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국제경제 브레인
세계은행 최중경 이사 (경영대학 ’75)
재미서울대총동창회 회보 주필
2005년의 세모를 정리하는 바쁜 일정 때문에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시간을 낸 세계은행의 최중경 이사를 방문한 것은 12월 19일
국제정치의 파워를 상징하는 백악관을 불과 두 블럭 비켜 선 12층짜리 포스트 모던 풍의 수려한 월드뱅크 빌딩 주변은 세계화 반대 데모를 막기 위한 방위벽 등 가설장치가 흉물스러웠으나 막상 건물 메인홀을 들어서자 10층을 넘게 하늘을 처다보고 서 있는 아트리엄이 역시 세계의 부(富)를 거머쥔 아틀라스를 목격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지하층에는 넓은 인공호수가 자리를 잡고 있어 도시 속의 공원을 무색케 한다.
백악관을 취재하면서 항상 지나는 길에 위치한 이 건물을 건축 시작 때부터 눈여겨 보았지만 기자가 막상 세계은행 건물에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중경 이사가 집무하고 있는 30여 평의 넓은 사무실은 11층 745호 실, 펜실배니어 가(街)의 남서쪽의 코너에 자리잡은 이 사무실은 조지 워싱턴 대학과 키 브리지에서 루스벨트 아일랜드을 거처 타이덜 베이슨까지 확 트인 전망이 특히 좋았다.
지난 8월 세계은행 이사로 부임한 최 이사는 서울대 경영대학 (75학번) 출신으로 1979년 행정고시를 거처 재무부에 첫 발을 들여논 이후 여러 부처를 거치는 동안 재정 및 국제경제의 최고 브레인으로 성장, 선배 경제 각료들의 천거로 오늘의 영광을 차지한 명실 공히 서울대의 자랑이자 한국의 자부심이다.
“한국이 월드뱅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오래 전입니다. 60년대 초까지 빈곤국 중 하나였던 우리 나라가 한국전 이후 월드뱅크에 가입해서, 많은 원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월드뱅크가 지원한 국가 중에 가장 성공적인 국가로 일어선 거지요. 우리의 사례가 세계 발전도상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심지어 이 곳에 와서 일하고 있는 저까지도 개발도상 국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훤칠한 키에 전형적 한국의 선비형의 최 이사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제가 처음 부임해서 울포위츠 총재를 만났을 때 한국이 발전한 과정이 (발전도상 국가들에게) 하나의 교과서이기 때문에 앞으로 같이 일하면서 한국의 경험을 통해서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많은 기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그는 밝혔다.
“저는 우리 선배들이 이룩한 업적의 수혜자로서 조심스럽게 저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며 “우리 나라는 다소의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전진의 발걸음을 계속해 왔다는 점이 발전도상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의 모델을 따라갈 수 있을가 하면서 우리의 경험을 배우려고 많은 문의를 해오지요. 그래서 저 역시 후속 개발국가들을 돕는 데 다소나마 기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덧부쳤다.
세계은행, IMF와 더불어 세계경제, 재무질서의 양대 기둥
세계은행(World Bank)은 IMF와 함께 세계 경제, 재무질서를 지지하는 양대 기둥이다. 양 기구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은행은 기본적으로 개발기구인 반면에 IMF는 국가간의 균형 있는 수지(收支)를 유지하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의 생산성 증가를 도모하여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증진하는 것을 주요목적으로 갖고 있으며 설립시부터 첫 20년간은 전력과 교통시설의 보급에 원조액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이와 같은 기간시설사업은 아직까지도 주요기능으로 남아있으나 최근 들어 세계은행은 활동을 다양화하여 최빈개도국의 빈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투자를 강조하며 보건, 가족계획, 영양, 교육, 주택공급등에까지 그 역할을 확산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정식명칭은 World Bank Group이며,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개발협회 (IDA)와 국제금융공사 (IFC), 국제투자보증기구 (MIGA), 그리고 국제투자분쟁해결본부 (ICSID)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은행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은행’이 아니며, 유엔 전문기구의 하나로 184개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본 기자가 입수한 최근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세계은행은 2003년 1백여 발전도상국에 185억 달러의 재정 및 기술지원을 제공했고, 2002년에는62개 저소득 국가 133개 사업에 국제개발 원조로 81억 달러를 제공했다. 또 26개 최다부채국의 부채 총 41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이 밖에 HIV/AIDS퇴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여자 어린이 교육지원 (방글라데시), 보건사업 (멕시코), 독립국가 재건 (동 티모르), 재해복구 사업(인도)을 벌였다.
