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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함
슥 10:1-7
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2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슥 10:1-7 / [주님만이 양식을 주신다] 봄부터 가물어서 늦은 비밖에 기대할 수 없거든 여호와께 비를 내려 달라고 빌어라! 먹구름을 몰아다가 번갯불을 일으키며 큰비를 내리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도록 들녘에서 곡식을 키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 비가 오지 않는다고 점쟁이들을 찾아가서 물어 보고 기우제나 지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사람들은 너희들을 속이고 허황한 위로를 팔아먹는다. 바로 너희 조상들이 그런 짓을 하였기 때문에, 목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강도와 맹수들에게 쫓기고 잡혀 죽는 양 떼같이 되었다. 3) [해방 전쟁과 귀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탄압하는 모든 목자들에게 내가 이제 분노를 폭발하고, 양 떼를 해치고 돌아다니는 힘센 염소들을 잡아죽이겠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양 떼인 유다 백성을 찾아와 돌보시고 그들을 자기의 군마들처럼 강하게 키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들 중에서 정치 지도자가 나오고, 그들 중에서 군대의 지휘관이 나오고, 민족의 집권자가 모두 이 백성에게서 나올 것이다. 5) 이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강한 용사들이 되어 모든 적들의 얼굴을 밟아 길바닥의 먼지 속에 으깨어 놓을 것이다. 그들이 싸울 때에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사기 충천한 적의 기마병들도 이 전쟁에서는 수치만 당하고 말 것이다. 6) 내가 유다 백성을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도 해방시켜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내가 그들을 버린 적이 없었던 것과 같이 된 것이다. 나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요, 그들의 호소를 들어줄 작정이기 때문이다. 7) 그때에는 에브라임 백성이 용사들처럼 강해지고,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기쁠 것이다. 이런 일을 보는 그들의 자녀들도 기뻐서 환호성을 올릴 것이고, 기뻐 뛰는 마음으로 그들의 하나님 나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을 구체적으로 증거합니다. 회복의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우리 인생에 참된 회복과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1) 우리에게 비를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밭의 소산을 거두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시절에 맞추어 봄비 때에 번개를 내고 비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때에 맞는 은혜의 비를 주시도록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흡족한 비를 내려서 날마다 마르지 않는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은혜의 소낙비를 각 사람에게 주셔서 밭의 채소가 자라듯 우리도 살게 하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목자가 없으므로(2-3)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진정한 목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돌아보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 찾았던 목자는 고대근동에서 집안의 수호신으로 섬겼던 드라빔이었고, 우상과 복술자를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숫염소 같은 지도자들을 벌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주시겠다 하십니다. 양은 목자 곁에 있어야 안전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시대에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는 예수의 음성에 집중하고 신앙의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용사같이 하신다(4-7) 회복과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회개입니다. 주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주님께서 백성들은 구원해 내시고 지키십니다. 단 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갈 때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백성, 그분의 양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그들을 용사처럼 날쌔게 하시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적용: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주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의 본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겼던 이유는 자신의 기준에 맞춰 예배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야 합니다.
< 설 교 >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주리라
슥 10:1-12 /강문호 목사
2009년도 새 해가 밝았습니다. 해는 밝았지만 그리 희망이 넘치게 맞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 해 첫 말씀을 축복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는 두 계절이 있습니다.
겨울과 봄입니다. 여름과 가을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내가 예루살렘 골통품 가게에 있었습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와 비를 맞으며 비가 온다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 때에는 온 대지에 푸른 풀이라고는 단 포기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온통 메마른 풀들뿐입니다.
우리나라와 계절이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봄에 씨를 뿌려서 가을에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겨울이 시작되면서 비가 오기 시작하기에 이 때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추수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에 오는 비를 성경은 이른 비라고 말하고 봄에 오는 비를 늦은 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월, 11월에 오는 비를 이른 비라고 말하고, 4월, 5월에 오는 비를 늦은 비라고 말합니다. 두 비는 곡식이 자라는 데 절대적인 비입니다.
씨를 심을 때 비가 와야 하고 추수할 때 비가 충분하여야 곡식이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충분하게 내린다는 것은 풍요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른 비 때에는 이른 비를 주시고 늦은 비가 필요할 때에는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은 봄 비 즉 늦은 비 즉 추수 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비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 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신32;2)
사막에 비가 내리면 옥토로 변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지도를 놓고 보면 그 넓은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이 사막입니다. 그 유명한 사하라 사막입니다. 사막은 낮이면 40도까지 오르고 밤이면 영하로 내려 갑니다. 매일 50도 정도의 일교차를 가지니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물이 없으니 식물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 비가 계속 내려 준다면 물이 있고 풀이 있고 동물이 생기게 됩니다.
비는 은혜입니다.
한번 은혜를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늦은 비가 내려서 은혜를 또 다지고 결실을 맺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일을 합당하게 창조하시고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봄비를 구하면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소낙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속에 들어 있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당연하여도 구하라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언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가뭄에 비가 필요하니 비를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봄비가 올 때에 비가 오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비가 오는 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것도 기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가 잠 잘 시간이면 언제나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침대 밑으로 신발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버릇을 늘 보던 어머니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매일 밤 왜 신발을 침대밑으로 던지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그래요.>
어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것과 침대밑으로 신발을 던지는 것과 무슨 관계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침마다 침대밑에서 신발을 꺼내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아침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아요.>
이렇게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이에게 하나님은 소낙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봄 비 때 비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소낙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애완견과 야생견입니다. 애완견은 주인과 함께 삽니다. 주인이 주는 것만 먹습니다. 주인의 집에서 주인과 함께 삽니다. 주인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주인곁에서 삽니다. 그러나 야생견은 자기 멋대로입니다. 소위 똥개입니다. 아무 것이나 먹습니다. 아무 데나 다닙니다. 아무렇게나 짓어 댑니다. 그런데 애완견은 13년을 살고 야생견은 7년밖에 못 산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의지하고 시키는 대로 사는 이는 오래 살고 축복을 받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볼드윈이 194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그를 향하여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는 그런 군중앞에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나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기 전에 나를 위하여 그리고 제국을 위하여 먼저 기도하여 주십시오.>
아무리 잘 났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형통하지 못 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야 무엇이나 가능합니다.
평범한 것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봄비가 내릴 때이지만 기도하여야 합니다. 당연한 것도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일년 365일 일년 내내 기도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은총을 구하라.
스가랴 선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봄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를 주시기 전에는 번개를 주시는 데 번개가 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소낙비를 주시는 이도, 채소를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봄에 비를 구하라고 하고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무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배를 타려고 항구로 갔습니다. 한 치 앞을 보지 못 하는 짙은 안개로 배들이 꼼짝 못 하고 있었습니다. 잘못 움직이다가는 배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 시간은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무디는 안개를 걷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믿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안개가 걷힐 터이니 출발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무디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밖에서 선원이 외쳤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있습니다.>
안개도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습니다. 기도하면 안개도 걷히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합니다.
