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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리추악 간력
본명: 김금주
중국 공산당 당원, 조선족, 녀
1925년 2월 광동혁명군 제1차 동정(東征)에 참가
1925년 가을 중국 공산당에 가입
1927년 8월 쏘련 모스크바 동방대학 류학, 맑스—레닌주의 리론 학습
1930년 봄에 귀국, 동만 특위에서 사업
1931년 ‘9.18’사변후 중공 만주성위 부녀위원회에서 사업
1932년 여름 중공 주하 중심현위위원, 부녀부장
1934년 봄 중공 주하현 철북구위서기
1934년 8월 중공 연수방정특별지부서기
1936년 2월 통하 특별지부서기, 동년 8월 27일 적에게 체포되여 9월 3일 통하현성 서문밖에서 회생되였다.
리추악은 주하대지에서 옹근 2년간을 항일혁명투쟁사업에 전력을 다 해온 조기 혁명가이다.
그는 주하, 연수, 방정, 통하 등 현에서 광대한 지역을 오가며 당의 조직건설과 발전사업에 크나 큰 기여를 하였고 이르는 곳마다. 군중을 발동하여 각종 반일 대중단체를 묶어세워 튼튼한 항일근거지—홍색지반을 건립했고 유격대의 항일투쟁을 힘차게 지원하였으며 일본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리추악은 중국 인민 항일혁명투쟁에서 불멸의 업적을 쌓은 일대 건국영웅이며 상지시 인민들의 영원한 정신적 자부이며 또한 상지시 조선족의 영원한 자랑이다.
리추악의 원명은 김금주(金錦珠)이며 장일지(張一志), 류옥명(劉玉明)이란 가명도 썼다.
1901년 조선 평안남도 중락군에서 태여나 7살때 아버지를 여이고 어머니 술하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도 하며 어렵게 생활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후에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리추악이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바로 로씨야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맑스 –레닌주의가 전 지구에 신속히 전파되고 있었다. 이런 혁명정세의 영향을 받은 리추악은 점차 맑스—레닌주의 저작을 접촉하게 되였고 혁명리론학습에 정열을 몰부었다.
1919년 이르러 조선 ‘3.1’운동이 폭발되였다. 반일불길이 전 조선을 휘감고 타오르는 격류속에서 리추악은 조금도 주저없이 드높은 열정으로 혁명운동에 뛰여 들었다. 여기서 그는 평양학생운동의 령수로 활약하고 있는 양림을 알게 되였으며 혁명활동과정에서 그들은 뜻을 같이 하고 서로 사랑을 맺었다.
1919년 ‘3.1’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그해 가을 양림은 일제가 내린 수배령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오게 되였다. 리추악은 련인이 떠난후 학교에서 계속 학습하는 한편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이로하여 그는 일제 군경들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1924년 마가을 리추악은 날로 가심해지는 일제 군경들의 주목을 피해 부득불 조선을 떠나 련인 양림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때 양림은 운남 강무당에서 군사지식을 배우고 있던 중이였는데 뒤미처 양림이 학습을 끝마치자 그들은 함께 광주에 가서 그때부터 중국 혁명에 직접 투신했다.
1925년 2월 리추악은 광동국민혁명군 선전대 사업일군의 일원으로 진형명(陳炯明) 반동군벌을 징벌하는 제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이 해 6월에는 또 운남과 귀주 군벌 양희민(楊希閔)과 류진환(劉震環) 두 군벌의 반란을 평정하는 제2차 동정에 참가했다.
1925년 가을 그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는 한편 공부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일으키며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살해함과 더불어 정세가 급변하였다. 리추악은 1927년 8월 당조직의 결정에 의하여 양림과 함께 쏘련으로 가서 그는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학습하고 양림은 륙군보병학교에서 군사기술을 학습했다.
1930년 봄 리추악은 학습을 끝마치고 양림과 함께 귀국하여 당중앙 군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 만주성위로 와서 사업하게 되였다.
리추악은 만주성위의 배치에 따라 양림과 함께 중공 동만특위에서 한동안 사업하였다. 그는 동만지대의 연길, 왕청, 화룡 등 지역에 심입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반일 대중조직을 묶어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1931년 12월 양림이 중공 만주성위 군위서기로 소환되여 할빈으로 오게 되자 리추악도 함께 돌아와 만주성위 부녀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리추악은 양림을 도와 남만지대의 항일무장 대오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공장과 시민들속에 심입하여 항일구국의 도리를 널리 선전하고 부녀들을 발동하여 항일 구국활동에 참가할것을 호소하며 적극적으로 활약하여 당조직과 동지들의 호평을 받았다.
1932년 여름 철에 리추악의 남편 양림이 혁명사업의 수요로 강서 중앙소베트로 소환되여 가게 되였는데 그때 리추악은 이미 임신한 몸이였던 관계도 있고 또 ‘한어가 능숙하지 못하다’는 조건상 원인으로 조직의 배치에 따라 양림의 곁을 떠나 주하현(지금의 상지시)으로 와서 사업하게 되였다.
