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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보호를 약속함
슥 10:8-12
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9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0:8-12 / 내가 휘파람 소리로 그들을 불러모으겠다. 내가 그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남은 사람이 적을지라도 다시 옛날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9) 내가 비록 그들을 세계 만민들 속에 흩어 놓았으나 그들은 항상 나를 기억하고 자기들의 자녀들과 함께 살아 남아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데려오고, 앗수르 땅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길르앗과 레바논 땅에 다시 정착시키겠다. 그래도 그들 모두가 살기에는 땅이 좁을 것이다. 11) 그때에 유다 백성은 바다를 건너 애굽으로 들어갈 것이며, 주께서는 바닷속에서 물결을 뒤로 밀치고 나일강의 깊은 곳들을 말려서 그들의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앗수르의 우월감이 무너지고, 애굽의 자주권이 소멸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12) 그들의 힘은 여호와께 있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출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대로 번성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하셨고, 본 단락에서는 주의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8-9) 하나님께서는 양 같은 우리들을 향해 계십니다. 휘파람을 불며 양떼를 모으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이렇게 선한 목자로 계실 때 백성은 하나님으로 인해 보호 받고 그 속에서 번성하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 같은 우리는 늘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목자 곁에 꼭 붙어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만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순한 양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0-12)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일하실 때에는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만국에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와 거할 곳이 부족할 정도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의 원수였던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큰 나라들도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시면 막을 자가 없으며 또 넓은 바다나 깊은 나일 강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앗수르의 교만이나 애굽의 왕권도 하나님 백성의 구출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백성들이 돌아오는데 장애물을 다 제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여 다시 백성들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알고 믿는 믿음으로 강하여 용맹을 떨치는 것입니다(단 11:3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시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견고해지고 용맹하고 강해지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적용: 목자가 휘파람을 불어 양들을 부르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부름과 소리에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약속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심으로 참된 소망을 주십니다. 이 소망을 붙잡고 역사하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 설 교 >
고난의 바다
스가랴 10:8-12, 마가복음 4:35-37 / 이성희 목사
서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에 발표한 소설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줄거리이지만 다시 한 번 되새겨 봅시다. 쿠바의 어느 작은 어촌의 노인 어부 산티아고는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로 떠납니다. 85일째 되는 날에 엄청나게 큰 청새치 한 마리를 발견하고 잡습니다. 이틀 동안 어부는 큰 고기에게 끌려 다닙니다. 사흘 때 되던 날 그는 작살을 던져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가 너무 커서 배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배 옆에 고기를 묶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거대한 청새치를 시장에 팔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는 도중에 상어 떼를 만나 상어가 큰 고기를 다 뜯어 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머리와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 해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다른 어부들이 웅성거렸습니다. “누가 이 거대한 고기를 잡았지?” 거친 바다에서 고생 가운데 잡은 큰 고기는 어부에게 전혀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끊임없는 인간의 도전 정신과 인내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작가의 메시지는 감동을 주었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러나 그는 1961년에 자살하였습니다. 성 전환한 그의 아들은 여성교도소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 동생, 여동생 모두가 자살하는 불운한 가정입니다. 이런 그의 가정의 내력은 패배가 아니라 파괴입니다. 인간은 거친 인생의 바다에서 인간만의 힘으로는 처절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다”고 합니다. 인생은 고난의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는 결코 인간을 위해 잠잠히 있어주질 않습니다. 바다의 풍랑은 쉴 새 없이 불어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마구 흔들어댑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바다를 창조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셋째 날에 물이 한 곳에 모이게 하셨는데 이것이 곧 바다입니다. 창세기 1:10에는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바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인간에 관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에스겔 28:2에는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참 넓고 큽니다.
