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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회후기와 다회일지 쓰기/ 하나를 잡으면 전체를 보게 되며 동시에 그 전체가 출렁인다.
ㄷ ㅏ회일지는 차 일기이지만, 다회일지 작성을 각각의 개성에 맞게 작성하면 자신의 차공부가 된다.
매일 혹은 틈틈이, 또는 간헐적으로 생각날 때 기록하며 써 보는 그 자체가 차공부다.
대체로 다회후기와 다회일지를 병행해서 한 번에 쓰지만, 분리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 또는 시음 중심으로 하지 않는 이상, 차시음에 대해서 다회후기나 다회일지로 세세히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 다회나 시음 행사에서의 시음은 시음 용지에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회후기> 게시판과 <차시음> 게시판은 바로 이 용도에 초점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차시음> 게시판은 이 부분은 특화하여 좀 더 다채로운 ‘차시음 일지’로 활용되길 바라본다.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다면 혼자 또는 두서넛이 좋다.
그리고 시음은 ‘단품 차’가 아니라 반드시 ‘비교시음’이어야 한다.
차는 단독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품 차 한 종의 차를 가지고 그 차 자체가 가진 맛을 시음하고 평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른 차맛과 비교하고 있다.
그 자신 안에 이미 다른 차맛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차는 다른 것들에 기대어서 표현된다.
탕색은 색상표에 기대고 있고, 향은 꽃향과 과일향, 나무 향 등에 기대고 있다.
맛 역시 오미에 기대어 표현되며, 곡류나 식물의 맛에 기대고 있다.
왜 그럴까?
찻잎은 찻잎이 가진 고유의 차향을 내는데 말이다. 그건 바로 찻잎이 제다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 시음은 반드시 ‘비교시음’이어야 한다.
이건 우열을 비교 시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비교 시음하는 것'이다.
차훈련은 우열을 논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간파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바로 ‘차시음 훈련’이다.
같은 차라도 우리는 사람에 따라 차맛은 달라지기도 한다.
차는 날씨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우리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물맛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다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차의 양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차 품평은 기준을 정해 놓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 시음은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편의상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특정한 차에 대해 시음한다고 하였을 때라고 가정한다면, 어느 순간 차의 선호도는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 차의 기본적인 것을 파악하고 나면, 맛에 대한 호불호는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호불호도 그 차에 대한 것이지 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차에 대한 평가이지 그 사람의 취향에 대한 평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차에 대한 평가가 좋아도 어떤 사람의 취향은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사람은 그러한 자기 기준에 맞춰서 차를 선택한다.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그 자신의 취향을 다 반영할 만큼 기회가 열려 있고,
선택지가 있다면 사람은 더 많은 다양성에 노출될 것이다.
사람은 끝없이 타인이 공유하고 있는 것을 원함과 동시에 그 자신만의 취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소유함과 동시에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쉽사리 그러한 상황이 주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다 충족할 수도 없다.
어느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차 역시 모두가 직접 차산지에 가서 차를 구매하거나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대치를 발휘하면 좋겠지만, 그 역시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는 않은 게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람의 조건들에서 보자면,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서서 즐기는 형태로 가려면,
차시음과 차생활 그리고 다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프로그램이 있는 차회로 ‘차회’ 그 자체를 일상으로 끌어오는 수밖에는 없다.
차회를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를 습득하여 일정하게 반복하는 가운데 특별한 감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느낌, 그렇게 차오르는 여운으로 삶을 충족하는 것이다.
차만 마시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세계를 열어주기에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비교시음’이라는 의미에는 그 자신의 선호도가 아닌 타자의 선호도도 포함되어야 ‘비교시음’이 완결된다.
혼자서 하는 시음과 두서너 명, 또는 더 여러 사람이 하는 시음은 분명 차이가 있다.
타인의 평가에 그 자신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를 취합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그 차의 시음을 객관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비교시음’이다.