리추악은 주하현으로 온후 중공 주하중심현위 위원, 부녀부장 등 요직을 맏고 철남지역의 삼고류, 석두하자,. 철북지역의 량주하, 하동, 후림향, 흑룡궁 등 광범한 지역을 기점으로 심입하여 당조직에서 맡겨준 중임을 완성하기에 동분서주하면서 한 로련한 혁명가의 강한 책임감으로 혁명사업에 몰두해 나섰다.
1932년 겨울 그는 하동에 심입하여 하동지부의 간사신분으로 사업하며 지부를 도와 당조직건설과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4월 ‘하동사건’후 그는 흑룡궁지대로 전근되여 가서 지부서기 김로흠(金魯欽)을 협조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흑룡궁 당지부는 최초의 당원수가 5명이였는데 8월에 이르러 25명으로 발전되였고 당지부를 특별지부로 개건하여 만주성위로부터 ‘건전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리하여 철북구역의 각지 당조직 건설은 날따라 발전하는 새로운 국면을 이루게 되였다.
이러한 형세에 쫓아 리추악은 주하중심현위의 위탁을 받고 철북구역에서 반일 군중기초가 가장 좋은 후림향에 심입하여 각 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1933년겨울 비밀리에 중공 철북구위원회를 성립했다. 철북구의 성립은 주하현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원들을 비롯한 흑룡궁, 하동, 량주하, 우지미, 연수, 방정 지대 각 지의 당지부와 당소조 및 산재하고 있는 당원들을 귀속시키고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령도하게 되였다.
1934년2월 리추악은 또 진극강(陳克强)과 함께 현위의 지시에 따라 연수 천대산(天臺山) 지대로 들어가 연수 방정지부를 개건했다. 이 시기에 주하중심현위에서는 원임 철북구위서기였던 범경해를 다른 사업터로 보냄과 동시에 리추악을 철북구위서기로 임명했다.
리추악은 현위에서 주는 새로운 중임을 떠메고 이해 8월까지 줄곧 철북구위에서 사업하며 각 지방 기층 당조직의 건설과 발전, 그리고 당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 정신을 관철하는데 큰 성과를 올린 동시에 이르는 곳마다 군중속에 심입하여 반일 선전활동을 적극 벌리고 군중을 발동하여 당이 령도하는 농민자위대, 청년의용대, 부녀회, 공산주의 아동단 등 반일 대중단체를 묶어 세웠다.
1934년 에 이르러 철북구역의 많은 마을에는 농민자위대가 건립되였는데 5구(현 장수향 국경촌)에만 해도 그 성원이 1600명이나 되였다. 청년의용대는 항일유격대의 유력한 병사 보충원천으로써 년말까지 250며명을 유격대에 보냈다.
철북구역의 광범한 지역에는 또한 부녀회가 보편적으로 조직되여 있었다. 후리향과 추피툰 일대에만 해도 5—6백명에 달했다. 그들은 유격대의 의복과 신발 만들기, 옷씻는 일, 밥짓는 일, 부상병 간호, 군수품운반, 보초서기, 정보나르기, 혁명노래부르기 등 부녀들로서 할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해내여 유격대의 항일활동을 힘차게 지원했다.
리추악이 주하대지에서 활동한 2년은 바로 철북항일근거지를 확건하여 합동지대 제2퇸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지 유격대의 튼튼한 후방이였으며 일본군, 만주군에게 커라란 타격을 준 2년이며 북만지구의 한 홍색지반으로 이름을 떨쳤던 2년이였다.
1934년 8월 리추악은 북만성위의 제의와 주하 중심현위의 결정에 따라 철북구위서기를 조일만에게 넘기고 연수 방정 특별지부서기로 임명되여 새로운 중임을 떠메고 사업터를 연수 방정지대로 옭겨갔다.
때는 바로 일본침략자들과 위만주군들이 조상지가 령솔하는 항일유격대에 대한 ‘토벌’을 전면적으로 벌려 엄준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형세에서 리추악은 ‘인민군중을 발동하고 반만항일투쟁을 벌리며 유격근거지를 넓히고 보다 광범위하게 항일유격전을 벌릴’데 관한 중공 만주성위에서 전체 당원들에게 내린 호소정신과 중 공중앙의 ‘1.26’지시 및 중앙 쏘베트 정부의 정권건설에 관한 지시정신을 관철하기에 모를 밖고 모든 정력을 경주했다.
그는 솔선적으로 특지의 기타동지들과 손잡고 당원 대오를 발전시켰다. 그중에서도 한족중에서 당원을 발전시키는데 주의를 돌렸으며 특지의 령도하에 방정지부를 성립하고 공고 발전시킴으로하여 방정현위를 구성하는데 기초를 닦는 등 연수 방정지대의 당 조직건설과 발전에 새 국면을 열었다. 그리고 지부당원들을 이끌어 항일유격지의 개척과 유격대를 협조하고 지원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또 중하진 천대산에 밀영을 안치하고 유격대 부상병들을 받아들여 치료했으며 철공에 능숙한 사람들을 조직하여 병기수리공장을 건립하고 병기를 만들어 내였다. 그리고 군중을 발동하여 적정을 정탐하여 정보를 제때에 유격대에 제공하여 주어 유격대의 반일활동을 성과적으로 지원했다.
