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剛般若波羅蜜經
제3강 선현기청분 제2
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출처 : 염화실
善現起請分 第二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하시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나니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이니다 世尊이시여 願樂欲聞하노이다
제2, 선현(善現)이 법을 청하다[善現起請分]
그 때 덕이 높으신 수보리(須菩提) 존자(尊者)가 대중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옷차림을 바르게 정돈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 공경하면서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잘 당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좋은 질문이다, 수보리야. 그대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그대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지니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즐겁게 듣고자 하나이다.”
금강경의 대지(大旨)
금강경 내용을 요약하여 대지(大旨)를 표현할 때 ‘파이집 현삼공(破二執 顯三空)’ 이라는 말을 씁니다. 나[我,주관]와 남[法,객관]이라고 하는 두 가지 집착을 깨뜨려서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이라고 하는 세 가지 공(空)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것을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정상이지만 나와 남이라고 하는 집착 때문에 문제가 야기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집착인 주관과 객관을 깨뜨려서 자유롭고 해탈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금강경의 큰 뜻이다’라는 표현도 자주 합니다.
수보리가 법을 청하다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은 ‘선현(善現)이 일어나서 법을 청하다’ 라는 뜻입니다. 선현은 수보리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공의 이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지요. 흔히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 라고 합니다.
수보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금강경은 틀림없이 공(空)의 이치를 이야기 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공이란 낱말이 없습니다. 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공의 이치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공을 얼마나 생활화 할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 이야기 되어질 것입니다.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希有하시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시에 장로수보리가 제대중중이라가 즉종좌기하사
편단우견하시며 우슬착지하시고 합장공경하사
이백불언하사대
희유하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선호념제보살하시며
선부촉보살하시나니
時에
그때, 법회가 이루어질 때이지요.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수보리는 연세도 높고 어른이고 또 존경받아 마땅한 십대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장로(長老)라는 말을 씁니다. 장로라는 말이 본래 불교용어예요.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편단우견(偏袒右肩)은 오른쪽 어깨에다 옷을 치우쳐 맨다는 뜻입니다. 스님들의 가사를 보면 매듭을 왼쪽 어깨에 걸쳐놓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른 쪽 무릎을 땅에 댔다고 했습니다. 인도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진실을 이야기 할 때 이런 자세를 취합니다. 계약을 한다든지, 고백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기의 심정을 토로할 때 등등 그 마음이 진실하다는 뜻에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혀를 내미는 것도 진실을 말한다는 뜻이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장로 수보리도 가사를 오른쪽 어깨에 치우쳐 매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합장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고해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보살을 호념하고 부촉하시는 분
希有하시니다 世尊이시여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정말 드문 일입니다’‘정말 세상에 드문 분이십니다 세존이시여’ 라는 뜻입니다. 다른 대승경전에는 부처님에 대한 찬탄의 말이 아주 많습니다. 금강경에서는 ‘희유하십니다’라는 말로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여래가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하시나이다.
선(善)은 ‘잘’이라는 뜻이고 호념(護念)은 염려하고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수보리는 여래가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아끼고 염려하고 보살피신다고 찬탄합니다. 그리고 또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선부촉(善付囑)하신다고 찬탄합니다.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가르치고 당부하신다는 뜻입니다. 부촉(付囑)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예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경전을 읽어라’ ‘어떤 수행을 해라’ ‘무엇을 잘 지켜라’ ‘무엇을 유념해라’ 등등 무엇인가를 당부하실 때 ‘부촉한다’라고 합니다.
불교사찰에서는 교무나 총무나 재무와 같은 소임을 줄 때도 부촉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임명한다는 말은 잘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보살(諸菩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보살은 진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진정 의미있고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보살을 표현할 때 흔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위해서 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하는 한편 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아끼고 사랑하며 교화합니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간단한 말이면서도 우리 삶의 지향점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의 입장에서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보살행을 하는 사람, 불자의 삶이 보살입니다. 보살행도 무주상 보살행을 하면서 인생을 의미있고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들도 보살입니다.
