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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의 흥남철수작전(1.4후퇴의 시작)
1.4후퇴는
함경북도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 전투에서 시작한 미 해병대의 철수작전이 1950. 12. 24.흥남부두에서 완료된흥남철수작전을 시작으로, 서울이 1951년 1월 4일 중공군에게 재함락된 것을 말함.
흥남철수작전은
이때 철수병력과 피난민은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개마고원의 강추위 속에 후퇴하는 미 해병대
중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국군과 UN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군 2군단은 해체되었고, 국군의 3개 사단과 미 제 2 보병 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특히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중국군의 2차공세로 12월 6일 평양을 내어주고 임진강까지 철수하게 되자, 흥남 일대의 미 제 10군단은 측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육로철수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한 미 제 10군단은 국군 제 1군단과 함께 함흥-원산 일대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방어전을 치를 것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 원수는 ‘해상을 통한 철수’를 지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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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LST(Landing Ship Tank, 전차 양륙함) 81척, LSD(Landing Ship Dock, 도크형 상륙함) 11척, MSTS(해상 수송부대) 함선 76척을 비롯해 모두 200척이 넘었습니다. 10여 일간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 유엔군과 한국 해군 함정, 그리고 민간 선박을 이용해 철수한 인원과 장비는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10만5천명, 차량 17만5천대, 화물 35만 톤에 이르렀고, 피난민이 9만 1천명에 달했습니다. 피난민들의 숫자에는 부모의 품에 안긴 영유아나 어린이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어선 등 민간 선박을 타고 넘어온 피난민들 숫자를 감안하면 1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7천6백 톤급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빽빽이 싣고 철수하는데 성공해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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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뉴스위크는 흥남철수 작전(미군은 ‘철수’가 아니라 ‘병력재배치’를 뜻하는 ‘Redeployment’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만)을 일컬어 ‘진주만 이래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2차대전 초기의 던커크(Dunkirk) 철수작전에 비견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도 있죠. 하지만 칼바람 불어 오던 부두에서 피붙이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기억이며 또한 스스로 선택한 생존을 위한 희망의 여정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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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으며 서울 등 북한지역 주민들 40만 명이 대거 육로로 피난하였습니다. 전쟁이후 피난민은 120만에서 130만 명으로 추산 합니다.
1.4후퇴는 미군이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작전을 한것으로 흥남철수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당시193척에 군인 10만명. 북한민간인 10만명이 북한을 탈출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건 북한쪽 철수당시의 일이고 "(북한 장진호전투중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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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쪽 사정]
6.25당시는 여름이었고 한강물이 깊어 다리로 통과하여야 하는데 국군이 인민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을 폭파로 수도권시민이나 서울시민이 같혀 피난을 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 서울시민만이 한강쪽배를 얻어 타고 한강을 건넜을 뿐 서울시민의 발이 3개월 동안 묶여 있었다.
하지만 1.4 후퇴는 정부와 군이 작전상후퇴를 알려줬고 당시 겨울이라 한강이 얼어붙어 짐을 소달구지에 실고 혹을 어린이들을 등에 업고 한강을 건너 후퇴를 했습니다.
특히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사업가 .공산주의가 싫어서 젊은층. 등.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전쟁 중이라 통계를 낼 사람도 낼 엄두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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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시 인구는 백 만명으로 잡고 군/경. 가족. 사업가. 공무원. 공산주의가 싫어서 등.병자. 실종자. 남북자. 부산에서 자리 잡고 있는 시민. 등을 뺀 순수한 서울시민으로서 약 30만~40 만명 정도가 서울을 탈출 한 것입니다.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 예하부대(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영국군 해병 코만도 41부대)의 병력 12,500명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3개군 12개사단) 병력 약 12만명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위기에 처했으나.
