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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hāvaggo ♦ 10. ānāpānasaṃyuttaṃ (SN 54.1)
♦ 1. ekadhammavaggo ♦ 1. ekadhammasuttaṃ (SN 54.1)
제54주제(S54) 들숨날숨 상윳따 Anāpāna-saṃyutta
제1장 하나의 법 품 Ekadhamma-vagga 하나의 법 경(S54:1) Ekadhamma-sutta
♦ 977. sāvatthinidānaṃ .
tatra kho ... pe ... etadavoca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311]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ekadhammo, bhikkhave, bhāvito bahulīkato mahapphalo hoti mahānisaṃso.
katamo ekadhammo? ānāpānassati .
kathaṃ bhāvitā ca, bhikkhave, ānāpānassati kathaṃ bahulīkatā mahapphalā hoti mahānisaṃsā?
3.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106) 앉는다.
106) '전면에 마음챙컴을 확립하여'는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를 옮긴 것이다. 『위방가』는 “이 마음챙김은 코끝이나 입의 표상에(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확립되고 잘 확립되었다(upaṭṭhitā hot supaṭṭhitā)고 해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한 것이다.”(Vbh.252)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위방가 주석서』는 “입의 표상(mukha-nimitta)이란 윗입술의 가운데 부분(uttar-oṭṭhassa vemajjha-ppadeso)이라고 봐야 하나니, 즉 코의 바람(nāsika-vāta)이 닿는(paṭihaññati) 곳을 말한다.” (VbhA.368)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전면(全面 혹은 前面)에(parimulkthaṃ)'는 구체적으로 코끝에나, 숨이 닿는 윗입술의 중간부분에 혹은 인중(人中) 즉 코의 밑과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에라는 뜻이다.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앞으로 수행할/한, 대面 할/한(-mukha) 방향 방법 순서 등에 대해서 - 전반적으로 전체적으로 全(pari-) 부문에 대해서 기억/잊지 않음(sati)을 확립/대기/준비시켜 두고서(upaṭṭhapetvā) -(지금까지 수행한 것을 기초로 혹은 교법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할 (것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熟知(기억을 확고하게 준비)하고서. 4념처 혹은 호흡념은 기본적으로 삼매(定蘊) 수행이다. 즉 內로 삼매에 드는 수행이다. 이것을 외부 공기(大氣)가 자신의 콧구멍 주변이나 얼굴(面相-mukha-nimitta)과의 접촉에 대해서 집중하는 수행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즉 호흡념을 身(제5근)과 제5경(触)에서 일어나는 觸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단적인 예가 되는 주석이 본 경의 [137) … 그 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入,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SA.iii.270~271)] 호흡을 제5境(外處인 触處)로 설명한 주석이다. 즉 호흡이란 대기 중에 있는 산소 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설명은 위 [코끝이나 입의 표상에(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확립되고 잘 확립되었다] 라는 표현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 된 것뿐이다. 유명한 논서로부터 잘못된 주석의 단초가 발생한 경우이다. ------------------------------------------------------ 촉입은 外처(밖)이다. 호흡은 內(안)이다. 4념처(호흡념)은 밖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自燈明 - 안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수행이다. 흔히들 呼吸을 '나' 밖에 존재하는 공기(대기)를 들어 마시고 내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身行 혹은 色身에 대한 관찰이다. 그래서 호흡은 (色)身들 중에서 풍대에 속하는 身[rūpakāya]을 지켜보는 수행이다. 이하 受도 心行의 (내입과의 觸생) 受이지 외입과의 (觸생) 受가 아니다. '느낌들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주석서처럼 락/고/비고비락- 중에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느낌은 '內'와의 촉에 의한 것과 '外'와의 촉에 의한 것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受는 삼사화합 觸生受이다. 또한 名色에서의 名에 대한 느낌과 色에 대한 느낌으로도 설명된다(대인연경).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 pe ...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의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해 생기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는 色(호흡)에 대한 느낌이다. 이러하거나 저러하거나 모든 느낌들은 하나로 합류한다. |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 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107)
107) 다음 §5에 나타나는 16단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은 『맛지마 니까야』「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出入息念經, Ānāpānasati-sutta, M118)의 핵심이다. 이 16단계는 『청정도론』 VII.146~237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출입식념경」(M118)과 『청정도론』의 설명을 엮어서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 (대림 스님 역, 개정3판, 2008)를 출간하였으므로 참조할 것.
