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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위와 탐욕을 버린 하나님의 자녀들 원문보기 글쓴이: Daniel
(위 지도에서 허연 부분은 사막, 한대, 고산, 밀림 지역이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은 온대와 냉대)
세계에서 국가 면적 크기로 러시아, 캐나다, 미국 다음으로 큰 땅덩어리의 나라
중국! 인구 13억 8천을 육박!
쌀, 밀, 옥수수의 최대 생산지이지만,
자국에서 다 소비하고도 모자라 수입까지 해야하는 식량 부족의 위험 국가이다.
그래서 중국은 남중국해를 장악하여 14억에 육박해 가는 인구를 먹여살리려고
안간 애를 쓰고 있다.
남중국해에 있는 난사군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중국과 베트남, 타이완,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6개국 간의 영토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영토에서 바다까지의 구역을 정하는
방공식별구역이 있다.
한 국가의 영토라는 것은 육지와 섬등 토지로 구분되어 있는 국경을 말하는 것이고,
영해라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바다로, 자국의 섬들에서 바닷물의 높이가
가장 낮아진 썰물 때,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섬들을 직선으로 연결한 기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이다.
그리고 영공은 영토와 영해의 수직 상공으로, 대기권까지 한정된다.
그런데 영해를 넘어선 바다를 사용할 권리도 있다.
바로 배타적 경제 수역이라는 곳이다.
배타적 경제수역은 자국의 기선으로부터 200해리까지의 수역 중에서 자국의 영해를
뺀 나머지 바다이다.
이 배타적 경제 수역에서는 어업활동을 할 수 있고, 인공 구조물을 설치할 수 있으며,
천연자원 탐사와 개발도 할 수있다.
그리고 다른 국가의 선박과 비행기들이 자유롭게 어떤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통행할 수 있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송유관 설치도 할 수 있으며, 통신용 케이블도
설치 할 수 있는 수역이다.
그런데 남중국해는 베트남 필리핀 중국등 모든나라가 구역을 법정상으로 정했더니
가운데엔 주인이 없는 공해가 생겼다.
이 지역을 놓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이 싸우고 있다.
바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생긴 것이다.
이지역은 어족이 풍부하고,
석유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고는데다가, 해상교통에 중요한 지역이다.
이에 중국은 파도가 치면 보이지도 않는 암석에 콘크리트를 부어 시사군도와 난사군도는
한나라때부터 중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는 인공적인 섬이므로 억지주장이라 하여 중국과 싸우고 있다.
이런 싸움에 미국과 유럽등에서는 중국을 강하게 비판하고,
스위스에서 열린 PCA재판에서 중국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결론을 내려
사실상 베트남 필리핀 등이 유리해졌다.
하지만 PCA재판은 중국을 압박하는 힘은 사실상 없기 때문에,
중국측은 그 재판은 유럽인들이 내린 결론일 뿐, 승복해야 할 어떠한 명분도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이에 군사까지 이동시켰었다.
난사군도 약 73만km2 이고, 남중국해의 남단에 위치한 해역으로서 약 100여 개의 소도,
사주, 환초, 암초로 구성과 108개의 산호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역은 군사상의 요충지인 데다가 난사군도에 풍부한 석유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1960년대 후반에 실시된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의 조사보고가 동 영유권
분쟁을 촉발하여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시사군도는 1974년 베트남과 중국의 무력 충돌 이후 중국이 실효 지배 중이고,
난사군도는 중국, 타이완, 베트남, 말레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6개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50여개의 섬을 각각 나누어 점령하고 있다.
그래서 남중국해는 아직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게다가 동중해의 일본의 무인도인 센카쿠 열도도 중국이 자기네 거라고 주장한다.
거기 바다 주변에 석유가 매장되어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본이 독도 주변의 자원이 탐나서 자기네 거라고 우리에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대마도까지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것인 것 같다.
또 중국은 석탄 생생량도 세계최대 이지만, 자국내 소비로도 부족하여 수입국 1위를
달리고 있다.
석유도 생산되고 있지만 자국내 소비만으로도 부족하다.
중국은 큰 땅덩어리의 혜택을 받아서 자원도 골고루 있다.
자원의 쌀이라 부르는 철광석 매장량 1위,
강도와 경도가 매우 높은 특수 강철로 무기 제작에 사용되는 텅스텐은
세계의 50%가 묻혀있고,
전 세계 희토류의 30.9%매장량으로 97%까지 생산해 내고있다.
희토류는 첨단 산업에 꼭 필요한 희귀 원소 17종을 말하는데,
스마트폰, 컴퓨터, 카메라 등 첨단 기기의 액정 표시 장치인 LED나 의료 장비 제조에 등에
두루 쓰이고,
전기 및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풍력, 태양열 발전을 위한 영구 자석 제작에 필수이다.
