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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붕괴 사고 발생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지붕 붕괴 현장.
2004년5월23일 오전7시쯤 프랑스 파리
의 북쪽 외곽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여객터미널의 지붕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
가 발생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으면서
터미널 건물이 완전히 반 토막 났다.
한국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형 사고였다.최소한
5명이 사망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 사고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는 적었다.
사고가 난 2E 터미널은 전해 6월 개통돼
완공된 지 1년도 안 되는 새 건물이었다.
에어프랑스, 대한항공 등이 입주해 있고
한국행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곳이어서
우리로서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없는 아찔한 사고였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공항을 유럽의 허브
공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대대
적인 확장 공사를 벌였다. 2E 터미널도 그
중 하나로, 7억5000만유로(약 1조원)를
들여 지었다. 철골조와 유리로 된 화려한
건물 외관은 첨단 디자인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유럽의 허브 공항’이
되겠다는 프랑스의 원대한 계획도 한 방에
날아갔다.
▶2010년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 별세
▶2009년 조은화씨,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
작곡가 조은화(36)씨가 2009년 5월 23일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1위(상금 1만유로)를 차지하며 한국 음악계의 숙원(宿願)을 마침내 풀었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음악 경연 대회. 한국 출신 음악인이 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작곡·성악·기악을 통틀어 조씨가 처음이다. 그동안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1976년, 3위)·권혁주(2005년, 6위), 피아니스트 백혜선(1991년, 4위)·박종화(1995년, 5위)·임효선(2007년, 5위) 등이 이 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다.
조씨는 1973년 부산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와 독일 베를린의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수학했으며 2002년 한스 아이슬러 상을 받았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현대음악제와 2004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 2006년 일본 도쿄의 '오늘날의 음악 21' 등 여러 음악제에서 작품을 발표했으며, 아르디티 4중주단과 앙상블 모데른 같은 명문 현대음악 단체들이 그의 작품을 연주했다. 서울대에서 그를 지도한 장정익 교수는 "지난해까지 서울대에서 강의하면서 피아노 협주곡과 관현악을 활발하게 쓰는 등 차분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작곡가"라고 말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
(盧武鉉·63)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40분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뒤편 봉화산을 산책하던 중 30m 높이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9시30분쯤 운명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은 오후 6시30분쯤 봉하마을로 운구돼 마을회관에 안치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사건 수사본부장을 맡은 이운우 경남지방경찰청장은이날 오후 공식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확인하고, 사인은 두개골 골절과 늑골 골절 등 다발성 골절이라고 발표했다.
19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13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실시된‘5공 청문회’에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19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권유를 뿌리친 이후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걷다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누르고 경선에서 1위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8년 2월 퇴임한 뒤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사저를 짓고 머물러 온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달러의‘포괄적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09년 4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후 딸 정연(34)씨가 2007년 9월 박 전 회장의 돈 40만달러를 송금받아 미국 뉴저지주의 아파트를 사는 데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등 가족들과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면서 정신적 고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지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23일부터 29일까지 7일장으로 이뤄진다. 영결식과 안장식은 29일 경남 김해시 소재 진영공설운동장과 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봉하마을에서 각각 거행된다.
▶2007년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 새 앨범 홍보차 방한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Amerie.27)가 세 번째 앨범 ‘비커즈 아이 러브 잇(Because I love it)’ 홍보를 위해 2007년 5월 23일 방한했다.
1980년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출신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에이머리는 2002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2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 한국계 최초로 빌보드 싱글차트 ‘톱 10’에 올랐다.
2005년엔 영화 ‘히치’ 삽입곡 ‘원씽(1Thing)’을 불러 이듬해 그래미상 2개 부분에 후보로올랐다.
영화 ‘대통령의 딸’에 출연했고,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100인’에 두 차례 뽑히기도 했다.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방중
중국 베이징(北京) 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중국측으로부터 ‘극진한 대접’ 을 받았다.