곧이어 전투에 투입됨으로써 한국전쟁 기간동안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전기가 된 전투이며,
* 6.25당시 가장 극적이고 성공적인 軍民 철수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흥남철수작전의 계기가 된 장진호전투에 관해 먼저 알아야 흥남철수를 이해할수 있을것 같아 戰史 및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 전투기간은 중공군과의 주된 교전시기에 따라 11.27~12.11 (2주간)로 보는등 조금씩 자료가 다르며, 전투 참가병력수 및 사상자숫자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1. "장진호 전투"
전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는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開戰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 제2단계는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되었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었던 시기
<사진>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중앙)과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우측)
전쟁초기 청천강유역의 서부전선에는 미 8군 휘하의 미 제1군단(美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英 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 9군단(美 제25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 예비대로 美 제1기병사단과 英 연방 제29독립보병여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에는 美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美 제10군단(美 해병 제1사단, 美 제3사단, 美 제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미 해병 제1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여 장진호(長津湖)작전에 투입된 11월 2일, 함흥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동부지역에서의 중공군의 1차공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장진호( "장진호"는 장진강(長津江)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Reservoir))
<사진>1950년 10월 하순 Lin-chiang-Hesanjin 동쪽지역에서 미 해병 제7연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 중에
있는 중공군 제4군 124사단 지휘관.
<사진> 미 해병 제7연대에서 생포한 중공군 포로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美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美 해병 제1사단에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美 해병 제1사단(1만 2,000명)은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12개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친 사투를 벌인다. 美 해병 제1사단의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11월 28일 11시. 양개 연대장(제5 및 제7연대)은 무평리의 공격은 물론, 현진지의 고수도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담리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기로 합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30일에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됨에 따라 양개 연대장은 12월 1일,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 전투에서 美 해병 제1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릎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U.N.공군(美 해병 제1비행사단의 근접항공지원기 Corsair 함재기)의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美 해병 제1사단>
<사진> 美 해병 제1사단 마크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美 해병 제1사단은 1950년 10월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후,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고 "장진호(長津湖) 작전"에 투입된 11월2일 함흥 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날 야간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美 해병 제1사단은 치열한 근접전투 끝에 중공군 7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美 해병 제1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고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를 점령하였다. 하갈우리는 상륙항이었던 흥남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하는 개마고원지대로서 해발 고도가 1.000 - 2.000m의 낭림산맥을 따라가는 고산지대였다. 이로 인하여 진흥리부터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기복이 극심한 협곡도로로 전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며 오히려 우마차의 통행은 가능할 정도였다.
또한 이때부터는 작전지역에 눈이 쌓였고 야간에는 수은주가 영하-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시작됨으로 인하여 지형과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당시 美 해병 제1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26,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美 해병 제1사단의 2개연대(제5 및 7연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4개사단이었다. 중공군은 美 해병 2개연대에 대하여 4개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 주변일대에 종전의 4개사단에 추가하여 4개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 고토리,및 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공세로 인해 美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제5 및 7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월 30일 美 해병 제1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 제1사단의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美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1893.10.26-1977.12.25)
스미스 사단장의 결의
이때 UN군측에서는 극동군 수송 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이 해병 제1사단장을 방문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수철수를 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美 해병 제1 사단의 스미스 사단장(M/G Oliver P. Smith)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하며 이 제의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결정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스미스 사단장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지역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때 스미스 사단장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사단은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We a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라는 유명한 말로 장병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들은 철수 간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질서있는 철수로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했다.
이때부터 美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美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 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때 해병 제1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동상환자였다. 중공군은 전사 25,000명과 부상12,500명, 총 37,500명의 손실을 당했다. 이로 인해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의 궤멸
美 해병 제1사단과 맞섰던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사단 중 8개사단을 투입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 및 단하였지만,
해병사단의 강력한 화력과 강인한 전투력에 의해 돌파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원손실을 입고 궤멸상태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인하여 "U.N.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느냐, 계속 주둔하느냐?"의 기로에 있었던 중공군 3차공세(정월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의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일 중공군이 제9병단을 투입하여 금강, 또는 대전선까지 진출하였다면, U.N,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철수하거나 또는 한반도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2. "장진호 전투"의 의의
실제로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만일 美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전투 결과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 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 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이자
한국전의 10대 전투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전투를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 해병 제1사단의 선전은 "한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장진호(長津湖) 전투"의 영웅들
레이몬드 G.데이비스 중령(제7연대 제1대대장)
<사진>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
<사진> 노년의 모습
1915년 1월 13일 조지아주 피츠제럴드에서 태어난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은 1938년 조지아공대를 졸업 후 ROTC장교로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나 사임하고,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美 해병대의 Basic School에 입교하여 해병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과달카날과 펠릴리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의 소대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의 수훈으로 1952년 전쟁 기간 중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The 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군은 해병 제3사단을 지휘하여 1969년 "수훈훈장" 등 총 20여개의 훈장을 수여받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디.
