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폄하하자는 목적이 아니라 우리 한글과 우리의 의 원류를 제대로 찾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다.)
1. 녹음기같은 발음 기호를 만들고 싶었던 세종
2. 원시한글을 찾아서
3. 원시 한글 가림다의 흔적
4. 한글의 외국문자 모방설
5. 유물로 나타난 원시한글 가림토들
6. 결론 미한민국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
1. 녹음기같은 발음 기호를 만들고 싶었던 세종
한글은 누가 창제 했을까?
이는 물어 보나 마나 세종대왕께서 창제 하셨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갑자기 우리 글자가 없어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이 민망하여 한글을 창제 했다고는 여러 문헌이나 시대 상황을 참작하여볼때 아니라고 본다.
충령대군인 세종은 위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이라는 두 형님이 계셨다.
그러니 충령은 王道의 책 보다는 여러 책들을 두루 섭렵하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무렵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한가지 문제를 제기 하여 이를 연구 하게 됬다고 본다.
그것은 한자로 기록된 모든 글자들의 발음이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달라서 한자를 읽거나 중국인과 대화등에혼동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에도 홍무정운 (洪武正韻)등 운서가 있어서 다소나마 참고가 되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가 한자음을 발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종은 녹음기와 같이 정확한 발음을 기록할수있는 글자의 필요성를 느꼈다.
세자가 아니기에 마음대로 시중에 다돌아 다닐수 있었던 충령께서는 전 조종에서 부터 상것들이 쓰던 언문(諺文) 에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이 언문은 자음과 모음의 혼동은 물론 그 체계가 완전 주먹 구구 식 이어서 녹음기 노릇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이 글자들을 가지고 잘 연구하면 우리말의 완벽한 발음은 물론 여러 발음으로 읽히는 한자의 운도 바로 잡을것 같았다.
이는 훈민정음 반포후 써진 용비어천가가 월인천강지곡의 한자음만 봐도 알수 있다.
그래서 충령은 왕이 된 후까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완성 시키킨것이 훈민정음이고 이것으로 글자가 없어 고생하는 일반 백성을 위한것은 물론 훈민정음으로 홍무정운 대신 동국정운(東國正韻) 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세종이 참고했을것 이라는 언문이란 무엇인가?
*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불과 50일만에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19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 훈민정음이 사상 초유의 문자였다면 언문이라는 단어대신 ‘훈민정음’ 이라는 단어가 대신 올라 있엇을 것이다. 즉 언문이라는 말은 훈민정음 반포후에 생긴 단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므로 언문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유치한 형태로나마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증거는 최만리등 상소문중 다음 글귀가 증명한다
* 옛 글자가 있었다는 상소문 기록
최만리 상소문에 훈민정음이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자방고전(字放古篆)이나 전조(前朝.고려)에 언문이 있었다(諺文自前朝有)는 등의 말이 있다.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 속용문자(俗用文字) -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가추어 지지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었다.
2. 원시한글을 찾아서
그렇다면 언문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하여 수천년전 우리의 뿌리로 올라가 보자.
필자는 지금 우리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은 하늘에 살고계신 천신이 아니라 대략 6천년전 지금 바이칼호 부근에 있었던 몽골리안 일족의 지도자라 했다.
그분들은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선악과 이전의 신선과 같은 분들로 국경이나 경제, 글자는 물론 말도 생식본능에 필요한 몇마디 밖에 없이 그저 이심 전심으로 사셨던 분들이라 했다.
그 부족의 이름이 태양을 숭상하는 '환한부족' 이었고 그래서 그분을 환한님 > 화나님
하나님이라 불렀다 했다.
그리고 인구가 늘면서 그 아드님 환숫(황웅)께서 고조선 개국지에 독립 국가를 세울 뜻을 밝히셨고 이에 하느님은 쾌히 승락 하시며 국가와 민족을 세우는데 근간이 되는 천부인 세개와 교훈인 천부경을 내려 주셨다 했다.
여기서 천부경을 해독해보면 천부인 세개의 정체가 드러 나는데 이는 생략하고 천부인 세개가 원방각(圓方角 ㅇ ㅁ △ )이라는 것은 이젠 정립된 상태다.
이 천부인 세개로 환숫(桓雄)께서는 우리 말과 그 신하 신지를 시켜 우리 원시 글자인 신지녹도문(神誌鹿圖文)을 만든다.
