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의 날’에 시작하는 농사일
내일이 음력 2월 초하루입니다. 이때쯤 날이 풀리고 한 해 농사가 시작됩니다. 올해는 계절이 늦은 감이 있지만 예년 이맘때면 논두렁에서는 아지랑이가 올라가고, 양지쪽에는 냉이와 벌금다지가 파랗게 자랐습니다. 보리밭에는 제법 파릇파릇 싹이 자랐었지요. 부지런한 까치들은 둥지를 틀려고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어릴 적에는 이날을 ‘머슴의 날’이라며 마을 젊은이들이 일꾼들과 풍물을 치며 한바탕 신나게 놀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마을 회관이나 마당이 넓은 집에 모여 일꾼 중 한 명이 ‘썩은 새끼줄로 목을 매는’ 시늉을 합니다. 새끼줄을 건 사람이 몸을 비틀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 모인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립니다. 그가 코미디언 기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상한 몸짓으로 웃음을 더 자아냈습니다.
한바탕 놀이가 지나가면 무리를 지어 고샅을 다니며 ‘마당밟기’처럼 집집을 순례합니다. 한쪽에선 울타리를 잡고 우는 시늉을 합니다. 그럴듯하게 곡을, 아예 통곡을 흉내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구경꾼들은 박장대소했습니다. 집집마다 그들에게 떡과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냈습니다. 농사철에 힘들 것을 생각하면서 갖는 마지막 휴식이며, 머슴들의 잔칫날입니다. 긴 겨울을 지나 힘든 농사일을 시작하는 마을 공동행사입니다.
아이들도 덩달아 신납니다. 아이들은 주머니에 볶은 콩을 한주머니 넣고 다니며 먹었습니다. 영양분과 고소한 맛이 있는 콩은 별다른 주전부리가 없었던 아이들이 선호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붙잡아 부스럼이 났는가 머릿속을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부스럼이 났으면 “대보름날 부럼을 깨지 않았구나”며 꿀밤을 줍니다. 전날 어머니와 누나는 가마솥에 콩을 볶았습니다. 나무주걱으로 저으며 “쥐 잡자, 쥐 잡자”며 흥을 돋웁니다.
그러면 집 안이나 밭에 쥐가 몰려오지 않고, 두더지가 밭도 파헤치지 않는다는 일종의 ‘뱅이*’였지요. 하긴 당시 집 안 천장은 쥐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조용한 밤중에 천장에서 ‘우다다닥’ 소리가 들리면 모든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비를 들어 천장을 한두 차례 두들기면 겁에 질린 쥐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어찌 그리도 쥐가 많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머슴들은 거나하게 취해 마을을 돌다가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옵니다. 대보름날처럼 멍석을 깔고 윷놀이를 시작합니다. 주로 막걸리 내기였습니다. 지는 쪽이 이기는 쪽에게 막걸리를 사야 합니다만 술을 사는 이는 주인들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들이 머슴들에게 미리 준비한 옷 한 벌을 내줍니다. 일종의 작업복 증정입니다. 밥상에는 고봉밥이 올라옵니다. 아낙들은 고봉밥을 푸는 기술(묘기)이 필요했습니다. 새며느리들은 고봉밥 푸는 방법을 시어머니나 시누이에게서 전수받았습니다.
머슴의 날은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되길 비는 일종의 기원제 형식이었습니다.
필자는 금년 소품종 다량 생산을 해보려 합니다. 봄에 나는 나물들은 새봄이면 저절로 나니 그대로 두고, 밭에 모종을 하거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줄일 계획입니다. 한 종류를 가꾸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물 대기, 제초하기, 퇴비 주기, 햇빛 차단, 온도 조절 등 모든 것이 전체 포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은 일손이 엄청 필요한 노동집약적 농사였습니다. 같은 일일지라도 작물에 따라 시기가 제각각 달라 똑같은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합니다. 먹을 때는 제철 것이라 좋지만 관리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히 병충해 관리가 작물의 가짓수만큼이나 복잡합니다.
주문한 퇴비를 받으라고 문자가 옵니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퇴비를 받으면 땅과 함께 숨쉬기를 합니다. (참고로 완벽하게 부숙된 퇴비는 냄새가 없습니다. 농가에는 해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 공급됩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감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이제 씨앗을 챙길 차례입니다. 지난해 받아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을 점검하고, 모자란 것은 구입합니다. 곧 파종을 준비합니다.
이필영, 아기의 첫 외갓집 나들이, 역사민속학 46,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p.458
*뱅이란 인간을 항상 위협하고 있는 불의의 사고 및 질병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또는 기왕에 일어난 불행한 사태들을 되도록 빨리 소멸시키려는 일종의 주술적 대응이나 방법이다. 뱅이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예방하다’, ‘없애다’, ‘해결하다’, ‘방지하다’, ‘막다’ 등의 뜻을 지닌다. 지방에 따라서 豫防, 防豫, 방법, 방사, 방쉬 등이라고도 불린다. 양밥도 흔히 쓰이는 낱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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