한국전쟁당시 美 해병 제1사단 소속의 중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데이비스 대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령이었던 데이비스 대장은 1950년 8월 21일 아침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 캘리포니아주 Camp Pendleton에서 출두명령을 받았다.
출두명령 2시간 후 美 해병 제1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대요원은 불과 수명밖에 없었고, 대대 막사로 예정된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비스 중령은 기간요원을 모아놓고 대대장으로서의 첫 번째 훈시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훈시내용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개 대대를 편성하는데 1주일 여유밖에 없다.
우리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원의 60%는 예비역이다.
그 중에는 2차 세계대전당시 역전의 용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험 없는 예비역이다.
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결과가 된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그 24시간을 전부 사용하여야 한다".
이후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는 1개월 후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뒤,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美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 제9병단이 은밀히 장진호 일대에 진입해 있었다. 중공군의 제9병단은 美 해병 제 1사단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뒤늦게 사지에 들어왔음을 알게 된 美 해병 제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전투과정을 "장진호 전투"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중공군과 美 해병대의 병력대치 규모는 10 : 1로서 중공군이 절대 우세하였다. 이 전투에서 美 해병 제7연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 중령은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고립된 제2대대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작전을 감행, 전멸위기에 있던 F 중대를 구출하였다.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은 여생을 불우한 재향군인을 돌보는 일과, 한미 유대강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위령공원 건립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외에 그는 1991년 평양을 방문하여 원탁회의에 참석했으며 또한 2002년에는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미군유해 회수를 위한 미국정부의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자유 향유의 댓가"에서 한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혹독한 고난과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강력한 힘을 향유하는 것이며,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만을 고집하던 자들의 목소리가 국민의 의지를 약화 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25 전쟁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수많은 한국민을 공산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자유를 찾게한 美 해병대 예비역 대장,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Gen. Raymond G. Davis (Ret.))은 심장병(Heart attack)으로 2003년 9월 3일 조지아 주 칸여스 소재 카운티 병원에서 입원 3일만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美 해병대 사령관 마이클 W. 해기 대장, 젤 밀러 상원의원, 죠지아 주 선니 풀듀 주지사 外에 수백명의 퇴역군인들(Veterans)이 참석하여 그의 타계를 슬퍼했다.
윌리암 E. 발버 대위(제7연대 제2대대 F 중대장)
제2대대 F중대(중대장 Capt. William E. Barber)는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었으나 중공군의 공격을 5일6박동안 6회에 걸쳐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하여 사단을 구했다. 이 계속된 전투에서 F 중대는 중공군 1.000명을 사살 혹은 부상을 입히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투가 끝난 후의 F중대의 병력은 220명 중 보행이 가능한 인원은 82명뿐이었다. 이때 유담리일대에는 8.000명의 美 해병대 병력이 갇혀 있었다. 이때의 F 중대 중대장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의 공로로 미국의 최고훈장(Medal of Honor)이 중대장 윌리암 E. 발버 대위에게 수여되었다.
윌리암 E. 발버 대령(예)은 2002년 4월 19일 캘리포니아 주 Irvine 자택에서 항년 82세로 타계했다.