로스엔젤스 빅 베어 산에서 100여명이 모임을 가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와 몇 명의 선발대가 먼저 올라가 준비하고 있는 데 폭설이 내렸습니다. 자동차들이 올라 올 수 없었습니다. 제설차로 치워도 엄청나게 내리는 눈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몇 명은 기도실에 엎드려서 그 계획이 포기되지 않도록 눈을 그치게 하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얼마 후 눈은 거짓말처럼 그치고 말았습니다.
행사를 무사히 치룰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막 쎄미나도 이제 20년이 되었습니다. 233기를 마쳤습니다. 34,950명이 수료하였습니다. 그 동안 번제 의식을 세 번 하였습니다. 우리가 번제 예식을 수양관에서 드리던 날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준비를 하였습니다. 만만의 준비를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일기 에보는 내일까지 비가 계속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이 생기고 가장 어두운 낮이었다고 기상청이 발표하였습니다. 대낮에도 가로등을 켠 모습을 뉴스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번제 예식을 하느냐고 전화는 빗발쳤습니다. 정말 결단하기 힘들었습니다. 좀 두고 보자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시간 전 전화부터는 결단을 하여야 했습니다. 장거리 전화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비를 그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 시간을 30분 정도 앞두고 빗발이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제예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그 것을 기독교 TV에서 여러 번 보도되었습니다.
일기를 주관하시는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비도, 소낙비도 번개도 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남미 볼리비아에서 카니발이 열렸습니다.
사순절을 앞두고 수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거리에는 노점들이 대목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노점 중에 미니어처를 파는 곳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무슨 물건이든지 미니로 아주 작은 모형을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노점 주인이 외쳤습니다.
<자동차를 사고 싶은 분은 미니 자동차를 사서 두고 보면서 기도하세요, 반드시 자동차를 사게 됩니다. 집을 사고 싶은 무주택자는 미니 집을 사서 두고 보면서 기도하세요. 반드시 집을 장만하게 됩니다. 모든 미니 상품들이 다 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다가 와서 물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무엇을 사야 합니까?>
상점 주인이 말했습니다.
<샌들 하나 사면 1년을 신습니다. 10년을 더 살고 싶은 분은 10개를 사세요. 100년 더 살고 싶으면 100개를 더 사시면 됩니다.>
노점 상 주인은 계속 희망을 불어 넣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넉넉히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사설 탐정이 있었습니다. 얼간이였습니다. 어떤 회사가 그를 고용하였습니다. 밤낮 졸기만 하였습니다. 크게 도둑을 맞았습니다.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곳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금은방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사설 탐정은 도둑이 또 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에는 가짜 보석을 즐비하게 진열하고 진품은 다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재를 털어 좋은 카메라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간밤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잊어 버린 것은 꼭 하나였습니다.
<카메라.>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2009년도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카잔키스(Nikos Kazantis)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펜을 붙드니 하나님이 움직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하나님의 숨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 가야 합니다.
3. 더 받을 줄 믿고 구하라.
스가랴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봄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큰 비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보니 노아의 홍수때에 큰 비가 내렸다는 창세기 7;12.8;2의 큰 비와 같은 단어입니다. 세상을 덮은 큰 비입니다.
봄비를 구하였더니 그렇게 큰 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게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비를 구하였더니 소낙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한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한 명을 구하였더니 8명을 주셨습니다.
한나도 결혼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 하여 아들을 간구하였습니다. 아들 한 명이라도 달라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한나에게 3남 2녀를 더 주셨습니다(삼상2;21) 봄비를 구한 스가랴에게 소낙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오늘 만나야 합니다.
박 정희 대령이 집권하자 말자 한 일은 경제 부흥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담당 비서관을 대표로 구성하여 선진국 순방단을 만들었습니다. 세계에 잘 사는 나라를 연구하여 우리나라에 적용시켜서 정치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순방단이 40일을 선진국을 돌고 와서 보고서를 냈습니다. 보고서를 내면서 그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얼굴색이 변하면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아! 내가 경제조사를 하라고 하였지 언제 종교 조사를 하라고 하였나?>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다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선진국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였습니다. 예수 정신으로 나라를 개척하였고 예수 정신으로 일하면서 오늘 날의 선진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풍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를 구하였더니 소낙비를 주셨습니다.
큰 교회가 부도가 나서 교인들이 다 뿔뿔히 흩어지고 할머니들만 몇 명 남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1,000여명 들어가는 교회 10명도 안 되는 할머니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쓸쓸하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토요일마다 청소를 하면서 의자를 하나 하나 닦았습니다. 한 분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두 의자면 충분 한 데 토요일마다 힘들게 왜 의자들을 다 닦습니까?>
할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교인들이 늘어나게 기도해요. 언젠가는 이 의자들이 다 찰줄 믿고 다 닦아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스가랴는 말했습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당연한 것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3. 더 많이 주실 줄 믿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봄(春)에 대한 묵상
스가랴 10:1 / 이상호 목사
문학적 소양은 부족하지만 오늘은 춘분지나 봄을 맞아서 여러분과 함께 봄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일단 '봄에 대한 묵상'이라는 제목을 잡아놓았어요. 그리고 컴퓨터로 성경에서 '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죠. 여러분, 성경에 '봄'이라는 단어가 몇 개나 나온다고 생각되십니까?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서 찾기도 아주 쉬워졌어요. 컴퓨터 성경으로 '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15개의 '봄'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구나 하고 보았더니 글쎄 그 중에 14개는 눈으로 본다는 의미의 '봄'이예요. '엿봄', '알아봄', '낯을 봄', '멀리 봄', '마주 봄', '우러러 봄', '바라봄' 이런 것들이고, 계절을 말하는 '봄'은 오늘 본문에 있는 '봄비'가 유일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여러 개의 성경 프로그램을 돌려 확인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어요. 시편을 기록한 시인들도 봄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무조건 이 구절을 오늘의 본문으로 정해놓고 묵상했어요. 성경이 유일하게 말하는 '봄'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마음에 진정한 새 봄을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봄을 영어로는 spring(봄, 샘, 태엽, 일어나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봄은 땅속의 씨앗들이 춤을 추며 올라오는 계절입니다. 봄비라도 내리고 나면, 그야말로 스프링처럼 여기저기 숨어있던 씨앗들이 땅 위로 올라옵니다. 어떤 것은 꽃부터 내어놓고, 어떤 것은 이파리부터 내어놓고, 어떤 것은 어느 날 문득 솟아오릅니다. 생긴 대로 저를 드러내는 봄. 지난겨울의 고단함을 견뎌낸 씨앗들이 펼치는 봄의 잔치 앞에서 생명의 경건함을 배우게 됩니다.
동면의 상태에서 고요하게 봄을 기다리던 씨앗과 뿌리를 통해 침묵을 배우고, 고요함의 영성을 배웁니다. 인내의 영성을 배웁니다. 침묵이나 고요함이나 인내, 이 모든 과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씨앗, 뿌리, 나뭇가지, 꽃눈.