중국은 2010년 이전에는 희토류에 대한 용도를 잘 몰라서 싸게 수출하였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안 후에는 중국이 희토류에 대한 국가 관리를 선언하면서
2010년 희토류 가격이 15배나 상승했다.
이로인해 주요 국가들은 희토류 자원 확보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중국,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수출 대상국 1, 2, 3위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곤란한 것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 문제로 샌드위치 된 입장에서 어렵게 돌파구를
찾아야 할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중국의 종교는 인도의 대승불교가 티벳에서 북중국으로, 베트남에서 남중국으로
넘어가서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이지만, 유교를 창시한 국가이다.
세계를 두루 보아도 사탄이 세상 신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비교적 예법을 중시하는
문화를 가졌다.
그 예법이 교묘하게 변질되어 가면서 사람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고,
다른 국가들이 사탄에게 하는 인신제사도 중국 은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 국가 중국이 어떻게 국가를 이루고 성장해 왔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노아와 홍수 이후로 퍼져나간 인류, 바벨탑 사건이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은 인종도
같았다.
세계가 말하는 동북아시아의 황인족! 중국의 역사서는 실로 방대하다.
<중국의 고대 역사>
1.황하문명
'황허'란 말은 우리 식으로 발음하는 것이고 한자식 대로 발음하면 황하라 한다.
중국에서 '황제'라는 뜻은 '누런 임금'이라는 뜻이다.
즉 누런 흙, 황허강의 흙의 덕을 알아차린 사람의 지혜를 일컫는 말이다.
황하문명은 B.C.5000~400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좁쌀, 기장등이 재배되었고
개와 돼지도 사육되었었다.
※양사오 문화(앙소문화)
확실하지는 않으나, B.C.4000~B.C.2000년경 전설적인 5명의 임금이 다스린 시대로,
'3황5제'라는 시대이다.
여기서 3황이란 농사를 다스린 신농씨,
가축과 옷을 다스린 복희씨,
불을 다스린 수인씨를 말한다.
대표 유적지가 허난성 양사오에 있기 때문에 양사오 문화라고 한다.
※용산 문화(룽산문화)
B.C.2500~B.C.1500년경, 황하강 하류와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검은 간토기가 사용되었고
그 중심지가 산룽성 룽산이어서 룽산 문화라고 한다.
2. 하나라
홍수가 잦았던 황허강 주변의 백성들은 매년 홍수로 인하여 재해를 당했다.
그러나 그 홍수를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우'라는 사람이 황하강의 물 길을 터서 홍수를 막아내고 왕이 되었다.
하왕조는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여 4백여 년 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전과 누각을 증축하여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주변 종족들을 유린하고 포악무도한 정치를 일삼다가
결국상 상(商)족의 '탕'에게 멸망한다. 이 상족이 은나라를 세운다.
3.은나라(B.C.1600~B.C. 1046 )
하나라의 폭군 걸 왕을 무너뜨리고 '탕'이라는 사람이 세운 나라로,
중국 최초 갑골문자와 청동기를 사용한 나라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 홍수, 지진, 가뭄은 이 모든 뜻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이 나라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이 하늘을 대리자라 믿었다.
은나라의 왕은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고,
수많은 소와 양을 제물로 바쳤다.
제사를 지낼 때는 청동기로 만든 도구를 썼는데,
은나라의 청동기는 독특하고 복잡한 무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은나라의 제사는 노아와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동물로 제사드리는
비슷한 방식이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자신의 조상들에게 구전으로 불려받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따라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제사법은 매우 변질되어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은나라 왕은 점쟁이들을 불러 자주 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거짓 선지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왕의 명령을 받은 점쟁이는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뼈를 불에 달궈
그것이 금이 가는 모양을 보고 앞날을 점쳤다고 한다.
이렇게 점을 친 내용을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뼈에 새겼고,
이것을 ‘갑골 문자’라고 한다.
옛날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에 사탄이 비틀어 왜곡시켜 놓았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점을 치기 위해서 동물을 잡아서 제사형식을 갖췄다는 것이다.
갑골 문자는 단지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글자로 새김으로써 왕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하늘의 뜻으로 하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전하는 왕을 우러러보라는 뜻이었다.
'무왕'이 전차 300대와 특공대 3천명, 병사 4만5천을 거느리고 여러 지역의 작은
민족들과 힘을 함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무왕은 왕이 되기전 은나라에서 인재를 찾아 떠돌다가
웨이수이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대화를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한다.
그가 바로 '강태공'이다.
무왕은 '강태공'의 지혜를 빌어서 은나라의 폭군 주임금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나라는 황제가 그의 직할령을 다스리는 제후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봉건제도를 도입하였다.