The Chosin Few(생존자협회)
"장진호 전투" 이후
이 전투에서 생존한 장병들의 모임(미국, 캐나다, 호주)을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부르며 이들은 세계 52개 지역에서 그때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Chosin Few 생존자협회)는 1984년 회원 6.000명으로 결성되었다.
# Chosin 은 '長津'을 일본어로 발음한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도 미군과 같은 전술지도(50.000분의 1)를 사용하였다.
미국 최고훈장(Medal of Honor)수여자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여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병 17명에게 미국정부로부터 미국 최고훈장(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한국전 전 기간중 131명 수여)
<장교 9명>
해병대: 중위 2명, 대위 2명, 소령 1명, 중령 1명
육 군: 중령 2명
해 군: 소위 1명
<부사관 및 병 8명>
해병대: 부사관 5명, 병 3명
<한국전쟁 참전국 인원손실 현황 >
미국 대통령의 치하
2004년12월7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진주만 피습 63년을 맞아 이라크 파병 美 해병 제1사단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Camp Pendleton을 방문한 석상에서 한국전쟁 당시 해병 제1사단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에 대항하여 싸운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들의 용맹했던 전투를 치하한 바 있다.
<사진> 한국전기념사업회 주관 한국전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크린턴
미국 대통령, 중앙에 기념사업회의장인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퇴역) - 1995년 -
<사진> 장진호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美 해군은 美7함대 소속 타이콘데고라급 최신예 이지스 순양함에 초신(Chosin)이란 함명을 붙였다.(CG-65, USS Chosin)
# 아래의 사진들은 1950년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의 2주간의 기간 중 북한 지역의 함경남도 흥남 북쪽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지역까지 진출한 美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이 중공군(120.000명)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항까지 철수 중의 힘들고 어려웠던... 많은 희생자 발생, 장면 등을 그 당시 참전했던 美 해병대 장병 및 종군기자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로서,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사진>전투에 참가한 미해병대 병사들의 모습
<사진> 하갈우리의 간이 활주로(공사진척 40%) 물자 수송 및 부상자 후송에 사용됨 - 1950.12.6 -
<사진> 하갈우리 간이활주로에 동체착륙한 미 해병대 수송기(C-47) 승무원은 무사했음.
<사진>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지역에서 지원포 사격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美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 진입과 동시에 전투의 계속을 위해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한 수송기 이착륙장의
절대 필요에 의거, 장진호 남쪽에 위치한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2월 6일, U.N.군사령부의 철수명령에 의거 철수하게 되어 공사진척이 40%정도인 하갈우리 활주로를 이용하여
C-47수송기편에 부상자 4,300여 명을 후송하였다.
이때 장진호 남쪽끝 일대 지역에는 약 10.000여 명의 병력과 U.N.군에 협력한 1.500여 명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매우 혼잡하였다.
<사진> 동체착륙 후 연소하는 미 해병대 수송기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
<사진> 철수 중에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
<사진> 혹한과의 싸움
Exodus(영광의 탈출)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유태인들의 투쟁을 그린 레온 율리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폴 뉴먼이 이스라엘의 저항 지도자면서 군부대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맡았다.
한 패기만만한 장교가 키프러스 수용되어있던 유태인 이주자들을 영국의 경계망을 뚫고
배에 태워 도망치는 장면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며,
영화의 두번째 파트에서는 독립이 선포되고 이웃국가들의 침략에 맞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려낸다.
본래 Exodus(영광의 탈출) 영화의 주요 배경 음악.
Earnest Gold(어네스트 골드)가 작곡한 곡으로,
14주간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1961년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곡상을 수상했다.
(영화 'Exodus'는 폴 뉴먼, 에바 마리 세인트 주연, 오토 플레밍거 감독으로2차 대전 후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이 영화를 본 가수 팻분(Pat Boone)이 같은해, 가사를 넣어 "The Exodus Song"를 만들었다.
이 테마곡 " The Exodus Song"은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연주곡이었던 원곡보다 Pat Boone의 노래가 더 히트하였다.
남침 중 중앙청을 점령하고 춤을 추는 중공군들
종북연대?
