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여자의 조건 ........................................................ 마광수
나는 ‘야한 사람’은 ‘야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야한 사람을 ‘야인
(野人)’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야인은 ‘문명인(文明人)’과 대비된다. 문명인이 이기적
명예욕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차 윤리적 명분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야인은 스스로
의 본성에 충실한 자연아(自然兒)를 가리킨다.
중국의 경우라면 문명인의 대표적 인물로 공자나 맹자를 꼽을 수 있고, 야인의 대표적 인
물로 장자나 양주(楊朱)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가장 야인다웠던 여성으로
기생 황진이를 꼽을 수 있다. 그 반대쪽에 서는 여성은 아마 신사임당쯤 될 것이다. 어쨌
든 나는 남자든 여자든 관능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을 일단 ‘야한 사람’으로 간
주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야한 여자’의 첫째가는 조건은 우선 ‘야한 마음’이다. 흔히들 ‘야한
여자’를 ‘화장을 덕지덕지 많이 한 여자’, ‘퇴폐적으로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여자’ 등으로
보고 있는데, 그런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만 야한 여자’를 가리키고 있어 충분
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마음이 야하면 겉도 야해진다. 그러나 ‘진짜 야한
여자’가 되려면 겉과 속이 다 야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겉만 야한 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서는, 겉만 야한 여자가 마치 ‘진짜 야한 여자’처럼 보여 속아넘어가
기 쉽다 (나도 많이 속았다).
마음이 야하다는 것은 본능에 솔직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신주의자가 아니라 육체주의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본능은 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식욕과 성
욕이 우리가 살아가는 원초적 이유이며 우리의 실존 그 자체가 된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성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에 대한 욕구나 희망 없이는
식욕조차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에 찌들어 지내거나 상사병에 걸렸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식욕의 감퇴’이다. 그리고 ‘사랑’은 ‘성적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야한 마음을 가진 여자는 성적 욕구에 솔직한 여자이고, 성적 욕구에 솔직하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에도 솔직해진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성에게서 사랑받고 싶
고, 이성의 눈에 쉽게 띄고 싶고, 이성에게 ‘섹스 어필’하고 싶은 욕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고상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섹시하냐 못하냐로 결정될 뿐이다.
그래서 ‘야한 여자’는 섹시한 여자이고 스스로를 섹시하게 꾸미는 데 당당한 여자다. 남이
뭐라고 하든 화려하게 몸치장을 하고 (‘화려한 몸치장’을 ‘사치스런 몸치장’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선정적인 이미지로 자기 자신을 가꿔나가는 여자다.
예컨대 입술에 항상 립스틱을 바르거나 머리를 아주 길게 기르는 여자는 ‘야한 여자’다.
그럴 경우 입술이나 머리의 색깔은 분홍색이나 갈색 같은 ‘고운’ 빛깔이 아니라, 새빨간색
이나 노란색같이 ‘튀는’ 느낌을 주어 관능적 열정을 유발시키는 빛깔이어야 한다. 노출이
많은 옷을 즐겨 입는 여자도 ‘야한 여자’다. 비싼 보석 장신구가 아니라 싸지만 그로테스
크한 디자인으로 된 장신구를 좋아하는 여자도 ‘야한 여자’다. 그리고 살갗접촉에 용감한
여자 또한 ‘야한 여자’다.
그렇다면 마음이 진실로 야해져서 그것이 겉으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떤 심리적 메
커니즘에 의해서일까? 나는 ‘야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고, 그런 마음을 ‘관능적 아름다움의
적극적 창조’로까지 발전시켜, 아름다운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근본적 심리기
제(心理機制)가 ‘자기애(自己愛 :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많은 심리학자들은 나르시시즘을 일종의 변태심리로 보아, 이성과의 성적 접촉
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할 때 할 수 없이 대용품으로 이용하게 되는 ‘변칙적 성애’ 정도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르시시즘을 좀 더 폭넓게 수용하여, ‘자기 자신의 주체적 자아가 확보되
어 스스로의 굳건한 가치관을 갖게 됐을 때 맛보게 되는 기쁨’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저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르시시즘이다. 남이 뭐라고 하든
저 잘난 맛에 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삶과 독창적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한 여자는 ‘자신을 미적(美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여자다. 말하자면 누구
를 위해서 화장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하는 여자는 야한 여자가 아니
다. 스스로 제멋에 겨워 화장하고 몸을 꾸미는 여자, 그런 여자는 애인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굳이 화장의 예를 들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때, 상대방을 소유하는 즐거
움보다 나르시시즘을 맛보는 즐거움에 취할 수 있는 여자 (또는 남자)는 야한 여자 (또는
남자)다. 그런 사람은 애인이 떠나가도 별로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관능적 나르시시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