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현지시간)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됐을 때 퍼스트 레이디에게 달려가 총격범의 흉탄을 막기 위해 윗몸으로 여사를 가린 비밀경호국(SS) 전직 요원 클린트 힐이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NBC 뉴스가 24일 보도했다. 유족은 이날 SS가 배포한 성명을 통해 "고인이 자택에서 곁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 21일 캘리포니아주 벨베데레의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다고 전했다. 사망 원인을 밝히지는 않았다.
1932년 1월 4일 노스 다코타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8년 SS의 덴버 현장사무소에서 특별요원으로 채용됐다. 고인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부터 제럴드 포드까지 다섯 대통령을 경호했다. 나중에 SS의 백악관 경호 업무를 총괄했고, 부국장 지위에까지 올랐다.
대통령 차량 대열이 댈러스의 딜리 광장을 지날 때 총격이 시작돼 경호원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지자 힐은 대통령의 컨버터블 리무진 뒷좌석에 뛰어올라 퍼스트 레이디를 보호했다. 대즐(Dazzle)이란 암호명으로 통하던 그는 미국 재무부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SS는 재무부 산하 기관이었다.
그는 1975년 조기 퇴직했는데 마흔셋,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나중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판명된 증후군에 시달렸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대통령의 암살을 막지 못했는데 상을 받고 해서 죄책감에 오래 짓눌려 있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힐은 2009년 기자였던 리사 맥커빈 힐을 처음 만나 함께 책을 쓰는 등 사랑을 싹틔워 2021년 결혼했다. 부부가 함께 회고록 '케네디 여사와 나'와 '다섯 대통령' 등 여러 권의 책을 내놓았다. 그는 회고록에 피격 직후를 상세히 묘사했는데 "난 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달려 차 트렁크 손잡이에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모래뻘에 빠진 것 같았다. 케네디 여사는 뒷좌석을 빠져나오려고 몸을 일으켰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는 바라보지만 날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내가 거기 없는 것처럼"이라고 적었다. 그는 여사를 좌석에 앉히려 노력한 다음, 총격범 쪽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흉탄을 막으려고 윗몸을 일으켜 세운 채 차량이 속도를 높이길 기다렸다.
그는 "내 잘못이었다"고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 1975년 CBS '60분'에 출연해 마이크 월리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재빠르게 반응했더라면. 내 생각에도 난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무덤에 갈 때까지 그걸(죄책감을) 안고 살 것"이라고 말했다. 힐은 차 트렁크 왼쪽으로 뛰어올랐는데 흉탄은 대통령의 오른쪽에서 날아와 그 바람에 대통령은 즉사했다. 힐은 0.5초나 1초라도 빨리 차량에 올랐더라면 대통령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진행자 월리스는 "그럼 당신은 방향을 제대로 잡았으면 기꺼이 총탄을 맞았을 것이냐"고 물었고, 힐은 "그렇다. 그렇게 됐으면 내게 훨씬 잘 된 일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흔히 대통령 경호원들은 위급한 순간 몸을 던져 대통령에게 날아올 총탄을 막아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힐은 그렇게 하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댈러스를 다시 찾아 차분히 돌아본 그는 대통령 목숨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을 인정했다.
SS 국장을 지냈던 루 머를레티는 성명을 통해 “고인은 영웅 이상이었다. 그는 심오한 인류애, 헌신, 줄지 않는 진정성의 남자였다"고 안타까워했다.
SS는 성명을 통해 "의무와 돌봄에 전폭적으로 헌신한 사람이었다"면서 "그의 경력은 공공 서비스의 가장 높은 이상을 실현해 보였다. 우리는 존경받는 동료이자 우리 기관에 기여한 다정한 친구를 잃은 것을 추모한다. 나라 전체가 영원히 (고인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 1993)의 주인공 프랭크 호리건(이스트우드)은 케네디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자책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고인의 얘기에 착안해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7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대선 유세를 하던 중에 총격을 받아 귀를 스친 뒤,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일 때 옆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부축한 션 커런이 지난달 SS 국장으로 지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