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 김애자
날이 밝아오면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와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횬효림 사이로 난 자드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흐름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된다.
싱그러운 바람결이 피부에 닿고, 비릿한 이끼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이럴 땐 산 밑에서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좋거니와, 젖빛 안개 속에서 어리서리 드러나는 숲의 실루엣도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생명과학의 원칙에서 보면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식물들이 내뿜는 탄산가스 배출이 끝나지 않을 때라서 그렇지만, 산촌에 살면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지다보면 일정한 시간에 산책에 나설 수 없을뿐더러, 농번기에 바쁜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는 것도 좋은 방편인 것 같아 아침 시간을 택한 것이다.
오늘은 잣나무 단지로 들어섰다.
몇 발자국 걷다가 덩치가 큰 잣나무를 양팔로 껴안고 이마를 대는 순간 코끝에 와닿는 잣나무 향기에 절로 눈이 감긴다.
순간 나무를 껴안고 명상에 잠긴 금발의 선수 ‘제이미 엔더슨’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본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 TV 화면을 통해서이다.
스노보드슬로프 스타일 선수로 나온 그녀는 여러 개의 장애물을 능숙하게 통과하면서 보여준 고난도의 점프와, 멋진 회전기술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남자도 해내기 어려운 종목을 여자 선수가 당당하게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기 전, 그는 캘리포니아 타호에 들려 자작나무 숲을 거닐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시간만 나면 숲을 산책하며 명상하기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기꺼이 그녀의 팬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자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흙과 물, 공기와 불이란 네 가지 원소가 인간의 몸을 이루는 생명의 근원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명심이나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흙과 물과 공기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소득을 올리면서 가족애를 돈독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억지로 무엇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토끼나 강아지와 고양이와 닭 등의 동물들과 친숙하게 놀도록 배려할 뿐이다.
제이미 앤더슨도 어린 시절부터 동물들과 숲에서 지내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경기를 앞두면 매번 긴장된 몸의 세포를 이완시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숲길을 걸으며 명상을 하고, 때론 나무를 껴안고 나무의 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며 필승을 다짐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태어난 성욱이는 중학교 2학년이고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의사인 아빠와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가 아이들은 시골에서 맘껏 뛰어놀면서 자라야 한다며 친정 옆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들 양육을 친정에 맡기었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흙에서 뒹굴며 자랐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외할아버지 내외는 당신의 자식들 기르던 방식대로 흙에 놓아 길렀던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면서 할아버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온갖 꽃 이름을 익혔고 새와 곤충들의 명사를 달달 외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형제는 닭장으로 가 모이를 주고 송아지만 한 진돗개를 앞세워 들판과 개울과 숲을 학습장으로 삼고 휘돌아 쳤다.
곤충들도 아이들의 친구였다.
도시의 아이들이 징그럽다고 기겁을 하는 송충이도 민달팽이도 아무렇지 않게 집게로 잡아 땅에 묻어줄 줄 안다.
아이들 소리가 끊어진 적막한 산촌에서 나는 이들 형제가 거침없이 뛰노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기에 좋았던 것은 주말이면 아빠와 논바닥에서 야구공을 치는 장면이다.
처음엔 야구방망이를 잡고 폼만 잡았던 애들이 점차 아빠가 던지는 공을 받아치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야구는 즐거운 놀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추수가 끝나야만 가능한 놀이였다.
그렇게 겨울 한철 논바닥에서 시작한 야구놀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겨울에는 베트남에서 치른 국제청소년 야구대회에서 성욱이가 홈런을 날리고 돌아왔다.
영어와 수학 점수도 90점을 상회한다.
국가 대표가 되려면 영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면서 영어와 수학도 깔축없이 챙긴다.
나는 성욱이 형제를 보면서 루소가 《에밀》에서 밝힌 소년기 10장이 생각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란 것과,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생각하도록 키우라는"말이다.
사실 아이들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체험 이상의 교육은 없다는 것을 나는 성욱이 형제를 통해서 절감한다.
성욱이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추수철이면 주말을 이용하여 외할아버지 일손을 거들어 준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에 40kg이나 나가는 벼자루를 등으로 져다 할아버지 트럭에 차곡차곡 싣는다.
물론 영어와 수학을 더 잘 배우기 위해 학원에도 가지만 아이는 제 스스로 노력해야 목적한 만큼 배울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는 그 행복의 궁극의 목적은 저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자신이 살아온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생의 가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내외도 산촌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셈이다.
우리 손으로 남새와 꽃밭을 가꾸고 메주를 쑤고, 장과 고추장을 담는 이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 숲을 산책하면서 자연주의자 에머슨이 지식인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던 말을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발로 걸어야 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라는 이 고요한 잠언箴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