지구는 유일한 푸른 행성입니다. 물은 지구표면의 75%를 덮고 있습니다. 강과 호수와 바다가 지구표현을 이렇게 넓게 덮고 있습니다. 그 중에 70.8%가 바다인데 3억 6,105만 평방킬로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 바다를 ‘고난의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가 왜 고난의 바다입니까? 괴물이 우글거리는 바다입니까? 왜 성경은 고난의 바다라고 합니까? 인생의 바다는 고난의 바다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무한한 자원의 바다입니다. 바다는 미래의 희망입니다. 앞으로 지구상에서 인류가 개발하고 진출할 곳은 바다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우주로 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바다괴물이 등장합니다. ‘리워야단’이란 괴물입니다. 시편 104:26에는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괴물이나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파괴하려 하고, 범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던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된 것같이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를 탐냅니다. 하나님의 자리 바다를 리워야단이 탐내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10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선민을 불러 모으시는 장면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다윗과 솔로몬시대처럼 번성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포로로 잡혀 갔다가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마치 고난의 바다를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고난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바다이지만 이 바다를 안전하게 지나게 하시고 백성들을 든든하게 하십니다. 이 고난의 바다를 잘 지나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첫째, 고난의 바다의 물결을 치십니다.
스가랴 10:11에는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고 합니다. 고난의 바다는 물결을 일으켜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물결을 치시고 원수를 파멸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가 될 때에 대부분 북방 앗수르로 끌려갔습니다. 일부는 남방 애급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교만한 나라입니다. 이사야 10:5에는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라고 합니다. 왜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까? 그들의 지나친 교만 때문입니다. 애급은 규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규란 임금의 권위이며 권력입니다. 이 말은 왕권의 몰락을 뜻합니다. 애급은 왕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하나님은 여지없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할 때에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라진 바다를 다시 합하여 애급의 병거와 군대를 모두 수장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결을 치셨으므로 원수들이 완전히 몰살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4:16 상반절에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다를 갈라지게 하셔서 마른 땅을 지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센 바다가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애급의 원수들에게는 바닷물을 치셔서 모든 군사들을 몰사하게 하는 무서운 바다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바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마른 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바다에 물결이 없습니다. 세상은 험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평지와 같습니다. 세상은 파도가 엄습하는 바다와 같이 흔들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흔들리는 요람입니다. 아기들이 요람을 흔들어주면 잠을 자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흔들리기에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요동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내 마음 평안해”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때로는 흉흉합니다. 마태복음 8:24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곧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고 하면 바다와 물결은 잔잔하게 됩니다. 거센 이리 같은 바다가 순한 양 같이 변합니다. 물결을 치시는 하나님의 권위 때문입니다.
인생은 고난의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고난을 넘어가게 고난도 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시험이 있지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시험이 있지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고난이 있지만 고난이 유익이 되어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고치십니다.
흔히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병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유익합니다. 고난의 바다라는 병을 주시고, 물결을 치시는 약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신앙인들은 각자가 자신의 여정에서 수없이 경험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사야 43:2에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합니다. 물 가운데 지나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지나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물결을 치시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있고, 시험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또 무슨 복을 주시려는가?” 하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바다에 숨겨놓은 은총을 발견하며 사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허만 멜빌의 ‘레드번(Redburn)’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난생 처음 바다에 나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 아버지는 리버풀의 오래된 지도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리버풀에 가면 이 지도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힘든 항해 끝에 젊은이는 리버풀에 도착하였습니다. 리버풀에 내리게 되면 아버지가 준 지도가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도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지도를 제작한 이후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버풀에 도착해보니 도로의 표지도 없어지고, 거리 이름도 바뀌고, 집들도 사라졌습니다. 힘든 항해 끝에 고난의 바다를 지나왔지만 알지 못하는 고난이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고난의 바다를 지나면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바다라고 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고난은 문자 그대로 산 넘어 산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찬송합니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우리는 고난의 바다에서 살지만 물결을 치신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의 삶을 삽니다.
둘째, 고난의 바다를 지나 견고하게 하십니다.
스가랴 10:12에는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고난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에 숙명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는 은혜입니다. 고난의 바다를 지나지만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십니다.
