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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심은 어디에.....
이크벨 추천 0 조회 180 21.10.11 15:35 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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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0.11 16:46

    첫댓글 저는 까야를 심과 대상의 관계에서 chandarāga 의 수해자 라고 여깁니다.

    심과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일체법 이라고 할 때 까야가 그 일체법과 관계맺음이 오취온이라고 보아지는데요...
    관계(상대하는 것: 일어나는 것은 소멸하는 것으로 파악치 않는 상태)맺지 않게 되면 오온 그자체로 있다고 봅니다.
    곧 육육의 전개가 끊기는 것으로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라고 여깁니다. 곧 여실지로 파악되고 있는 상태로 봅니다.

    이때... 비로소 chanda - rāga에서 탐(rāga)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데요...

    따라서 심은 어떠한 의미를 갖추는 것이라기 보다는 심은 의에서 식을 갖춘 까야의 전개되느냐 반야를 갖추어 까야의 전개를 그치는 것인가가 갈림길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이때 심은 그 갈림길에 선택되어진 길의 영향을 받아서 굴러간다 봅니다.

  • 작성자 21.10.12 22:28

    //저는 까야를 심과 대상의 관계에서 chandarāga 의 수해자 라고 여깁니다.......//

    도움이 되는 멘트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마님의 까야에 인식의 기반을 엿볼 수 있어서 도움이 됩니다.

    크게 심, 대상, 까야... 이 셋의 관계에서.....

    이미 식을 갖춘 까야가 어떤 선택지를 갖느냐가 심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말씀이신 듯 싶네요.
    그러고 보면, 심은 독립변수인 의나 식의 영향을 받아 변하는 종속변수인 싶네요....

  • 작성자 21.10.12 23:01

    //심과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일체법 이라고 할 때 까야가 그 일체법과 관계맺음이 오취온이라고 보아지는데요...//

    특히 이 구도가 무척 인상적인데요.

    심과 대상이 만나 이루어지는 이 일체법 세계에서
    식을 갖추고 육문을 갖춘 까야가 그 일체법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육육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로 오취온과 오온을 구별하신 거 같고요.

    갑자기 드는 생각이
    우현 경(s12:19) 초반에.....
    "몸이 생겨나고 밖으로 명색이 주어진다" 할때의 이 명색이
    심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체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 작성자 21.10.12 23:06

    @이크벨 1. 심과 대상 사이의 관계로 발생하는 일체법
    2. 그 일체법과 관계를 맺는 까야
    3. 일체법과의 관계에서 증장하기도 하고, 증장이 멈추기도 하는 까야
    4. 까야의 방향에 따라 그 성격이 다시 변하는 심과 그 심과 만나 발생하는 일체법....
    5. 그 일체법과 관계를 맺는 까야.........,

    이런 식의 과정인 거 같습니다.

    물마님의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21.10.12 23:18

    @이크벨
    불교의 존재론이라고 할까요. 이게 아주 심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을 갖춘 이 몸은 현대인이 돈과 명예, 권력 등으로 끔찍히 챙기는 대상인데요.
    불교에서는 이 까야를 심과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체법을 대하는 방식과도 연결시키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런 식의 행복론이 불교에만 있다는 있다는 뜻이 아니라 풀어내는 방식이 참으로 정교하다는 얘기입니다.

  • 작성자 21.10.12 23:21

    @이크벨 부처님이 2천5백년 전에 까야를 토대로 그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전개방식은 참으로 놀랍네요....

  • 21.10.11 16:59

    육상이 법상임을 앎으로서 의가 알려집니다.
    신(까야=오취온=육근)이 일체법임을 앎으로써 심이 알려집니다(심 차원).

  • 21.10.11 16:59

    까야 상태(=의 차원)에서 ‘심이 없다’라는 표현보다는 심이 잡힐 만큼의 ‘반야’가 ‘생겨났는지 아닌지’가 중점인 것 같습니다. <밖으로>에서 식이 최소한의 반야(=신행을 파악하는 앎)로 전환하여야 <심과 까야의 관계에서의 쌍요자나> 상황이 펼쳐진다고 봅니다.

  • 21.10.11 17:00

    @새벽 육육연기와 12연기는 상호 동시적 진행 과정이나 12연기로의 앎으로 옮아가려면 개체로서의 작용에 대한 앎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새벽은 봅니다.