아래 「낌빌라 경」(S54:10) §§7~10에도 나타나지만 이 16단계는 다시 크게 네 개로 구성된 네 무리로 구분이 되는데 이 각각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의 각각에 배대된다. 그래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에 대한 관찰(kāya-anupassanā, S54:10 §7)에서부터 시작하여 느낌(vedanā)에 대한 관찰(S54:10 §8)과 마음(citta)에 대한 관찰(S54:10 §9)을 거쳐 법(dhamma)에 대한 관찰(S54:10 §10)로 종결이 된다.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5.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108)
④ '몸의 작용[身行]109)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312]
108)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온 들숨의 몸의 … 온 날숨의 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내쉬리라고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지혜와 함께한 마음으로 들이쉬고 내쉰다.”(『청정도론』 VID.171)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이 문맥에서 몸(kāya)은 호흡 그 자체를 나타낸다.
109)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 kāya-saṅkhā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 본서 제4권 「까마부 경」 2(S41:6/iv.293) §5에서 까마부 존자는 찟따 장자에게 “장자여, 들숨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이고 이런 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의 복주서인 『빠라맛타 만주사』도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 kāya-saṅkhāra] 이란 들숨날숨을 말한다. 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몸의 작용이라 부른다.(Pm.220)”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서 제3권 「앗사지 경」(S22:88) §7의 주해도 참조할 것.
sabbakāya: 全身이란 호흡의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身 즉 色에 속하는 것 모두(kāyagata ,M119 참조) - 거친 욕계의 몸에서 미세한 색계의 색까지. |
‘pīti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6.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110)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111)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112)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10)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pīti-paṭisaṃvedi).' 그것은 대상을 통해서와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ārammaṇato ca asammohato ca)이다. ① 그는 희열이 있는 두 禪 [즉, 초선과 제2선]에 든다. 그가 그것에 드는 순간에 禪을 얻음으로써 대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②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청정도론』 VIII.226~227)
즉 ①은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희열이고 ②는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 · 고 · 무아의 특상(lakkhaṇa)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희열을 말한다.
111)『청정도론』은 '행복을 경험하면서(sukha-paṭisaṃvedi)'도 희열의 경험과 같은 방법으로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①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행복과 ②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 · 고 · 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행복을 말한다. 다른 점은 행복은 초선부터 제3선까지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청정도론』VIII.229)
112) “마음의 작용[心行, citta-saṅkhāra]은 느낌의 무더기[受蘊]와 인식의 무더기[想蘊]를 말한다.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의 작용을 경험한다(cittasaṅkthāra-paṭisaṃvedī).'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VIII.229)
‘citt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113) “'마음을 경험하면서(citta-paṭisaṃvedī)'란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을 경험한다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VIII.231)
114)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abhippamodayaṃ cittaṃ)': 여기서는 삼매와 위빳사나의 두 가지 방법으로 기쁘게 한다. 어떻게 삼매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pīti)이 있는 두 禪에 든다. 그 증득의 순간에 그 禪과 함께한 희열로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어떻게 위빳사나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禪과 함께한 희열을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청정도론』 VIII.232)
115) 『청정도론』 VIⅢ.232는 두 가지로 '마음을 집중하면서(samādaha citta)'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네 가지 禪에 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찰나삼매(刹那三昧, 순간적인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刹那心一境性, khaṇika-citt-ekaggatā)를 통해서이다. 찰나삼매는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할 때 그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통찰하는 것”이라고『청정도론』 (VIⅢ.232)은 정의하고 있다.
