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다 요리를 먼저 배웠던 시골 아이
강레오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크게 짓는 집안이라 일꾼들도 많아서 하루 세 끼를 늘 잔칫상처럼 차리곤 했지요. 어린 강레오는 자연스럽게 요리와 친해졌습니다. 특히 할머니에게 만두 만드는 걸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만들었고 칭찬도 곧잘 받았지요. 그리고 중3이 되던 날, 문득 '이제 난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떠올렸을 때, 그가 떠올린 직업도 역시 요리였다고.
부모님의 반대는 심했지만, 강레오는 고1 때 요리학원을 등록해 자격증을 땄습니다. 고2 때 일을 시작했고, 고3 때는 5성급 호텔에서 고기 손질을 하게 되었죠. 열심히하다보니 닭 한마리를 17~18초 안에 손질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스무 살, 6백만 원 들고 런던으로 떠나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여기서 계속 있으면 평생 고기 손질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당시 수석 요리사로 일하던 유학파 출신들은 '때깔'부터가 달랐지요. 그들이 부러웠던 강레오는 군대를 다녀온 뒤 런던으로 뜨길 결심합니다. 이때가 1997년, 그의 나이 스물 두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요리로 유명한 이탈리아나 프랑스가 아니라 왜 하필 영국이었을까? 그 이유도 참 재밌습니다. 단순히 영어는 알파벳이라도 알기 때문에 간 거라고. (피쉬앤칩스가 좋아서는 아니고...)
강레오는 지금까지 번 6백만 원을 들고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었지요. 두달 지나자 돈이 금방 떨어지더랍니다. 안되겠다 싶어 일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인터넷도 안되던 시절이라 하루 30군데의 식당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영어도 못하는 작은 동양인을 받아줄 식당은 없었지요.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낮에는 샌드위치 가게, 저녁에는 프랑스 요리집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한 작은 동양인의 영국체류기가 시작된 것이죠.
그렇게 몇 달을 열심히 일하자 어느날 셰프가 물어보더랍니다.
"레오, 너 근데 영국에 왜 왔니?"
"저는 영국 최고의 요리사에게 배우기 위해 왔어요."
"그래? 그럼 내 친구 셰프 소개시켜줄게 그리로 가봐."
전설적인 천재 요리사, 피에르 코프만의 제자가 되다
영국 최고의 요리사, 피에르 코프만
그렇게 성실함을 인정받은 강레오는 몇군데 소개받아 옮겨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전설적인 셰프 피에르 코프만 밑에 들어가게 되었죠. 피에르 코프만은 22년간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세 개나 만들어내면서 단 한 번도 별을 잃지 않았던 전설적인 요리사입니다. 또한 주방에선 악명높은 카리스마로 유명했습니다. 강레오는 감격적인 출근을 했지만 3일 만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맵고 짠 음식에 익숙한 한국사람은 미세한 맛을 느낄 수 없다. 너 나오지 마라."
라고 피엘 코프만이 말한 것이죠. 강레오는 좌절했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셰프는 없다는 걸 안 이상 이곳이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막무가내식으로 무보수로 출근한다고 했죠. 그렇게 한달 동안 청소만 했는데도, 코프만은 쓰레기통 차듯 발로 차면서 '왜 여기있냐?'하고 지나갔다고. 두달 째 되던 날 '이제 그만 나와'라면서 차비 정도 챙겨줬지만, 세달 째 되는 날 드디어 첫 월급을 받게 됩니다. 강레오의 포지션까지 주게 되었죠. 이제 강레오는 최고의 셰프 밑에서 수양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몸살에 걸리자 배를 후려갈긴 셰프, 주방에서의 수난
강레오가 주방에서 겪은 시련은 혹독합니다. 재밌는 일화들이 많지요.
강레오는 최고의 셰프들을 거쳐갔는데, 보통 그런 셰프들은 포악하기로 유명합니다. 팬을 치우라고 했는데 깜박하고 안치우면 기름이 든 팬을 던지는가 하면, 초코릿무스를 잘 못 만들었다며 달걀 한판을 머리에 던지기도 합니다. 하나씩 말이죠. 그의 스승 피엘 코르만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강레오가 독감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고 고열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죠. 피엘 코프만이 다가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감기에 걸려 그렇다고 하자, 코프만은 어깨를 쭉 피라고 하더니, 주먹으로 강레오의 배를 세차게 후려 갈겼습니다. 숨이 막히고 하늘이 노래졌죠. 그러더니 하는 말이,
"주먹이 아파? 몸살이 아파?"