이러한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부촉하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 많겠지만, 수보리가 일어나서 부처님의일을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세존이시여 선남자선녀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면 응운하주며 운하항복기심하리잇고
청법의 내용
응운하주(應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겠습니까’ 하는 것은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는 내용이거든요. 우리가 무턱대고 ‘심심한데 법문 좀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법문해 줄 내용을 콕 찝어서 질문합니다.
이렇게 수보리가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금강경 제2분의 이름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선현이 법을 청하다’입니다.
善男子善女人이
선남자 선녀인은 줄여서 선남선녀입니다. 사회에서도 흔히 쓰는 말이지만 불교에서 나온 말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다 훌륭하신 남자고 훌륭하신 여자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좋게 보고, 훌륭하게 보고, 위대하게 봅니다. 나아가서 보살로 보고 부처님으로까지 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사람을 비하해서 부른다든가 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이 진정 성인다운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여기 아주 중요한 말이 이 단락에 나왔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최상의 깨달음’입니다. 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 마음을 낸 사람을 발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말을 늘리면 발보리심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보리심’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보리심은 자비와 원력입니다. 사람들을 보았을 때 저절로 연민심과 자비심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잘 보살피고 거두겠다고 하는 원력입니다. 이 원력의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하고, 도심이라고도 하고, 깨달음의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보리심이나 도심이나 깨달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근본적인 뜻은 사람을 연민과 자비로써 잘 보살피고 깨우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보살피고 깨우치겠느냐? 불교에서 하는 것과 타종교에서 하는 것과 또 보통의 자선단체에서 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불교에는 불교다운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내용인가 하는 것은 앞으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습니까
수보리가 모든 보살을 호념하고 부촉하신다고 여래를 찬탄하면서 물었습니다. “대자비와 대원력을 갖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응운하주(應云何住) 응자는 ‘꼭’ ‘응당히’라는 뜻이고, 주는 ‘산다, 머문다’라는 뜻입니다. ‘운하주 어떻게 머물겠습니까’ ‘응운하주,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합니까?’
이것을 묻고 다시 또 묻기를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항복받는다는 것은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자기 분도 아니고 자기 인연도 아닌데 욕심을 낼 수도 있지요. 그럴 때 그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되느냐,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좀 좋은 일을 해놓고도 생색을 내고 싶다, 그럴 때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되느냐 이러한 것을 묻는 것입니다. 다른 경전에도 이러한 질문과 답이 있겠지만 금강경은 처음부터 수보리가 보살을 호념하시고 부촉하시는 부처님께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길’과 ‘사는 방식’을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금강경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간단명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나니
불언하사대 선재선재라 수보리야 여여소설하야
여래가 선호념제보살하며 선부촉제보살하나니
선재선재라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재선재라 하였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라는 뜻입니다. ‘선재선재’라는 말이 마치 ‘부처님이 옆에서 우리들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들려주시는 말씀처럼 들린다’고 표현한 이도 있습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라는 말은 부처님이 모든 생명을 찬탄하는 말씀입니다. 수보리가 질문을 잘 해서 훌륭하다고 하는 뜻도 물론 있습니다만 부처님이 보시기에 우리 중생들은 질문을 못해도, 묵묵히 있어도 모두가 선재선재입니다.
‘참 훌륭하고 훌륭하다. 어찌하면 그렇게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화낼 줄도 아느냐. 참 신기하고 신기하다.’이런 의미까지 선재선재라는 말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나니
수보리 그대의 말한 바와 같아서 여래가 선호념제보살하며 선부촉제보살한다. ‘여래가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한다. 또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한다. 당부하고 가르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이니다 世尊이시여 願樂欲聞하노이다
여금제청하라 당위여설하리라.
선남자 선녀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이는
응여시주하며 여시항복기심이니라.