주나라의 제후국들은 연, 진, 진(晉), 위, 주, 조, 정, 노, 제, 등, 송, 채, 오, 월, 초나라가
있었는데, 이중에서 제나라에 '강태공'이 제후가 되었다.
공자가 쓴 '춘추' 라는 책의 제목의 이름을 따서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주나라가 이들 제후국들 가운데서 패권을 가진 종주국으로 군림하다가
B.C.770년에 견융의 침입으로 왕이 살해 당한 이유로 주나라의 원래 수도였던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호경은 서쪽, 낙읍은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기 전의 국호를 '서주'
옮긴 이후를 '동주'라고 한다.
여기서 '동주'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눈다.
당시 종주국이었던 주나라가 이민족에 의해서 수도를 옮기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따라서 각지의 제후들은 주나라를 명목상으로만 받들 뿐, 서로 패권을 차지 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였다.
이에 주나라에서 제국간,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맺는 '회맹'이 생겨났는데,
회맹의 주도자가 된 사람을 '맹주'라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15국 중에서 5명의 패자를 '춘추오패'라고 한다.
춘추오패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합려
월나라의 왕구천이다.
※제자백가 사상
춘추시대는 온갖 잡설로 혼란한 시대였다.
이시대에 나타난
예를 중시하는 유교(유가)사상, 자연을 중시하는 도가사상, 사랑을 중시하는 묵가사상,
법을 중시하는 법가사상은 동양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근본이 되는 사상들이다.
이것의 멘토들은 공자, 맹자, 장자, 노자 등의 사람들이 있다.
5.전국(戰國 )시대(B.C.403~B.C.221년)
전국이란 한자 그대로 전쟁을 하는 나라들이라는 뜻으로 한나라의 유방이 쓴
'전국戰國' 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B.C.403년 경에는 중국에 백개가 넘는 나라들이 생겨나서 각국 별로 전쟁과 혼란이
심한 시대였다.
이 많은 나라들 중에서 제, 초, 진, 연, 위, 한, 조 나라가 나머지 나라들을 모두 점령하여
'전국 7웅'이 되었다.
이 시기엔 유세객(遊說客)이라고 하여 재능이 있는 선비들이 중원에 흩어져 있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세치혀로 제후들을 설득하여 제후 바로 밑 자리에 있는 책사 역할을 하면서
나라들을 쥐락펴락하였다.
또 중국에서 중원이란, 넓은 들판의 중앙에서 중국의 황허강 중류의 남부 지역으로
중국의 중심부나 중국 땅의 경쟁하는 곳, 또는 정권을 다투는 무대를 말한다.
7.진나라(B.C.221~B.C.206년)
위 어지러운 중국을 최초 통일 국가로 완성한 '진 시황제'가 이룬 업적이
진나라이다.
그는 통일 후에 옛 전설 속의 어진 3황 5제에서 따온 '누런임금'이라는 뜻의
'황제'로 호칭을 바꾸고 자신이 최초의 황제라는 뜻으로 '시황제'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황제라는 단어는 중국의 모든 왕조에서 임금을 부르는 정식 호칭이 된 것이다.
(진나라의 36군)
주나라의 제후국 중에 하나였던 진나라는 '법가사상'을 채택하여 엄격한 법을
시행하였고,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강한 군사력을 키워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으며,
왕족출신이라고 할찌라도 전쟁에서 패하면 특권을 빼앗아 전쟁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하도록 유도하였다.
또 진시황제는 글자를 '한자'로 통일 하였고, 표준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70만명의 죄수들을 동원하여 지하 깊숙히 자신의 묘인 '진시황릉'을 만들었다.
또 기존에 있던 역사관과 법가사상 외의 사상들은 단절시키기 위하여 기존의
유가사상, 묵가사상, 도가사상의 서적들을 모두 모아 불태워 버리고,
당대의 유학자들을 모두 잡아 죽여버리는 '분서갱유' 를 일으켰다.
분서갱유의 원인은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된 어느 날,
함양궁의 박사인 순우월이라는 사람이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다고 생각해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
비방하는 선비들이 있다며,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복서, 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라는 충언을 하였다.
이에 시황제가 그대로 따라 분서갱유를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분서(焚書)'란 한자 그대로 불사를 '분'에 글 '서'자이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책은 대나무로 만든 '죽간'에 쓰여 있어
복원할 수 없이 사라진 희귀한 책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진시황제는 북쪽의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이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하였다.
이외 10년을 공사한 '아방궁'도 있었지만 항우가 불질러 없애버렸다.
진나라는 진시황릉, 아방궁, 만리장성을 쌓는데 백성들의 노역과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이 백성들의 한계선을 넘게 했고,
시황제가 죽자 농민들의 원성이 폭발하여 마침내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진시황제 사후, 아들 호해가 왕위에 올랐으나 사치로 인하여 내시였던 조고에
의해 멸망당했고, 진나라는 15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 한나라 (B.C.206~ A.D220년 )
진나라 시황제가 사망한 후에 혼란에 빠진 진나라에서 장수였던 '유방'이 세운 나라이다.