이 모든 것은 기도하는 독방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묵상하며 명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로세로 높이 50cm의 땅속에는 약 2만 개의 씨앗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면 어찌 될까요? 그러나 그들은 한꺼번에 피어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지천으로 냉이가 있지만, 피어난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1㎡(0.3025평),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면적에는 약 100포기의 냉이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장소에서는 무려 열매는 4만 개, 씨앗의 수는 120만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120만 개의 씨앗 중에서 약 100포기만 싹을 틔운 것이지요. 그러면 나머지 씨앗들은 죽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때가 되면 피어날 것들입니다. 완전한 씨앗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때론 아주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봄마다 냉이를 캐 먹어도 냉이가 지천인 이유입니다. 기다림, 명상, 침묵, 고요함, 인내는 그들의 삶 자체입니다.
1. 봄이 오는 소리
여러분 봄을 느껴보셨습니까? 아직 꽃샘추위니 뭐니 하면서 좀 추울 때도 있지만 분명히 봄이 오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도 봄은 왔었고 작년에도 봄은 왔었습니다.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또 옵니다. 우리 모두가 겨울에는 몸을 움츠리게 되고 옷을 끼어 입게 되고 했지만 이제 봄에는 어깨를 펴고 두툼한 옷을 벗어 던지고 얇은 옷을 갈아입습니다.
봄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합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부드러워지면 씨를 뿌리고 움이 돋고 싹이 납니다.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아 냇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올라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고 병상에 있거나, 무덤 속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옆 사람과 한 번 손잡고 인사합시다. "봄이 왔어요. 우린 살아있어요" 옆에 있는 분이 살아 있는 모습 확인하셨죠?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늘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늘 오던 봄이 또 왔으니 당연하게 느껴집니까? 늘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뭐가 잘 안됐어도 괜찮습니다. 봄은 새로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희망만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괜찮습니다. 봄이 오긴 왔는데 무엇인가 시작하기 위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기대와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여러분 얼마나 얄밉고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봄’이란 ‘보다’의 명사형입니다. 무엇을 보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인간은 보려고 하는 것만 봅니다. 보려고 하는 것만 보입니다. 아무리 단풍이 곱게 들었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봄에 꽃이 피어나도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보는 눈을 잃어버렸습니까?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헛된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눈을 치유하려면 먼저 우리는 창조세계 중에서도 자연의 변화를 깊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창조세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통해서 시대의 징조를 정확히 보는 일, 시대의 징조를 보고 예언자적인 선포를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 이것이 일체의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신앙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생명이 오는 소리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고레스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져서 일부분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 활동한 선지자예요. 이미 70년 이상 포로로 살았기에 거기서 자녀를 낳고 생활의 터전을 잡았기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죠. 아무튼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만 성전을 재건하다가 중단을 하게 되어 맥이 풀리고 낙심한 상태에 있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예언한 내용이예요.
봄의 소리는 생명의 소리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셨어요. 봄이 오는 길목에서 꽃샘추위의 고통이 있듯이 주님은 소망이 없는 이 땅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거쳐야 했어요. 부활의 생명은 싸구려 은총이 아니잖아요. 적어도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안겨준 생명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너무나 이 부활의 생명을 싸구려 은총으로 맞바꾸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부활의 생명은 고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태어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당하는 고난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가슴 아파해야 할 일이지만 이 세상에 구원의 봄을 여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돌렸던 등을 다시 돌려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움츠렸던 어깨가 당당하게 펴질 거예요. 여러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의 굳어졌던 마음이 녹아지게 될 겁니다. 얼었기 때문에 흐르지 못했던 냇물이 여러분 마음속에 다시 흐르게 될 거예요. 흐르면 살아나요. 여러분 마음속에 희망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기쁨이 되살아나길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깨우치는 소리
주님은 생명의 회복을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쓰셨어요. 너무 오랫동안 태양 볕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해서 두꺼운 얼음이 된 곳은 강력한 망치로 두들겨 부셨어요. 도전과 자극을 주어서 얼음을 깨신 것이죠. 종교와 전통이라는 울타리로 가리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화 있을진저"라는 독설과 함께 그들의 폐부를 찔렀어요. 너무나 얼음이 두꺼워서 깨지 않고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지친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어요. 풀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피고, 양지 바른 곳에서 그늘진 곳으로 피어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복음을 전하셨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에게서 힘이 있고 강한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고,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해서 무조건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기쁨을 얻고 밝아진 사람들에게서 어두운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퍼져간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태양 볕의 따사로움을 느끼고 아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시는 겁니다.
봄을 맞이하여 중요한 사실은 봄(春)은 봄(見)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절을 가리키는 '봄'보다 눈으로 보는 '봄'을 더 많이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봐야 바뀌죠. 올바로 알아야 뭔가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죽어라고 좇아가 붙잡아보면 모두가 다 헛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결국 지치고 힘이 빠지고 말 것입니다.
비를 내리시고 번개를 만드시고 밭의 채소를 맺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생명이 되고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알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고 고난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이 빠져있다면 많이 가졌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많이 높아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나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여러분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역시 물질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깨지고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 아닌가요? 세상이 병들어 있는 것은 풍요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을 수 없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고 고통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여러분 마음에 봄처럼 따스함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원통함과 상처들이 햇빛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심으로 녹아내리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장이 서로 경쟁하고 서로 높아지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는 삭막한 곳이 아니라 좀 더 서로 나눌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넉넉한 삶의 현장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곳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는 곳이 되게 하시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봄에는 꽃망울이 터지면서 향기가 퍼져나가요. 이 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 문화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표창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표창을 받아보신 분 있으면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없죠? 그러나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를 효자로 표창해요. 남편을 기쁘게 한 자를 열녀라고 표창하잖아요? 임금을 기쁘게 한 자는 충신이라고 해요.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성도의 행복이 있어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겉치레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 봄에 더 이상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멈추시기 바랍니다. 곤고하고 비탄한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나그네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칙칙한 어두움과 같은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뼛속 깊이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두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온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지금도 그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맺힌 한을 그대로 키우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희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이 축복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는 그 터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봄에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면 온 누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오도록 하십시다.
봄비야, 내려라
슥 10:1-12 / 이윤재 목사
7월 첫 주일입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장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마는 싫지만 그러나 비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느 시골에 살던 한 사람이 서울로 이사와서 아파트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에 살긴 살지만 그래서 가끔 시골 생각이 나서 베란다에 닭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누가 도와줘서 닭을 잘 키우기 위해 자동장비를 갖추었습니다. 자동적으로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때가 되면 물이 나오고 때가 되면 모이가 나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닭이 울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닭집에 쫓아가서 물었습니다. “닭이 갑자기 울지를 않아요. 혹시 병든 닭을 판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묻습니다. “모이는 제대로 줍니까?” “모이요? 자동적으로 나와요”. “물은 제대로 줍니까?” “물도 자동적으로 나오지요”. “온도는요?” “온도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닭이 할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주인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울지 않지”. “아니, 그러니까 울지 않다니요? 안 우는 닭이 있다는 말입니까? 혹시 안 우는 닭을 판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주인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닭이 무엇이 아쉬워서 울겠습니까? 물도 모이도 온도도 습도도 자동적으로 주는 데, 닭이 부족한 것이 없는 데, 무엇이 아쉬어 울겠습니까?”.