116)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vimocayaṃ cittaṃ)': 초선을 통해 장애들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제2선을 통해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로부터, 제3선을 통해 희열로부터, 제4선을 통해 행복과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혹은 그가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은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무상의 관찰로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으로부터, 괴로움의 관찰로 행복하다는 인식(sukha-saññā)으로부터, 무아의 관찰로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으로부터, 염오의 관찰(nibbidanupassanā)로 즐김(nandi)으로부터, 탐욕이 빛바램의 관찰로 탐욕(rāga)으로부터, 소멸의 관찰로 일어남(samudaya)으로부터, 놓아버림의 관찰로 가짐(ādāna)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청정도론』 VIII.233)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8.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117)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118)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119)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20)
117) “'무상을 관찰하면서(anicca-anupassī)'라고 했다. 여기서 무상한 것(anicca)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uppāda-vay-aññathatta-bhāvā)이다. 무상한 성질(aniccatā)이란 그들에게 존재하는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긴 무더기[蘊]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머물지 않고 순간적인 부서짐(khaṇa-bhaṅga)을 통해 부서진다(bheda)는 뜻이다. 무상의 관찰이란 그 무상함으로 물질 등에 대해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청정도론』 VIII.234)
118)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virāga-anupassī): 여기 탐욕의 빛바램은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과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khaya-virāgo ca accanta-virāgo ca)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이란 형성된 것들[行]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것(khaṇa-bhaṅga)이다.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이란 열반이다.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함이란 이 둘의 관찰로 일어나는 위빳사나와 도(magga)이다. '소멸을 관찰하면서(nirodha-anupassī)'라는 구절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청정도론』 VIII.235)
119) “여기서도 놓아버림(paṭinissagga)은 두 가지이다.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pariccāga-paṭinissaggo ca pathandana-paṭinissaggo ca)이다. 놓아버림의 관찰이란 놓아버림 그 자체가 관찰(anupassanā)이다. 이것은 위빳사나와 도의 동의어이다.
① 위빳사나는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과보로 나타난] 무더기들과 업형성력(abhisaṅkhāra)들과 함께 오염원(kilesa)들을 버리기 때문에 ㉡ 형성된 것에 대해 [무상 등의] 결점을 보고 그 [형성된 것의] 반대인 열반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② 도는 ㉠ 근절(samuccheda)로써 무더기를 생기게 하는 업형성력들과 함께 오염원들을 버리기 때문에 ㉡ 열반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이 두 [위빳사나의 지혜와 도의 지혜]는 각각 이전의 지혜를 계속해서따라 보기 때문에 관찰[隨觀]이라 한다.”(『청정도론』 VIII.236)
120) 『청정도론』의 설명에서 보듯이 ⑫번째까지의 앞의 세 번째의 네 개조까지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방법이 둘 다 적용되었지만 이 네 번째의 네 개조는 위빳사나의 방법만이 적용되고 있다.
evaṃ bhāvitā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
evaṃ bahulīkatā mahapphalā hoti mahānisaṃsā”ti.
9.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paṭhamaṃ.
♦ 8. padīpopamasuttaṃ (SN 54.8) 등불 비유 경 (54-8) Padīpopama-sutta
♦ 984. “ānāpānassatisamādhi, bhikkhave, bhāvito bahulīkato
mahapphalo hoti mahānisaṃso.
kathaṃ bhāvito ca, bhikkhave, ānāpānassatisamādhi
kathaṃ bahulīkato mahapphalo hoti mahānisaṃso?
♦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 pe ...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evaṃ bhāvito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samādhi
evaṃ bahulīkato mahapphalo hoti mahānisaṃso.