그러므로 1차로 그 자신이 갖고 있는 평가능력과 2차로 다른 차들과 비교한 상대 평가,
3차로 타인의 평가를 합산 취합하여 내린 평가, 이 모든 형태는 자신과 차, 차와 차, 타인과 차를 비교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종합한 형태가 ‘비교시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에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가 다회로 발전되었음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아니라면 처음부터 사람들은 모일 구실이 필요하였던가! 일 것.
그 구심점으로 차보다 더 나은 것은 없었을 테니까!
어떤 충족에서 보자면!
다회후기/ 후기가 바로 ‘의전’ 공부, 의전은 바로 순서와 체계를 알게 하는 것.
ㅊ ㅏ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서는, 오랫동안 차를 행해 온 회원들만의 ‘활동무대’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다회’의 형태일 것이다.
물론 다회는 여러 형태가 있다.
다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차피 본질적으로 자기 여가를 사용하는 시간이다.
시간을 만들어서 다회에 참여하는 것이며, 시간을 내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다.
혼자서 마셔도 되는데 굳이 다회에 참석하여 함께 차를 마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차생활을 한다는 것은 취미활동처럼 똑같이 투자(돈과 시간)하는 것이 먼저다.
평생을 지속할 차생활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그 자신의 여가생활을 일부러 차생활에 할애하는 것이다.
모든 취향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차 역시 그 자신을 만드는 시간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돈과 시간과 자기 행위를 투여하는 것.
차가 온라인에서 공부만하고 또는 혼자 마시면 그뿐이면 좋겠지만,
다회라는 행위를 통하였을 때 차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힘’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더 잘 인식하게 된다,
집단 안에 포함되어 결속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집단에 의지하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기본 욕망이기 때문이다.
다회는 ‘장소’가 필요하다.
물론 그 장소는 어느 특정한 곳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집에서 차를 마시더라도 찻자리가 필요하듯이,
다회는 장소 없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차는 오프라인 또는 우리 삶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 순간에 재생되므로(되살아나므로),
재생될 공간이 필요한 것. 차가 다기에서 물에 의해 재생되듯이.
그러니 ‘공간’은 실내든 실외든 잘 활용하여야 하는 것.
다회후기/ 혹여 ‘의전’을 알고 싶으면, 다회 후기를 써야 한다.
어떤 행사의 기록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의전을 감각하게 한다.
의식적인 행사만이 아니라 어떤 ‘룰과 절차’가 있는 것은 모두 본질적으로 어떤 ‘완성도’를 향하게 된다.
그 완성도가 곧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충일감을 주기 때문이다.
뭔가 구색이 갖추어질 때 사람이 충일감을 얻듯이 말이다.
그것이 깨질 때 사람의 마음도 깨진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체계는 있다.
이러한 것을 자기 안에 내재화시켜 체화되려면 ‘다회후기’를 써야 한다.
글을 쓰고 사진을 정리하면서 시작과 과정, 마무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서가 바로 ‘질서’란 것을 알게 되고, 여기에서의 시행착오는 곧 그 자신의 삶에 투영되고 반영된다.
그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한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니체는 오류가 삶을 만든다고 했다.
어떤 의전들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다.
그것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한 나라의 역량이 집중되기도 한다.
의전은 우리 삶 곳곳에서 필요하다.
그것이 곧 질서이기 때문이며, 그 질서는 계열을 종합하여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서는 정서적 충만감을 주기 때문이다.
‘행다’의 순서처럼 다회도 그러하며, 하물며 ‘헌다’는 의전 그 자체다.
‘차만들기’ 역시 순서에 의해서 차가 만들어진다.
다회도 순서에 의해 다회가 완결된다.
모든 것들에게는 절차가 있듯이.
이러한 것을 변용하여 응용하면 바로 ‘창작’이다.
다도 또는 의식차는 모두 이러한 것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보면,
창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순서대로 동작을 하는 것, 동작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한 것, 의미를 부여한 것에 미적 인식을 가미시킨 것.
곧 무엇을 보는가? 에 따라 창작의 형태도 달라지는 것.