닭이 우는 것은 아쉬운 것이 있어서 운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으면 울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결핍의 문제입니다. 없으니까 채웁니다. 목마름의 문제입니다. 목마르기 때문에 마십니다. 목마름은 고통스럽지만 목마름 때문에 샘을 찾는 것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차가 멈추지만 기름이 없기 때문에 주유소로 갑니다. 결핍은 고갈을 낳고 고갈은 갈망을 낳습니다. 그래서 결핍은 자주 축복입니다. 성경이 인간 존재를 “비” 혹은 “물”로 자주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가4:15절입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솔로몬이 그가 사랑했던 슐라미 여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와의 사랑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의 시내입니다. 반면 민수기는 다릅니다. 민21:17,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민21장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쓴 것입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 사는 백성의 소원은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물아, 솟아나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 우묾물이 솟아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이 인간을 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은 물이 있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가랴는 또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 물에 관한 환상입니다. 1절입니다. 슥10: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여기에 “봄비”가 나옵니다. 저는 “봄비”가 노래 제목이나 시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여기에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옛날 “봄비”라는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나를 울려 주는 봄비 엔제까지 내리려나? 봄비”, 이런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이 노래를 봄비를 연인과의 사랑의 관계로 다루고 있습니다. “봄비”를 주제로 한 시도 참 많습니다. “봄비”를 주제한 시는 대략 두 종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겨울을 이기고 나온 승리의 메시지입니다. 노천명이 쓴 “봄비”가 이런 메시지입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봄비는 긴 겨울을 이기고 내립니다. 그래서 봄비는 겨울을 이기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또 하나의 메시지는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수복이라는 시인이 쓴 “봄비”가 그 시입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봄비가 내리면 생명이 돋아나고 새들이 웁니다. 고난의 때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가 본 “봄비”는 어떤 봄비일까요? 다시 1절을 보겠습니다. 슥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이 말씀을 더 쉬운 <새번역>으로 보았습니다. 슥10:1, ”너희는 봄철에 비를 내려 달라고 주님께 빌어라. 비구름을 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소나기를 주시며, 각 사람에게 밭의 채소를 주신다“(새번역). 조금 더 쉽습니다. 봄비는 먼저 비구름가 일어야 내립니다. 그런데 그 비구름을 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비를 달라고 빌라고 스가랴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말한 “봄비”는 단순히 계절의 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의 비입니다. 구름을 일게 하시고 비를 내리게 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의 70년 바벨론포로는 계절로 하면 겨울이었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노래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눈물어린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나긴 겨울 지나고 지금은 봄입니다. 봄은 만사가 회복되는 계절입니다.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 봄비입니다. 봄비가 내리면 얼어붙은 땅이 풀리고 땅에 심은 채소도 새 순을 돋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다시 소생합니다.
회복의 봄비
그래서 스가랴의 봄비는 “회복”의 봄비입니다. 우리로 보면 “봄비”는 겨울로 부터의 회복이지만, 이스라엘로 보면 “여름”으로 부터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은 3월부터 10월까지 긴 여름이 계속됩니다. 이 때는 정말 비가 한 방울도 안 옵니다. 그러다가 11월, 우리로 말하면 추수감사절, 이스라엘로 말하면 초막절이 되면 하늘에 구름이 끼고 지중해로부터 바람이 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른비입니다. 이른비는 긴 여름 더위를 식혀주고 그동안 메말랐던 땅을 부드럽게 하여 곡식 심을 준비를 합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름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비가 내입니다. “어둔 밤 지나면 새 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 날이 밝아오네”. 아멘. 반드시 여름은 지나갑니다. 그리고 봄이 옵니다. 이것이 이른비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는 아직 남았습니다. 12월부터 2월까지 본격적인 비가 내립니다.. 이 비를 “큰 비”, “소낙비”라고 부르는 데 이때 가장 많은 비가 내립니다. 이스라엘 비의 80%는 이 때 내립니다. 적은 지역은 200미리, 많은 지역은 700미리까지 내립니다. 폭풍우를 동반한 비가 이 때 내립니다. 전11:3에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할 때 “비”가 이 비입니다. 마7:26-27에서 “비가 오고 창수가 내려 모래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리라” 할 때 비가 이 비입니다. 남쪽 광야로 가면 이때 내린 물이 북정물이 되어 와디를 따라 쏜살같이 지중해로 흘러 갑니다. 이 장면이 시126:4절에 나옵니다. “여호아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시내들같이 돌려 보내소서”. 남방시내는 겨울이 폭우가 쏟아지는 네게브 광야를 말합니다. 이때 내린 빗물이 쏜살같이 흐르듯이 아직도 포로잡혀 있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신속하게 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가면 여기 저기 웅덩이가 있는 데 옛날 사람들이 빗물을 모은 물탱크입니다. (사진). 광야에도 있고 산에도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이 웅덩이 중 하나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3월이 되면 큰 비는 그치고 마지막으로 조금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그치면 10월까지는 비 한방울도 오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비입니다. 3월경에 내립니다. 이 비를 성경은 “늦은 비”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른비(가을비) 소낙비(겨울비) 늦은 비(봄비)
10-11월 12-2월 3-4월
씨(파종) 성장 열매
이른비는 10-11월, 우리로 말하면 가을비입니다. 이 비가 오면 땅이 부드러워져 씨를 뿌립니다. 12-2월에 본격적인 겨울비가 내립니다. 큰비요, 소낙비입니다. 이 비로 뿌린 식물들이 쑥 쑥 자랍니다. 마지막 3월에 늦은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바로 봄비입니다. 이미 자라고 있는 식물에 마지막 비를 부어 열매맺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도표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스라엘 비는 다만 계절의 비가 아니라 우리를 일생 신앙으로 자라가게 하는 은총의 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른비로 씨를 뿌리고 소낙비로 자라서 늦은 비로 거두는 이스라엘의 비는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가시는 은총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요? “구원은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친 은혜의 과정입니다”. 이른비로 구원의 씨가 떨어져 소낙비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다가 늦은 비로 열매맺어 구원이 완성되어 하늘 곳간에 추수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과정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달려 있습니다. 씨뿌리는 것도 자라는 것도 열매맺는 것도, 구원받는 것도, 성화되는 것도, 예수님을 닮고 자녀답게 하는 것도, 모든 것이 하늘의 비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Salvation is not the event, but process”. 구원은 이벤트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나마 죽을 때ㅏ지 이어지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1절 보겠습니다. 슥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비“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 소낙비입니다. “무리에게”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 “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비”가 아니라 “소낙비”를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낙비는 12월에서 2월까지 내리는 세찬 겨울비입니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는 무서운 비고, 네게브 사막을 적시며 흐르는 엄청난 물입니다. 일년중 80%가 내리는 겨울비입니다. 우리가 비를 달라고 기도만 하면 하늘을 여시고 “소낙비”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고 우리의 기도보다 크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엡3:20,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하 하실 분”임을 믿습니까?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훨씬 크게 우리를 일으키실 것을 믿습니까? 마7: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대로 주시지 좋은 것으로 주신 분입니다. 구하는 것과 좋은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보다 크십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회복은 다시 일어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낙비같은 은혜를 주셔서 어떻게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까? 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하나님이 봄비를 내려 회복시키시는 회복의 긴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우선 전제가 있습니다. 먼저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2절입니다. 