"주먹이 더 아픕니다!"
"그럼 죽을 병은 아니니까 뛰어!"
악명 높은 피에르 코프만
또 한번은 서비스 15분 전, 열심히 냉장고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는데, 피엘 코프만이 아직 다 안되었냐고 묻더랍니다. 네, 아직 다 안되었고 빨리 끝내겠다고 했죠. 코프만은 지하에 가서 생선 한 마리를 가져오라고 했고, 강레오가 생선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올라와서 보니 4L짜리 기름통이 엎어진 채로 냉장고에 처박혀 있었죠. 5분이 남았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오더는 물밀 듯이 들어오고, 요리는 만들어야 하고, 냉장고까지 치우려고 하니 정신이 없었죠. 그리고 옆을 보니 피엘 코프만이 다리를 까닥이며 보고 있더랍니다. 코프만이 엎은 것이죠. 일은 미리미리 하라는 냉혹한 교훈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루 18~20시간을 일하던 강레오는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하루는 새벽 1시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오늘은 정말 일을 열심히 했다'는 생각해 맥주 한 캔을 땄습니다. 그리고는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갑자기 알람이 울리더랍니다. 벌써 아침이 된 것이죠. 맥주는 캔만 따져있는 채로 그대로 있었다고.
작은 동양인, 어떻게 수석 요리사가 되었을까?
이렇게 힘든 유럽의 요리 바닥에서 어떻게 동양인이 수석 요리사가 되었을까?
고든 램지 셰프 밑에서 일할 때의 에피소드인데, 방법은 의외로 단순무식했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두 시간 더 일찍 나오고 두 시간 더 늦게 퇴근한 것. 원래 고기 요리를 하는 것이 주방에선 최고의 지위인데, 유럽 주방에서는 동양인에게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생선이나 야채요리를 시켰죠. 그래서 강레오는 두 시간 일찍 나와 자신의 일을 끝내놓고 남의 일들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기 파트에 가서 도와주고, 또 끝나고는 디저트 파트에 가서 도와주고, 그렇게 모든 섹션의 요리를 조금씩 도와주다 보니 모든 요리를 할 줄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디저트를 담당하는 요리사가 도망을 갔습니다. 비상이 걸렸죠. 오더는 들어오는데 아무도 디저트를 만들 줄 몰랐으니까요. 그때 강레오가 나섰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완벽한 디저트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모습에 놀란 고든 램지는 나중에 은글슬쩍 물어봤습니다.
"너 그럼 이건 할 줄 아니? 저건 할 줄 아니?",
"네, 다 할 줄 알아요."
"그래? 그럼 넌 가운데 서서 애들을 도와줘라."
그렇게 고든 램지의 부주방장이 된 것입니다. 이후 강레오는 피에르 코프판의 유일한 한국인 수제자, 장조지, 두바이 고든 램지 레스토랑의 수셰프로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이제는 한국의 맛을 세계로 알리는 강레오
최고의 요리사 밑에서 배운 강레오는 스승들의 음식을 똑같이 만들 수도 있을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분들의 좋은 제자로 만족할 게 아니라, 이제부터 내 스스로가 ‘나에게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말이지요.
7년 전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프렌치 레스토랑을 차린다고 하자 업계가 뒤숭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태원의 레스토랑 <마카로니 마켓>인데, 지금은 셰프 자리를 놓고 나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음식연구원에서 한국의 맛을 배우고, 정여창 선생의 5백55년 제사 음식도 전수 받았습니다. 지금은 작년에는 비비고(bibigo)의 런던 1호점을 도맡아 진출시켰으며, 2012년 여름에는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면서, 훈남 스타 셰프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죠.
"인생에 속성코스는 없습니다. 저는 나이 80을 넘어서도 이 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싶습니다. 원하는 일이라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평생 할 일이니까요. 자기가 일단 소질이 있고, 내가 평생을 행복해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그 일을 평생 즐기면서 하다보면, 굳이 성공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