하늘에 바람이 없겠습니까? 땅에 흔들림이 없겠습니까? 바다에 풍랑이 없겠습니까? 고난의 바다는 인생의 필연입니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고난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 바다에도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에 잠기데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셔서 배를 타고 갔지만 밤새도록 풍랑이 일어나서 가지도 못하고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파도를 발로 밟으시고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치는 바다도 땅처럼 밟으셨습니다. 위험하고 빠지는 물을 땅처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든든합니까? 우리의 바다가 안전합니까? 우람한 산이 우리를 보호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합니다.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흔들립니다. 정말 살얼음같이 견고하지 못한 땅을 밟고 다니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물위를 걸어오게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에 물을 바위처럼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걷는 곳을 견고하게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가볍게 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바다를 지나게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바다를 지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단련하여 강하게 하시려고 고난도 주십니다. 고난도 알고 보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닙니다. 징계 받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시는 자를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여행을 보내라”는 일본의 격언이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지만 여행을 통하여 인생을 배우고 유익한 것을 많이 얻습니다. 우리 아들들이 군대에 갑니다. 군대는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참 좋은 곳입니다. 연약하던 아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 강해집니다. 좋은 것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잘못된 것도 많습니다. 요즘처럼 군대폭력이 심각한 때는 군대도 기피하고 군대 보낸 아들에 대한 걱정도 많습니다. 요즘 군대에서 폭력을 경험하고, 인권유린을 경험하고, 인격모독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건 군대의 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정말 민주적이며, 인간성이 살아 있고 인권이 존재하는 군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이 첫 휴가를 나오면 격려하고, 기도해주고, 휴가비를 줍니다. 그래서 첫 휴가 나오면 주일날 교회는 절대 안 빠지지요. 왜 첫 휴가 나온 아들 병사를 그렇게 격려하고 휴가비까지 줍니까? 그들이 연동교회가 군에 파송한 선교사처럼 살라고 그렇게 합니다. 군에 근무하는 동안 더 견고해지라고 그렇게 격려합니다.
차디찬 북풍에 단련된 나무가 가장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강한 철은 수없이 망치로 쳐서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견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고난과 징계와 아픔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좋게 빚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게 하십니다.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갖은 고난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욥은 나무랄 데 없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 가시고, 아들 일곱 딸 셋의 자녀를 다 데려가시고, 온 몸에 병이 들어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그의 아내까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는 설움을 당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다시 회복하여 이전보다 배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면서 더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연단하셔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게 만드셨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을 많이 하여 일생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지만 그녀를 통하여 낳은 아들을 죽게 하셔서 심한 고난과 뼈를 깎는 회개를 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의 바다를 지나 하나님이 이전 보다 더 견고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욥기 23:10에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욥만의 노래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노래이며 우리 모두의 간증입니다. 고난의 바다의 풍랑을 겪은 선원이 방향을 벗어나지 않고 배를 잘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아드리아 해변 어부들 아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들이 깊은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아내들은 바닷가에 내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찬송가 첫 절을 노래하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아내들은 노래를 다 부른 후 귀를 기울여 둘째 절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바다 저편 파도에 실려 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내들과 남편들은 그렇게 서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가집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노래, 바다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고난을 넘어 평안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세상 바다가 심상치 않습니다. 쉴 새 없이 출렁이고, 요란한 광풍이 불고,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전합니다. 특히 교회에 대한 사회의 도전과, 공격과, 폄하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단은 교회를 강하게 하고, 견고하게 세우고, 개혁하고, 바르게 가게 하는데 유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비판하는 쪽은 심판을 받겠지만 그 비판을 받는 쪽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며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바다거북은 바다에서 해변으로 올라와 모래에 알을 낳습니다. 새끼 거북이 부화하게 되면 모래 언덕을 넘어 바다까지 사투를 벌입니다. 바다까지 가지 못하고 잡아먹히는 것도 있습니다. 바다에 다다르게 되면 새끼 거북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려 가는 생존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서 힘이 생기게 되면 파도를 타고 다닙니다. 파도도 넘어 다닙니다. 연어를 보세요. 강에서 산란한 치어들은 안전한 모천을 두고 거친 바다로 들어갑니다. 큰 바다에 들어가서 단련하고 견고하게 된 다음에 다시 모천으로 돌아와서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칩니다. 거친 바다는 연어로 하여금 모천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길러줍니다.