여기서 원방각인 천부인으로 우리 글자만 만들었다는 근거는 한자에는 ' ㅇ' 이 없고 영문자에는 'ㅁ' 이 없을뿐 아니라 우리의 주변 국가 글자와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신지녹도문은 그후 여러 형태로 전 하다가 대략 천년후 제 일세 단군인 왕검이후 불과 백 오십여년 만인 제 삼세 단군 가륵(嘉勒) 재위 46년(B.C.2181) 경자이년(庚自二年) 천제는 삼랑 을보륵에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또는 가림다)라 하니 이것이 바로 원시한글로 추정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림토가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부터는 이 글자가 바로 지금 우리 한글의 원형이며 따라서 엄청난 철학을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말과 글자가 우연히 세월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증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인류학계에서 기절초풍을 할 정도의 사건이다.
말과 글자가 의도적으로 동시에 만들어지다니...
세계 학계에서는 우리 한글 같은 과학적인 글자가 한사람의 생애 안에 만들어진다는 것도 놀라고 있는데 말까지 동시에 만들어진다면 참으로 기절할 것이다.
여기서 세종 이전에 한글의 원형이 있었으며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근거를 제시 한다.
천부인으로 우리 말과 글자는 만들었다는 근거를 필자는 누차 강조 했으므모 여기서는 지금 'ㅅ' 의 원형인 사람 천부인 △ 에 대하여만 설명한다.
우리 글자는 발음 기호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알파벳과는 달리 각 자음 속에는 뜻이 들어 있다고 했다.
** 'ㅅ' 속에는 그 모양과 같이 서거나 솟는 뜻이 있다.
* △(ㅅ) - 그 모양과 같이 서거나 솟는 모양
* 서다,세우다 (立)
* 사람 -
* 사내(丁) - 사내의 원 의미는 장정의 남근을 말하므로 서 있는 것이다.
* 숫 - 남근(男根)
* 솟대(山象雄常) - 생명의 핵심인 남근상을 상징하는 서낭나무의 원조로 신단수(神壇樹)
* 소도(蘇塗) - 솟대가 모셔진 성소
* 서울 - 섯벌 (徐羅伐) > 서벌 > 서블 > 서울
* 새벌(新羅) - 새로 선 벌 (섯벌 > 서라벌)
* 스승, 스님 - 학문등이 서 있는 사람
** 한편 우리 한글 자음도 상형문자의 일종이었으므로 그 형상을 닮아서 만들어 진것이 많다.
* 서까래 - ㅅ 처럼 대들보에 걸친것
* 쑥 - 그 잎 모양
* 삼 ( 麻, 蔘)- 그 잎모양
* 손 - 손가락 사이
* 삿 (사타구니) - 다리 사이
(이하 생략 )
** 한편 △ 은 그 끝이 뾰죽 하고 뾰죽 한것은 가늘고 좁다.
* 솔 - 소나무
* 솔 - 부추
* 솔기 - 옷솔기등 가늘다.
* (오)솔길 - 좁고 가는길
(이하 생략)
이상 말들은 세종이 만든 말들이 아니다.
또 세종은 자기가 만든 28자를 가지고 이미 만들어진 말들을 일일히 쫓아 다니며 그 말의 뜻에 자기 글자를 맞출수도 없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말들을 한글로 쓸때 반드시 'ㅅ'을 써야만 된다는 것은 세종 전에 그런 말을 그렇게 표현한 글자가 있었다는 뜻이고 이는 바로 글자와 말을 동시에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즉 애초 위와 같이 ㅅ 을 써야만 발음되는 말을 만들때 사람 천부인인 ㅅ 을 갖다 놓지 않고서는 그런말을 그렇게 만들수 없다는 것이며 다음 글자, 예를 들면 서울의 뿌리말인 '섯벌'에서 벌판 이라는 뜻의 '벌'을 만들때도 땅 천부인 'ㅂ' (ㅂ은 ㅁ에서 분해된 글자)을 갖다 놓지 않고서는 벌판이라는 말에 'ㅂ'이 들어갈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말로 그 근간이 되는 천부인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말과 글자가 천부인을 근간으로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증거이다.
이상과 같은 원시 한글가림토를 만든 내용이 단군세기와 소도경전 본훈에 기록되 있다.