슥10:2,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회복은 그릇을 깨끗이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에 채우시나요? 탈무드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사용하시나요? 큰 그릇? 예쁜 그릇? 깨끗한 그릇? 답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에 채우시나요? 큰 그릇? 예쁜 그릇? 빈 그릇? 빈 그릇에 채우십니다. 아무리 채우고 싶어도 더러운 그릇에 채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전 520년, 바벨론에서 돌아온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아름답게 짓고 새출발하면서 스가랴를 통해 진정한 회복을 위해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상으로부터 돌아서라, 드라빔, 복술, 거짓꿈, 이런 것들은 아음다운 성전을 짓고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실상이었습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짓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우상을 떠나지 않았는 데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고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섬기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상”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립니다.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는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우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우상입니다. 겔14:3은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했습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은 우상공장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 대용품”, “짝퉁 하나님”으로 모시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살겠다”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인간과 우상은 세 가지 관계를 가집니다. 첫째 우상을 사모하고, 둘째 우상을 섬기다가, 마지막에 우상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이 우상들과 결별해야 합니다(가사).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예배는 일주일에 한번 내 마음을 가다듬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내가 섬겼던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내 주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은 물질입니다. 물질이 우상이 되면 물질은 나쁜 주인이 되어 나를 망하게 합니다. 물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사용의 대상입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누구나 이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너무 사랑해서 하나님도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우리가 키우는 것보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키우면 훨씬 잘 키웁니다. 회복은 이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2) 다음 회복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7번이나 ”다시 일어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아닌 것으로 우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실패와 성공을 통해 발견한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넘어진 자리가 곧 전환점이다“이라는 교훈입니다. 1970년에 미국 아폴로 13호가 지구와 달 중간지점쯤 갔을 때 산소탱크가 폭발했습니다. 연료가 부족해서 동력을 상실하고 지구로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황하던 우주비행사들이 곧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달의 인력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달을 한 바퀴 돌고, 중력이 주는 가속도에다 엔진을 가동시켜 지구로 되돌아왔습니다. 넘어진 자리가 전환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주 넘어집니다. 자주 넘어집니다(악보).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 합니다. 주뜻 이루며 살기에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우리가 넘어진 것은 넘어져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시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아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둘째 “넘어졌을 때 멈추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쉬지 않고 달리는 것에 익숙하여 무저건 달리기만 하려고 합니다. 열심히 달리다가 쉬면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경주마는 달리다 멈추고 야생마는 달리기만 합니다. 전7:14절입니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해 보아라”. 멈추어 생각하는 기준은 현재의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큰 그림의 한 모자이크입니다. 그것의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는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큰 그림의 소중한 조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넘어졌을 때 잠시 멈춰 전체 그림안에서 오늘의 조각을 보는 것입니다. 혹시 조각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그림 전체가 망쳐진 것은 아닙니다. 혹시 나쁜 조각이라도 전체 그림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그려갑니다. 우리는 그 그림의 한 부분입니다.
셋째 “실패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실패는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실패는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다시 시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가 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첫째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자. 둘째 지금 있는 것으로 다시 시작하자. 셋째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 다시 시작하라” 말씀하십니다. 매일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회복을 위한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슥10: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여기 “휘파람”이란 말이 나옵니다. 참 성경에 휘파람이란 단어까지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휘파람을 불 줄 압니까? 그런데 누가 휘파람부는가 했더니 하나님이 붑니다. 휘파람은 옛날 목축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들에서 목자가 양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요즘은 호르라기를 불거나 조금 더 큰 목장에서는 개에게 방울을 달아 방울소리를 듣고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목자가 휫파람을 불어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고 우리는 그의 양임을 믿습니까? 시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유명한 시23편을 아십니까? 키워드는 “여호아”입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여호아로 시작하여 여호아로 마칩니다. 여호아가 다섯 가지 일을 합니다. 여호아가 2절, 푸른 풀, 맑은 물가로 인도합니다. 3절,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4절,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십니다. 5절, 내게 상을 베풉니다. 6절, 영원히 함께 삽니다.
4) 회복의 네 번째가 있습니다. 회복은 옛날 것을 지나가게 하고 새 것을 사모하게 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슥10: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어기에 “지나게 하며” 했습니다. 회복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해를 지나가게 하며”. 회복된 사람에게도 고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게 합니다”. 바다 물결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고 말라지게 하겠다고 합니다. 앗수르나 애굽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앗수르를 낮아지게 하겠고 애굽의 홀을 없앱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수많은 전쟁 후에 왕이 되었을 때, 반지를 만드는 직공을 불러 명령했다고 합니다. " 특별한 반지를 하나 만들어주게.내가 힘들어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보고 힘을 얻고,또 모든 것이 다 잘 풀려 교만하려 할 때 겸손하게 해 줄 글귀를 새긴 반지를 하나 만들어주게." 직공은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고,어떤 글귀를 새겨 넣을지 궁리를 했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지혜로운 왕자 솔로몬에게 갔습니다. "왕자님. 왕께서 제게 반지를 만들어 글귀 한 줄을 새겨 넣으라고 하셨는데 도무지 좋은 글귀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실패하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힘을 줄 수 있고,모든 것이 잘 풀려서 교만해지려할 때 겸손하게 해 줄 수 있는 글귀가 없을까요?이 말을 들은 솔로몬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써 넣으세요.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
그렇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고난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나가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이란 pasover, 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의 학대를 넘고, 홍해바다를 넘고, 광야를 넘어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이태리의 밀란에 있는 대성당에 가서 문 좌우와 상단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의 문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의 우측에는 장미꽃과 함께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은 오직 한 순간뿐이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문의 왼쪽 편에는 가시 십자가와 함께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도 오직 한 순간뿐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 상단에는 “영원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습니다.