24일 박 대표가 만리장성 방문에 나섰을 때는 국가원수급 다음 서열에 해당하는 대우를 했다. 중국 공산당이 검은색 링컨 콘티넨털 리무진 승용차를 제공했고, 수행한 한나라당 의원 10명은 5대의 벤츠 차량에 나눠 탔다. 차량 행렬은 앞뒤로 경광등을 단 호위차량이 붙고 별도의 차량 3~4대가 혼잡한 교통을 완벽하게 통제해 시원하게 질주했다. 중국 공안원들은 박 대표를 위해 도로 곳곳에서 출근길 차량들을 막고 있었다. 박 대표의 ‘요란한’ 행렬이 만리장성 입구에 들어서자 서양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박 대표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만났다. 후 주석과의 면담 약속이 잡힌 것은 방중 열흘 전쯤이라고 했다. 이것부터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김하중(金夏中) 주중대사는 “중국에 오면 누구나 후 주석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박 대표는 중국측에서 자발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고 전했다.
또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지난 23일 박 대표와의 면담 때 실내 에어컨을 모두 끄도록 했다.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박 대표를 위한 배려였다. 이날 베이징의 오후 기온이 25도에 육박했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1시간 이상 진행된 면담시간 내내 박 대표를 위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한나라당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은 웃으며 “더워 죽는 줄 알았다” 고 했다.
외교부장 출신인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은 영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주최한 만찬 때 박 대표를 위해 ‘특별’ 음료수를 준비했다. 콜라 절반에 뜨거운 물을 섞은 중국식 감기 특효 음료였다. 만찬 후에는 별도의 감기약을 건네기도 했다.
탕 위원은 만찬 도중 한국의 포항제철을 다녀온 경험을 얘기하면서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주역이 바로 박 전 대통령이었다” 면서 “박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당선됐다는 보도를 듣고 박 전 대통령의 딸이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 말했다. “박 대표가 4·30 재·보선에서 어머어마한 대승을 거둔 후, 이 정치인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는 말도 했다. 탕 위원의 부탁으로 한나라당의 방중단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10여권의 책을 전달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의 한 관계자는 “칭하대학 수리공정학과 출신의 후진타오 주석은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면서 “중국인 가운데는 박 전 대통령을 개혁·개방을 이룬 덩샤오핑(鄧小平)과 비슷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고 말했다.
▶2005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박성용씨 별세
▶2005년 몽골 새 대통령에
엥흐바야르 前총리 선출
▶2004년 한국전에 첫 참전했던 미군
스미스부대 특공대장 찰스 B 스미스 별세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참전 미군으로는 처음으로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던 찰스 B 스미스 미 특공대장이 2004년 5월 23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스미스씨는 6·25전쟁 당시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반도 긴급투입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원 406명은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첫발을 디뎠다. 이튿날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포병부대원 134명이 합류, 540명 규모의 특수임무대로 탈바꿈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6시간여 동안의 치열한 교전 끝에 탱크 4대를 격파하고 4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도 170여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스미스 중령은 북진 대열에 참가,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k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가 11월 10일 전출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스미스 중령은 뒤에 준장으로 진급한 뒤 1967년 예편했다. 1975년 7월 방한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87년 7월 오산에 새 전적비가 세워짐에 따라 두 번째로 방한했었다.
▶2004년 ‘90경기 무패’ 멕시코 영웅
프로복서 차베스 은퇴경기서 판정승
90경기 무패행진’, ‘WBC 세 체급 타이틀 석권’ 신화의 주인공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41·멕시코)가 은퇴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23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경기에서 차베스는 프랭키 랜달(미국)에 10회 판정승을 거뒀다. 랜달은 94년 라스베이거스 경기에서 처음으로 차베스를 링에 눕힌 선수. 차베스는 같은 해 4개월 뒤 곧바로 설욕을 했지만 은퇴를 앞두고 다시 랜달과 맞서기를 원했다. 경기 종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주먹을 주고 받은 결과는 차베스의 판정승. 이로써 차베스의 통산전적은 106승2무5패85KO가 됐다.
멕시코가 낳은 최고의 스포츠스타 중 한 명인 차베스의 은퇴경기였지만 4만5000여석의 관중석 중 절반 이상이 비어 과거의 영화를 무색케 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차베스는 관중들을 향해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고 외쳤다.