** 가림토의 단군세기 기록
경자이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라서 형상으로 뜻을 표현하는 참글 1) 이 있었으나 열 집이 있는 읍에 말에 통하지 않는 수가 많았고 백 리 되는 나라안에서도 이것이 서로 이해되기가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1)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庚子二年 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郎乙普勒讚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曰..... 檀君世記)
1) 참글(眞書) - 한자와 가림토가 만들어지기전 이야기니 신지녹도문의 일종
2) 삼랑 - 삼시랑으로 삼신을 모시며 천부인을 관리 하던 단군의 신하
** 가림토의 소도경전 기록
신시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겐 투전목(鬪佃木)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 하는 것은(그림 생략 )이며 전목은 (그림생략) 이다. 단군세기에 단군가륵 제2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했다. 그 글은 이렇다.
神市有算木蚩尤有鬪佃木夫餘有書算其曰算木 (그림생략)也 其曰佃木( 그림 생략)也 檀君世記檀君嘉勒二年三郞乙普勒讚正音三十八字是謂加臨多其文曰 ( 아래 그림 蘇塗經典本訓)
3. 원시 한글 가림다의 흔적
가림다와 훈민정음 그리고 일본 신사 신대문자 비교
* 소도경전 본훈에 고려때 가림다로 추정되는 글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려 광종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초기에 난을 피해 오월(吳越)에 도착했을 때 월씨에 호사가가 있어서 동국한송정(東國寒松亭)이란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겨 이를 파도에 띠워 보냈으나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이 글을 한시로 풀었는데 여기에 말하길
(高麗光宗時張儒接伴使著聞初避亂到吳越越氏有好事者刻東國寒松曲於琴底漂逆波越不得解其辭適遇張儒拜問其辭張儒卽席以漢詩解之曰 )
月白寒松夜 달은 히고 소나무는 찬 밤
波晏境浦秋 파도도 잠든 경포(境浦)의 가을에
哀鳴來又去 슬피 울며 오고 또 가는
有信一沙鷗 바다 갈매기 하나 있네
蓋琴底所刻文疑古加臨多之類 아마 거문고 바닥에 새긴 글자는 옛 가림다(加臨多) 류 이었을 것이다.
3. 원시 한글의 흔적
* 일본 신사에 있는 신대문자 사진 (KBS 방영)
* 현재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 통용되는 부라미 문자 사진 ( 상가 간판. KBS 방영)
4. 한글의 외국문자 모방설
** 한글은 신대문자(神代文字)를 모방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
* - 샤지요시히코 신대문자 연구학자 -
갑자기 그렇게 훌륭한 세계 최고 글자인 한글이 어떤 한 명의 국왕 밑에서 단 몇 년만에 만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자의 역사 문화의 역사적인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 ‘미야시다문조(神代文字)’는 일본역대 천황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내용인데 이 미야시다 문조는 한자가 들어오기 전 수 백년 전부터 일본에 있었다.
* 일본 신사에 있는 신대문자(神代文字)는 한글과 비슷 한데가 너무 많은데 훈민정음은 1443년에 만들어졌고 일본 신대문자 라는 아히루 문자는 708년 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신대문자는 훈민정음보다 700년이나 앞섰음으로 세종은 일본의 신대문자를 모방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 이세신궁(伊勢神宮)은 나라현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대문자가 소장 되 있다 일본인이라면 죽기 전에 꼭 찾아가 보아야 한다는 십만 신사의 본산으로 일본천황이 해마다 직접 참배를 하다. 이 이세신궁 외궁에는 신대문자와 관련된 보물이 수백점 이나 된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중한 보물은 신에게 바치는 세 개의 보물인데 이는 거울 칼 구슬이며 1) 이 보물들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아무한테나 절대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실물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고 사진도 공개하지 않는다.
이 신궁에 있는 거울을 ‘아티노’ 거울 이라 하는데 이는 신대문자 때부터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채 지금껏 전해지고 있으며 그것은 누구도 볼수없다. 다만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세의 신관인 나이쿠에 남아있다. 그외에 나머지 신보는 20년마다 지금있는 물건과 똑같이 만든다. 그리고 오래된 것은 20년이 지난후 극비의 장소에 묻어버린다.
1) 신대문자가 가림다가 전래된 것이라면 이 세 가지 보물은 천부인의 복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 키타규슈 미야자키현은 동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으로 신화의 발상지이며 엔노 신사가 있는데 서기 708년에 세워져 있고 신대문자가 새겨져 있는 돌탑이 있다.