다회후기는 그러한 순서와 질서를 스스로 내재화시키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자기 객관화하는 시간이다.
그것이 바로 글의 힘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피드백’ 주는 것 역시 자기 객관화이다.
다회 또는 차행사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은 오류를 스스로 알았을 때 시정이 가능하다.
똑같은 오류가 계속 일어나는 경우는 그 진행과정상의 매끄럽지 못함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가 계속 쌓이다 보면 결국 그 오류가 우리 모두를 쳐버린다.
점점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삭막한 환경에 노출하게 된다.
다회가 점차로 사람을 안정되고 아름다운 관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다회를 치르지만,
결과는 언제나 어떤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면 분명 오류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셀프 피드백’이란 바로 자기 글쓰기를 통하여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주는 것.
이 것이 축적되면 그 자신의 삶이 바뀔지도.
비록 다회 후기에 다회에서의 일련의 그 모든 과정이 이야기 속에 다 들어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 자신이 그 과정을 상기하며 생각은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또 하나의 그 자신만의 세계다.
자기 인식을 교정하고 자기 관점을 갖는 시간이기도 하며, 자기 객관화의 시간이기도 하다.
다회후기 쓰기 역시 창작이다.
다회 장소
ㄷㅏ호ㅣ장소는 하나의 세계다.
거시적인 세계에서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과 같다.
그때 그 세계에는 바깥과 분리된 하나의 결계가 쳐진 것.
그러니 그 공간은 독립적인 하나의 세계이다.
사람들이 다회 장소에서 뭔가를 하면서 서로의 파장에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밖을 의식하고 행동한다. 그렇지 않고 그 장소에 매몰될 때 에티켓이나 자기감정 컨트롤에 실패한다.
의식은 항상 외부로 열려 있어야 한다.
이 외부로 열려 있는 의식이 그 자신을 통제한다.
이러한 일련의 감정은 스트레스 형태다.
이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한다.
감당할 때 긴장감이 그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 긴장감이 그때의 그 자신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
차 마시기
ㅊㅏ를 마시는 것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
차맛을 음미하려면 바로 그 순간의 그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차맛은 몸에 각인된다.
몸이 기억할 때 비로소 축적이 되는 것.
차를 마신다는 것, 시음을 한다는 것, 다회를 한다는 것은 모두 우리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현재에 머무는 바로 그때 특이성이 발생하며, 이 특이성은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시간 안에서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것.
이 ‘사건’은 그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의 이벤트가 다른 형태로 계속 변화되는 양상이다.
그 이벤트(사건)의 진행방향은 ‘일의성’이다.
그것들의 궤적을 연결하면 하나의 ‘직선’ 형태이기에 그러하다.
하나가 계속 변모하고 모양을 달리하며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로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왜 사람이 서로 만나는가? 사람은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활동, 움직임에 의해 무엇인가의 일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때는, 현재에서 그 순간에 집중하여 몰입하면 발생하게 되는 특이성에 의해
계속 다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사건적 형태의 '일의 진행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씨를 뿌렸으면 땅 속이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관통하여 어느 순간 무엇인가가 솟아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덧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환경의 윤택함과 척박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움직임이라는 행위의 결과'는 있게 마련이다.
반드시 오프가 아니라도 온라인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글도 마찬가지다.
모두 사건적인 형태라서, 그 언젠가의 시작점이 있었기에 계속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존재 자체가 사건적이므로 우리의 만남이 지속될 수 있는 것.
이처럼 단순한 원리다.
움직임 그 자체가 전부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고 웃음을 준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빌미를 제공하는 것, 엮임을 생성해 내는 만남이 재밌는 만남이다.
차 마시면 즐거운 이유가 차를 마시는 방식이 ‘놀이’적이기에 그렇다.
차는 연결이다. 다도구 사용 방식에 그것이 이미 담겨 있다.
ㅊ ㅏ는 연결이다. 차는 어떤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럴 때 어떤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이 감정이다. 감정과 연결되어 사람은 생각을 하게 된다.