시편 90:17에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시편기자의 바램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과 발을 견고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결 론
1994년 9월, 아일랜드와 핀란드 사이 해협에서 900명이 탄 유람선이 침몰하였습니다. 침몰할 당시 갑판 위에 있던 29세의 젊은이 켄트 헬스테드는 두려워하는 20세의 아가씨 사라 헤드레뉴스에게 “우리가 살아난다면 스톡홀름에서 저녁식사를 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여 사라는 구명보트를 타고 있었고, 켄트도 탈출하였지만 바다에 빠져 실신하여 표류하다가 구조되었습니다. 사라와 켄트를 추운 밤바다에서 5시간 동안이나 버티게 한 힘은 스톡홀름에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소망은 살게 하는 힘입니다. 약속은 인내의 씨앗입니다. 거칠고 고난이 심하고 삼킬 듯 한 바다이지만 소망이 있으면 마른 땅입니다. 약속이 있으면 풍랑 심한 바다도 유리바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고난의 바다에 소망을 담아 주시며, 고난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바다를 볼 때마다 인생바다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인생바다에서 연단을 통하여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며 우리 인생의 바다가 소망의 바다,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바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그들을 견고케 하리라
스가랴 10:8~12 / 피영민 목사
서론
여러분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의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면 이 성전기초를 놓고서 건축하지 못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 성전건축을 완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숫자도 적고 돈도 없고 권세도 약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하드락’이었습니다. 하드락이 무엇이냐면 하드는 강하다는 뜻이고, 락은 약하다는 뜻으로 강한 자는 약해지고 약한 자는 강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드락의 원리로 유다백성들이 아무리 약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가랴 선지자가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구함으로 능력을 받아 결국 4년만인 BC 516년에 스룹바벨성전을 완공한 것입니다.
오늘 이 스가랴서 10장의 제일 중요한 주제는 인간은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 강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약한 유다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BC 516년 스룹바벨성전을 완공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방해를 해도 다 물리치고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 적용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예수님 초림 때에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그때의 유다 백성들은 매우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속국이었고, 약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한 백성들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라는 말씀처럼 메시아가 유대인에게서 나와 이방인까지 다 구원받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9장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을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스가랴 9장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2-13). 스가랴서 11장의 예언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말합니다. “그것은 핏값으로 받은 것이다. 그것은 더러운 돈이니 성전에 둘 수 없다.”고 말하며 그 돈을 받지 않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땅을 샀습니다. 토기장이의 땅은 가장 싼 땅으로 행려병자, 나그네가 죽으면 그곳을 묘지로 삼는 땅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스가랴서 11장은 유대인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재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타이터투스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고 150만 명이 죽고 다치는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서 9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고, 11장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로마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가랴서 10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고, 그러함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10장의 핵심구절은 12절입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0:12). 여호와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강하게 하는 능력을 주어 그들이 도처에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예수께 돌아오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휘파람을 불어가지고 택한 백성들을 모으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약한 영역이 있습니다. 나는 약한 곳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그것이 가장 약한 것입니다. 약한 영역이 있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영역이 있고 약한 사람이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이 여호와를 의지하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가랴서 10장의 예언인 것입니다. 약해야 거기서 강한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약할 때가 곧 강함입니다. 사람이 강하다고 할 때는 곧 그때가 약할 때입니다. 우리는 오늘 약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약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를 더욱 더 강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Ⅰ. 성도들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이곳에 전구가 있습니다. 전구가 노력을 열심히 하면 불이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다. 그러나 코드를 꽂으면 불이 들어옵니다. 능력의 원천과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구의 능력의 원천은 발전소인 것입니다. 발전소가 없는 전구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의 능력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코드가 꽂히면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의 삶에 흐르게 되지만 단절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강해지는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스가랴 10장에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슥 10:12),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슥 10:6),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슥 10:3). 유다백성들은 이 능력으로 성전도 완공했고, 마카비전쟁에서도 이겼고,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스가랴서 10장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능력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주신다고 말합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슥 10:1). 필요할 때 비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비는 물질적인 필요의 근본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축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슥 10:3). 돌보심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슥 10:5). 임마누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슥 10:6). 죄로부터 구원,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근원이요 구원의 근원이요, 축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약속은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3장 25절에 모세는 죽기 직전에 아셀에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라고 축복합니다. 또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우리 성도들은 독수리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하십니까?