* 샤지요시히코 신대문자 연구학자에 의하면 신대문자로 쓰여진 기록중에는 소금으로 1년분의 세금을 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나라시대 이전인 5-6세기 경이 일이라 한다. 그는 또 한때 일본 역사가들은 신대문자는 없는 문자이고 따라서 신대문자로 쓰여진 것들은 모두가 가짜이기 때문에 조사할 가치고 없는 것이라고 하고 신대문자 감추기 작업이 있었은데 만약 그런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공개하면 명치정부로 부터 추궁을 당하게 되니 스스로 페기한 사람도 많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황조황태신궁에 신대문자가 새겨진 청동거울과 동검이 있다는데 실물을 확인해볼수가 없다.
2. 신대문자를 한국인에게 감추는 이유
* 신대문자가 나타나는 곳은 주로 규슈섬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깝고 한반도와 관련된 신사가 가장 많은곳
* 일본을 세운 신도 최초의 천황도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이는 일본학자들도 싫지만 어쩛수 없이 받아드리는 정설이다. 그러므로 그때 가림토가 있었다면 같이 들어가 신대문자가 되었을 것이다.
* 서정범교수 - 927년 그러니까 약 천년전 엔끼시끼 신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거기에 보면 국내성에 신사가 세 개가 있는데 한국신사가 두 개가 있고 소노진자라고 하는 지신을 모시는 신사가 하나있다. 그렇다면 천황의 궁성에 신사가 세 개가 있는데 한국신사가 두 개이고 하나는 지신을 모시는 신사이니 천황의 조상이 누구 라는 것은 말하나 마나이다.
* 히코산(英彦山)신궁 - 일본 히코산에는 환웅이 삼천명의 선인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히코산의 개산(開山)기록이 있는데 일본 단군연구가가 말하기를 이곳사람들은 이곳 히코산을 우리의 태백산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하며 히코산의 환웅 초상화 까지 있다. 그렇다면 이들도 환웅의 후예이며 신대문자는 가림다 가 아닌가?
* 히코산은 우리말로 히고 큰산, 태백산도 우리말로 하면 ‘히고 큰산’ 이므로 히코산의 환웅은 태백산의 환웅이 된다.
그러므로 일본이 신대문자를 감추고 있는 의도를 짐작할수 있다.
** 한글은 부라미 문자를 모방했다는 인도 학계의 주장
* 델리대학 언어학의 권위자 푸렘싱 교수는 부라미(BRAHMI) 문자의 전공 교수인데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칠판에 자모 하나 하나를 쓰고 예를 들어가며 한글이 인도에서 건너갔다고 설명했다 그이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산스크리스트 문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라미’ 문자는 소리위주의 문자로 매우 훌륭한 문자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오래 사용되지는 못했으나 한글과 매우 같은 문자이다.
브라미 알파벹이 인도에서 건너간 것은 불교 수도승이 전파한 것이며 중국의 신천에서 다른 모든 글자로 영향을 끼쳤을 것다.
중국의 글자는 상형문자인데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경에 기초하여 브라미 문자를 썻다. AD 10-11 세기에 그 불교 수도승들이 한국에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 델리에서 인도 북서부의 ‘구자라트’ 주의 ‘바도다라’ 시내는까지는 기차로 열두시간쯤 거리인데 자동차 광고판이나 간판의 글씨가 한글과 매우 흡사해서 그 글씨를 우리말로 읽어도 보고 그들보고 우리 한글 글자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발음이 같은 것이 많았다.
* MS대학의 언어학자 PG파델교수는 한국글자와 인도글자가 닭았 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주변의 실론, 버마, 네팔,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글자가 모두 ‘브라미’ 문자에서 왔기 때문인데 순례자로 인도에온 중국의 학자가 음성학 체계가 잘 발달된 브라미 문서들을 통해 그것을 수용한 후에 이것을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음절인 히라가나 가다가나도 브라미로 부터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 현재의 브라미어는 그 뒤 많은 변화과정을 거쳐 지금의 한글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 바루다 대학 언어학과 P.K.S 판디교수의 말
‘한국어와 일본어로 드라비다인과의 연결관계를 발견 할수 있다. 이 언어들은 기원전 25년 전에 강력한 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국어와 드라비다인의 말이 같은 기원에서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서로 우호적인 관계는 있었을 것이다. 언어적 증거는 매우 확연하다. 무려 400단어 정도의 드라비다어(타밀어)가 한국 일본의 옛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이광수의 지봉유설등 많은 학자들도 한글의 기원을 인도의 범어 즉 산스크리스트어에 두고 있다.