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4. “비구들이여, [317]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로지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 “ahampi sudaṃ, bhikkhave, pubbeva sambodhā anabhisambuddho bodhisattova samāno
iminā vihārena bahulaṃ viharāmi.
tassa mayhaṃ, bhikkhave, iminā vihārena bahulaṃ viharato
neva kāyo kilamati na cakkhūni; anupādāya ca me āsavehi cittaṃ vimucci.
5. “비구들이여, 나도 깨닫기 전,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러한 머묾으로 많이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러한 머묾으로 많이 머물 때 몸도 피로하지 않았고 눈도 피로하지 않았고
나의 마음도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였다.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neva me kāyo kilameyya na cakkhūni, anupādāya ca me āsavehi cittaṃ vimucceyyā’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고125) 나의 마음도 번뇌들로부터 해탈하게 되기를'이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126)
125)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고(neva kāyopi kilamati na cakkhūni)'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다른 명상주제를 통해서 수행을 하면(kammaṃ karonta) 몸도 피로하고 눈도 혹사당하기(vihaññanti)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몸을 네 가지 근본물질인] 요소별로 관찰하는 명상주제(dhātu-kammaṭṭhāna)에 대해서 수행을 하면 몸이 피로하게 되고 기계(yanta)에 던져진 것처럼 압박감을 느끼게(pīḷan-ākāra-ppatta) 된다. 까시나의 명상주제(kasiṇa-kammaṭṭhāna)에 대해서 수행을 하면 눈이 쑤시게 되어 피로하게 되고 그 수행에서 나오면 마치 넘어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patan-ākārappatta) 된다. 그러나 이 명상주제에 대해서 수행을 하는 자는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혹사당하지 않는다.” (SA.iii.264)
126) “그러면 이 성스러운 자의 성취(ariy-iddhi, 본경 §6을 주석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음.) 등의 구분(pabheda)을 왜 설하셨는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ānisaṃsa-dassan-attha)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자의 성취나 네 가지 색계선이나 네 가지 무색계선이나 멸진정을 원하는 비구는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시(nagara)를 점령하면 사방에서 생산되어 사대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bhaṇḍa)들도 점령하게 되고 그 지방(janapada)도 점령하게 되는 것처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수행하게 되면 이러한 성스러운 자의 성취의 구분을 얻는 이익이 있게 된다. 수행자(yogi)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로 [경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nipphajjati)는 이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SA.iii.264~265)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에 의해서 [sādhukaṃ manasi kātabbo]가 가능하다. 作意의 집이 법의 집이라 표현하든지 憶念의 집이 법의 집이라 표현하든지 전개되는 과정은 동일하다. <憶念sati → manasikāra作意> 아래 [gehasitā sarasaṅkappā]이 66에 속하는 법이다. |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ye m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eyyu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6.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appaṭikūle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paṭikūle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paṭikūle ca appaṭikūle ca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paṭikūle ca appaṭikūle ca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appaṭikūlañca paṭikūlañca tadubhayaṃ abhinivajjetvā upekkhako vihareyyaṃ sato sampajāno’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나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318]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 이 둘을 다 버린 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eyyaṃ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yyaṃ,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7.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8.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319]
‘무한한 알음알이' 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원한다면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나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 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무르리라.'
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 “evaṃ bhāvite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samādhimhi evaṃ bahulīkate,
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duk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adukkhama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9.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공부]지을 때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127)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127) 여기서부터 본경의 마지막까지는 본서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2(§12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와 제3권 「앗사지 경」(S22:88) §§11~13(§13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과 제4권 「간병실 경」1(S36:7) §§9~11(§11의 비유 부분은 본경과 다름)에도 나타나고 있다. 경문에 대한 설명은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10~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만일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만일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꿰뚫어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
♦ “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duk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adukkhama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10.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s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ī’ti pajānāti”.
11.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seyyathāpi, bhikkhave, telañca paṭicca, vaṭṭiñca paṭicca telappadīpo jhāyeyya,
tasseva telassa ca vaṭṭiyā ca pariyādānā anāhāro nibbāy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기름을 반연하고 심지를 반연하여 기름 등불이 탄다 하자.