  • 21.10.11 17:01

    @새벽 여기서부터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21.10.12 06:56

    까야 안에서 식과 의로 변질(?)된 심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걸까요?
    까야와의 관계에서 심의 위상이 궁금해집니다.//

    이크벨님...
    心이 까야(身) 안에서 자기 행위(심행= 욕탐)를 돕도록
    意를 만들었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양분(=意思食)을 취하기 위해)
    이렇게 태어난 意는 六相, 즉 色相이나 무색相을 비여리작의 함으로써 ...
    (작의의 집이 법의 집이므로 ) 법이 출현합니다.
    그러면 意와 法을 조건으로 다시 識이 일어납니다.

    결국 무명으로 덮인 心은...
    자기가 살기 위해 마노(意)와 識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心은 까야 상태에서도 항상 건재합니다.
    마치 아빠(心)가 부인(意)과 아기(識)와 함께 사는 것처럼 ...
    심과 의와 식은 한지붕 세 가족입니다.

    그래서 意에 알려진 法이 心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아마도 意에서 비여리작의로 불선법이 일어나면
    心은 자동으로 불선심이 되는 것 같아요...^^

  • 21.10.12 06:42

    이크벨님... 위 본문의 그림에서
    심과 색사이 ...
    즉 큰 원 안에 있는 <3행, 명신 , 색신>은
    kāya이고 = 오온, 명색 이고 = '나'아님도 되지만 ...

    심과 색사이의 <3행, 명신 , 색신>...
    즉 kāya, 오온, 명색은...
    모두 무명에 의해 연기된 법...
    中에 의해서 드러난 법...
    고의 일어남(苦集, 유전문)이기도 합니다.

  • 작성자 21.10.13 00:55

    //마치 아빠(心)가 부인(意)과 아기(識)와 함께 사는 것처럼 ...
    심과 의와 식은 한지붕 세 가족입니다.

    그래서 意에 알려진 法이 心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아마도 意에서 비여리작의로 불선법이 일어나면
    心은 자동으로 불선심이 되는 것 같아요...^^//


    더 구체적으로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의식을 아빠, 부인, 아기로 각각 비유하셨는데, 심이 의와 식을 탄생시켰지만, 의와 식은 나름의 작동으로 다시 심에게 영향을 주는 구조인 거 같네요.

    심의식의 상호작동방식이 서로 순환적인 거 같은데, 편의상 최초 논의의 시작을 어디부터 잡아야 할지 궁금하네요.
    위에 물마님 좋은의견이신데, 심과 대상 사이의 일체법 발생, 그리고 까야 순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갔는데,
    일체법의 발생과 까야 사이의 연결이 끊기는 느낌이거든요.

    심이 육문을 갖춘 까야를 만드는 과정이 경전에 나오나요? 그 심은 또 어디서 나오는건지....
    제가 사띠 비구가 되긴 싫은데.....ㅎㅎㅎ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 21.10.13 20:15

    @이크벨 그 심은 또 어디서 나오는건지....// ㅋㅋㅋ

    일어남 경(S47:42)
    정신·물질(명색)의 일어남이
    바로 마음의 일어남이고,
    정신·물질의 소멸이
    바로 마음의 소멸이다.

    그렇다면 心(citta)도 명색을 조건으로 일어난 법이지
    심(citta)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 21.10.13 20:14

    @해맑은 편의상 최초 논의의 시작을 어디부터 잡아야 할지 궁금하네요....//

    원인과 결과는 돌고도는 동그라미와 같습니다.
    원인에 따른 결로서 과보를 만나면
    이때 그 과보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원인을 지어 또 새로운 결과인 과보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因果는 집멸하면서 흘러가지만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할상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둥근 동그라미에서 어디를 시작점이라고 정할 수가 있나요?
    심이 명색을 만들고 다시 명색이 심을 일으키는 이 과정에서
    둘 중 어떤 것을 최초의 원인이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런게 다 이 세상은 뭔가 시작점이 있을 것이라는 ...
    因果로 굴러가는 圓이 아닌...
    시작과 끝이 분명한 직선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
    사람들이 만들어 낸 궁금증이지요

  • 21.10.12 07:19


    기본적으로는 ........... <과거(過去)심(心) 불가득, 미래(未來)심(心) 불가득, 현재(現在)심(心) 불가득> 입니다만 ...........

    심(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

    일단 ...... 심(心)은 ‘원숭이’에 비유됩니다. 이 가지를 잡았다가 저 가지를 잡는 ‘원숭이’.