이 경기에 앞서 차베스의 두 아들도 각각 링에 올라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하는 경기를 펼쳤다. 동생인 오마르는 2라운드 아마추어 경기를 치렀고 형 차베스 주니어(8승무패4KO)는 상대에 KO승을 거두며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했다.
▶2004년 광주과학기술원 변영로 교수,
‘이코노미 증후군’ 예방알약 첫 개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충성메모’
파문의 당사자 안동수 법무장관, 취임 43시간 만에 경질
김대중 대통령은 23일 ‘충성 메모’ 파문과 관련, 안동수 법무부 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후임 법무장관에 최경원 전 법무차관을 기용했다.
이날 경질된 안 장관은 지난 21일 법무장관에 임명된 지 43시간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역대 최단명 장관으로 남게 됐다.
김 대통령이 안 장관을 신속히 경질한 것은 안 장관의 ‘취임사 초고’의 ‘정권 재창출’ 부분이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다 작성 경위를 둘러싼 은폐와 거짓말 의혹까지 제기됨에 따라 더이상 끌고갈 경우, 정권 차원의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안 장관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서초구 방배동 자신의 아파트를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대통령에게 누가 된다면 용퇴를 생각해보겠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곧바로 청와대로 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전달했다.
▶2000년 이한동 국무총리 서리 취임
▶2000년 시리아 북동부서 6000년전 도시 발견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에 도시 문명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6000년전 유적이 시리아에서 발견됐다. 미국 시카고대 근동연구소는 시리아 북동부, 고대 주요 무역루트에 있는 `텔 하무카르`의 거대한 흙더미를 파고 들어갔다. 그 결과 시가지 방호벽 등 6000년전에 복합적 형태의 사회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연구소측은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이 문명지가 남부의 수메르 문명과 같은 시기에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은 얻었다고 2000년 5월 23일 발표했다. 하무카르 유적은 수메르 유적과 같은 시기인 6000년 경으로 추정되지만,여러 흔적으로 보아 하무카르의 도시문명이 수메르 이전에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에서 최대의 성과는 6000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폭4m의 방호벽.이런 규모의 축조물은 문명이 시작된 증거로 간주된다. 또 방호벽 안에서 이글루 모양의 거대한 화덕과 조리용 토기, 동물 뼈,밀-보리-귀리 등 곡물 흔적이 나타나 사회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소풍’,
한국영화 사상 첫 칸영화제 수상
칸 국제영화제 52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상을 받았다. 1999년 5월 23일 제5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송일곤 감독의 ‘소풍’ 이 단편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소풍’ 은 실직 가장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동반자살하는 이야기를 다룬 내용으로 단편영화로는 드물게 35㎜ 필름으로 찍은 14분짜리 작품이다.
단편영화 ‘소풍’ 의 송일곤 감독.
칸 국제영화제 52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상을 받았다. 1999년 5월 23일 제5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송일곤 감독의 ‘소풍’ 이 단편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소풍’ 은 실직 가장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동반자살하는 이야기를 다룬 내용으로 단편영화로는 드물게 35㎜ 필름으로 찍은 14분짜리 작품이다.
▶1999년 미국 81세 노령 산악인,
국립공원 요세미티 엘캐피탄봉(2307m)에 올라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 수립`
미국 뉴저지주 우즈베리에 사는 아마추어 산악인 제리 블록(81·전 엔지니어) 할아버지가 23일 오후 5시(현지시각) 11일간의 사투 끝에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 엘캐피탄봉(해발2270m) 정상 정복에 성공, 요세미티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을 세웠다. 블록 할아버지가 택한 코스는 엘캐피탄봉 최난코스인 ‘아쿠아리안 월스’. 정상까지 750여m에 걸쳐 가파른 암벽을 타야한다.
오렌지색 헬멧을 쓰고 물과 음식, 침낭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정상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쉬운 코스로 올라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손자 샘(20)과 힘찬 포옹을 나눴다. 할아버지는 환호하는 기자들을 향해 “16살때 산을 타기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려운 등반이었다” 고 말했다.
