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
신덕룡
간밤에 무언가 다녀갔다
솔솔 재미 붙여가며
애써 가꾼 땅콩밭을 몽땅 파헤쳐놓고
늦봄에 땅을 갈아엎고
두세 알씩 정성 들여 씨앗을 묻은 뒤
텃새들 눈을 피해
종이컵까지 씌워 싹을 틔우고 여름내 보살폈는데
깊이 잠든 사이
일궈 놓은 살림이 거덜 난 것처럼 허망했지만
태연과 무심을 가장하면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다
따지고 보면 같은 산자락에 울도 없이 얹혀살면서
주인이니 도둑이니 하는 말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짐짓 불편한 동거일 뿐이라고 다독일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온몸으로 비와 바람을 맞고
이편과 저편을 나누고
상처받을 때마다 결의를 다지고 살았던
짐승의 시절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봄 여름을 잊고 가을 한 철 목 빼고 기다리다가
허기진 놈부터 배불리 먹었다면
다행이다, 먹고 남긴 것들
추려 담을 그릇 또한 클 이유가 없겠다
― 신덕룡 시집, 『단월』 (여우난골 / 2023)
신덕룡
경기 양평 출생. 1985년 《현대문학》(평론), 2002년 《시와시학》(시)으로 등단. 시집 『소리의 감옥』 『하멜서신』『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저서로 『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풍경과 시선』 등. 김달진문학상, 발견문학상, 편운문학상, 백호임제문학상, 김준오시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