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면 독수리 날개가 달려 날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균형 감각이 놀랍고 속도가 빠르고 눈이 좋아 멋있게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한 우리라도 여호와를 앙망하면 독수리 날개가 달려 균형이 있고 힘이 있게 하늘을 날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 가지 위험에 빠집니다. 능력의 원천인 하나님을 잘못 찾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를 돕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자기 안에 잠재능력이 있어 그 능력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능력으로 봄비 때에 비를 내릴 수 있습니까?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번개를 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죄와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능력을 끄집어내려 하지만 능력을 끄집어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은 별거 아닌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은 있어봐야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진짜 강해지는 것은 언제입니까?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능력을 구하는 것만이 강해질 수 있는 원인이요 비결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 나는 약합니다, 아버지 나는 부족합니다. 아버지 나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독수리 날개침 같은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내 인생에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존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한 개에 부딪치게 되고, 그 후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한 능력인 것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다른 원천에서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슥 10:2-3). 사람들이 하나님께 능력을 구해야 하는데 드라빔에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술자에게 구하고 헛된 꿈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드라빔은 조그마한 트로피같이 생겼으며, 각 가정마다 수호신이라고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을 보면 사사시대에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드라빔을 만들어 가정에 두고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강하게 경고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 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렘 29:8). 여러분 점쟁이한테 다니지 마십시오. 복술자에게 가지 마십시오. 복술자는 도구로 점치는 사람들입니다. 사주팔자 점치는 곳에 가지 마십시오. 이것은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꿈에 너무 의존하지 마십시오. 꿈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외에 다른 원천에게 능력을 구하면 능력만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도 같이 오는 것입니다.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슥 10:2). 유리하고 방황하며 곤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의 강도는 어떤 것인가?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의 강도는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95%이고 5%가 모자라니 하나님께 그 5%만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의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도 내 자유의지로 50%를 믿었으니 하나님 은혜 50%만 채워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인 것입니다. 100%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전구가 0.001%노력하면 불이 살짝 들어오고 코드를 꽂으면 확 들어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10장의 능력은 하늘의 기상을 움직이는 능력인 것입니다. 봄비 때에 비를 내리는 능력인 것입니다.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슥 10:3).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일 중요한 능력은 약한 유다백성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휘파람을 불어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슥 10:4).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 이 네 가지 표현은 전부다 메시아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말뚝으로써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싸우는 활로써 원수를 물리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잡은 자로써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약한 유다백성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어도 휘파람을 불어 다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가장 최상의 능력은 택한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하실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슥 10:10). 이 예언들은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에 흩어진 택한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는 영적인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바울이 명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 하나님이 육적인 이스라엘은 버리셨더라도 영적인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유대인들도 택함을 받은 남은자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도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아닌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하나님을 욕하고, 천국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통해서 흩어진 자신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능력은 결국 메시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역사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강하게 하신 결과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세 번째로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강하게 하시는 결과는 무엇인가요? 결과가 12절 후반에 나옵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0:12).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강하게 하신 첫 번째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받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고 환란이 와도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능력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으로 강하게 하시면 사람은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공회사람들이 핍박을 해도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도 며칠 전만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욕했습니다. 요한도 옷 벗김을 당하고 도망을 가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받더니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는 왕래하리라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를 다 행하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증거한다는 말씀이며, 자신의 고백하는 신앙에 따라 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예배를 드리는 성도인 우리들은 모두 약합니다. 약해도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 믿고 간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양 같은 존재이지만 준마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은 약하나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봄비 때에 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소낙비를 주십니다. 약할 때에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우상에게 구하지도 말고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키십니다. 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능력을 주신다는 이 약속을 믿고 간구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목자