블록 할아버지는 “날씨가 추웠고, 배낭 무게 때문에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면서 “중간에 ‘도저히 안되겠다’ 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계속 걸었다” 고 말했다.
등반 도중 암벽에서 미끄러져 천식 약병을 절벽으로 떨어뜨린 블록 할아버지는 약 없이 11일간 등반을 계속했다. 갈비뼈 부근에 멍이 들어 고생도 했다.
할아버지를 취재하기 위해 동행한 NBC카메라 기자 크레그 화이트도 밧줄이 끊어져 3m 아래 바위땅에 곤두박질하는 등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블록 할아버지의 이번 엘캐피판봉 최고령 등반기록은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갱신한 것. 86년 68세 나이로 정상에 올라 영예를 안았다. 최근 한 69세 노인이 엘캐피탄봉 등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최고령 기록을 내줄 수 없다” 는 생각에 다시 도전했다.
▶1999년 독일 대통령에
요하네스 라우 선출
▶1997년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당선
▶1996년 인천 국제공항 터미널 기공식
▶1996년 북한 공군 소속 이철수 대위,
미그19기 몰고 귀순
▶1995년 2002년 아시안게임
부산개최 확정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1985년 미 문화원 점거농성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학생운동의 반합법 투쟁기구인 삼민투쟁위원회 주도하에 서울의 5개대 남녀학생 73명이 연합으로 서울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인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학살 책임져라’라는 문구를 내걸고 미 문화원을 점거,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미 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72시간 만에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 기소됐고 사법사상 초유의 피고들의 재판거부사태, 묵비권행사, 재판부기피신청,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재판과정 역시 파란으로 점철됐다.
▶1984년 김일성 소련 방문,
흐루시초프와 회담
▶1982년 프레이저 호주수상 내한
▶1982년 이란군 호람샤르 탈환
▶1979년 카르스텐스 서독 대통령에 피선
▶1977년 시인 이산 김광섭 사망
▶1975년 월남난민 태운
청룡호 부산에 입항
▶1973년 대법원 공해에 첫 배상판결
(영남화학에 320만원 지급 판결)
▶1969년 문교부
외래어 한글표기 원칙발표
▶1965년 ‘진통제 마약’
메사돈 만든 제약사 급습
▶1961년 최고회의 언론기관을 정비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1956년 SEATO 본부 방콕에 설치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대처승관련 담화발표
불교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싸움이 점차 격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3일 담화를 발표 "사찰은 독신승 만이 지켜야 하며 일제 잔재인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전국 사찰의 9할은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화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불교 분규 격화
비구승-대처승 양측은 첫 유시가 발표되자 정화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끝내 대처승들이 소유하고 있던 태고사를 비롯, 각 절들을 뺏고 빼앗기는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11월 25일 조계사에서 양파가 충돌하고, 12월 13일에는 비구니 5백여명이 서울시내에서 데모를 벌였다. 12월 16일엔 대통령이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담화를 다시 발표했지만 양파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대통령은 1955년 6월 16일 네 번째로 대처승 사찰철수촉구 담화를 발표했고 10월초에 가서야 비구승은 전국 4백50개 사찰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51년 중국-티베트, `17조 협약` 조인
티베트와 중국 대표가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조인했다. 1950년 12월 수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하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보장한 이 협약으로 티베트는 자주성을 잃고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했다.
이 협약에서는 티베트의 자치도 약속했지만 대규모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로 자치의 의미를 크게 제약했고 장기적으로 인민 저항을 불러 일으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티베트 불교문화의 파괴를 불러일으켰다. 1959년에는 달라이 라마의 해외망명까지 초래했다. 티베트는 중국의 서장 자치구와 청해성 등 각급 지방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1950년 터키 총선,
27년 만에 1당독재 종식하고 정권교체
▶1950년 한국은행법 시행령 공포
▶1949년 서독 연방공화국 수립
서독의 새로운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1949년 5월 23일 공포돼 본을 잠정 수도로 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됐다. 이로써 동서분열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6~1947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각 점령지역에 주의회가 탄생했고 행정책임이 독일측으로 이송됐다.