유방은 유교를 국교화하였고,
제 7대 왕, 한무제가 해외 원정을 펼쳐 B.C.111년 '베트남 북부'를 속국으로 만들어
약 1000년 간, A.D.939년까지 중국이 다스렸다.
또한 만주를 정벌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흰두국시 산맥을 점령하여 '실크로드'도 처음으로 개척하였다.
B.C.108년에 우리나라의 고조선을 멸망시킨 나라가 바로 이 한나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나라는 골치아픈 흉노족까지 정벌하였다.
한나라의 '사마천'은 130권의 역사서인『사기』를 펴냈고,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였으며,
'불교'를 도입하였다.
이후 한나라는 외척과 환관들의 권력투쟁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중국에는 신나라→ 후한→ 위,촉,오의 삼국시대→ 위·진 남북조시대→ 수→ 당
→ 송, 요, 5대10국, 금→ 원(몽골)→ 명→ 청→ 중국공산당이 세워진다.
9. 고대 중국의 희생제
희생제 내용은 네이버백과에서 퍼오겠습니다.
고대 중국의 희생제의
고대 중국에서 희생제의가 널리 행해졌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중국 문자인
한자의 근간이 되는 갑골문만 보더라도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제사(祭祀)의 제(祭)는 갑골문에서 손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쥐고 있는 모습에 보일 시(示)가 첨가된 것이다.
1) 글자의 형태에서는 도살된 제물(동물)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이 연상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희생제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종교라는 말의 종(宗)을 비롯하여 신(神)·축(祝)·사(社)·사(祀)·조(祖)·복(福) 등의 종교와 관련된 말들에는 거의 어김없이 보일 시(示) 자가 들어가는데,
그 말은 제단(丁) 위에 올려놓은 제물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기도
한다.2) 이것 또한 희생제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3)
고대 중국에서는 희생제의를 드리는 시기와 장소 혹은 희생제물 등을 정하기 위해 점(占)을 치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때에도 많은 동물이 희생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갑골은 문자 그대로 거북의 등과 소뼈(특히 어깨뼈)인데, 그것은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다.
갑골에 점을 치는 내용을 적은 다음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놓으면 균열이 생기고 그것을
보고 점을 친 것이다.
그 균열을 형상화한 글자가 점 복(卜)자이고, 그것을 해석한 것이 점(占)이다.
이와 같이 점을 치기 위해서라도 거북과 소를 도살해야 했다.
점을 치는 것 자체가 희생제의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에서 동물 희생제의가
고대 중국에서 매우 빈번하게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던 희생제의의 형식과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요순(堯舜) 시대에 이미 조상에게 황소를 제물로 바친 기록이 있는데, 그 방식은 이렇다.
4) 먼저 제물의 머리카락에서 귀 뒷부분을 잘라낸 후 도살했고, 몸의 지방질을 뜯어내어 태웠으며, 고기들을 잘게 잘라 요리를 하여 접시에 담아 제단에 놓았다.
이러한 과정으로 진행되는 희생제의에서는 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었고, 네 발이나 꼬리 등의 몸 일부를 절단(각을 뜨는)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더 심각한 폭력적 장면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소가 가장 중요한 희생제물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등급의 소가 선별되었다.
도살된 소를 통째로 불에 사르는 번제도 널리 행해졌다.
신정국가를 이룬 은나라(후에 상나라로 바뀜) 시대부터 상제(上帝)와 여러 천계의 신,
조상신, 자연신 등의 많은 초월적 존재들이 제사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로서의 희생제의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거행되었다.
대체로 소, 염소, 돼지가 주된 희생제물이 되었고, 개나 새가 제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까지 희생제물로 바친 기록도 있다.
5) 상나라의 통치자들이 신들에게 희생제의를 드리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통치에는 소홀하였고 결국 망하고 말았다는 기록에서도 희생제의가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 중국에서는 동물을 도살하여 제물로 삼는 희생제의가 국가의 중심적 종교 의례였고, 가정이나 마을에서도 희생제의를 주기적으로 거행했으며, 희생제의를 근간으로 한 사회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중국의 희생제의 (성스러움과 폭력, 2003. 9. 30.,
㈜살림출판사)
첫댓글 이 글은 중국이 왜 남중국해를 장악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글입니다.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 만큼이나 자원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인구가 너무 많아서 자원 부양 능력이 딸립니다.
그래서....
남 중국해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시진핑과 김정은이는 똥배짱이 두둑합니다.
머리도 보통 머리가 아니고....
게다가 트럼프도 대차고 보통 스케일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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