거기에다 어떤 사람이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면 그 기름 등불은 먼젓번의 연료가 다하고
다른 태울 것을 가져다 넣지 않았기 때문에 연료가 없어져서 꺼질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ī’ti pajānātī”ti.
그와 같이 비구는 [320]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 라고 꿰뚫어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aṭṭhamaṃ.
(S54:13)
(i) 몸의 관찰
♦ “yasmiṃ samaye, ānanda, bhikkhu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
7. “아난다여, 비구는
①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kāye kāyānupassī, ānanda,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taṃ kissa hetu? kāyaññatarāhaṃ, ānanda, etaṃ vadāmi yadidaṃ — assāsapassāsaṃ.
tasmātihānanda, kāye kāyānupassī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 들숨날숨이란 것은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몸137)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138) 비구는
그때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37) “'한 가지 [형태의] 몸(kāy-aññatara)'이란 흙의 몸 등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즉 바람의 몸[風身, vāyo-kāya]이라고 나는 말한다는 뜻이다. 혹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라는 이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을 물질의 몸[色身, rūpa-kāya]이라 한다. 그 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入,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SA.iii.270~271)
한편 아비담마에서는 28가지 물질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위 주석서의 인용과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MA.ji.261) 등에서는 25가지 물질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비담마의 28가지 물질의 분류 가운데서 심장토대(hadaya-vatthu)를 제외한 27가지와 일치한다. 아비담마에서는 대상 가운데 감촉(phoṭṭhabba, 觸)을 지 · 화 · 풍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28가지 물질 등은『아비담마 길라잡이』 527쪽 이하를 참조할 것.
138)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a)'라는 것은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바람의 몸이다. 혹은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인 물질의 몸 가운데 어떤 하나인 들숨날숨을 관찰하기(ānāpānaṃ anupassati)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느낌 등의 모든 곳에서 그 뜻을 알아야 한다.”(MA.iii.271)
(ii) 느낌의 관찰
♦ “yasmiṃ samaye, ānanda, bhikkhu
‘pīti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
8. “아난다여, 비구는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324]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vedanāsu vedanānupassī, ānanda,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taṃ kissa hetu?
vedanāññatarāhaṃ, ānanda, etaṃ vadāmi, yadidaṃ — assāsapassāsānaṃ sādhukaṃ manasikāraṃ.
tasmātihānanda, vedanāsu vedanānupassī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受隨視]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 들숨날숨을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39)
139)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sādhukaṃ manasikāra)'이란 희열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긴 것이니, 아름답게(sundaraṃ)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vedanāññatara)'란 세 가지 느낌 가운데서 하나인 즐거운 느낌[樂受, sukha-vedana]을 두고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이 즐거운 느낌[樂受]인가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다만 설명을 위주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마치 “무상에 대한 인식[無常想, anicca-saññā]의 수행에 몰두하고 전념한다.”(「긴 라훌라 교계 경」 N62 §25)는 곳에서는 인식[想, saññā]이라는 이름으로써 통찰지[般若, paññā]를 설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이름으로써 느낌[受]을 설하셨다고 알아야한다.
이 두 번째 네 개조의 첫 번째 구절에서는 희열이라는 제목 아래 느낌을 설했고, 두 번째 구문에서 행복(즐거움)이라 설한 것은 본성에 따라 설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心行]의 두 구문에서 “인식과 느낌은 마음부수이다. 이 법들은 마음과 결합된 마음의 작용이다.” (Ps.i.188)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그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제외하고 마음과 연결된 모든 법들은 마음의 작용[心行]에 포함된다.”(cf. Yam.i.229)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이라는 이름으로써 느낌을 설했다.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이름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여기서 '잘 마음에 잡도리 하는것'이라고 하셨다.”(SA.iii.271)
(iii) 마음의 관찰
♦ “yasmiṃ samaye, ānanda, bhikkhu
‘citt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 pe ... samādahaṃ cittaṃ ... pe ...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
9. “아난다여, 비구는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citte cittānupassī, ānanda,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taṃ kissa hetu?