5) 마지막으로 회복은 우리를 견고케 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슥10: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견고케 하리니” 했습니다. 회복의 최종 목적은 견고함입니다. 견고함이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솔로몬이 지은 성전 터가 큰 바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진). 길이18m, 넓이13m, 높이가1.25-2m인 흰 바위입니다. 이 바위위에 성전이 건축되었다고 해서 황금돔사원이라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바위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믂어 바쳤다고 합니다. 성전이 견고한 바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수없이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시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31:3, “주는 나는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견고함이란 하나님만 믿는 것입니다. 신학자 벵겔이 말했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두려워한다. 견고함은 하나님외에 어떤 경우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근에 좋은 책이 나왔습니다.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셔>(포이에마)라는 책입니다(사진). 이 책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재미교포 윤석언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1년 교통사고로 졸지에 전신이 마비되어 24시간 요양원에 누워 있습니다. 성대를 다쳐서 말도 잘 못합니다. 절망가운데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박수민 선교사였습니다.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평신도 선교사인 그는 지금 운석언씨에게 2,000통에 이르는 이메일과 메시지를 보내 그를 살려 냈습니다. 수술받을 때 금식해 주고 절망할 때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격려하고 기도했더니 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글로써 책으로 자기와 같이 고난당한 사람들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평신도 선교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는 견고함의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혜는 견고함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봄비가 임하면 땅은 부드러워지고 믿음은 견고해 집니다. 문제는 봄비입니다. 성령의 봄입니다. 겔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찬183장이 필요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철따라 우로를 내려 초목이 무성하니 갈급한 내 심령위에 성령을 부으소서“. 성령이여, 임하소서. 회복의 영이여, 임하소서. 인생의 겨울로 단단해진 우리의 심령을 녹이소서. 성령이여 임하소서. 메마른 우리의 땅에 소낙비로 임하소서.
마지막 시대의 3대 특징
스가랴 10장 1-3절 / 이한규 목사
1. 큰 은혜가 임하는 시대
마지막 때는 추수할 때가 가까웠기에 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소낙비로 응답하신다(1절). 즉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더욱 활발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은혜가 더 필요한 고통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지막 때는 은혜가 넘치기에 가짜도 넘친다. 그래서 은혜를 준다는 여러 가지 신기한 수단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본문 1절은 분명히 “여호와께 구하라.”라고 되어 있다. 각종 신기한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여호와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기한 것의 유혹에 넘어가 영혼이 망가진다.
저주란 다른 것이 아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것이 저주이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복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저주이다. 성도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어느새 시선이 다른 데로 가기에 매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추구하려고 해야 한다. 특히 하루에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보내는 것은 상상 이상의 축복을 예비하는 것이다.
2.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
본문 2절에 나오는 드라빔은 고대에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지면서 복을 빌거나 점칠 때 사용했던 물건이다. 또한 복술자는 점치고 예언하고 신기한 일을 벌이는 사람을 뜻한다. 성경에서 드라빔이나 복술자는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즉 마지막 때는 “계시받았다! 예언한다!”라고 말하면서 거짓 계시와 예언을 남발하는 사람들로 인해 성도들이 고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운명과 팔자를 믿고 삶이 운명적으로 다 결정되었다고 믿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약속이 너무 뚜렷해서 예정되었다고 믿지만 그 예정이란 ‘다 결정되었다는 의미’의 예정이 아니고 ‘다 약속되었다는 의미’의 예정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삼아 매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참 믿음이다. 그러므로 꿈과 계시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항상 신기한 어떤 현상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크고 소중하게 보는 영적인 습관을 체질화시키라.
3.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
마지막 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들에게 큰 권능이 주어진다(3절).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다. 지금 약해보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강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찬란한 꿈을 포기하지 말라.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꿈이다. 물론 꿈이 있다고 모두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꿈은 반드시 장벽을 만난다. 아무리 찬란한 꿈도 깨져서 누더기가 될 때도 있다. 그때 회복의 하나님을 믿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죄책감과 열등감과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새롭게 하라.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 육적인 처녀성은 회복될 수 없지만 영적인 순결성은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환경에서 절망하지 말고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약해지지 말라. 모든 찬란한 꿈을 시련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붙잡고 새롭게 출발하라. 하나님은 축복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좋은 일을 주저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도전과 음성을 거부하게 하는 자존심을 버리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내일의 축복을 향해 전진할 때 놀라운 회복의 은총도 허락될 것이다.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슥 10:1-8 / 김종민 목사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 동안, 고성, 속초, 그리고 인제, 강릉 등, 여러 곳에서, 큰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로 인해, 울창한 숲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강풍을 동반한 산불로 축구장 700개 이상의 면적이 재로 변하고, 하룻밤 사이에, 많은 주택들이 불타고, 이재민들이 발생했습니다.
산불로, 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요일, 밤 늦게, 속보를 계속 들으면서, 캄캄한 밤이라, 소방 헬기가 불을 끄지 못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지금 이 순간, 큰 비가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여기 저기서,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이 피해를 당한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산불로 인한 피해가 하루빨리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수요일에즌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는데, 시원스럽게, 큰 비가 내렸으면 합니다.
여러분! 옛날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깨나 불조심”
늘 불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은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시사철 비가 옵니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봄에는 봄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장마가 오고, 가을에는 태풍이 찾아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든지, 비가 자주 내리지만, 많이 올 때도 있고, 적게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일 년에 두 차례, 비가 내리는 때가 있습니다.
신명기 11: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양력 10월에서 11월 사이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는 양력을 사용하지만, 그래도 농사짓는 사람들은 주로 음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명절도 음력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들 달력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 10월이나 11월경이, 1월이기 때문에, 그때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3월에서 4월 사이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10월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이스라엘에서의 10월은 씨앗을 뿌려야 할 때입니다.
농부가 밭에 나가, 뿌리기 전이나, 씨앗을 뿌린 후에는, 이른 비가 적당하게 내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뿌린 씨앗이 발화가 잘 되고, 새싹이 잘 올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렸는데, 적당한 때에, 이른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부는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으면, 씨앗을 뿌린 밭에, 물을 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린 씨앗의 싹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파종할 때에는 이른 비가 와 주어야 하고, 수확하기 전에는 늦은 비가 적당한 때에, 와 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내려야 합니다.
많이 와도 안되고, 적게 와도 안되고, 적당하게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 자라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강한 바람으로, 불씨가 여기저기 옮겨 붙으면서, 울창한 숲이 잿더미로 변해갈 때,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우리는 산불의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고, 바람의 세기를 약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대로, 비를 내릴 수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으로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아멘.
봄철에는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가 올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구름을 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소나기를 주시며, 밭의 채소를 허락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3-24)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셔서, 우리의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우리의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도록, 우리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봄비가 올 때에”, 봄비가 오는 때인데,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봄비가 오는 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질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봄비가 오는 때라고 해서, 당연히 비가 올까요?
