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더듬기
박래여
삼십 년이 넘도록 이어온 부부 계모임이다. 동네 백숙 집에 자리 잡았다. 남자들은 옻닭을, 여자들은 백숙을 시켰다. 소주와 맥주병이 쌓이고 남자들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져 들썩거리는데 아이를 안은 부부가 들어섰다. 오늘 계주인 아랫말 친구의 아들가족이다. 너덧 살 어린 손자가 귀여워 할아버지는 온몸에 기쁨이 출렁거린다. 주말을 맞아 아들 가족이 왔기에 인사하러 오라고 했었단다.
아이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엄마 품으로 달려들고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에게 인사를 시켰다. 사업가 친구 부인이 아이를 안으며 오만 원짜리 현금을 쥐어준다. 아이는 넙죽 받는다. 내 수중에 현금은 겨우 만 원짜리 하나다. 그것을 쥐어주었다. 친구 아들을 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그 아들이 열두세 살 때부터 이어져 온 모임이다. 우리 애들은 대여섯 살 어렸으니 두 친구 집 아이들이 우리 애들을 돌봐줬다. 일행이 노래방을 갈 때면 두 집 애들은 우리 애들 보호자 노릇을 했었다.
세월 참 빠르다. 사업가 친구는 친손과 외손이 다섯이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도 있다. 주말부부인 친구는 손자 한 명인데 우리는 아직 남매가 미혼이다. 늦은 나이에 부부가 됐으니 아이들이 늦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매도 일찍 결혼 했으면 아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 애들도 이미 꽉 찬 나이지만 결혼은 인륜지대사인만큼 본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일임해 버렸다. 그 집 손자를 보며 우리 나이를 생각했다. 두 친구는 나잇살에 따라 배가 더부룩하게 나오고 머리카락은 염색을 안 하면 허옇게 변해버린 할머니 할아버지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주량은 아직 젊은이 못지않다.
세 팀 모두 삼십 대 후반에 만나 칠십 대가 됐으니 어찌 세월을 탓하지 않으랴. 한 달에 한 번 만나기를 삼십 년이 넘도록 이어오니 인연도 참 질긴 인연이다. ‘아이들이 사십이 넘었으니 우리가 안 늙고 배기겠나.’ 술잔을 기울이며 허탈하게 웃는 노인들이다. 세 팀 모두 잘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두 팀은 은근히 우리 부부를 부러워하고 별난 사람 취급도 한다. 가난한데도 편안한 얼굴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들에겐 별나 보이는 것 같다. ‘우릴 어떤 사람이 껌 딱지부부래요.’ 우스개를 했다. 껌 딱지라는 말은 부러움이 가미된 말이 아닐까.
사업가 친구는 그 집 공장에서 생산하는 여러 종류의 순대를 한 박스 싸 와서 세 몫으로 나누어 한 덩이씩 준다. ‘오랜만에 순대 포식하겠네. 고맙소.’ 인사를 했다. 정이란 알게 모르게 드는 것이다. 삼십 년이 넘도록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다보니 이젠 만남이 기다려진다. ‘다음 달 계주는 사장님이네. 비싼 쇠고기 사 주나?’ 부자답게 계모임도 푸지다. 민물장어집이나 한우쇠고기 전문점이기 일쑤다. 아이들 어릴 때는 세 집에서 돌아가며 집에서 술상, 밥상을 차렸었다. 우리 집이 계주가 되는 날은 특별 식을 준비했었다. 황토 바른 닭구이, 대나무 통 밥, 염소 고기, 닭갈비나 찜, 돼지고기 수육, 도토리 묵, 손두부 등등, 평소 먹기 어려운 자연식으로 차려내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던 안 주인들이 반기를 들었다. 두 집은 음식점에서 계주를 해도 농부는 집에서 손님 대접하는 것을 원했다. 그만큼 나도 불만스러웠다. ‘집에서 한다고 돈이 적게 드는 것도 아니잖아. 술은 더 많이 먹지, 두 친구 부부 떠나고 뒷정리하고 나면 새벽 서너 시 되기 예사야. 나도 살자. 이젠 나도 음식 만들기 싫어. 나가서 하자.’ 농부에게 협박도 하고, 살살 달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덜컥 환자가 되고 일상생활도 힘들어지자 계모임을 음식점으로 정해졌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 달 계주가 알아서 음식점을 섭외한다.