1948년에 들어서 3국점령지역의 통합과 연방정부의 수립이 협의되고 6월 통화개혁이 단행되자 소련은 베를린 봉쇄로 대응해 독일의 동서분단은 피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9월부터 헌법제정의회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잠정헌법으로의 `기본법` 기초(起草)를 시작해 이해 5월 8일 채택했다. 8월 1일 최초의 연방의회선거가 행해져 9월에는 헌법제정의회의장을 맡은 기독교민주동맹의 아데나워를 수상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됐다. 대통령에는 호이스가 선출됐다.
▶1946년 극예술연구회 발족
▶1946년 38선 월경 금지
▶1937년 석유왕 록펠러 사망
▶1934년 미국 은행강도 보니와 클라이드 사살
1934년 5월 23일, 포드자동차를 타고 미국 루이지애나주 깁스랜드 부근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남녀가 잠복해 있는 경찰들이 무차별로 쏜 87발의 기총소사 세례를 받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남자는 벌집이 된 차 운전석에서 한 손에 총을 든 채, 여자는 무릎에 기관총을 얹혀놓고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수그린 채 죽어있었다.
보니와 클라이드
두 사람은 미주리주ㆍ오클라호마주ㆍ텍사스주에서 1년 9개월간 주유소ㆍ시골은행ㆍ간이식당 등을 휘저으며 12명을 살해하고 강도행각을 벌여온 은행강도 클라이드 배로와 그의 애인 보니 파커였다. 같은 시대의 전설적 갱스터 존 딜린저가 한 번의 강도짓에서 7만 4000달러를 훔친 것에 비하면 1500달러를 넘지 않은 두 사람의 강도짓은 좀도둑 수준이었지만 대공황기에 서민의 착취기관이었던 은행을 공격함으로써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 상징으로 인식됐다.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두 사람이 되살아난 것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아서 펜이 감독하고 페이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가 열연한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와 클라이드)가 개봉되면서였다. 반전시위와 히피문화가 꿈틀거리던 1960년대 말의 심리상태와 맞물려 젊은이들은 공권력을 조롱하는 주인공들의 무한 질주에 열광했고 두 사람의 화끈한 인생에 매료됐다. 내일 없는 질주, 1930년대 대공황기를 살아간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1923년 조선야구협회 창립
▶1917년 생물학 발전에
공헌한 강영선 출생
▶1916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 옥사
▶1915년 극작가 함세덕 출생
▶1915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1915년 이탈리아 일차대전 참전
▶1912년 중국 철도투자를 위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4국 차관단 결성
▶1908년 윤봉길 의사 출생
▶1908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출생 -
1956년 트랜지스터 발명,
1972년 초전도이론 개발으로 노벨상 수상
▶1907년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
▶1906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사망.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906년 5월 23일 사망했다. 텔레마르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파산으로 한때는 약방의 도제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그는 독학으로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중 단막 희곡 `전사의 무덤`(1850)이 극장에 공연되자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극장 지배인으로 생활하며 발표한 현대극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고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고미술을 공부했다. 이때 발표한 `브랑`(1866)으로 명성을 얻자 `페르 귄트`와 10년의 세월이 걸린 세계사극 `황제와 갈릴레아 사람` 등을 연이어 발표, 사상적 입지를 굳혔다.
1879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이 출간되자 당대의 보수적 관객들은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위험한 선동물이라며 비판했으나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살겠다"는 노라의 전언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입센은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작품으로 근대극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 1891년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 출생 - 1951년 노벨문학상 수상
▶ 1886년 역사가 랑케 사망
▶ 1734년 근대적 최면술의 선구자 독일의 메스머 출생
▶ 1707년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 출생 - 포유류의 탄생
1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닦은 칼 폰 린네. 린네는 여성이 젖을 먹여 아이를 키운다는 점에 주목해 포유류라는 단어를 고안함으로써 인간을 동물계에 포함시켰다.
2 1758년 발행된 [자연의 체계] 제 10판. 린네는 이 책에서 ‘포유류(Mammalia)’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 1498년 이탈리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교수형
https://youtu.be/CW86fGFSK2g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