슥 10:8-12 / 김태영 목사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비극 중의 하나가 바로 지도자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득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로 인하여 상처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참된 지도자를 소개합니다. 그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스가랴 10장은 그 참된 지도자,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선한 목자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3절에 보면, 백성이 마치 양같이 유리한다고 합니다. 목자가 없는 양떼의 모습입니다. 이는 참된 목자가 없어 백성들이 방황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전쟁의 한 복판에 던져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우리의 승리의 이유가 되시며 큰 능력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당당히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을 이겨내어 승리의 삶을 누리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선한 목자는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목자가 휘파람을 불면 양떼들이 다 모입니다. 그처럼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불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서 바벨론, 앗수르 그리고 전 세계로 흩어졌던 그들을 불러 모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구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여진 그들을 이전에 번성하였던 것같이 다시 또 번성토록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온전한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삶이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진 소유를 잃어버리고, 깊은 고통과 아픔 그리고 어둠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 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더욱 풍성하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 과정까지도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라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선한 목자는 우리를 견고케 하십니다.
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신 다음에 견고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들도 다시는 고통당하지 않도록 견고케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되는 것이 우리 안에 그럴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견고함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견고함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견고해 질 것입니다. 견고하신 하나님, 망대가 되신 하나님, 반석이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우리의 인생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참된 지도자 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 이십니다. 인도자 없는 세상, 지도자를 잃어버린 세상, 그러나 우리는 지도자 상실의 시대에서 염려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완전한 지도자,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바라봄으로 견고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은 삶의 행복을 고백하며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선한 목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승리합니다. 인생 살아가는 동안 승리의 이유가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그 한 분만을 신뢰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며 온전한 회복을 이루고, 흔들림 없이 견고히 서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인도하시는 예수
슥 10:8-12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지도자가 필요하며 지도자에 따라 그 공동체가 어려움과 평안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절대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문제점입니다. 또한 믿을 수 있는 신의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아픔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새롭게 시작하려 했지만 그들을 바르게 인도해 줄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순간순간 마다 지도자로부터 받은 상처와 배신이 그들을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도자들의 욕심에 따라 행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백성들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다시 번성케 회복 시키시며 많은 나라들 가운데 견고케 하시는 목자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스가랴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6절)
양은 원래 방향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은 나갔다 하면 자기 우리를 찾아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양은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목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자구책이 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그냥 공격을 하면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양에게는 돌보아 줄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했을 때는 선한 목자를 목자라고 하는 것이고 삯군은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고 우리가 더럽혀 졌을 때 우리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지쳐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지만 긍휼이 여기셔서 우리를 지켜주시되 버리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버리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 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둘째 :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8절)
목자가 피리를 불면 양들은 목자에게로 몰려듭니다.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불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불러 모아진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들이 잘못하여 흩었지만 그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 때 그들이 다시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선한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회복은 더 아름답고 풍성한 삶입니다.
11절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는 모든 장애물들을 모두 없애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고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모두 이루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통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 우리를 견고케 하십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2절)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신 다음에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다 회복되면 감사하고 헌신하는데 그것도 1년 이상 가지 않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흐려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견고하게 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목자로 삼는 사람들을 견고하게 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견고함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우리가 더 견고하게 이 땅 가운데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의지하는 척 해봐야 우리의 삶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도자가 없는 세상, 지도자가 없는 세상, 지도자의 신뢰를 잃어버린 이 땅의 모습이지만 우리의 지도자 하나님은 신뢰할 만합니다.
우리의 참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