겨울에는 눈이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다시피, 지난 겨울, 이곳 청주에는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계절이니까, 눈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올 때가 됐으니까, 비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계절이라고 해서, 그냥 비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눈이 와야 되고, 비가 와야 하는 계절이지만, 하나님이 하늘을 닫으시면, 한 송이의 눈도 내리지 않고,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철을 따라, 하늘 문을 열어, 눈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셔야 합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철 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레 26:4)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힘으로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든, 할 수 없는 일이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산불 속보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비를 내려 주옵소서. 강한 바람이 불어, 불씨가 사방으로 날리면서, 나무를 태우고, 마을로, 도시로 향하고 있습니다. 소방헬기는 캄캄한 밤이라 뜨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주여, 비를 내려 주셔서, 저 사나운 불을 멈추게 하여 주옵소서. 더 이상의 피해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인명피해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세월호 같은 아픔이 다시는 없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봄비가 올 때가 되었다고 당연히 비가 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겨울에 많은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봄인데도, 봄비가 시원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봄비가 와야 할 계절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구름 속의 작은 물방울이 빗방울로 성장하지 못할 때에, 하늘에 구름 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비나 눈을 만들어, 내리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시사철, 강우량을 마음 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을까요?
도전하고 있는데, 그런 날이 올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그럴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호와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을 일게 하십니다. 먹구름을 몰아다가 큰 비를 뿌리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비를 만드시고, 비를 내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자연의 법칙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욥 28:23-26)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시편 135:7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랴 8:1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게 하시고, 하늘 이슬도 내려 주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 비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불이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후,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한 후,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사환은 엘리야에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반복하여, 하나님께 비를 내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 사환이 엘리야에게,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가뭄이 해소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아도 봄비가 오는 때입니다. 그래도 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봄비가 오는 때일지라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도 기도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전국적으로 비 소식이 예보되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가장 적당하게 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귀 기울여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에게 어떤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7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아멘.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에스겔 34:26-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때를 따라 복된 소낙비를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된 소낙비가 내리면, 밭은 열매를 맺으며, 땅은 소산을 내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은 기뻐하고,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닏.
여러분!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8절을 보면,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성의 복도 주시고, 어떤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고,쓰러지지 않고,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힘든 고통의 삶을 살았던 야베스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지역을 넓혀 주셨습니다.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도록,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보다 생각한 것보다 더 풍성하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아멘.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라빔 우상은 헛소리를 할 뿐입니다.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위로는 헛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니까, 고성, 속초의 산불의 발화점은 전봇대에서 비롯된 것 같고, 강릉 옥계에서 일어난 산불의 발화점은 산중턱에 있는 신당이 아닐까 하여, 조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에, 태백에 살 때, 태백산을 오르다 보면, 계곡에 향을 피운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바위 밑이나, 바위 위에 향을 피우고, 우상에게 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향을 피우기 때문에 산불의 위험이 있고, 돼지 등, 버린 음식물 쓰레기들로 계곡물이 오염되기 때문에, 단속을 해도, 몰래 몰래, 올라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상숭배해서는 안됩니다. 무당을 가까이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는 것은, 단순히 비를 구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복된 소낙비와 같이,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복된 소낙비처럼,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내려야 합니다. 필요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시 30:10)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소낙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은혜의 단비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된 은혜의 소낙비를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의 단비, 축복의 단비를 구함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된 은혜의 단비, 복된 축복의 단비를 풍성하게 내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비를 내려 주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주여, 우리 한마음교회에 은혜와 축복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스가랴 10:1-12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구하라, 주시리라(1-7절)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 이어 10장은 유다 지파를 통해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봄비가 올 때가 되었다고 해서 항상 봄비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장마철임에도 비를 만나기 어려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올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마5:8상)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고 우리가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봄비가 올 때에 비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주관하시는 공급자임을 알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흡족한 비를 내려주십니다. 소낙비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아니라 채소를 싱싱하게 자라게 할 만큼 충분한 비를 의미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흡족한 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2.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드라빔은 ‘가정의 신’을 뜻하며 복술자는 점쟁이입니다. 생명이 없는 드라빔이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복술자에게 무슨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구할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허탄한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의 위로는 헛된 것입니다. 위로받을 일이 있으면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십시오. 허탄한 것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흡족한 비를 내려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자연법칙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에게 구해야 합니다. 허탄한 것을 구하고 잘못된 곳에서 기도하는 자들은 유리하며 곤고함을 당한다고 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양들을 방황하게 만든 목자, 즉 거짓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시겠다고 합니다. 숫염소 역시 거짓목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숫염소는 고집이 세며 심판의 대상에 속하는 무리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 시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마25장)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숫염소를 벌하시겠다고 합니다. 거짓 목자와 숫염소를 징계하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돌보시고 전쟁의 준마같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준마는 힘 있고 민첩한 말인데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필수전략 무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준마 같게 하리니’는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에게 승리를 안겨주시겠다는 뜻입니다.
4.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모퉁잇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는 모두 중추적이고 큰 힘을 가진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즉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유다 지파를 가리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에서 나오셨습니다.
5절에서 주어는 3인칭 복수 그들입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로서 용사 같이 원수를 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힘이 어디서 오는 지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실 때 원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강한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승리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얻는 힘입니다.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견고히 할 것이고 요셉 족속을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이 둘은 각각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나아가 요셉 족속은 이방 민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민족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족속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통해 선민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어디서 돌아오는 것이겠습니까? 스가랴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였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하리니’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벨론 포로 귀환 시 돌아오지 못하고 세계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입니다.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완전한 회복의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 회복이 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남 유다 족속과 대조적인 북쪽 족속이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 또한 6절의 요셉 족속처럼 이방민족을 상징합니다. 이들 역시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은 영광과 기쁨을 볼 것이고 하나님으로 인해 마음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휘파람을 불어, 구속, 견고하게 하리니(8-12절)
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불어 백성들을 모으신다고 합니다. 이는 목자가 양들을 부를 때 부는 휘파람처럼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시어 백성들을 인도하여 부르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길을 잃은 양처럼 헤맬 때도 부르시고 탕자처럼 집을 떠났을 때에도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구속하기 위함입니다. 구속은 값을 치르고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살려주신 것도 놀라운 일인데 번성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번성이 있습니다.
9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8절의 말씀처럼 부르셔서 모으시는데 흩으셔서 부르시겠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백성들이 다시 세계로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님께서 모으실 것입니다. 또한 세계 처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끝날에 모든 백성들을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주님이 소집하면 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가 세상의 끝 날입니다. 이 날을 늘 잊지 않으며 살아가십시다.
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그들은 세계 처처에 흩어져 있는 선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그들이 돌아오는 출발지를 알려주시는데 애굽과 앗수르라고 하십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였습니다. 이 두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압제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와 같고 빈들과 같은 곳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으로 부르십니다. 그곳으로부터 돌아올 때 사람들의 수가 많아 차고 넘쳐서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과 요단강 서편의 레바논까지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올 때에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것인데 이 때에 바다 물결을 치시겠다고 합니다. 고난의 바다와 바다 물결은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때를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의 장애물을 치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나일 물이 마르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강대한 나라 앗수르와 애굽이 약화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약화되고 몰락될 것입니다.