nāhaṃ, ānanda,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 ānāpānassatisamādhibhāvanaṃ vadāmi.
tasmātihānanda, citte cittānupassī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心隨視]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40)
140)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muṭṭhassatissaas ampajānassa)'라는 구문에서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비구는 들숨날숨의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삼는다(assāsa-passāsa-nimittaṃ ārammaṇaṃ karoti), 그러나 그의 마음은 대상에 대해 마음챙김과 분명히 알아차림을 확립하면서 공부짓기 때문에 그를 오직 마음에서 마음을 관팔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않는 자에게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는 수행(anāpāna-ssati-samādhi-bhāvana)은 없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써 마음을 경험함 등에 의해 그때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고 했다.”(SA.iii.372)
(iv) 법의 관찰
♦ “yasmiṃ samaye, ānanda, bhikkhu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 pe ... virāgānupassī ... pe ... nirodhānupassī ... pe ...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
10. “아난다여, 비구는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dhammesu dhammānupassī, ānanda,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so yaṃ taṃ hoti abhijjhādomanassānaṃ pahānaṃ taṃ paññāya disvā sādhukaṃ ajjhupekkhitā hoti.
tasmātihānanda, dhammesu dhammānupassī bhikkhu
tasmiṃ samaye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아난다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法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 141)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무는 것이다.”
141)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마음이 평온하게 된다.'라고
설한 구문에서 '욕심(abhijjhā)' 이라는 단어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장애(kāma-cchanda-nīvaraṇa)를 설했고, '싫어하는 마음(domanassa)'이라는 단어로 악의(byāpāda)의 장애를 설하셨다.
그리고 이 네 번째 네 개조는 위빳사나로써 설하셨다. 법을 관찰하는 것은 장애 등의 단락으로써 다섯 가지이다.(「대념처경」(D22)에서 법에 마음챙기는 공부[法念處]는 ① 다섯 가지 장애[五蓋] ②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③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 ④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⑤ 네 가지 진리[四諦]의 다섯 단락으로 분류되어 나타난다.) 그중에서 장애의 단락(nīvaraṇa-pabba)이 처음이고, 그 중에서도 이 두 종류의 장애가 처음이다. 이와 같이 법을 관찰하는 것의 처음을 보이기 위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설하셨다.
'버림(pahāna)'이란 무상의 관찰로써 항상하다는 인식[常想]을 버리기 때문에 버림이라는 형태의 지혜를 뜻한다.
'그것을 통찰지로써 보고(tam paññāya disvā)'란 무상, 탐욕의 빛바램, 소멸, 놓아버림의 지혜라 불리는(anicca-virāga-nirodha-paṭinissagga-ñāṇa-saṅkhāta) 그 버림의 지혜를 그 다음의 위빳사나의 통찰지로써, 그것도 그 다음의 것으로써, 이와 같이 그 다음 단계의 위빳사나를 보이셨다.
'평온하게 된다(ajjhupekkhitā hoti).'란 ① 사마타에 든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과 ② 하나로 확립된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으로 두 종류의 평온함이 있다. 함께 생긴(sahajāta) 법들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고, 대상(ārammaṇa)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상에 대한 평온함을 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ānanda)'란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는 방법으로 공부지을 때 그는 단지 장애의 법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필두로 설한 법들에 대한 그 버림의 지혜도 역시 통찰지로써 보고 평온해지기 때문에 “그때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라고 알아야 한다.”(SA.iii.272~273)
♦ “seyyathāpi, ānanda, catumahāpathe mahāpaṃsupuñjo.
puratthimāya cepi disāyaṃ āgaccheyya sakaṭaṃ vā ratho vā, upahanateva taṃ paṃsupuñjaṃ;
pacchimāya cepi disāya āgaccheyya ... pe ... uttarāya cepi disāya ... pe ...
dakkhiṇāya cepi disāya āgaccheyya sakaṭaṃ vā ratho vā, upahanateva taṃ paṃsupuñjaṃ.