  • 21.10.12 07:19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말씀에서 ....... ‘이것’과 ‘저것’은 .......... 일단 ‘심(心)’은 아닙니다. <이것과 저것은 ‘法(dhamma)’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 ‘法(dhamma)’이라는 것이 ........... 심(心)하고 별개의 것이었다면 ... <法(dhamma)의 모습>이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으신 후에야 비로써 ‘그 본 모습’을 드러낼까요?

  • 21.10.12 07:20

    @아위자
    해탈하는 장본인은 분명 ‘심(心)’입니다만 ........ ‘法(dhamma)’은 <해탈의 장본인도 아니면서> 부처님에게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으신 후에야 비로써 ‘그 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묘(妙)한 것’인 모양입니다. 이 삼계를 ‘법계(法界)’라고 하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 그 <법계(法界)와 심(心)의 관계>에서 ‘일체(法) 唯心造’라고 한역 아함은 지적하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 21.10.12 07:20

    @아위자
    심의식 非色에서 ....... 意나 識은 <분명히 ‘法(dhamma)’>입니다. 그렇지만 心은 法(dhamma)이라는 지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 촉수상사(觸受想思) 無色을 볼 때 ...... 그것들이 法(dhamma)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 心과의 관계는 <쌍요자나(결박, saññojana, saṁyojana)의 관계>이기에 ‘심해탈’이 거론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위자’는 ...... 여기에서 ....... 心을 추정해 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는 ‘心과 法(dhamma)’>을 통하여 心을 추정해 봅니다.

  • 21.10.12 07:21

    ‘벽오동’을 심는 이유는 ...... ‘봉황’을 보겠다는 것..... 이듯이.

  • 21.10.12 07:25


    ........ 부처님께서 ....... 우리 중생들에게 <아비담마(abhi-dhamma, 對法)를 강조>하시는 뜻은 ‘해탈과 열반[=봉황, =심해탈과 혜해탈]’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 21.10.12 07:27

    @아위자
    결국 ........ <심은 어디에?>........라는 화두가 .......... 우리 중생들에게 주어진 <화두>가 아닐까요?

  • 21.10.12 07:31

    @아위자

    心은 항상 <法>을 직접 경험하면서 .... 삶을 영위하고 있다.

    즉 ........ <색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색법'이라는 '法'은 작접적으로 경험하면서> .......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21.10.12 07:33


    '이크벨'님의 ............ <화두>를 .......... 메모의 글을 보면서 ..............몇번이고 반복해 보면서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모든 중생들의 .......... 궁굼점.

  • 21.10.12 07:36


    <初發心時 變正覺>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만 ....... 언제가 되어야 ‘정각[=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이르게 될까요?

  • 21.10.12 07:37

    @아위자
    얼마나 더........... <무상, 고, 무아>를 체험해야만 ....... 이 <화두>가 타파 될까요?

  • 21.10.12 07:40

    @아위자
    왜? ........ 부처님께서는 ........ 중생들이 <심(citta)을 묻는데>도 손가락은 <法(dhamma)을 가르치실>까요?

  • 21.10.12 07:46

    @아위자 아무리 .......... 法(dhamma)이 <心의 거울>이라고 해도.......... 거기에 비친 것은.......... 온갖 ,,,, 相(nimitta)들 뿐이거든요........ 그 相들이 非相임을 見한다면 ....... 그것이 바로 <부처님을 뵙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이 뭐꼬?"

  • 21.10.12 07:47

    @아위자
    혹시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21.10.12 08:18

    @아위자 ㅎㅎ 무생지를 얻을 때 까지 아닐까요? ㅎㅎㅎ

    법의相 이 如임이 나타날때 까지요... ㅎ

  • 21.10.13 07:54

    @물마 '있는 그대로' 즉 오염의 정화에 대한 심 체득이지요.

  • 21.10.12 09:00

    ‘부처님 오신 날’ 특집 방송에서 불교를 한 글자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성철스님의 답변은 ‘心’이었다고 합니다.