차와 다도구를 가지고 차를 우리는 과정은 어떤 하나의 과정을 드러낸다.
그래서 차가 어려운 것. 그 과정을 드러내는 숙련도가 있어야 하므로.
가령, 예를 들자면 ‘일본다도’는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고,
‘명선茗禪’은 ‘선다일미禪茶一味’를 드러내고 있다.
차와 선. 추사가 아니라면 이것을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술’ 그 자체로 말해줄 사람이 있었겠는가?
차인에게 있어 자신의 다기와 찻잔이란
찻잔만 자기 찻잔 가지고 다니라 하지 말고, 자기 다기를 가지고 직접 차 우리는 형태가 보편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려 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그동안의 차모임이든, 차행사든, 차박람회 등등의 형태였다.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반면에 다회는 회원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대체로의 모든 다회에서 차는 무조건 팽주 한 사람이 우리고 차를 우리는 팽주를 보조하는 차협(다동을 대체한 말)이 돕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차를 우리는 일은 실로 혼자서 우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잔의 차가 나오려면 구색이 갖추어야 져야 한다.
구색을 갖춘다는 의미는 이러하다.
다탁, 다반, 화로(물을 데우는 도구, 현재는 전열 도구를 의미함), 차, 물, 다기(차호 및 개완 등)와 찻잔, 숙우, 찻잔 받침, 차칙, 차시 등등, 퇴수기 등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 더 간소해질 수도 있고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팽주 부면에 모든 것을 구비해놓고 차를 우리거나 또는 차협이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다주는 형태도 있다.
일상에서는 그 모든 것을 그 자신이 세팅해 놓고 혼자서 준비한 후에 차를 우려 마신다.
현대로 올수록 한 잔의 차를 우려내는 시스템을 간소화하고 자동화 하려고 도구들이 현대화 기계화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도 다기로 차를 우려 마시는 행위는 그대로 남는다.
차려 놓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다 해도 ‘먹는 행위의 동작’은 남듯이!
차를 우리는 과정과 마시는 과정은 그 자체로 ‘차’에 있어서는 ‘문제’다.
여기서 ‘문제화’ 시키는 이유는 바로 그 문제가 주어져야 ‘물음’을 만들어 내고 답을 찾기에 그렇다.
바로 이 지점에 ‘차의 모든 것’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다기로 차를 우려 마시면 그 순간 그 자신이 ‘팽주’가 된다.
자신이 자신의 찻자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시작과 마무리를 그 자신이 모두 해야 하듯이, 그 자신이 그 경험을 그 자신의 신체에 각인시키게 된다.
시작과 과정 마무리를 훈련하는 셈이다.
팽주 훈련을 혼자서가 아닌 여럿이 있는 곳에서 하는 훈련은 중요하다.
공간과 교감하는 훈련이기에 그러하다.
공간을 이기는 훈련이다. 이긴다는 표현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농부가 흙을 이겨야 농사를 지을 수 있듯이, 작가가 그 자신의 작업실에서 펜과 노트를 이겨야 글을 쓸 수 있듯이, 차인은 공간과 다기를 이겨야 차를 우릴 수 있다.
결국 이거다. 장소에서 공간을 파악하고,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 속으로 들어가 그 에너지를 균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균일함을 자기 안에 내재한 후에 그 힘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되면 바로 하나의 어떤 형태를 만들 수 있다.
그 시간을 보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식’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명상을 하러 가거나, 요가를 하러 가거나, 책을 읽으러 독서 모임에 가거나 하는 등의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행위들처럼, 차와 보내는 시간 역시 그렇게 보낼 수 있다.
친목활동을 넘어서는 하나의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자면 먼저 그럴 환경이 갖추어 져야 한다.
그러한 공간들이 생겨나야 한다.
또한 자신의 다기로 우려 마시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도자기 산업 역시 개인 다기 맞춤으로 어떤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먼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어디서든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뜨거운 물을 공수받을 수 있는 환경과 장소.
하물며 공원에서도.
___2023/07/02 아란도 작성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