11, “아난다여, [325] 예를 들면 사거리에 큰 흙더미가 있다 하자.
만일 동쪽으로부터 수레나 마차가 오면 그 흙더미를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만일 서쪽으로부터 … 남쪽으로부터 …
북쪽으로부터 수레나 마차가 오면 그 흙더미를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142)
142) “여기서 사거리(catu-mahā-patha)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cha āyatanāni)를 뜻하고 거기에 있는 흙더미(paṃsu-puñja)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에 있는 오염원들(kilesā)이다. 사방에서 오는 수레나 마차(sakaṭa-rathā)는 네 가지 대상(ārammaṇa)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cattāro satipaṭṭhānā)이다. 하나의 수레나 마차로 흙더미를 누르는 것은 몸을 관찰하는 것(kāya-anupassanā) 등을 통해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파괴하는 것(upaghāta)이라고 알아야 한다.”(SA.iii.273)
evameva kho, ānand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pi
upahanateva pāpake akusale dhamme;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ntopi upahanateva pāpake akusale dhamme”ti.
아난다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면
삿되고 해로운 법들을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물면 삿되고 해로운 법들을 눌러서 평평하게 할 것이다.”
dasamaṃ.
♦ ekadhammavaggo paṭhamo. 제1장 하나의 법 품이 끝났다.
♦ tassuddānaṃ —
♦ ekadhammo ca bojjhaṅgo, suddhikañca duve phalā.
♦ ariṭṭho kappino dīpo, vesālī kimilena cāti.
첫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의 법 ② 깨달음의 구성요소 ③ 간단한 설명, 두 가지 ④~⑤ 결실
⑥ 아릿타 ⑦ 마하깝삐나 ⑧ 등불 비유 ⑨ 웨살리 ⑩ 낌빌라이다.
첫댓글 六根(~身/意)는 門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心門이나 識門이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즉 意門이 출입門의 대표이다.
이러한 門을 지키는 수문장이 念(sati)이다.
이러한 城(=身)의 4거리(지수화풍=4대) 中에 識이라는 성주가 앉아 있다.
이 識이 반야 공부를 하고 있는 마음(心)이다.
心 주변에서 보좌하고 있는 참모(대신)들이 念을 비롯한 名(受/想/思/觸/作意)=心行(名身)이다.
4거리(지수화풍=4대) 色(身行/色身)까지 포함하여 명과 색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名色이다.
이때 반야 공부를 하고 있는 識을 中이라 하고, 名도 극단이라고 하고 色도 극단이라고 한다.
하여튼 어떠한 종류의 名이든 色이든 어떤 것도 갈애에 의해서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가 보다.
識도 또한 心의 욕탐(-갈애)의 대상이다.
반야 공부를 하고 있는 식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거친 色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죽고 나서
욕계에 태어날 때, 재생연결식의 역할을 할 것이고
거친 색은 해결하였지만 미세한 색에 대해서 아직 집착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색에 대한 갈애]가 남아 있는 불환자이고 색계에 태어날 것이다.
어떠한 색이든지 모두 벗어낫지만 受想 등의 名- [非色에 대한 갈애]를 해결하지 못한 불환자는
무색계에 태어날 것이다.
호흡(風大)수행은 色身을 수행주제로 하지만
신수심법으로 이어지는 수행이라고 나타난다.
또한 칠각지로 또한 明脫로 인도하는 수행이라는 표현은 경문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明은 반야이고 脫은 삼매 혹은 사마타이다.
아나빠나 사띠 경문의 정형구 6번까지의 실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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