** 한글은 몽골 글자를 모방했다는 설의 시비
* 유희의 언문지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몽고문자를 본받아 명나라 학사인 황찬에게 질문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후 한자의 정확한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 요동에 와있던 한문 음의 권위자 황찬에게 신숙주 성삼문 이 자주 방문한 것을 오해 한 것이다.
* 경상대 국어교육학과 여증동 교수 - 세종실록에서 말하는 자방고전(字倣古篆)은 훈민정음이 우리의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뜻이지 만약 몽고의 글자를 모방했다면 자방몽전(字倣蒙篆)이라고 했을 것이다. 옛고(古)자를 쓰는 것은 반드시 자기 나라의 것을 말할 때 쓴다
*우리의 의문
그렇다면 10세기경에 들어온 브라미 문자가 15세기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 어디에 숨어 있어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무 것도 없다’ 이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5. 유물로 나타난 원시한글 가림토들
*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
- 길림시 송호상 교수의 증언 - "동이민족 논설중 일부"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문자는
C14 측정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림토 사진)
(관련지도)
**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가림토 문자 비석 발견.
6. 결론 '미한민국'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
* 이상과 같은 논리와 증거를 들어 우리의 한글은 우리의 뿌리인 하느님의 선물 천부인 세개로 우리 말과 동시에 만들어 졌음을 입증하고 우리는 고조선이 망하면서 모화사상에 젖은 미친 선비들의 한문 전용에의해 우리의 글자가 길가의 잡초처럼 버려졌던것이다.
따라서 우리 말 역시 한문자를 따라 지금 우리가 쓰는 말 대부분은 한자가 아니면 말을 할수 도 글을 쓸수도 없게 되고 이는 민족혼까지 팔아버린 꼴이 되므로 그 광활하던 우리의 고조선 개국지는 모두 중국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 이 잡초처럼 버려젔던 한글을 세종께서 다시 복원, 체계있게 정리 한것이 현재의 한글인데 이역시 모화사상에 찌든 선비들에 의해 500년동안 역시 언문 이라는 천시를 받으며 부녀자들 사이에만 써 오다가 제대로 쓴것은 6.25 이후...
그러나 이역시 채 50년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언론인, 정치인, 학자, 작가등 소위 지식인들에의해 영어에 밀리게 되고 이는 곧바로 말로 이어지면서 영어가 아니면 말을 못하는 소위 '미한민국' 이 되가도 있으니 50년 후에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국가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상납 하자는 제2의 이완용이들이 설칠 것이다.
* 슬푸다 우리 한글의 운명이여!!!
우리 한글을 사랑하고 가꾸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혼과 뿌리와 국가를 지키는 일이며 우리의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거늘....
이 분야에 더이상 관심이 계신분은 http://cafe.daum.net/chunbuinnet 에...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저자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카페 운영자 - 우리 - 구 길수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왕권 시대엔 그의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것은 왕의 몫으로 될수도 있을것입니다. 에디슨의 수천가지 발명품 역시 그의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의 성과로 나온것입니다만 다 에디슨의 발명품이라 하지요. 전에 공병우 박사님이 이곳에서 한글 연구소를 차리고 제가 좀 가담을 하였습니다.
세종대왕님을 최고로 존경하고 살아갑니다.훌륭한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살기좋은 大 韓民國에 태어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임니다.좋은 자료 감사드림니다.
그렇죠. 진우님말씀이 맞죠. 실무자들 보다 그런 정책을 시행하도록 명령하는 자의 몫이죠. 공병우박사님과 함께했다니 참 멋지시네요. 한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진짜 세계최고라 생각됩니다.
세상의 모든 발명품이나, 예술품도,,어느 것으로부터 모방, 영향, 지도, 등등의 길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니 모든 학설에 이의를 달기보단 그 속에서 새 창조를 하신 세종대왕과 그걸 발전시켜 오늘이 있게하신 공병우 박사님,,모두 창제하신 거로 확실히 믿습니다,,좋은 글도 큰 상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