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불이(身酒不二)
오래 전이다. 밀양에서 창원으로 근무지와 거처를 옮겨왔을 때다. 90년대 말 우리나라가 엄혹했던 아이엠에프 보릿고개를 넘던 사월 초였다. 아직 창원 근교 지형을 잘 몰라 무작정 산길을 따라 올랐다. 천주암에서 산마루로 올랐더니 진달래가 활활 피고 지역사회 단체에서 행사를 준비했다. 진달래축제였다. 산마루에서 창원의 대표 브랜드인 ‘북면막걸리’ 시음회도 빠지지 않았다.
그로루터 몇 해 지난 늦가을이었다. 지금의 두대동 창원컨벤션센터나 시티세븐이 들어서기 전이다. 창원실내체육관 앞 만남의 광장에는 여러 부스를 설치해 경남 도내 각 시군 특산물을 파는 행사가 열렸다. 그 가운데는 각 지역 양조장에서 제조된 막걸리를 항아리마다 담아 맛보게 했다. 나는 우연히 그 행사장을 스쳐 지나다가 한 자리에서 여러 시군 향토 막걸리를 음미했다.
올봄 거제로 건너와 옥포에 사는 선배 연락을 받고 고현 횟집에 마주 앉았다. 교육대학을 나와 야간대학을 거쳐 중등으로 전직한 분이다. 전문직에 일찍 몸담고 거제 관내 교장으로 정년을 맞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횟집에는 맑은 술만 파는 것을 알고 나를 위해 일부러 곡차를 두 병 준비해 왔다. 선배는 약주를 즐기지 않음에도 외지에 가면 그곳 막걸리를 맛본다고 했다.
내가 연초에 머문 지 두 달이 된다. 주간에는 교무실에선 동료들과 어울린다. 수업에 들면 학생들과 대면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하루 일과가 후딱 지난다. 일과가 끝나면 마주할 얼굴이 없다. 원룸에 들어도 텔레비전을 잘 켜질 않아 면벽 수도하는 스님과 같다. 중죄인이 갇힌 교도소 독방이나 마찬가지다. 고립감이 엄습해 와 날이 어둡기 전 임도나 갯가로 산책을 다녀오기도 한다.
저녁은 학교 급식소에서 때우는 날이 더러 있다. 대개 일찍 잠든다만 주중 한두 번은 곡차를 자작으로 들기도 한다. 마을에는 주점도 없고 마주 앉을 사람도 없다. 원룸에서 골목을 나가 얼마 걸리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생탁을 두 병 사 오면 두 차례로 나누거나, 아니면 단번 자작으로 페트병 바닥을 보았다. 방송인 왕종근이 광고 모델이 되어 생긋 웃는 그 부산 생탁이다.
내가 사는 창원 대표 곡차 브랜드는 ‘북면막걸리’다. 창원부에서 북쪽이라고 북면이다. 감계와 무동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입주민이 많이 늘어 읍으로 승격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북면에는 무곡과 온천에 제조원이 다른 두 양조장이 있다. 전에는 화천리에서도 술도가가 있었는데 연전에 헐고 상가가 들어섰다. 온천과 화천리보다 무곡에서 빚어진 막걸리가 북면을 대표한다.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산행을 즐겨 다닌다. 동행이 있기도 하나 단독산행으로 떠난 경우가 훨씬 많다. 외진 산자락을 타다 보면 산모롱이 어디쯤 너럭바위가 나오고 샘터가 있는지도 훤하다. 그 가운데 외감마을에서 양미재를 넘으면 구고사가 나오고 그 아래가 칠원 산정마을이다. 고두밥을 쪄 누룩으로 농주를 빚어 파는 할머니를 알고 있다. 내가 가끔 찾아 안부를 여쭌다.
봄비가 종일 내린 사월이 다섯째 월요일이다. 일과를 끝내고 저녁공부를 하고 가는 학생들과 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웠다. 옆 자리에서 식사를 들던 매점 여사가 찬으로 나온 부추해물전에 주석을 달았다. 때마침 비 오는 날, 격에 맞추어 나온 반찬이렷다. 그런데 나는 감히 속으로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곡차를 파는 식당이라면 어울렸을 텐데 교내 급식소라 허전할 뿐이었다.
교정을 내려서도 비는 그치지 않아 산책은 나설 수가 없었다. 달팽이집 같은 원룸으로 들어 약재 찻물을 달였다. 냉장고엔 외포 양조장에서 제조된 ‘얼쑤’ 막걸리가 있었다. 거제에 와 성포 막걸리에 이어 두 번째로 맛보는 곡차다. 신토불이(身土不二)는 신수불이(身水不二)와 통한다. 제 몸과 샘물은 하나여야 한다. 신주불이(身酒不二)라면 몸과 그 지역 곡차와 하나가 되는 것이렷다. 19.04.29