유연 세존이시여 원요욕문하노이다.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여(汝)자는 수보리가 물었으니까 수보리에게 답하는 말도 되지만 사실은 금강경이 설하는 자리에 모인 1250명의 대중이기도 하고,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600년 지났지만 금강경을 읽는 바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경전을 봐야 되겠지요.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보리심을 발한 사람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사람은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응당히 이와 같이 살아야 하며 응당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시(如是)라고 하는 말은 ‘아래와 같이’ ‘앞으로 이야기 되어질 내용과 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시’라는 말 속에는 앞으로 이야기 되어질 내용들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고래의 주석가들은 ‘여시’라는 말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설명되어질 삶의 방식’ 또 ‘앞으로 설명되어질 마음 항복받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겠노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고 그와 같이 살아라. 앞으로 이야기 해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唯然이니다 世尊이시여
그러니까 수보리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유연(唯然) 할 때 유(唯)라는 말은 ‘예’라는 뜻입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는 뜻으로 ‘유연이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호흡에 읽어야 합니다.
願樂欲聞하노이다
원요욕문하노이다 이럴 때는 즐거울 락(樂)자가 아니라 좋아할 요(樂)자로 읽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듣는 자세도 좋습니다만 듣기를 좋아하는 마음, 정말 듣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자세로 법문 듣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상으로 제2선현기청분이 끝났습니다.
금강경 제2분에서는 별다른 큰 뜻이 없습니다. 수보리라고 하는 장로 제자가 부처님께 법을 청하고 부처님께서 그 답을 설해 주시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법을 청하는 자세
여기서 우리가 하나 유의할 점은 법을 알고자 하는 자세, 법을 듣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누가 누구에게든 간곡한 마음으로 법을 청하고 들으려고 했을 때 진정 큰 깨달음이 옵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심심하니까’ 또는 ‘상식적으로 불교가 무엇인가 그저 궁금하기 때문에’ 하는 정도 가지고는 간절한 마음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큰 깨달음이 오기 어렵습니다. 수보리처럼 간곡한 마음으로 청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3강 대승정종분 제3
大乘正宗分 第三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하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하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제 3, 대승의 바른 종지[大乘正宗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보살은 온갖 중생들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나는 것, 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생기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있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은 것들을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제도(濟度)하느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실은 제도를 얻은 중생은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相), ‘남’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수명’에 대한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바르고 으뜸이 되는 큰 가르침
금강경 제3분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상당히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경전을 막론하고 이 단락 제목처럼 무게있는 제목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 제목이 ‘대승정종(大乘正宗)’입니다. 대승(大乘)은 큰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한자로 작은 수레 큰 수레 할 때의 큰 수레라는 뜻인데 많은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큰 가르침이라고 표현합니다. 종(宗)자는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종(正宗)은 바르고 으뜸이 된다, 큰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바른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제 3분의 제목인 ‘대승정종’은 ‘큰 가르침 중에서도 바르고 으뜸이 되는 내용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제목에 담겨있는 속뜻을 잘 이해하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게 있는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불이 고 수보리하사대 제 보살마하살이 응여시항복기심이니
소유일체중생지류인 약난생 약태생과 약습생과 약화생과
약유색과 약무색과 약유상과 약무상과 약비유상비무상을
아개영입무여열반하야 이멸도지호리니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들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다스린다는 말보다 ‘항복’이라고 하는 강한 표현을 쓰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냥 다스리는 정도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확실하게 항복받아야 됩니다. 면전에서만 항복받는 것이 아니고 정말 철저히 저 깊은 곳까지 자기 마음을 항복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항복받는가?
여래는 일체중생을 멸도에 들게한다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소유(所有) 있는 바 일체중생지류(一切衆生之類)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들을 말합니다. 약난생, 약태생 할 때 약(若)자가 여기는 만약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동격을 나열할 때 한자에서 약(若)자를 씁니다. 난생이라거나 태생이라거나 습생이라거나 이런 뜻이지요.
알로 태어나는 것이 많습니다. 조류가 거의 다 알로 태어나지요. 태생하면 포유류들이 태생이지요. 습생은 습한 데서 태어나는 생명들입니다. 화생은 변화해서 태어나는 생명들, 유색은 어떤 형체가 있는 생명들입니다. 무색은 형체가 없는 생명들입니다. 여기서 색(色)은 색깔이라는 뜻이 아니라 형체라는 뜻입니다. 유상은 생각이 있는 생명들이고 무상은 생각이 없는 생명들입니다. 비유상비무상은 하나인데 생각이 있기도 하고 혹은 생각이 없기도 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아홉가지 중생을 구류중생(九類衆生)이라고 합니다. 아홉가지 종류의 생명체라는 뜻인데 인간은 태생에 해당 되지요. 그런데 이것은 다종다양한 생명의 모습들이면서 또 한편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봐도 됩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마치 조류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생으로 인간답게 사는 사람도 있어요. 습생으로 태어난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화생으로 태어난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홉가지 종류 중생을 모두 인간의 여러 가지 삶에다 배대를 하면 다 맞아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이런 다종다양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을 아개영입무여열반(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이멸도지(而滅度之)호리니 내가 다 그들에게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그들을 제도하리니 그런 뜻입니다.