  • 작성자 21.10.13 01:57

    아위자 선생님, 우문에 현답이라고, 저의 질문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작성자 21.10.13 02:25

    "法(dhamma)이 <心의 거울>" 이라 표현은 맛지마니까야 어딘가에 이와 유사한 법경이라는 표현이 있는 듯한데,
    아쉽게도 거기 나오는 법경이 무엇을 비추기 위한 거울인지 까지는 나오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것이 심을 비춘다는 표현만 있어도 불교가 이렇게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아위자님이 내린 '법은 심의 거울'을 제 식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법은 일종의 거울인데, 그 거울은 심을 비추고(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심의 거울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데, 누가 나에게 손거울 주면서, '이건 니 거울이야' 라고 말하면, 그 거울은 나를 비추고 반영하는 용도이듯이...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나 자신이 아니듯........
    거울에 반영된 심의 모습도 심 자체는 아니고, 특징, 니미따 같은 거라고 이해합니다.

  • 작성자 21.10.13 02:27

    그런데......그 니미따는 심을 반영하는 니미따 라고 할 수 있지만, 심만 반영하는 니미따는 아니라고 봅니다. 색적인 기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법은 심의 거울이라고 하는 표현은 반만 와닿습니다.

    물마님 표현에 따르면, 심과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체법이 나타나는데, 법이 꼭 '심'의 거울이라고 심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에 방점을 찍다보니, 니미따도 심과 관련시켜 볼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죠. 거울에 비치 니미따는 심이 대상과 부딪치면서 튀어져 나온 것 이라고 봅니다.

    법은 심을 반영하는 것 외에도 대상을 반영한다고 봄이 어떨지요?
    법은 심과 대상 등 일체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뭐 이런 식으로....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21.10.13 07:57

    각묵스님 글
    3.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불교술어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의 범어 원어를 살펴보면, 심(心)은 citta(Sk. citta)이고, 의(意)는 mano(Sk. manas)이며, 식(識)은 viññāṇa(Sk. vijñāṇa)이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경들에서는 주로 ★생각하는 그 자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이나 감각장소[處, 入,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나타난다.
    識으로 옮긴★viññāṇa(vi분리하여 + √jñā, to know)는 여섯 감각 장소[六內處]와 여섯 대상[六外處]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6가지 알음알이[六識]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경들에서는 이렇게 심․의․식의 용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여러 초기경에서는 ‘★안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으며, 다른 몇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m

  • 21.10.13 07:59

    @mindsati aṁ vijānāti - S.v.451)”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노[意]를 통해서 법(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동의어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의 셋을 같은 것이라 한결같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완전히 동의어로 쓰인다.

  • 21.10.13 08:01

    @mindsati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이를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음은 여러 심리현상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안다.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하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 7가지와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해로운 심리현상 14가지와 유익한 심리현상 25가지의 총 52가지 심소법들을 들고 있다.
    특히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곱 가지 심리현상들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7가지 마음부수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 觸)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 受)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ññā, 想)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 21.10.13 08:03

    @mindsati 넷째, ★의도(cetanā, 意思)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 心一境, 定)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命根)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作意)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 일곱 가지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임금이라면 일곱 가지는 최측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일곱은 항상 마음과 같이 일어나고 마음과 같이 멸한다.

    4.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초 기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오온의 화합 혹은 무더기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독립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몸(물질, 色, rūpa)의 무더기(蘊, khandha)와 ★느낌(受, vedanā,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의 무더기와 ★인식(想, saññā, 이성적이고 지적인

  • 21.10.13 08:05

    @mindsati 측면)의 무더기와 여러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a, 오온의 문맥에서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며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뜻함)의 무더기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수와 상과 행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는 것)의 무더기가 함께 뭉쳐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薀]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인 것이다.(kckim 아나빠나 사띠 정형구, 색.수.상.행 등의★♥마음 형성작용들citta-saṅkhāra 과 근경(형성).식viññāṇa을 마음에 경험, 명색의 일어남이 마음의 일어남)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는 마음(citta/viññāṇa)과 정신(名, nāma)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신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즉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심리현상 상카라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인데 정신 가운데서 ★대상을 아는(요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음알이[識]라하고 마음[心]이라한다.
    ★ 마음(알음알이)은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行]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了別]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우리의 정신적 영역 가운데서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을

  • 21.10.13 08:10

    @mindsati 뜻할 뿐이지 ★마음이 우리의 정신영역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초기불교는 밝히고 있다.
    ㅡㅡㅡ
    이처럼 심.의.식 증장이 마음을 보는 지혜이고,
    소위 '법은 심의 대경'이라고 할때의 막연한 '거울' 보다는 훨씬~구체적이므로 좋지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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