세계은행은 회원국들의 경제규모에 따른 분담금으로 운영되며, 그 비율은 미국 (16.41%), 일본 (7.87%), 독일 (4.49%), 영국 (4.31%), 프랑스 (4.41%) 순이다. 운영에 관한 최종 결정은 장관들이 모이는 총회에서 채택되며, 집행이사회는 재정국들이 임명하는 위원장과 위원 1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160개국에서 온 경제학자, 교육자, 환경학자, 재정분석가, 문화인류학자 등 1만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3천명은 국가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 발전도상국들의 모델”
최 이사는 한국의 경제가 1960년대의 세계의 1백위권 밖의 빈곤국가에서 1990년 대에 세계경제의 10위권으로 성장하는 기적을 이뤘기 때문에 세계은행의 이사 자리가 한국에 배정된 배경이라며, 60년대에 빈곤했던 나라들이 아직도 그 상태에 머물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제가 보기에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잘 짜인 경제 개발계획, 두번째는 그 플랜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 어떻게 보면 정치적 리더십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가 파이낸스입니다. 누군가 그 플랜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돈을 대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좋은 비지니스 플랜이 있어도 누가 돈을 대주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경우는 세 박자가 다 맞았어요.”
“한국의 다른 개발 도상국가들과 다른 것은 교육열의 의해 상당한 지식이 축적되었다. 모든 국민이 잘 교육되어 있는 상태이지요. 조선시대에도 복식부기가 있었고 2차방정식도 풀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문화역량이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우리가 해방되고 미국식 근대교육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뛰어난 교육열이 20여년 축정된 상태에서 개발계획을 뒷바침하는 역량으로 이어졌지요. 즉 교육이 뒷바침된 좋은 계획, 그리고 리더십이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소위 개발독재라고 했지요. 민주화과정이라든가 다른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던 경제발전의 추진력으로서 평가받아야 할 측면이 있었던 거지요.
“거기에 남북한이 대치된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하나의 이그샘플, 즉 모범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의지가 경제개발에 가장 필요한 화이낸싱을 가능케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만큰 우리 나라가 지정학적인 유리한 고지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우리는 그 화이낸싱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게 다시 없는 행운의 타이밍이 된 거지요. 그것을 저는 교육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88올림픽을 하면서 한국이 국제적으로 떴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음했습니다. 이 때 우리도 이사국을 해야겠다고 주장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89년에 처음
그 후 1997년 한국수출입은행장
“한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은 세계 경제의 양대 기둥인 IMF와 월드뱅크에 동시에 이사가 파견된 것입니다” 라고 그는 강조했다.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원집정제로, 혹은 헤라클레스 기둥으로 불리고 있는 월드뱅크와 IMF의 차이는 무엇일까?
IMF는 처음 환율 안정을 위한 기구였다. 환율과 외환보유고, 국민소득과 물가 등 각국의 거시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를 하는 기구이고, 월드뱅크는 경제개발을 위한 화이낸싱을 하는 기구이 다. IMF가 화이낸싱을 하는 경우는 어느 국가가 외환위기에 처했을 때 제공하는 긴급자금 지원에 국한된다.
세계은행은 주로 각국의 인프라 스트럭쳐, 즉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산업발전에 불가결한 세 가지 요소인 통신, 교통, 에너지의 인프라에 건설에 집중적으로 자금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경제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기구가 월드뱅크다.
“우리 월드뱅크에서 한국은 이 기구가 제공한 장학금을 받은 학생 가운데 베스트 스튜던트로 통했습니다. 한국은 89년 월드뱅크의 이사직을 배정받으면서 수혜국의 베스트 스뉴던트가 이제는 인스트럭트로 발돋음한 것이지요. 이 때 우리 나라는 수혜국에서 지원국이 되었습니다. 삼년에 1억달러씩 제공합니다.” 최 이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치 교수가 강의하 듯 설명해 나간다.
세계은행과 IMF가 세계화 반대시위의 타깃이 되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세계화 반대 시위를 월드뱅크와 IMF에 와서 하는데 이 두 기구가 2차대전 이후에 세계경제의 양대 축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상징성 때문에 와서 자주 찾아와 시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세계화의 핵심은 세계무역기구(WTO)이거든요. 소위 무역자유화, 투자자유화와 관련된 것이데,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규제완화나 무역자유화 등에 대해 우리가 전혀 관계를 안 한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정책권고에 국한되었거든요. 하지만 공식적으로 투자나 무역의 자유화 등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기구는 WTO입니다. 그러나 월드뱅크와 IMF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우리가 타깃이 되는 것 같습니다.”
교육과 재정, 경제관직의 섭렵
최 이사는 시흥이 서울데 편입된 1969년 교육평준화 실시에 의해 설립된 시흥 강서중학교의 일회 입학자로서 그는 스스로를 ‘평준화 일세대’라고 부른다. 신설학교였기 때문에 우수한 교사들이 배정되었다. 이 점을 강조한 이유는 평준화 이후의 경기고를 나와 1975년 관학캠퍼스의 일세대로 서울대를 입학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상대가 없어지고 경영, 법, 의과대학 등 특수대학이 독립했을 때 경영대학에 진출해서, 경영대학원까지 마쳤다.