12. 내가 그들에게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백성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을 주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견고하게 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할 것입니다. 지금 광야와 빈들과 같은 곳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광야와 빈들 같은 곳을 지나갈지라도 흡족한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의 현장이 되도록 살아가십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듯 저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조차 적절한 때에 공급해 주심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것임에도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때를 따라 주시는 것 이외에도 항상 있는 태양과 공기를 주심에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거짓목자와 숫염소가 득세하는 세상, 애굽과 앗수르와 같이 강자의 횡포가 있는 세상에 내몰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휘파람으로 부르시어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하루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삶의 현장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봄비가 올 때에 하나님께 비를 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현재 상황에서 자신의 언어로 그 분을 달리 표현해 보십시오.
3.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불어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어떻게 견고하게 하십니까?
5. 흡족한 비를 맞으며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참 목자가 오실 것입니다
슥 10:1-7
어느 시대든지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들이 분간됩니다. 참 지도자 때에는 백성이 태평할 수 있고 거짓 지도자 때에는 고난과 도탄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경우에서도 신앙의 통치자들이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흥하였고 백성들이 평화의 노래를 불렀으나 수염소 같은 거짓 지도자들이 세력을 잡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곤고를 당하였습니다.이스라엘은 과거에는 우상과 복술의 지도를 요구하고 행복을 구하였거니와 지금은 참 신 여호와 하나님께 지도와 행복을 구할 것이니 여호와만이 우리 간구를 응답하시며 참 목자를 보내주시고 또한 풍성한 은사와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참 지도자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 심령에 봄을 맞을 것입니다.
1. 봄이 오면1절에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사람에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봄의 계절을 가르쳐 시작의 계절, 화초의 계절, 희망의 계절, 훈푼의 계절, 사랑의 계절이라고도 말들 합니다. (1) 봄비가 내립니다.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 중에 하나가 지상의 수분을 증발하여 공간에 모여 간직했다가 지면에 골고루 내려주시는 일입니다. 봄비는 이슬비와 가랑비로 내립니다. 연한 새싹위에 봄비는 보슬 보슬 내립니다. 대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우리들 심령의 대지 위에도 봄비 같은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되겠습니다. 메마른 대지 위에 먼지가 날라도 촉촉이 봄비가 내리면 먼지가 자고 깨끗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비되어 우리의 심령을 씻어주실 줄 믿습니다. (2) 따뜻합니다.약한 것 같은 따뜻함이 강한 것 같은 추움을 이긴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을 따뜻함이라 한다면 미움은 추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수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대로 모든 것 다 갖추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봄날 같이 따뜻해야 합니다. 흑인이 마음 기쁘게 백인들이 모인 교회에 가서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 심령들이 찾아옵니다. 얼음 속에 계란을 100일을 두어도 병아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체온이 있어야 생명체가 될 수 있습니다. 체온을 유지해야 합니다. 교회에 훈훈한 바람이 볼 때 그 교회는 생동하는 교회는 됩니다. (3) 봄에는 씨를 뿌립니다.가을에 특별히 뿌리는 씨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봄에 파종합니다. 씨뿌리는 그림과 추수하는 그림을 비교해 보면 추수만을 그린 그림은 결과의 기쁨은 있으나 왠지 쓸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씨를 뿌림은 곧 수확은 없지만 미래의 희망으로 가슴을 부풀게 합니다. 그러나 봄이라 해서 덮어놓고 희망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자만이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는 계절에 인간 심리 밭에 진리의 씨를 많이 뿌려 풍성한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 목자가 올 것입니다. (1) 은사의 비를 여호와께 간구합시다주의 복음이 땅위에 선전되어 교회가 시작될 때에 예루살렘 다락에 성령이 강림하여 큰 부흥의 불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추수가 가까웠으니 성숙기의 늦은비를 하나님 앞에 구하시기 바랍니다. 요엘 선지자는 욜 22:23-24에 “말세에 나의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겠다”고 예언했습니다. 구원 얻을 자를 위하여 말세에 성령을 크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강우기에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번개불과 비의 관계는 근세 과학자들이 학리적 이론으로도 승인하는 일이지만 영적 부흥의 큰 비가 임할 때에도 죄를 들어내는 강한 빛이 수반됩니다. 각자의 숨어있는 죄를 밝혀 주어서 통회하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 성령의 불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큰 비가 내려 땅을 윤택케 하며 목마른 자로 시험한 물을 마시게 하니 이 권능의 큰 비는 여호와의 명령에만 의지하여 내립니다(욥 37:5-6).큰 비의 결과로 각 사람의 밭에 채소가 풍성하게 풍작되리니 이는 개인적으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나, 땅이 움을 내기 위해서는 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약 5:8).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 밭에 뿌린 생명의 씨가 움트기 위해서는 성령의 단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보화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구하여 심령의 윤택한 은사를 받아 봅시다. (2) 참 지도자를 보내실 것입니다.선한 목자 그는 메시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만이 참 지도자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참 지도자인 사실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1) 모퉁이 돌입니다. 지대의 머릿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만백성의 소망의 반석이요, 우리 교회의 지댓돌입니다. 세상 소망은 다 부끄럽고 헛된 소망이 되기 쉬우나 그리스도만은 성도의 참 지도자시요, 그분만은 신실하사 의지할만 합니다. 세상 석공들이 내어 버린 돌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었으니 눈에 보이는 교회는 건드릴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아무도 손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신임할만한 참 지도자이십니다. 2) 못과 활입니다.우리 목자인 그리스도는 튼튼히 박혀 있는 못이고 뽑을 수 없는 못이므로 모든 귀중품을 다 이 못에 걸고 의지해도 안심할만 합니다. 이 지도자는 우리의 영광이시요 신임할만한 지도자이십니다.활은 대적을 치는 힘을 뜻합니다. 세상의 강한 장수가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는 처음에는 상승장군, 무적용사라고 말했으나 마지막에는 다 실패로 그 생을 마치었습니다. 동서양을 호령하던 몽고사람 징기스칸이나 유럽천하를 흔든 나폴레옹이나 역발산 기세를 자랑하던 항우가 다 패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간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그에게 활을 겨누고 대적하였습니까 무력으로 지식으로 재물로 사상으로 정권으로 말할 수 없이 공격하여 왔으나 “예수의 영광 권세여 엎디어 절하세” 세계 인구 20억 중에 7-8억이 찬송을 불러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께서 말세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천하만민 모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요 구름을 타고 강림하시리니 각 사람이 반드시 그를 보겠고 저를 찌른 자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을 인하여 애곡하리니 진실로 그러 하리로다. 3) 참 목자는 일체의 권세를 잡은 자로 오실 것입니다.우리 지도자인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RP서 모든 권세를 다 그에게 맡기겠다 하셨습니다(마 28:18). 세상 권세는 일시적이나 주님 권세는 평화적이요 영원할 것입니다. 세상 권세는 언제나 강압적이나 예수 권세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영원히 구주를 통치하시리니 실로 평화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밤낮으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십니다. 마귀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