 언급한 내용과 ‘상품제호’라는 말만 뺐다. 금강산 표훈사의 석이병과 마찬가지로 방풍죽은 《증보산림경제》, 《고사신서》, 《해동농서》, 《임원경제지》에도 인용되어 있다.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大饅頭, 義州人能造如中國人, 而他皆不好; 鵝, 義州人善炰之, 恰似天朝之味; 黃花菜, 卽萱草也. 義州人學於上國 善爲之, 味極好.
허균, 《성소부부고》 제7권, <山月軒記> : 不佞少日以轉運判官, 督漕於湖南, 海上往來者慣矣. 深喜扶寧之蓬山, 欲結廬於其麓以棲遲焉.
허균, 《성소부부고》 제18권, 문부십오(文部十五), <기행(紀行) 상(上)>, ‘조관기행(漕官紀行)’ : 倡桂生. (중략) 貌雖不揚, 有才情可與語, 終日觴詠相倡和.
허균, 《성소부부고》 제2권, ‘시부 2’ <병한잡술(病閑雜述)>, ‘애계낭(哀桂娘)’ : 桂生扶安娼也. 工詩解文, 又善謳彈. (중략) 余愛其才, 交莫逆.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鹿尾, 扶安人陰乾者最好; 烏賊魚, 西海或有之, 而產興德扶安者最佳; 桃蝦, 產于扶安沃溝等邑. 色如桃花, 而味絶好.
허균,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5, <도문대작> : 僧桃, 全州一境皆僧桃, 大而味甘; 甘榴, 產靈巖咸平者最佳; 蘿葍, 產于羅州者極好, 味如梨而多津; 甘苔, 產湖南而咸平務安羅州所生極佳, 味甘如飴; 竹筍醢, 湖南蘆嶺以下善沈之, 味絶佳; 蓴, 產湖南者最好; 茶, 雀舌產于順天者最佳, 邊山次之.
허균, 《성소부부고》 제25권, <도문대작인> : 因得歷嘗, 而釋褐後南北官轍, 益以餬其口. 故我國所產, 無不嚌其炙而嚼其英焉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선집》, 돌베개, 2012, 181쪽.
발행일 : 2018. 05. 11.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2018 파워라이터ON은 임지현, 이상욱, 박종기, 양지열, 진중권, 김민경, 전중환, 이택광, 정종현, 주영하 등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자이자 유명한 분야 전문가 10인의 지식 콘텐츠를 간편하게 만나볼 수 있는 연재 프로그램입니다.
2018 파워라이터ON 연재는 네이버문화재단
[ë¤ì´ë² ì§ì백과] 맛이 매우 좋아서 두텁떡이나 곶감찰떡마저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