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연중 제27주일 강론>(2023. 10. 8.)
(마태 21,33-4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마태 21,33-35).”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앞부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이고,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도 내용이 많이 비슷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2-6).”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혼인 잔치의 비유’는 개인의 응답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강조되어
있고(43절),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답하는 일과
응답하려면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아야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로 표현하신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밭주인과 소작인들의 관계라는 뜻이 아니고,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가 결코 아니고,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자녀의 관계’입니다.
소작인들은 남의 밭에서 ‘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주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소작인 같은 태도로 하느님을 대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의,
즉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아버지의 잔치이니까 자녀의 잔치이고,
그 잔치의 주인이 아버지이시니까 우리도 잔치의 주인입니다.
혼인을 하는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이고(마태 22,2),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신앙인들, 즉 ‘우리’입니다(요한 3,29).
신랑의 잔치는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의 잔치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7-1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인간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39.40).”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