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푸른 구도求道 그 끝에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월산 두 성인 성도기成道記.
백월산 白月山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신라 구사군,
요즘 창원 북쪽에 있는 백월산 부등곡無等谷에 들어갔다.
그들은 저마다 북쪽과 남쪽 다른 암자에 살면서 미래 부처인 미륵불을
열심히 섬겼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예경하면서 정토왕생을 염원했다.
3년째 되던 어느 봄날 저녁, 나이가 스물쯤 되어 보이는 자태가 아름다운
낭자가 달달박박을 찾아와 하룻밥 자고 가기를 청하며 시 한 수를 읊는다.
날 저문 산중에 갈 길은 아득하고
길 잃고 인가가 머니 어찌하리오.
오늘 밤 이곳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하신 스님은 화내지 마세요.
하지만 박박은 차갑게 거절한다.
"수도하는 곳은 청정해야 하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지체하지 말고 어서 더떠나시오."
하고는 인정사정없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
거절을 당한 낭자는 노힐부득을 찾아가 하룻밤 묵어가기를 부탁한다.
부득을 갑작스런 여인 출현에 놀라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 밤에 어디서 오는 길이오?"
여인은 시 한 수를 지어 바친다.
첩첩산중에 날은 저문데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소
송죽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시냇물 소리는 더욱 차갑소
길을 잃어 찾아왔다 마시오
바른 법 일러주러 왔으니
부디 내 청을 들어주시고
길손이 누군지 묻지 마세요.
이 말을 들은 부득은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인과 함께 밤을 새울 곳이 아니오만, 깊은 산골짝에
밤이 어두웠으니 문전박대할 수가 없구려. 중생을 살피는 일이
보살행 가운데 하나이니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밤이 깊도록 부득은 자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염불하기를 쉬지않았다.
새벽이 될 무렵 낭자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부득을 물렀다.
"갑자기 산기가 있으니 죄송하지만 스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부득은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을 가엾이 여겨 촛불을 들고 시키는 대로 거두어
주었다. 여인은 해산을 마치자 이번에는 물을 데워 목욕시켜달라고 했다.
부득은 민망스러움과 두려움이 엇갈렸지만, 산모에 대한 연민이 생겨
목욕할 통을 가져다가 물을 데워서 목욕까지 시켜주었다.
이때 문득 통 속 물에서 향기가 진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 여인은 말했했다.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십시오."
부득은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금빛으로 변했다.목욕통 곁에
전에 없던 연화대蓮花臺가 있었는데 여인은 부득에게 거기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세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스님 뜻이 갸륵함을 보고 대보리大菩提를 이룬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여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날이 밝자 박박은 지난밤 일을 궁금해하며
"지난밤 부득이 반드시 계를 어겼을 터이니 내 가서 실컷 비웃어 주리라"
부득을 찾아온다. 하지만 연화대에 앉아 미륵불이 되어
광채를 발하고 있는 부득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는,
"나는 마음이 막혀서 부처님을 만나고도 예우를 하지 못했구려. 큰 덕이 있는
어진 스님이 나보다 먼저 성불했으니, 부디 지난 교분을 잊지 말고 도와주시오.
자신도 제도해줄 것을 간청한다.
박박은 부득 말에 따라 통 속에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을 하니 소원대로 아미타불이 되어 함게 구름을 타고 가버린다.
이 이야기를 법정 스님은 이렇게 풀어내신다.
"수행자는 구도형과 봉사형 두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여기 달달박박은 서슬이 푸른 구도형이고 노힐부득은 온유한 봉사형이다.
봉사형 수행자가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봉사가
있기까지 투철한 자기 질서 안에서 거듭 태어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탐구〔智〕와 사랑〔悲〕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지혜가 없는
자비는 맹목이기 쉽고, 사랑이 없는 지혜 또한 메마른 관념에 빠지기 쉽다.
내게 밤늦게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가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를 가차없이 쫓아버리겠다.
예절을 모르는 보살과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내 질서, 투철한 내 삶 질서이기 때문이다."
실제 비오는 어느 날 대숲을 스치는 바람이 귀신소리처럼 들려
무서움에 질린 여인이 법정 스님처소를 두드렸다.
그때 스님은 그 여인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기도를 하시오."
하고는 냉정하게 그 자리에서 여인을 돌려 세우셨다.
아직도 법정 스님은 여인이 한밤중에 찾아온다면,
투철한 삶, 질서를 내세워 가차없이 쫓아버리려 하실까?
숨결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