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만섭 명연주 명음반 6월 21일 화요일 다시듣기 http://www.kbs.co.kr/radio/1fm/best/replay/2477370_51761.html
오늘도 여러모로 역시 러시아다. 살펴보면 여러가지로 북쪽의 향취가 느껴진다. 한여름에도 서늘함이 번져간다 .프로코피예프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선전전으로 독 러 전쟁을 독려했다는 정만섭 선생의 말보다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 소련의 정치적 선전으로 인해 작품이 왜곡됐다는 점에 한 표 던지고 싶어진다. 쇼스타코비치에 브람스, 게다가 필드의 수확까지... 오늘은 마리스 얀손스의 노익장의 투혼에 다시 한번 예술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게 한다.
Dmitri Shostakovich
Piano Trio no.1 in c minor op.8
Vladimir Ashkezazy(piano)
Zsolt-Tihamér Visontay(violin)
Mats Lidström(cello) 13:10
★★★★★★★★★★
Johannes Brahms
Piano Concerto no.1 in d minor op.15
Paul Lewis(piano)
Swedish Radio Symphony Orchestra/Daniel Harding 49:19
★★★★★★★★★★
John Field
Nocturne no.4 in A major
Elizabeth Joy Roe(piano) 5:27
★★★★★★★★★★
다른 표기 언어 John Field
출생일시 | 1782. 7. 26, 더블린 |
---|---|
사망일시 | 1837. 1. 23, 모스크바 |
국적 | 아일랜드 |
요약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은 쇼팽의 모델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그후 런던에서 무치오 클레멘티에게서 배웠다. 나중에는 클레멘티의 교습에 대한 대가로 그의 피아노 시범 연주자 겸 세일즈맨으로 일했고, 빠른 음악적 진보를 보였다.
1802년 클레멘티는 필드를 파리로 데려갔으며, 이어 독일과 러시아로 갔다. 그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재빨리 구축해갔다. 1803년 러시아에 정착해서는 한동안 인기 있고 세련된 피아노 교사로 활동했다. 다음 30년 동안 전유럽에 걸쳐서 폭넓은 연주활동을 펼쳤으며, 1832년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콘서트에서 자신의 작품 E장조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하나를 연주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페달을 사용해 음을 지속시키는 기법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의 작품이나 연주에서 페달을 사용했다.
그는 순수하게 피아노 명연주자로 활약했던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양식과 기교는 놀랍게도 쇼팽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작곡가로서는 소품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으며, 풍부한 표정을 가진 선율과 상상력을 지닌 화성을 보여준다. 때때로 등장하는 반음계는 긴 발전부의 후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피아노 협주곡 7곡, 피아노 소나타 4곡을 썼으며, 이 곡들은 때로 높은 질적 수준을 보이지만 작품마다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의 야상곡은 다른 대작들보다 압축적이고 친숙할 뿐만 아니라 양식면에서 뛰어나며 다양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Sergei Prokofiev
Symphony no.5 in Bb major op.100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Mariss Jansons 2014 43:06
★★★★★★★★★★
동의어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다른 표기 언어 Symphony No.5 in B♭Major Op.100
시대 | 20세기 이후 |
---|---|
분류 | 20세기 음악>기악곡 |
제작시기 | 1944년 |
작곡가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
초연 | 1945년 1월 13일 모스크바, 프로코피예프 지휘 |
구성 | 4악장 |
편성 | 피콜로 2, 플루트 2, 오보에 2,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 2, 바순, 콘트라바순,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베이스 드럼, 스네어 드럼, 심벌즈, 트라이앵글, 탬버린, 탐탐, 우드블록, 피아노, 하프, 현 5부 |
요약 〈교향곡 5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작곡된 작품으로 본래 프로코피예프의 의도와 달리 조국, 소련의 정치적 선전으로 왜곡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은, 1929년 〈교향곡 4번〉의 초연 무대 실패 이후 무려 15년이 지난 뒤에야 작곡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여름, 그는 한 달여 정도를 별장에 칩거하며 작곡에 매진했고, 또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는 데 다시 한 달을 보냈다. 그러나 사실, 이 교향곡은 이미 1930년대에 구상했던 아이디어들과 1937년에 작곡한 발레음악 〈신데렐라〉(Zolushka)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곡 당시의 시대 상황과 강렬한 음악 때문에 ‘전쟁 교향곡’으로도 불리지만, 사실 프로코피예프가 제시하려 했던 것은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서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에 대한 찬가”라고 표현하면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찬미하려 했음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 교향곡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것을 기념한 작품이라고 선전했다. 작품이 완성된 이듬해인 1945년 모스크바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지휘로 이루어진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작곡의도와 무관한 정부의 선전과 건강의 악화로 인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연주활동마저도 불가능하게 된 그는, 1946년 〈교향곡 5번〉으로 스탈린상을 받게 되면서 더욱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다. 역설적이게도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1948년에는 그에게 서구에 물든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후 그는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할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지한 채 은거해야만 했다.
이 교향곡의 불운한 행보는 미국에서도 지속되었다. 1946년 미국에서 이 교향곡이 초연되었을 때에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로진스키와 오먼디, 조지 셀 등 유수의 지휘자들이 앞 다투어 이 작품을 연주했다. 그러나 불과 5년이 채 지나기 전, 미국 전역에 메카시즘(McCarthvism)의 광풍이 불어 닥치면서 〈교향곡 5번〉은 공산주의의 잔재로 취급되며 금기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1951년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교향곡 5번〉을 연주하려 했던 유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모리스 아브라바넬(Maurice Abravanel, 1903~1993)은 살해위협의 협박전화를 받았고, 원치 않았던 은둔 생활을 하던 프로코피예프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감에 더욱 빠져들었다. 아브라바넬은 위협에 굴하지 않고 연주를 감행했지만, 가뜩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좌절해 있던 프로코피예프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교향곡 5번〉은 외견상으로는 관습적인 4악장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8~19세기의 교향곡 구성이라기보다는 바로크 시대의 악장 구성에 가까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느림-빠름-느림-빠름의 구조로 이루어진 이 교향곡은 독특하고 신랄한 화성과 풍부한 선율이 어우러져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음악세계를 강렬하게 제시한다.