초복이 다가온다. 이번 계주는 미리 복데리 하자며 옻닭과 백숙을 시켰다. 집에서 키운 토종닭이다. 나이 들면 사람 입이 변하는 것인지. 집에서 내가 하던 백숙 맛이 안 난다. 녹두를 넣어 끓인 걸쭉한 죽은 맛있다. 남자 셋은 술이 고기보다 맛있고, 여자들은 죽이 고기보다 맛있다. 한 면소재지에 살아도 얼굴 보기 힘들다. 몇 달 만에 본 음식점 안 주인은 여전히 곱다. ‘더 젊어진 것 같아. 음식점도 여전히 성업 중이고.’ 내 말에 환하게 웃는 안주인은 일요일은 무조건 쉰단다. 인건비가 비싸 부부가 해 낸다는 집, 염소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마늘이며 양파, 고추도 농사지은 것들로 상을 차린다는 집, 변함이 없어 편한 집이다.
오랜만에 염소와 닭들 울음소리도 듣고 똥냄새도 맡으니 새록새록 옛날이 그립다. 염소와 개, 닭을 치던 시절, 염소 새끼를 찾으러 산을 헤매고, 어미 잃은 새끼에게 우유병을 물리기도 하고, 강아지를 안고 놀기도 하고, 닭 알을 찾으러 풀숲을 뒤지던 시절이 떠오른다. 어느 겨울 계주였던 날, 우리 집 올라오던 일행의 차에 큰 고라니 한 마리가 치었고, 숨이 붙어 있는 고라니를 메고 온 남자들, 고라니 목에 구멍을 내고 봉을 끼워 생피를 먹던 남자들, 뜨거운 생간을 꺼내 참기름 소금장에 찍어먹고 고라니 고기를 구워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멧돼지는 수시로 터전을 침범했고, 풀어 키우던 개들이 멧돼지와 오소리, 너구리를 잡아다 마당에 놓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개도 묶어 키우고, 멧돼지도 고라니도 불법이라 잡지 못한다. 오소리 너구리도 귀해졌다. 마당의 풀밭에 집을 짓고 살던 산토끼도 사라졌다. 대신 산고양이가 기승을 부린다. 한 자리에 삼십 년이 넘도록 살자 사람 냄새를 싫어하는 산짐승이 스스로 터전을 옮겨 간 것은 아닐까. 가능하면 자연과 어울러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데도 짐승은 사람을 겁내 더 깊은 골로 떠났는지 모른다.
아랫말 친구의 아들 가족 덕에 옛날을 추억하는 자리가 됐다. ‘오늘 술값은 아부지 대신 니가 내라. 친구 아들이 사는 밥 한 끼 무 보자.’ 사업가 친구가 농담을 던졌다. 그 친구 아들이 진짜 계산을 하고 갔다. 이런 자리에 우리 아들이 끼었다면 아들 역시 밥값을 내 주고 갔을 것이다. 세 팀 다 자식들 잘 키웠고 잘 자라주었다. 말썽피운 자식을 둔 집이 없으니 자식 교육은 부모 하기 나름이 아닌가 싶다.
“이젠 헤어집시다. 다음 달에 보자고.”
운전기사가 된 나는 술 취한 남편을 차에 태우고 음식점을 떠났다. 언제까지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 운전이 가능할 때까진 만나겠지만 세 팀 중 한 팀의 아내라도 운전을 못하게 되면 모임도 끝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여섯 사람 중 누군가 먼저 이승을 떠날 수도 있겠다. 끝이 보인다는 생각을 하니 모임 자체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모두 지금처럼만 건강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