멸도(滅度)라는 말은 제도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화(敎化), 제도(濟度)를 여기서는 멸도라고 표현 했습니다.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제도한다고 했는데, 무여열반이란 모든 번뇌망상이 다 사라진 경지,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교리적으로 무여열반, 유여열반, 대열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들의 마음에 번뇌가 다 사라진 상태’로 이해하면 됩니다. 여래는 이러한 많고 많은 생명들을 무여열반으로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실로 제도받은 중생이 없다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하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하되 실무중생득멸도자니라.
‘실무중생득멸도자’이 구절이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와 같이 다종다양한 생명들 거기다 숫자도 얼마나 많습니까. 종류도 많지만 숫자도 많습니다. 난생도 무수히 많고 태생도 무수히 많고 습생도 무수히 많기 때문에 무량무수부변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무중생(實無衆生) 실로 없다, ‘실은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며 이것을 보고 대승정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로 중생이 제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여래가 그 많고 많은 중생들을 제도 했지만 왜 실은 제도를 받은 중생이 없는가?
이것은 상당히 차원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생명은 그 모습이 어떻든,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 완전무결한 존재다’ 하는 뜻입니다.
완전한 무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바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제도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미 제도되어 있다는 속뜻이 있습니다. 아주 깊은 뜻이 있어요.
부처님께서 평생설법하고도 ‘나는 한마디도 설법한 바가 없다’ 평생 중생제도 해놓고 ‘나는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구절 ‘실로 그 많은 중생들을 내가 제도한 바가 없다’와 같은 뜻입니다.
보통의 우리 불교상식으로 보더라도 부처님이 ‘내가 중생을 모두 제도했노라’ 하고 자랑한다면 부처님은 상쟁이가 되겠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무슨 부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모두 완벽한 존재다
또 사실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그 모든 사람, 그 모든 생명은 그대로 완벽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정말 부처님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부처님이 ‘내가 중생을 제도했노라’ 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지요. 특히 금강경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금강경은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추호만한 관념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 금강경의 큰 뜻입니다.
중생을 제도했어도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제도한 적도 없고 제도할 것도 없고 제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라고 말씀 하십니다.
何以故오
하이고(何以故)왜냐하면 그랬어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면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모든 사람 사람의 궁극적 위대한 차원을 망각하고 아상(我相) 나라고 하는 생각이나, 인상(人相)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 중생상(衆生相) 부처에 상대되는 중생이라고 하는 열등의식, 수자상(壽者相) 나는 몇 살밖에 못산다라고 하는 한계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인간의 본래 면목은 꿈에도 보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를 한 입장에서 설사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세울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세히 뜯어보면 본래로 완벽한 존재입니다. 더 고치고 말 것이 없어요. 본래 사람으로서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하는 의미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비보살이다
卽非菩薩이니라
그런 내용을 모른다면 즉비보살(卽非菩薩)이지요. 곧 보살이 아닌 것입니다. 불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인생을 좀 더 보람있고 의미있게 살려는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이 단락을 대승정종이라고 합니다. 참생명의 완전한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무게 있는 제목을 달게 된 것입니다.
작성자 : byunsdd
무비스님 - 제3강 금강경 2.善現起請分 3.大承正宗分
주소 : https://youtu.be/mH58rnwDCTo?si=SjcYDvpZeXeWPRDj
첫댓글 무비스님 - 제3강 금강경 2.善現起請分 3.大承正宗分
주소 : https://youtu.be/mH58rnwDCTo?si=SjcYDvpZeXeWPRDj
PLAY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