박원순-이정희-범민련 “우리는 하나?”
박원순, 이적단체 범민련 후원, 이정희 범민련 정신으로 조국통일
이재명 성남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김성환 노원구청장 등에 대해 “‘종북성향의 지자체장들을 모두 기억해서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퇴출해야 합니다” 발언으로 ‘종북’논란을 부각시킨 정미홍 더코칭그룹 대표가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표가 긴밀한 연대성을 보이고 있는 기사를 개제했다. 이정희 의원은 ‘종북’의 핵심으로 손꼽히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박원순 시장의 종북성향 논란에 불을 지필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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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홍 대표가 게재한 박원순-이정희 "서울시 공동운영" 계획에 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 ⓒ 오마이뉴스 기사 화면 캡쳐 |
정미홍 대표가 개제한 오마이뉴스 기사는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서울시 공동운영을 위한 ‘무지개 플랜’ 구상을 밝힌 내용이다.
박원순 후보는 이정희 대표와의 만남에서 “진보· 민주 정당과 시민세력이 함께 연대해서 좋은 결과를 맺자” 며 “함께 가치를 실현하는 동지적 관계가 됐으면 한다”며 이정희 대표와의 긴밀한 연대를 강조했다.
이 대표는 “많은 것들을 일구어 오신 박 변호사께서 이렇게 직접 나서셔 더 훌륭하게 더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된다고 했다” 며 “복잡한 것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해 연대와 협동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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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 화면 캡쳐 |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박원순 후보와 이정희 대표의 만남 만큼이나 이정희 대표의 박원순 후보 지지유세는 대단했다. 정미홍 대표가 링크한 이정희 전 대표의 블로그를 보면 박원순 후보의 선거유세를 다닌 이정희 전 대표의 활약상을 엿 볼수 있다.
이정희 전 대표의 블로그에는 2011년 10월25일 “하루종일 관악구 신림,난곡권역을 돌며 박원순 후보의 선거유세를 다녔습니다” 라는 글과 함께 현장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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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 당선을 위해 유세활동을 펼친 이정희 전 대표 ⓒ 이정희 전 대표 블로그 캡쳐 |
이정희 전 대표는 “서울 시민이 행복해지는 선거 승리를 위해 성실히 열심히 박원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겠다” 며 박원순 선거 출정식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정희, “범민련의 정신으로 조국통일 이루겠다” 박원순 “이적단체 범민련 국민혈세로 후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표는 지난해 11월 17일 이적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2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범민련은 남과 북, 해외에 우리 민족 전체가 힘과 지혜를 모아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결성한 단체”라며 이적단체 범민련을 추켜세웠다. 그는 “시련과 난관을 뚫고 통일운동을 개척해온 범민련의 정신과 함께 저희 진보당은 가까운 시일 내에 조국통일을 이뤄낼 것” 이라며 북괴와 김정일 충성집단인 범민련의 정신으로 조국통일을 이루겠다고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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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단체 범민련 결성 22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 후보. 이정희 전 대선후보는 "범민련의 정신으로 조국통일을 이루겠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 이정희 블로그 캡쳐 |
대표적인 종북인사로 비판받고 있는 이정희 전 대표의 이같은 발언에 누리꾼들은 “노골적인 적화통일 발언” 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종북논란의 핵심에 서 있는 박원순 시장은 지난해 10월 이적단체 범민련 등 좌파단체들이 주최한 ‘2012 평화통일 사진전 그날’ 을 국민세금으로 지원하고 있음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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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적단체 범민련의 행사를 지원한 것이 밝혀져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 블루투데이 |
이렇듯 박원순,이정희,범민련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정미홍 대표의 ‘종북성향’ 폭로는 종북세력에 대한 경각심 차원을 넘어선 근본적인 척결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신의한수’라는 누리꾼들의 호응이 잇따르고 있다.
2013년이 종북세력 척결의 원년이 될 것인지, 종북세력과의 계속되는 ‘동거’로 이어질 것인지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들의 종북척결의지를 외면해선 안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