1935년 3월 리추악은 친히 사람을 파견하여 방정현 성내의 적정을 탐지하고 조상지와 련계하여 함께 작전계획을 짜며 조상지로 하여금 방정현 기습전을 진행하기로 결단을 내리게 함으로써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후 조상지 주력부대가 타지로 전이하게 되자 이 지대에는 류해도(劉海濤)가 령솔하는 1퇀(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퇀)이 남게 되였다. 류해도 1퇀은 리추악 및 반일회 군중들의 전력적인 지지하에 적들과 우회전을 벌리며 싸워 적들을 크게 타격했다. 이로인해 적들은 특무를 파견하여 반일회 조직내부에 잠입하고 정보를 수집하려고 시도했다.
리추악은 적들의 이런 계책을 예측하고 류해도 퇀장과 협력하여 한차례 군수품을 부대로 운반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매복전을 벌려 ‘토벌’하려 오는 일본 군조 다까기(高木)을 위수로 한 기병대를 중도에서 호되게 족치였으며 일본군조 다까기를 격사했다.
1936년 2월 리추악은 주하중심현위의 지시에 쫓아 통하현으로 옮겨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1936년에 들어서면서 항전정세의 급변과 함께 조상지가 령솔하는 항련 제3군 주력이 주하지대로부터 북쪽 지대로 전략적 이동을 하는 새로운 항전단계에 들어섰다.
통하지대에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개척하는 과업은 3군의 활동에 아주 중대한 의의가 있었다.
리추악은 통하현으로 온후 조금도 지체없이 즉시 현내의 서북하, 북륙방, 하서남툰, 이도하자 등 9개 마을과 지역을 드나들며 적극 활동하여 군중을 발동하고 마을마다 부녀회를 조직하였으며 370여명으로 이룬 반일회 대오를 묶어 세웠고 자원 원칙하에 회비를 받아들여 항련 3군에 보내야 항일활동자금으로 사용하게 했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통하지대의 반일조직이 우후죽순인양 도처에서 일어서는 형세에 쫓아 그는 또 ‘통하현 반일회 장정초안’을 친히 작성하고 ‘동북항일련군 림시정부 선언’, ‘중국인 대일군전투 기본 강령’, ‘항일련군 제3,4군 정황’등 내용의 선전삐라를 널리 반포하여 반일운동을 기세높게 인도했다.
1936년 봄 그는 일본군, 위만주군이 도처에 침입하여 량식을 략탈하는 형세에 대항하여 한알의 량식도 놈들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선동하는 동시에 부녀들과 함께 산나물을 뜯어다 끼니를 때우며 량식을 절약하여 항일련군에 보냈다. 이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크게 놀랐는바 당시 목단강지구 경무통치위원장으로 있던 나까무라(中村)은 일본 중앙경무 통제위원장 도죠하데이(東條英機)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통하지구의 치안은 어쩔수 없는 암증’이라고 비명을 치게 했다.
1936년 8월 27일 리추악은 불행하게도 반역자 안연수의 밀고로 기본군중인 조국신(趙國臣)의 집에서 통하현 치안숙정선무공작반(治安肅정整宣撫工作班) 놈들에게 체포되였다.
리추악은 적들에게 체포된후 적들의 갖은 혹형과 반복되는 심문에 한 혁명가로서의 기개와 항일투쟁 최후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불굴의 정신으로 완강하게 싸웠다. 그는 놈들 앞에서 “반일하는데는 죄가 없다. 나에겐 잘못이 없다. 나더러 반일사상을 시정하라는것은 절대 될수없는 일이다.”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엄정히 규탄했다.
리추악의 혁명의지를 더는 꺽을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가 체포된 7일만인 1936년 9월 3일에 통하현성 서문밖에서 그를 총살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 공산당만세!”를 높이 웨치며 영용하게 최후를 바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5살이였다.
일대 건국영웅—리추악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해방사업을 위하여 지워버릴수 없는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보귀한 생명을 위대한 중국혁명사업에 바쳤다.
통하현 인민정부와 인민들은 리추악 렬사를 추모하여 흑룡강성렬사기념사업위원회의 협력하에 통하현 성내의 혁명렬사릉원에 ‘리추악려사기념비’를 세웠다.
흑룡강신문 편집 후기
70년전인 1936년 9월 3일 조선족의 훌륭한 딸 리추악이 통하현 토지에 붉은 피를 뿌리며 장렬히 순국하였다. 일찍 모스크바 동방대학과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한 력사가 있고 상지, 방정, 연수, 통하 일대에서 반일 투쟁을 벌리며 당 조직사업에 헌신한 리추악은 마지막 피 한방울 흘릴때까지 조직과 국가와 민족에 부끄러움 없이 혁명에 전력한 건국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