대학 4학년차에 행정고시 22회에 합격했다. 재무부에서 1년 수습을 거쳐 1980년 5월 발령을 받아 일년 후 군에 입대해서 육군장교로 4년 복무를 다 마치고 재무부에 복귀한 그는 관세국에 있다가 사무관 때는 증권국, 이재국에서 일하다가 승진해서 국무총리실로 옮겼다.
이 때 그는 호놀루루에 위치한 하와이 주립대학에 유학,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친고 귀국, 금융연구원을 잠깐 거친 후 나웅배 부총리실의 비서관에 발탁되었다. 이 지위에서
이 자리가 바로 IMF와 월드뱅크의 관련업무를 다르던 요직이었다. 소위 IMF 위기와 맞물렸는데 그 때 그가 IMF 담당관을 지내면서 IMF 경제지원을 얻기 위한 모든 실무를 총괄했다.
그가 지난 8월 월드뱅크의 이사로 오기 전 2년 2개월 동안 그는 국제금융국장으로 사실상 한국의 세계 금융의 창구역을 했다.
국내금융과 국제금융을 두루 섭렵한 최 이사는 특히 환율, 외채, 및 IMF, 월드뱅크, 아시아 개발은행 등 지역 개발은행, OECD와 WTO의 금융협상 관련 업무, APAC 등 지역협력체 등 국제 금융 내지는 국제기구들과의 협력 업무를 폭넓게 다룬 한국의 몇 안 되는 경제 브레인이다.
대북관계, “기본적 시나리오 가지고 있다”
이락의 선제공격론을 입안했고, 이라크 침공과 중동민주화론을 강력하게 주창하는 등 부시 행정부 1기의 대외정책 기초를 세운 인물인폴 울포위츠가 지난 봄 세계은행 총재로 발탁되었을 때 이 것은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재건과 중동 민주화에 촛점을 둔 대외정책의 한 맥락으로 해석되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지는 세계은행을 부시 행정부의 중동 민주주의 확산 정책의 옹호자로 만들려는 공격적인 조처라고 전했다.
울포위츠는 예일대 교수를 지낸 뒤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인도네시아 대사,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을 지내면서 미국 내 강경파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그는 “국제분쟁 해결은 군축이 아니라, 빈곤 타파와 경제발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세계은행 총재에 취임하면 안보와 빈곤 문제의 연관성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신문과의 회견에서 세계은행의 자원 배분은 정치적 고려와 경제적 고려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 논리는 앞으로 “민주와 자유의 고취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 세계은행의 울포취츠 총재를 통해 널리 전파될 것은 명약관하하다.
이와 관련하여, 6자회담의 성공적 회담결과 이 후의 세계은행의 북한에 대한 대처방안은 어떤 것인지로 화제를 돌렸다.
“북한이 앞으로 개방사회로 나와서 대외원조를 받게 된다고 하면, 결국 월드뱅크가 국제적 지원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IMF쪽에서는 통계, 인프라 구축 문제 등에 지원을 하게 될 것이고, 월드뱅크는 직접 자금지원을 하게 되는 것을 예상할 수 있겠지요. 그러자면 자연히 월드뱅크의 역할이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입니다만” 이라고 전제하면서, “한국 정부는 월드뱅크하고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한국정부가 부담해야 할 부분은 한국 정부가 부담할 것이고 월드뱅크에 지원요청을 하면 거기에 따른 타당 조사를 해서 돈이 나가게 됩니다. 미국과 일본의 자금지원도 가능해 질 겁니다.”
“그 전체를 코디네이트 하는 기관이 우리 월드뱅크입니다. 월드뱅크도 나름대로 가상시나리오를 생각하고 동서독 사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축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아직 6자회담이 분명히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그 성과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트리거 포인트까지 온 것은 아니지요” 라며 그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북한이 과거에 지나치게 억매이는 자세를 버리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를 희망하는 긍적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북한과 인게이즈먼트를 시작하자 라는 트리거 포인트에 이르면 어떤 구체적 안이 나오겠지요. 저로서도 나름대로 월드뱅크의 매니즈먼트, 특히 동아시아담당 부총재 등과 그런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동안 그런 인게이즈먼트가 시작이 되면 저의 이사실은 굉장이 바빠지겠지요. 저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긍정적 방향으로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많습니다.”
최 이사의 부친
부인 김치랑과의 슬하에 외대 스페인어과 1년 재학 중 도미하여 현재 조지타운대 언어연수과정에 다니는 지현, 랭리 하이스쿨 9학년 서문, 이렇게 두 딸과 처칠로드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원제를 두고 있다. 두째 딸 서문이 얼마전 중앙일보에 올에이(All-A) 학생으로 기사화 되었다고 자랑했다. 가족을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 얼핏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 역시 공부만 파던 ‘순진한’ 서울대 인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