플루트와 바순이 옥타브를 넘나들면서 불협화적인 선율을 연주하면서 음악이 시작된다. 뒤이어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이 선율을 연주한 뒤, 플루트와 오보에가 서정적인 제2주제를 연주한다. 극적인 악상을 제시하는 코데타로 제시부가 종결되는데, 여기에서 프로코피예프는 반복기호를 지시하여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을 재현하려 했다. 발전부에서는 다양한 모티브들이 자유롭게 전개되고, 짧고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거친 뒤 이어지는 재현부에서는 금관을 중심으로 대위법적인 텍스처가 전개된다. 코다에서는 제1주제가 무겁게 연주되면서 악장을 마무리한다. 이 첫 번째 악장을 일컬어 프로코피예프는 인간정신의 영광이라고 묘사했고,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의지를 확신했던 그의 믿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토카타 작풍을 보여주는 스케르초 악장인 2악장은, 무궁동(無窮動) 풍의 기계적인 추동력 속에서 클라리넷 독주의 우스꽝스러운 선율 중심이다. 오보에와 비올라가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 부조화스럽게 응답을 하며 진행된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중간 부분에서는 클라리넷과 비올라가 강렬한 리듬을 제시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제선율을 더욱 열광적인 리듬으로 제시함으로써 불길한 느낌을 준다.
이 몽환적인 느린 악장은 프로코피예프의 노스탤지어와 비통한 감정을 깊이 있는 음색으로 표현한다. 클라리넷의 애수어린 선율로 시작된 악장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저음역의 선율과 묵중한 리듬으로 이어간다. 중간 부분에서는 튜바가 흐느끼는 듯 선율을 비통하게 연주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고, 현악성부가 애수 어린 선율을 연주하면서 코다로 진행한다. 더없이 감동적인 코다는 피콜로와 섬세한 현악성부의 아르페지오 위에서 고음역의 선율이 아련하게 제시되면서 악장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악장은 1악장의 주요주제를 회상하는 짧은 도입부로 시작된다. 첼로가 묵직한 저음으로 코랄 풍의 선율을 연주하고 클라리넷이 이에 응답하면서 제시부로 들어선다. 본격적인 제시부가 시작되면 경쾌한 주제 선율이 플루트와 현성부가 연주하는 서정적인 두 개의 에피소드와 대비를 이루면서 음악이 전개된다. 다시 한 번 장엄한 코랄 선율이 연주된 뒤 음악은 점차 광적인 흥분을 고조시키면서 코다를 향해 돌진한다. 금관과 현악, 목관, 타악기가 총동원된 폭발적인 코다는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역동적인 전개로 승리에 넘치는 종결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승리감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우울한 선율로 악장이 마무리되면서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남긴다.
다른 표기 언어 Mariss Jansons
분류 | 연주자>지휘자 |
---|---|
출생일시 | 1943년 1월 14일, 리투아니아 리가 |
경력 | • 1973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1979~2000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 1985~19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 1992~1998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자 • 1996년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 2002년~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 2003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및 수석지휘자 |
유형 | 지휘자 |
수상 | •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 2위 • 1995년 노르웨이 외국인 훈장 • 1998년 해리 예술상 • 2006년 MIDEM 올해의 아티스트상 • 2006년 그래미상 최우수 오케스트라 연주 부문 • 2007년 에코 클래식 올해의 지휘자상 • 2013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
데뷔 | 1971년 |
레퍼토리 |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의 러시아 음악과 베토벤 등의 독일 고전음악 |
요약 라트비아 태생의 지휘자.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다.
1996년 봄, 오슬로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공연을 이끌어가던 마리스 얀손스는 갑자기 심장에 통증을 느끼며 포디움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얀손스의 머릿속에는 12년 전 지휘를 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Arvid Jansons)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리스 얀손스는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붙잡고 끝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고, 다행히 객석에 있던 의사들이 달려와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한 덕분에 얀손스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한 차례 위기를 겪은 후 마리스 얀손스는 최근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복귀한 후 2003년에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이듬해에는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수장을 맡으며 두 악단을 동시에 이끌어갔다. 2008년에는 영국 그라모폰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오케스트라에 얀손스가 이끄는 두 악단이 모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로열 콘세르트헤보는 1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6위를 차지했다.
현역 최고의 마에스트로로 꼽히는 마리스 얀손스는 1943년 1월 4일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태어났다. 지휘자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부모님이 일하는 오페라 극장에서 보내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196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얀손스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해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고 빈 음악원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Hans Swarowsky)를 사사했다.
1971년 얀손스는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하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인정을 받았다. 카라얀은 그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영입하려 했으나 구소련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얀손스는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지휘자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9년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얀손스는 노력과 열정으로 오슬로 필을 세계적인 악단으로 성장시켰고 그 공로로 1995년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로부터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로린 마젤(Lorin Maazel)의 뒤를 이어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서 7년간 악단을 이끌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이후 얀손스는 미국 피츠버그 시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문화잡지 《피츠버그》에서 선정하는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마리스 얀손스는 베토벤 교향곡을 비롯한 독일 고전 음악에 탁월한 해석을 보이고 있으며, 오페라 연주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